*) 『한국연극』 2009년 1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잠시 동안 이 글을 동네 초입의 장승처럼 세워두고, 오늘 나는 공연을 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이곳은 원래부터 글이 그리 자주 올라오지는 않는 공간이지만, 주인이 잠시 부재하는 동안 이 공간이 그리 외롭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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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햄릿과 아버지의 유령(Hamlet and His Father's Ghost)>.

 
연극이 햄릿이면, 음악은 유령이다 — 사이, 침묵, 부재로서의 연극음악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연출의 의도가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이 극은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이 극은 사이에서 빚어지고 사이에서 지워진다." 이 문장들은 일견 어떤 연극비평이나 연출의 변에 등장할 법한 글의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글은 어떤 시인이 쓴 서시(序詩)의 일부입니다(김경주, 『기담』, 10쪽). 이 젊은 시인은 자신의 시들을 하나의 '연극' 혹은 '음악극'으로 보고, 그 연극을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사이', 그 연극이라는 존재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부재(不在)'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말하자면 이 시인은 그의 글 그대로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을 꿈꾸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서 하나의 물음이 일어납니다. 음악이 없는 연극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연극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소리가 없는 연극 또한 상상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소리'란 효과음 등의 무대 음향에만 국한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효과음조차 없는 연극 역시 언제나 가능합니다). 역설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소리'란 오히려 침묵까지를 포함하는 소리, 아니 오히려 그러한 침묵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소리입니다. 우리는 그런 '소리' 없는 연극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은 연극음악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성찰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연극 속의 음악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고, 또한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연극적 시공간을 '살아내는' 것일까요? 연극음악이 지닌 가장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막 전환의 순간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보죠. 연극에서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장이나 막이 전환될 때, 무대 위에 펼쳐지고 개시되었던 연극적 시공간은 잠깐 동안의 '휴지기(休止期)'를 갖게 됩니다. 이 '사이'의 시공간은 연극 안에서 '기술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서사적'으로도 요구되는 것이죠. 이때 무대와 관객 사이에 약속되고 전제되어 있던 허구의 공간은 순간적으로나마 다시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 잠깐의 '사이' 동안 관객은 숨을 쉬고 기침을 하기도 하며, 그렇게 다음 순간 펼쳐질 장면들을 위해 일종의 '준비운동'을 하게 됩니다. 어둠 속에서 관객들은 생각합니다, 무대가 전환되는구나, 배우가 퇴장해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등장하는구나, 소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며 공간이 달라지는구나. 그러나 이러한 순간이 단순히 연극적 시공간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관객에게 '순수한 현실'에 대한 관찰의 시간만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연극적 문맥에서 한 발 물러서 있을 뿐, 여전히 이 시공간은 연극적인 자장(磁場)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 순간 음악이 등장합니다. 연극적 시공간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 곧 조명의 어둠과 무대의 전환과 배우의 등퇴장을 틈타 연극적 허구의 힘이 잠시 옅어지고 희미해질 때, 이 순간 음악은 지속적 '허구'의 공간을 깨고 출몰하는 어떤 '현실'의 개입을 막아줍니다. 말하자면 연극음악은 기본적으로 '환상'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음악은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연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답니다, 아직 박수를 치거나 집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요, 막이 전환될 뿐이고 배우들이 드나들 뿐이니까요, 그것은 연극이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악'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연극은 여전히 진행 중이니까요, '환상'은 계속됩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필요한 것으로만 보였던 음악은 여기서 어떤 중요한 '상징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음악은 관객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무대 위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행동들, 소품을 치우거나 무대장치를 옮기거나 배우들이 바쁘게 드나드는 모습의 윤곽과 소리들은 무시하라고, 지금은 다만 음악을 들으라고, 지금 당신이 어둡고 희미한 조명 아래 보고 있는 것은 보고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지금 듣고 있는 소음들도 들리는 소리들이 아니라고. 음악은 이 모든 연극적인 '필요악'들을 은폐하고 봉합하고 연결시키며, 또한 그 모든 것들을 '없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 '사이'의 시간과 공간을 '있는 것'으로 채워갑니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층위에서 연극음악의 역할이란 연극 속에 출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개입을 막아서 연극적 허구와 환상을 지속시켜주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막과 막 사이를 이어주는, 곧 암전의 공간을 '채워주는', 그리하여 관객에게 어떤 환상의 지속을 가능케 해주는 '안이한' 길 외에, 연극음악이 걸어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그 '또 다른 길'이란, 관객에게 연극적 '허구'로부터 벗어난 어떤 '현실(reality)'의 개입을 방지해주는 소극적인 길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의 체계로부터 이탈하여 그 상징 자체에 '틈'과 '사이'를 벌리는, 그리하여 어떤 '실재(the real)'의 출현 자체를 환기시켜주는 적극적인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곧, 연극음악은 '이 연극적 허구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라는 환상을 지속시켜주는 상징적인 역할이 아니라, 막과 막 사이에 위치한 '사이', 그 시간 아닌 시간, 공간 아닌 공간, 배우의 몸이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종류의 심리적 특성과 서사적 배경을 머금는, 어떤 실재적인 '심연'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연극음악이 하나의 또 다른 '배우'일 수 있다면, 아마도 그 배우란 이러한 '심연'의 배우,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침묵'을 말하는 배우, 채워지는 공간이 아니라 비워지는 '사이'를 연기하는 배우, 환상의 '존재'가 아니라 실재의 '부재'를 환기시키는 배우일 겁니다. 연극음악이 지녀야 할 '소리'가 '침묵'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그리고 또한 그러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가능합니다. 연극 안의 침묵과 부재는 참거나 숨기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로 오히려 소리와 존재를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이라는 것, 아마도 이것이 연극음악이 '증언'하는 하나의 사실일 겁니다. 연극이 햄릿이라면, 연극 속의 음악, 연극 '사이'의 음악은 아버지의 유령이며 또한 그러한 유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유령'으로서의 연극음악은 어떤 '치명적'이고 '마력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러한 음악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가능하며' 또한 '가능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음악은 연극을 '사이'에서 빚어가고 또한 '사이'에서 지워갑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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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6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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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7 0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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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1-0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쯤이면 뉴욕에 잘 도착하셨을까요, 람혼님? 직항이라도 열세시간 이상 걸릴텐데 말입니다.

아, 여유가 되신다면, 센트럴 파크와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제 안부좀 전해주세요. 다락방은 서울에서 잘 지내고 있노라고.

언제쯤 돌아오시나요? 잘 다녀오세요! 외롭지 않게 제가 이곳에 간혹 들를게요 :)

람혼 2009-01-07 07:18   좋아요 0 | URL
안부는 꼭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는 말을 '그것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외롭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

2009-01-07 13: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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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7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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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9 1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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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9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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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09 13: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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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0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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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13: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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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0 16: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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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0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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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2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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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0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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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1-1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죄다 비밀 댓글이닷!)


람혼님, 아직 안 오셨어요? (두리번두리번)

람혼 2009-01-16 01:40   좋아요 0 | URL
공연 성공적으로 마치고 잘 돌아왔습니다.^^
곧 다시 기지개를 켜고 글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2009-01-16 0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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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0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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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8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귀국하셨군요.하신 일이 잘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람혼 2009-01-19 18:33   좋아요 0 | URL
네, 잘 돌아왔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09-01-20 1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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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0 16: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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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2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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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0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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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15: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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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4 0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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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0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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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0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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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2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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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0 0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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