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lliam Blake, The Complete Poems, Penguin Books, 1977.
▷ William Blake, Songs of Innocence and Songs of Experience, New York: Dover, 1992.
3) 영미권의 염가판(paperback) 책을 볼 때마다 그 금방이라도 뜯어져 나갈 것 같은 갱지 재질의 책장들에 가끔씩 실망하곤 하지만, 이런 '고전'들을 이렇게 싼 가격에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일례로 위 오른쪽 책 『순수의 노래/경험의 노래』는 구입 당시 가격이 1달러에 불과했다). 펭귄판 블레이크 시전집에 수록된 시들은 주석을 제외해도 거의 900쪽에 육박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중에서도 바타이유가 특별히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블레이크의 구절이 있었으니(『저주의 몫(La part maudite)』에서도 이 문장을 책 서두의 제사(題詞)로까지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구절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Exuberance is Beauty.
바타이유는 이를 불어로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L'exubérance est Beauté.
이 문장의 '번역'은 번역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허탈'한 감이 없지 않다. 이 '번역'은 말 그대로 하나의 순수한(?) '옮김'이 되고 있으며, 또한 영어와 불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했을 때 물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옮김'의 과정 안에는 미묘하고 섬세한 '의미의 이동' 또한 존재하고 있다. 블레이크에게 있어 'exuberance'의 뜻을 새겨보자면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충일(充溢)' 또는 '만일(滿溢)'에 가깝다(한자 '溢' 안에도 '넘침'의 의미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바타이유에게 있어 이 단어는 '넘침' 또는 '과잉'을 뜻하는 자신의 'excès' 개념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타이유가 블레이크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appropriation)하는 방식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그가 '일반 경제'를 이야기하는 『저주의 몫』 안에서 이 문장을 제사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곧 바타이유는 블레이크의 저 '신비주의적' 명제(블레이크는 바로 이 문장 조금 뒤에 이어서 "Enough! or Too much"라고 외치기도 한다)를 그 자신의 '경제학적/인류학적' 명제로 치환하고 강화하며 재해석하고 있었던 것. 여기서는 문장 하나의 번역 안에서 '동일한 단어'가 드러내고 있는 '상이한 층위'를 목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윌리엄 블레이크, 『 천국과 지옥의 결혼 』(김종철 옮김),
민음사(세계시인선 46), 1996[개정증보판].
▷ 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모더니티 총서 10), 2000.
4) 이러한 의미에서 바로 이 문장을 번역하고 있는 두 권의 국역본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블레이크의 시들을 발췌해 옮기고 있는 김종철 번역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고 있다:
넘쳐흐름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동일한 문장을ㅡ하지만 '동일한' 문장이라고 해도 이는 적확히 말해서 분명 '바타이유가 번역/인용한 블레이크'를 다시 국역한 것이라고 해야 할 텐데ㅡ『저주의 몫』 국역본(언젠가 이 책의 번역 전반에 관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에서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가? 이렇게 옮기고 있다:
충만은 아름다움이다.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 두 국역을 비교할 때마다 그 둘이 지닌 각각의 '역할'과 '효과'가 묘하게 서로 뒤바뀌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기묘한' 느낌은 하나의 물음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블레이크 '그 자체'를 옮기는 김종철의 번역이 "충만은 아름다움이다"가 됐어야 했고, 반대로 '바타이유가 인용한' 블레이크를 옮기는 조한경의 번역이 오히려 "넘쳐흐름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가 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 내게는 마치 오히려 김종철의 번역이 바타이유가 블레이크를 번역하고 인용했을 때 생각했던 효과를 이미 '선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동시에 단순히 "충만"으로만 옮긴 조한경의 번역은ㅡ"충일"만 됐어도 더 좋았을 텐데ㅡ그 자체로 '충만'하지 못한 번역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김종철의 번역은 "~이야말로"라는 말로 일종의 '확인사살'(!)까지 하고 있음에야. 그렇다, 나는 이렇게 까칠하다.
▷ Georges Bataille, L'archangélique et autre poèmes, Paris: Gallimard(coll. "Poésie"), 2008.
5) 올해 초에 나왔던 바타이유의 또 다른 '따끈따끈한' 책으로는 위의 책이 있다(시인들을 엄선하여 출간하는 갈리마르의 이 총서는 정말이지 너무 아담하고 예쁘다...). 이 책의 내용 역시나 1971년에 바타이유 전집 3, 4권을 통해 이미 모두 '소화'된 것들이지만, 베르나르 노엘(Bernard Noël)이 붙인 서문을 읽는 재미만 해도 아주 쏠쏠하다. 특별히 새로운 의견이나 해석을 제시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근래에 본 바타이유 관련 글들 중에서도 특히 그의 시론(詩論)ㅡ사실 바타이유의 시론은 일종의 '반시론(反詩論)', 차라리 '반시'로서의 시에 대한 지극히 '역설적'이며 '전복적'인 담론이라고 해야 하지만ㅡ을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해설한 것으로 추천할 만하다. 노엘이 말하듯 "시에 반대하는 모든 행동은 오직 시의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toute action contre la poésie ne peut avoir lieu qu'à l'intérieur de la poésie)"는 것, 따라서 그러한 행동이 기반하고 있는 '내적 체험'이란 지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하나의 실천(pratique)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바타이유의 시론은 이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바로 바타이유가 말하는 '시의/에 대한 증오(la haine de la poésie)'의 본령이기도 하다.
▷ William Blake: 1757-1827, London: Tate Gallery, 1990.
▷ William Blake: The Complete Illuminated Books, London: Thames & Hudson, 2000.
6) 블레이크는 자신의 책을 직접 '제작'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미술에 대한 그 자신의 '상징주의적'인 독특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 유명한 'Illuminated Books'가 그 결과이다. 블레이크의 그림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어떤 '기괴함'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깊고 오래된 나의 또 다른 병증이다. 블레이크의 화집으로는 지금까지 다양한 종류들이 출간된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위의 두 가지 판본이다. 일람(一覽)을 권한다.
▷ 『 김수영 전집 1권: 시 』, 민음사, 1981.
▷ Kim Su-Yŏng, Cent Poèmes(trad. par Kim Bona), Bordeaux: William Blake & Co., 2000.
7) '옮기는' 일로서의 번역에 관해 짧게 언급하고 나니, 일전에 김수영 시의 불역(佛譯)을 잠깐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보르도(Bordeaux) 3대학에서 한국학과를 맡고 있는 김보나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먼저 찾아보았던 시는 물론(!)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의 번역이었다. 비단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 당신이라면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을 과연 어떻게 옮겼을까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그 구절이 "la gargotière souillon spécialiste du bouillon"으로 옮겨진 것을 보고 참 재미있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spécialiste"라는 일종의 해설적인 '첨가어'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었고(말하자면 이를 다시 거꾸로 한국어로 번역하여 "고기 수프(설렁탕)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싸구려 식당의 더러운 주인년"이라는 지극히 '직설적'인 직역을 한 번 떠올려보라), 둘째, 각운도 두운도 아니지만 "souillon"과 "bouillon"이라는 단어들이 형성해내고 있는 어떤 운율에 놀랐기 때문이었으며(한국어였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더러운 년'과 '설렁탕' 사이를 이어주는 저 '아름다운' 운율), 그리고 한국인이 "돼지 같은 주인년"이라는 말로 표상하는 인물과 프랑스인이 "la gargotière souillon"이라는 말로 표상하는 인물 사이에는 어떤 '문화적' 차이와 거리가 놓여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블레이크의 언어를 '옮겼던' 바타이유의 언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번에는 '상이한' 단어들이 지닌 '동일한' 의미들의 망, 그것의 범위와 한계 혹은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문제였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언어란ㅡ그리고 그 언어들의 '사이'란ㅡ참으로 현기증 나는 하나의 심연(abîme)이랄 수밖에(게다가 김수영의 저 불역본을 출간했던 회사가 '윌리엄 블레이크' 출판사였다는 '기묘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현기증은 실로 배가 될 수밖에...).
▷ 김수영, 『 거대한 뿌리 』, 민음사, 1974.
▷ 『 김수영 전집 1권: 시 』, 민음사, 2003[개정판].
8) 조용히,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책상 앞에 놓인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때가 있다. 주로 죽은 자들과 나누게 되는 이 '대화', 대부분 죽은 자들과 치를 수밖에 없는 이 '연애'를 진심 반 농담 반으로 걱정해주는 고마운 사람도 있다. 일천한 능력 탓에 저 언어라는 심연 속에서 기를 쓰며 허우적대다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아주 가끔씩 있다. 실제로 어느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속으로 한껏 욕을 퍼부을 때도 있었고, '땅주인'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반항을 애꿎은 '야경꾼'에게만, 그것도 '20원'도 '10원'도 아니고 단돈 '1원' 때문에 쏟아부은 적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김수영의 말대로, 이는 "얼만큼 작으냐". 이 시를 읽어 온 지가 벌써 십수년인데도, 나는 아직도 이 모든 '작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여전히 '타파'는커녕 단지 새겨서 '기억'만이라도 하기 위해서, 이 시를 계속 다시 읽고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데, 그런데 시의 반대야말로 언제나, 결국 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김수영의 저 '시론' 역시나 또 하나의 '반시론'이었음을, 새삼스레 절감하고 통감하게 된다. 읽기 위해 책을 자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인지, 나는 가끔씩, 아주 가끔씩, 궁금해지는 것이다.
▷ 펼쳐진 책, 쌓아놓은 책들 너머로,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punctum'이 되고자 하는 'studium'처럼, 그것도 시계 방향으로, 얄궂게도: 시계, 칼, 담배의 삼원소.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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