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절판과 8절판을 만드는 방법. '고독'이 몸부림 칠 때, 한 번쯤 직접 시도해볼 만하다.

1) 요즘은 책을 낼 때 4절판(quarto)이 됐건 8절판(octavo)이 됐건 접혀 있는 책장을 절단하지 않은 채 그대로 출판하는 경우는 참 드문 일이지만, 유럽 책들을 주문하면 가끔씩 여전히 그런 책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때가 있어 실로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접혀진 부분을 한 장 한 장 칼로 잘라서 아직 채 드러나지 않은 미지의 지면들을 넘겨보는 재미는, 어찌 보면 쓸데없는 고색창연한 취미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매번 책의 한 '역사(歷史/役事)'를 다시금 환기시켜주는, 소소하지만 동시에 소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소피아 서점의 백환규 선생이 일전에 한 번은 내게 이런 '추억' 한 자락을 말씀해주신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서 책장이 절단되지 않은 4절판들이 싼 가격에 많이 나왔었는데, 요즘은 그런 책 찾기가 참 힘들죠..." 웬만한 책 가격이 만원을 지나 2만원을 훌쩍 넘어버리는 요즘이고 보면, 나는 고학생들을 위해 그런 책들이 나왔던 시대를 떠올리고 '상상'하면서, 말하자면 '추억 없는 추억'에 빠져보기도 하는 것이다.

William Blake traduit et présenté par Georges Bataille, Montpellier: Fata Morgana, 2008.

2) 가장 최근에 책장을 '자르며' 넘겨보았던 책은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가 불어로 번역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선집(詩選集)이었다. 올해 초 출간된 이 책의 내용물은 사실 1979년에 출판된 바타이유 전집 9권 안에 이미 모두 수록되어 있는 것들이긴 하다(바타이유는 흠모에 가까운 감정으로 블레이크에 많은 관심을 갖고 그의 시들을 다수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 책이 특별히 '아름다운' 것은 블레이크와 관련된 앙드레 마송(André Masson)의 그림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파타 모르가나(Fata Morgana) 출판사만의 고급스러운 제책(製冊) 방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파타 모르가나는 몽펠리에(Montpellier)에 위치하고 있는 출판사로서 바타이유뿐만 아니라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책들도 다수 간행한 바 있어 내게는 다소 익숙한 이름의 회사이다. 책장을 칼로 자를 때 들리는, 경쾌한 마찰음 너머로, 앙드레 마송의 데생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내가 느꼈던 희열에 가까운 감정은, 내 지극히 '도착적'이고 '편집증적'인 쾌락들의 한 사례일 뿐이다.

       

William Blake, The Complete Poems, Penguin Books, 1977.
William Blake, Songs of Innocence and Songs of Experience, New York: Dover, 1992.

3) 영미권의 염가판(paperback) 책을 볼 때마다 그 금방이라도 뜯어져 나갈 것 같은 갱지 재질의 책장들에 가끔씩 실망하곤 하지만, 이런 '고전'들을 이렇게 싼 가격에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일례로 위 오른쪽 책 『순수의 노래/경험의 노래』는 구입 당시 가격이 1달러에 불과했다). 펭귄판 블레이크 시전집에 수록된 시들은 주석을 제외해도 거의 900쪽에 육박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이 중에서도 바타이유가 특별히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블레이크의 구절이 있었으니(『저주의 몫(La part maudite)』에서도 이 문장을 책 서두의 제사(題詞)로까지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구절은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Exuberance is Beauty.

바타이유는 이를 불어로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L'exubérance est Beauté.

이 문장의 '번역'은 번역이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허탈'한 감이 없지 않다. 이 '번역'은 말 그대로 하나의 순수한(?) '옮김'이 되고 있으며, 또한 영어와 불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했을 때 물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옮김'의 과정 안에는 미묘하고 섬세한 '의미의 이동' 또한 존재하고 있다. 블레이크에게 있어 'exuberance'의 뜻을 새겨보자면 그것은 신비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충일(充溢)' 또는 '만일(滿溢)'에 가깝다(한자 '溢' 안에도 '넘침'의 의미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바타이유에게 있어 이 단어는 '넘침' 또는 '과잉'을 뜻하는 자신의 'excès' 개념에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타이유가 블레이크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appropriation)하는 방식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그가 '일반 경제'를 이야기하는 『저주의 몫』 안에서 이 문장을 제사로 삼은 이유이기도 하다. 곧 바타이유는 블레이크의 저 '신비주의적' 명제(블레이크는 바로 이 문장 조금 뒤에 이어서 "Enough! or Too much"라고 외치기도 한다)를 그 자신의 '경제학적/인류학적' 명제로 치환하고 강화하며 재해석하고 있었던 것. 여기서는 문장 하나의 번역 안에서 '동일한 단어'가 드러내고 있는 '상이한 층위'를 목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 윌리엄 블레이크, 『 천국과 지옥의 결혼 』(김종철 옮김), 
    민음사(세계시인선 46), 1996[개정증보판].
▷ 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 』(조한경 옮김), 문학동네(모더니티 총서 10), 2000.

4) 이러한 의미에서 바로 이 문장을 번역하고 있는 두 권의 국역본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블레이크의 시들을 발췌해 옮기고 있는 김종철 번역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고 있다:

넘쳐흐름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동일한 문장을ㅡ하지만 '동일한' 문장이라고 해도 이는 적확히 말해서 분명 '바타이유가 번역/인용한 블레이크'를 다시 국역한 것이라고 해야 할 텐데ㅡ『저주의 몫』 국역본(언젠가 이 책의 번역 전반에 관해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에서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가? 이렇게 옮기고 있다:

충만은 아름다움이다.

말하자면 나로서는 이 두 국역을 비교할 때마다 그 둘이 지닌 각각의 '역할'과 '효과'가 묘하게 서로 뒤바뀌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기묘한' 느낌은 하나의 물음에서 기인하는 것인데, 블레이크 '그 자체'를 옮기는 김종철의 번역이 "충만은 아름다움이다"가 됐어야 했고, 반대로 '바타이유가 인용한' 블레이크를 옮기는 조한경의 번역이 오히려 "넘쳐흐름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다"가 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 내게는 마치 오히려 김종철의 번역이 바타이유가 블레이크를 번역하고 인용했을 때 생각했던 효과를 이미 '선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동시에 단순히 "충만"으로만 옮긴 조한경의 번역은ㅡ"충일"만 됐어도 더 좋았을 텐데ㅡ그 자체로 '충만'하지 못한 번역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김종철의 번역은 "~이야말로"라는 말로 일종의 '확인사살'(!)까지 하고 있음에야. 그렇다, 나는 이렇게 까칠하다.

Georges Bataille, L'archangélique et autre poèmes, Paris: Gallimard(coll. "Poésie"), 2008.

5) 올해 초에 나왔던 바타이유의 또 다른 '따끈따끈한' 책으로는 위의 책이 있다(시인들을 엄선하여 출간하는 갈리마르의 이 총서는 정말이지 너무 아담하고 예쁘다...). 이 책의 내용 역시나 1971년에 바타이유 전집 3, 4권을 통해 이미 모두 '소화'된 것들이지만, 베르나르 노엘(Bernard Noël)이 붙인 서문을 읽는 재미만 해도 아주 쏠쏠하다. 특별히 새로운 의견이나 해석을 제시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근래에 본 바타이유 관련 글들 중에서도 특히 그의 시론(詩論)ㅡ사실 바타이유의 시론은 일종의 '반시론(反詩論)', 차라리 '반시'로서의 시에 대한 지극히 '역설적'이며 '전복적'인 담론이라고 해야 하지만ㅡ을 간략하면서도 명쾌하게 해설한 것으로 추천할 만하다. 노엘이 말하듯 "시에 반대하는 모든 행동은 오직 시의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toute action contre la poésie ne peut avoir lieu qu'à l'intérieur de la poésie)"는 것, 따라서 그러한 행동이 기반하고 있는 '내적 체험'이란 지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언제나 하나의 실천(pratique)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바타이유의 시론은 이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바로 바타이유가 말하는 '시의/에 대한 증오(la haine de la poésie)'의 본령이기도 하다.

       

William Blake: 1757-1827, London: Tate Gallery, 1990.
William Blake: The Complete Illuminated Books, London: Thames & Hudson, 2000.

6) 블레이크는 자신의 책을 직접 '제작'했던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미술에 대한 그 자신의 '상징주의적'인 독특한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저 유명한 'Illuminated Books'가 그 결과이다. 블레이크의 그림들을 접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어떤 '기괴함'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깊고 오래된 나의 또 다른 병증이다. 블레이크의 화집으로는 지금까지 다양한 종류들이 출간된 바 있지만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위의 두 가지 판본이다. 일람(一覽)을 권한다.

   

▷ 『 김수영 전집 1권: 시 』, 민음사, 1981.
Kim Su-Yŏng, Cent Poèmes(trad. par Kim Bona), Bordeaux: William Blake & Co., 2000.

7) '옮기는' 일로서의 번역에 관해 짧게 언급하고 나니, 일전에 김수영 시의 불역(佛譯)을 잠깐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보르도(Bordeaux) 3대학에서 한국학과를 맡고 있는 김보나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에서 내가 가장 먼저 찾아보았던 시는 물론(!)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의 번역이었다. 비단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지만, 당신이라면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을 과연 어떻게 옮겼을까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그 구절이 "la gargotière souillon spécialiste du bouillon"으로 옮겨진 것을 보고 참 재미있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첫째 "spécialiste"라는 일종의 해설적인 '첨가어'가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었고(말하자면 이를 다시 거꾸로 한국어로 번역하여 "고기 수프(설렁탕)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싸구려 식당의 더러운 주인년"이라는 지극히 '직설적'인 직역을 한 번 떠올려보라), 둘째, 각운도 두운도 아니지만 "souillon"과 "bouillon"이라는 단어들이 형성해내고 있는 어떤 운율에 놀랐기 때문이었으며(한국어였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더러운 년'과 '설렁탕' 사이를 이어주는 저 '아름다운' 운율), 그리고 한국인이 "돼지 같은 주인년"이라는 말로 표상하는 인물과 프랑스인이 "la gargotière souillon"이라는 말로 표상하는 인물 사이에는 어떤 '문화적' 차이와 거리가 놓여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블레이크의 언어를 '옮겼던' 바타이유의 언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번에는 '상이한' 단어들이 지닌 '동일한' 의미들의 망, 그것의 범위와 한계 혹은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문제였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언어란ㅡ그리고 그 언어들의 '사이'란ㅡ참으로 현기증 나는 하나의 심연(abîme)이랄 수밖에(게다가 김수영의 저 불역본을 출간했던 회사가 '윌리엄 블레이크' 출판사였다는 '기묘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현기증은 실로 배가 될 수밖에...).

       

▷ 김수영, 『 거대한 뿌리 』, 민음사, 1974.
▷ 『 김수영 전집 1권: 시 』, 민음사, 2003[개정판].

8) 조용히, 모든 것이 정지된 것처럼, 책상 앞에 놓인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때가 있다. 주로 죽은 자들과 나누게 되는 이 '대화', 대부분 죽은 자들과 치를 수밖에 없는 이 '연애'를 진심 반 농담 반으로 걱정해주는 고마운 사람도 있다. 일천한 능력 탓에 저 언어라는 심연 속에서 기를 쓰며 허우적대다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가끔, 아주 가끔씩 있다. 실제로 어느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속으로 한껏 욕을 퍼부을 때도 있었고, '땅주인'에게는 차마 하지 못하는 반항을 애꿎은 '야경꾼'에게만, 그것도 '20원'도 '10원'도 아니고 단돈 '1원' 때문에 쏟아부은 적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 김수영의 말대로, 이는 "얼만큼 작으냐". 이 시를 읽어 온 지가 벌써 십수년인데도, 나는 아직도 이 모든 '작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여전히 '타파'는커녕 단지 새겨서 '기억'만이라도 하기 위해서, 이 시를 계속 다시 읽고 있는 것인데,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데, 그런데 시의 반대야말로 언제나, 결국 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김수영의 저 '시론' 역시나 또 하나의 '반시론'이었음을, 새삼스레 절감하고 통감하게 된다. 읽기 위해 책을 자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인지, 나는 가끔씩, 아주 가끔씩, 궁금해지는 것이다.

▷ 펼쳐진 책, 쌓아놓은 책들 너머로,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punctum'이 되고자 하는 'studium'처럼, 그것도 시계 방향으로, 얄궂게도: 시계, 칼, 담배의 삼원소.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9-29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9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9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30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8-09-30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레이크가 말한 exuberance가 "신비주의적 의미"를 가진다는 말씀을 들으니 이는 연금술에서의 증식multiplication과정과 연관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실제로 블레이크도 연금술과 같은 그노시스적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다죠?)

연금술에서의 증식과정은 기저물질(현자의 돌)은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물질들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하죠. 연금술에서 '창조'는 "다양한 양식들 속의 하나(unnum in multa diversa moda)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관점에서 님의 다음 문장
"'동일한 단어'가 드러내고 있는 '상이한 층위'"라는 말도 해석가능하겠군요..^^

동일한 단어(현자의 돌)의 증식을 통해 드러나는 상이한 층위(다양한 물질들)의 과정이 언어에 의해 창조되는 exuberance 혹은 multiplication의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

바타이유가 그의 일반경제학에서 발견한 것도 결국 이러한 증식의 과정을 통한 가치의 창조에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또 바타이유의 연금술적 해석도 가능하게 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람혼 2008-09-30 04:04   좋아요 0 | URL
연금술이라면 저도 한동안 빠져 살다시피(?) 하면서 허우적댔었지만, yoonta님처럼 생각해보진 못했네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블레이크에게는 'multiplication'의 연금술적 요소도 중요한 것이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emanation' 같은 신비주의적 혹은 신플라톤주의적 요소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말이죠. 곧 '연금술적'으로 비유할 때에는 동일한 단어가 상이한 층위들을 '증식'시킨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반면ㅡ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ㅡ'신비주의적/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동일한 단어로부터 상이한 층위들이 '유출'되어 나온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블레이크-바타이유가 개념화했던 저 '넘침'과 '과잉'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exuberance'라는 단어는 지극히 신플라톤주의적인 '유출'의 개념이 지닌 어떤 '시의적절함'(혹은, 말 그대로 니체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반시대성')을 더욱 강조하고 강화하며 재해석하고 있는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바타이유의 '일반 경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증식으로서의 가치 창조'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출로서의 과잉' 또는 '넘침으로서의 탕진/소비'라는 지점에 더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죠.

또한 블레이크뿐만 아니라 바타이유 역시나 그노시스주의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실제로 바타이유는ㅡ다소 생경하지만 동시에 날카롭게도ㅡ유물론과 그노시스주의 사이에서 어떤 '접점'을 찾아내고 있기도 합니다.^^

'unum in multa diversa moda'라는 연금술의 모토를 언급하시니, 저는 문득 저 미합중국의 건국 모토였던 'e pluribus unum'이라는 문구가 떠오르는데요, 요즘 미국 대선의 이런저런 흐름들을 '관전'하면서 이 모토를 다시금 새삼스레 재독(再讀)해보게 되더군요.^^

yoonta 2008-09-3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그러고보니 신플라톤주의, 특히 플로티누스철학에서의 유출로 볼수도 있군요. 그러나 플로티누스의 유출emanation도 결국 일자The one으로부터 누스nous 그리고 영혼psyche 등으로의 하강적 확산과정과 그 역의 상승과정의 반복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연금술의 '증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유출도 이러한 Trias적 과정을 통해 일자가 다자로 '증식'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연금술의 제 과정들을 단순히 화학적인 물질변성의 기술적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세계의 창조나 변환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나 메타포로 본다면 말이지요.

바타이유의 일반경제학도 결국은 잉여생산물의 단순한 '탕진/소비'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순수증여'의 행위를 통해서 가치의 증식/창조가 그 과정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표면적으로 과도해 보이는 소비행위가 사실은 가치의 증식에 기여하는 과정이라는 이 역설을 이해하는 것. 여기에 바타이유적 일반경제학의 핵심이 숨어 있는 것 아닐까요?

람혼 2008-10-01 03:17   좋아요 0 | URL
역시 yoonta님께서 바타이유의 '일반' 경제라는 말이 지닌 궁극적 함의를 명쾌하게 잘 정리해주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분명 일반 경제의 개념은, 그 자체로 '반쪽'일 뿐인 단순한 생산과 재생산의 고리를 넘어 그 나머지 '반쪽'인 탕진과 소비를 강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동질성과 이질성, 전유와 배설이라는 두 극성을 동시에 함께 사고하는 어떤 '불균형적 균형점'을 제시하고 있는 개념이라는 생각, 저 역시나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언제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이러한 사유의 체계가ㅡyoonta님의 소중한 말씀처럼ㅡ'가치의 증식과 창조'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단순하고 진부한 보편주의의 가면을 쓴 '순환적 보수주의'로 추락하고 마느냐 하는, 어떤 선택적인ㅡ따라서 어떤 '결단'의 순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ㅡ이론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 점에 관해, 꾸준히, 그리고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PhEAV 2008-10-07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 도서관에 새로 들어왔던 아당과 타네리판 데카르트 전집을 제본하려고 일일이 잘랐던 기억이 나네요. 어디 소설에서나 볼법한 작업을 하다가 책 두께가 너무 두꺼워서 좌절하고, 급한 책만 후딱 자르고 나머지는 그냥 도서관에 부탁했던 기억이...;;

람혼 2008-10-07 01:46   좋아요 0 | URL
Adam & Tannery 판본의 Descartes 전집은 저로서도 정말 탐나는 서책들 중의 하나입니다. 저 역시나 아직 전권을 소장하고 있지는 못한데요, 두툼하고 넓은 판형에 아름다운 17세기 활자체로 인쇄된 책을 펼쳐놓고 보고 있자면, 정말이지 기분이 묘해집니다(특히나 저는 그 시대 's' 서체의 형태를 너무나 좋아한답니다^^). 그나저나 K군님이 보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책을 열어보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그 책장들을 모두 자르려는 시도를 하셨다니, 정말이지ㅡUmberto Eco의 어느 소설에 나올 법한?ㅡ소설 같은 '명장면'입니다.^^

2008-10-22 2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5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8 0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8 1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9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30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30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30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31 0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