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tin McDonagh, The Pillowman, London: Faber and Faber, 2003.

1) 내가 LG아트센터에서 마틴 맥도너의 연극 <필로우맨>을 본 것은 2007년 5월 18일 금요일이었다. 내가 굳이 이렇게 나의 경험에 시간의 레테르를 붙이는 것은, 연극이라는 것이 나날의 공연마다 그 모습과 느낌을 달리하는 하나의 유동하는 '생물'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강조함으로써 관극의 경험이 지닌 저 일회성과 유일성이라고 하는 [연극]교과서적인 특징을 유독 부각시키려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간의 레테르를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서 나에게는ㅡ내 자신에게조차도ㅡ하나의 '반례'가 필요한데, 예를 들어 그 반례의 한 작은 사례는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것이다. 내가 모극장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지우개 머리>ㅡ왜 갑자기 이 영화가 떠올랐을까, 세간의 비유를 따르자면, 오히려 퀜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떠올렸어야 하지 않을까ㅡ를 본 것은 모년 모월 모일 모시였다, 라는 예시문이 그것.

2) 휘발성을 지닌 시간예술의 이러한 상대성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절대성'을 상정하고, 또한 요구한다. 그러므로 요는, 매체의 가변성 또는 부동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예술의 시간경험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 그 예술의 시간은 사실 극장의 시간이 아닌 삶의 시간이라는, 다분히 고답적이고 환원론적인 실존철학적 미학의 물음이 문제라는 것, 그러므로 예술의 경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회상의 형식과 결합되어 있다는, 후기 낭만주의의 찌꺼기 같은 이기적이고 자족적인 체념의 형식이 문제라는 것. 그런데 그 회상이 만들어내는 어떤 우연과도 같은 필연, 필연이라는 착각과 오인(誤認)이 사실은 진짜 문제라는 것. 이것은 또한 내가 이해하는 바의 '기억의 연극(Theater der Erinnerung)'에 대한 잡설의 설법과도 같은 해명, 부정성과 귀류법을 통해 우회해 내리는 '운명'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다.



3) 내가 런던에서 마틴 맥도너의 연극 <The Leenane Trilogy>를 본 것은 1997년 8월 9일 토요일이었다. 나는 그날 아침 담배를 피워물고 가던 레스터 스퀘어의 어느 골목에서 한 영국 여자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었고, 워털루 다리가 보이는 템즈 강둑의 어느 벤치에서 한 영국 할아버지의 잔소리 같은 일상사를 귀담아 들으며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음침한 날씨의 대명사라고 주입받았던 영국의 날씨는 벌써 며칠째 화창하게 맑음이었다. 그 며칠 전 나는 <The Leenane Trilogy>의 공연 티켓 3장을 구입했고, 아일랜드 방언이 섞인 영어 대사를 알아듣지 못할까 두려워 3부작의 희곡을 모두 구입하여 밤을 새워 읽어내려갔다. 당시 20대였던 작가 마틴 맥도너와의 첫만남은 그러한 독서의 끔찍하고도 짜릿한 전율 속에서 이루어졌다. 1997년 8월 9일 토요일은, 그의 3부작을 대낮부터 한밤까지 연속으로 상연하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장소는 세인트 마틴 가에 위치해 있는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 첫 작품의 공연 후반부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내 옆자리의 한 영국 할머니는 두 번째 작품 시작 전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내게 첫 번째 작품의 결말을 물어왔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매우 흥미로워했다. 관객들은 딸이 어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마지막 장면에서 어머니의 의자가 객석을 향해 돌아감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우연찮게도 그 할머니는 한국전쟁 당시 영국군이었던 남편과 함께 참전하여 간호사로 일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이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힘과 동시에 얻을 수 있던 정보였다. 두 번째 작품이 끝나고 난 저녁을 먹으러 근처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사를 마친 나는 마지막 작품을 보기 위해, 어떤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인 채로, 부랴부랴 다시 극장으로, 늦지도 않은 발걸음을 재촉했었다. 늦은 밤, 3부작의 모든 공연이 끝나고, 토요일만의 특별한 커튼콜이, 마치 하나의 독립된 작품처럼 무대 위에 올려졌다. 3부작에 등장했던 모든 배우들이, 공연을 마친 배우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그 어떤 이완의 표정도 없이, 말 그대로 어떤 표정도 없이, 마치 무대의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듯이, 말 그대로 널브러져 있는 듯이, 그렇게 무표정하고 완고하게, 서 있었다. 막이 올라가면서, 그들의 머리 위로, 거짓말처럼, 우울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관객이나 객석이 아니라 다른 어떤 곳, 다른 어떤 무언가를, 멍하게 혹은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고, 그들 위로는, 집요할 정도로 계속해서, 느린 비가, 그렇게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도 그 비 내리던 무대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나는 다시 마틴 맥도너와 만났다, 연극 <필로우맨>을 통해서.

       

▷ Martin McDonagh, The Beauty Queen of Leenane, London: Methuen, 1996.
▷ Martin McDonagh, A Skull in Connemara, London: Methuen, 1997.
▷ Martin McDonagh, The Lonesome West, London: Methuen, 1997.

4) <The Leenane Trilogy>는 이후 맥도너 작품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연극 세계를 이미 탄탄히 구축하고 있는 초창기 작품들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일독을 권한다. 현재는 위의 독립된 세 판본은 따로 구할 수 없고 세 작품이 함께 묶여진 희곡집으로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은 몇 년 전에 다른 제목을 달고ㅡ아마도 익숙치 않은 국외 지명인 'Leenane'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이유 때문인지 원제와는 다르게, 특히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번안'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제목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ㅡ배우 이영란 씨의 주연으로 국내에서 초연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관극은 하지 못했다. 가끔 생각이 날 때마다 작품을 어떻게 풀었었는지 항상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사실 더 궁금한 것은, 맥도너 작품의 그 국내 '초연'이 큰 화제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당시 맥도너의 낮은 지명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작품의 질 때문이었을까 하는 점이기는 하지만.

   

▷ Martin McDonagh, The Cripple of Inishmaan, London: Methuen, 1997.

5) 내가 연극 <The Cripple of Inishmaan>을 본 것은 1997년 8월의 어느 밤, 런던의 왕립 국립 극장(Royal National Theatre)에서였다. 그러므로 그때 난 맥도너의 작품 4개를 한달 안에 다 봐버린 셈이었다. 물론 어떤 극작가에게도 이러한 데뷔는 다분히 파격적이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작품의 공연은 위의 3부작이 지닌 카리스마에는 미치지 못했고 또한 왕립 국립 극장의 대극장(Lyttelton Theatre)이라는 무대에 비해 다소 왜소하게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아주 매력적인 '병신'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국내 <필로우맨> 공연의 팸플릿에 박천휘 씨가 "1998년에 런던 웨스트엔드에 27세의 청년 마틴 맥도너의 작품 네 개가 동시에 상연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라고 쓴 부분은 인쇄 오류이거나 글쓴이의 착각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의 작품 4개가 런던에서 '최초로' 동시에 상연되었던 해가 1998년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6) <필로우맨>의 한국 공연 대본[번역]에서 단 두 가지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두 점 모두 아주 세부적인 것들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첫 번째 경우는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고 두 번째 경우는 조금 불만족스러운 것이라 하겠다. 카투리안이 필로우맨을 묘사하면서 '동그란(round)' 베개라고 말한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며 마이클이 '원형의(circular)' 베개라는 표현이 더 좋다고 말하는 부분이 첫 번째 경우이다(The Pillowman, p.43). 필로우보이가 죽음을 결심한 후 필로우맨에게 "엄마한테 오늘 밤엔 차를 마시지 못할 거라고 말해줄래요?"라고 말하는 부분이 누락된 것이 두 번째 경우이다(The Pillowman, p.47). 첫 번째의 경우ㅡ나는 여기서 "circular"라는 단어를 한자어에 대응시키고 "round"라는 단어를 한글에 대응시킨 이 번역이 마음에 드는데ㅡ왜 마이클은 '동그란'보다 '원형의'라는 말을 더 좋아했을까? 사실 이 부분은 지나치기 쉬운 세부이긴 하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대사들로 이루어진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관극의 기억으로는, 공연에서 이 대사가 거꾸로 되었던 것 같다. 카투리안이 '원형의 베개'를 말하고, 이를 마이클이 '동그란 베개'로 정정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 부분이 '원형의'라는 딱딱한 말보다 '동그란'이라는 보다 말랑말랑한 단어를 더 선호하는 마이클의 '순수한' 성격을 잘 포착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부분에서 어떤 '착오'가 개입했던가? 물론 이에 대해서는 따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기억은 그리 정확한 것이 되지 못하기에, 하지만 또한 동시에 인상과 감응은 그보다 더 정확한 것이기에. 두 번째는 보다 '메타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누락된 부분은 세부이지만, 그 세부는 또한 단순한 세부가 아니기에. 아름다울 정도로 '부차적'인 세부의 누락이 절창(絶唱)의 누락이 된 것 같아 매우 안타까운 경우이기 때문이다. 필로우보이는 놀러나갔다가 저녁때까지는 꼭 차를 마시러 집에 들어오라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고는 필로우맨에게 저런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누락된 다른 많은 세부들 중의 단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또한 희곡과 상연 사이에서 이러한 누락은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세부의 누락은 일반의 그 '일반성'을 침식하고 잠식하며 또한 탐식한다. 물론 최민식, 최정우, 이대연, 윤제문, 네 배우의 연기는 아주 호연이었고, 음악 또한 아주 좋았음을 부기해둔다. 하지만 이것이 박근형의 연극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7) 카투리안과 마이클의 방. 그 두 개의 방은, 서로 이웃해 있었지만 동시에 격리되어 있었던 어린 시절의 그 두 방들이기도 하고, 또한 현재 두 사람이 위치한 두 개의 취조실이기도 하다. 이 두 개의 방은 과거와 현재에서 완벽하게 반복되며, 또한 동시에 단순한 반복을 넘어 증식하고 변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카투리안의 이야기를 '구연'하는 1막과 2막의 끝부분에서 '구현'되고 있는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방, 이는 가로의 축이며 또한 과거의 축이다. 그리고 카투리안의 취조실이 되었다가 다시 마이클의 취조실이 되는 하나의 공간, 두 개의 방은, 세로의[세로로 상정된] 축이며 또한 현재의 축이다. 이 가로와 세로, 과거와 현재의 시각적 교차는, 가로와 세로를, 과거와 현재를 교란시키면서 상당히 매력적인 그림을 선사한다. 한때 카투리안과 마이클의 대척점에는 부모가 있었지만, 지금은 투폴스키와 애리얼이라고 하는 형사들이 있다. 이 두 개의 방, 네 명의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집요하게 되새겨봐야 할 물음은, 내 생각에 다음과 같다: 누가 감금되고 누가 해방시키는가, 또는 누가 감금시키고 누가 해방되는가. 이는 일견 단순히 능동과 피동을 치환한 일종의 문형 연습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또한 일반적인 구원의 문제로 쉽게 환원될 수 있는 문제의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보다 도착의 문제에 더 근접한 것이다.

8) 연극이 하나의 약속이자 약호이듯, <필로우맨>은 약속에 관한 집요한 도착을 보여준다. 마이클은 카투리안에게 아이들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맹세를 하지만, 이는 이미 일어나버린 모든 일에 대한 사후적인 약속일 뿐이다. 예를 들어 투폴스키 또는 애리얼과 카투리안 사이에서 지속되는 권리(right)에 관한 끊임없는 수다를 보라. 진실을 말한다는 조건으로 카투리안의 작품을 보존해주겠다는 권리의 약속은, 카투리안이 말한 '진실'이 결코 진실이 아니었음이 확인되는 순간 작지만 커다란 불구덩이로 변한다. 결코 만인에게 공개된 적이 없었던 이야기들의 분서갱유, 이는 곧,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책들의 무화(無化)라고 이름할 만하다. 이 연극이 던지는 마지막 약속은, 결국 카투리안의 작품들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마음먹는 애리얼의 결심 속에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이 마지막 약속은 나에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하는, 저 근대 예술미학의 모든 약속들을 가장 극단적이고 도착적인 방식으로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근대예술의 이상이 살인 혹은 죽음과 만날 때, <필로우맨>은 그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만남의 시간을 상연하고 있다.

9) 이러한 만남으로부터 행복한 결말, 곧 '해피 엔딩'이 찾아온다.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와 작가의 형'이라는 이야기는 수정되고 가필된 또 다른 '필로우맨' 이야기와 다시 만난다. 결국 이야기들은 남는다. 하지만 카투리안이 죽기 직전 머리 속으로만 생각했던,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야기는 어디에 남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만약 이야기가 남았다고 한다면, 그것도 단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카투리안의 머리 속에서 마지막으로 서술된 그 마지막 이야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이 최후의 이야기, 최후까지 남은 이야기의 끝은, 관객인 나를 소름 돋을 정도로 '행복하게' 만들었던 해피 엔딩이 될 수 있었다. 되돌릴 수 있다는 환상과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사이의 만남은 그렇게 잔인하면서도 아름다운 해피 엔딩을 출산한다.

   

▷ Martin McDonagh, The Lieutenant of Inishmore, London: Methuen, 2001.
▷ Lilian Chambers, Eamonn Jordan(eds.), 
    The Theatre of Martin McDonagh: A World of Savage Stories, Dublin: Carysfort, 2006.

10) 마틴 맥도너의 다른 연극 작품으로는 2001년에 출판된 <The Lieutenant of Inishmore>가 있다. 역시나 일독을 권한다. 지금까지 맥도너의 연극 세계를 조명한 해설서는 불과 몇 권밖에 출간되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 압권은 역시 위 오른쪽의 책이다. 다양한 평론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의 리뷰와 공연 기록까지 수록하고 있는 이 책은 현재 나와 있는 맥도너에 관한 책 중에서 가장 볼 만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더 많은 책이 나와야 하고 또 나오겠지만. 이러한 상황은 사실 콜테스(Koltès)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ㅡ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콜테스에 관한 책으로는 비당(Bident)의 책이 가장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인데, 위베르스펠드(Ubersfeld)의 책도 있긴 하지만 그 책은 다소 연대기적인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ㅡ콜테스에 대해서는 후일 따로 글을 마련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개인적으로 맥도너와 콜테스를 함께 이야기하는 데에는 몇 가지 학술적이고도 정서적인 이유들이 있지만, 지금은 어쨌거나 바로 이 두 작가가 내가 가장 주목하고 아끼고 싶은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고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를 둘러대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2007. 5. 21.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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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필로우맨에 관심이 가네요. ^^
람혼님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

람혼 2007-09-09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
체셔 님이 잘 읽으셨다니, 왠지 기분이 너무 좋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