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갈겨쓴 글 뭉치들을 이리저리 정리하다가ㅡ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초고(草稿/礎稿)는 수고(手稿)로 '수고스럽게' 작성하는 '악습(惡習)'을 갖고 있는데ㅡ대략 10년 전쯤에 쓰고 처박아두었던 초현실주의와 페티시즘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지금 읽어보면, 저맘때쯤의 내가 지녔던 다소 격앙된 어조의 치기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그때는 내게 지금처럼 익숙하지 않았던 '지젝'의 이름을 다소 '생경하게' 발견하는 재미도 느끼게 된다. 현재와 비교해볼 때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달라진 구석들도 있지만(자잘한 변화들은 말할 것도 없이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라캉에게 있어서의 '실재'의 의미나 정치적 '혁명'에 대한 생각 등등이 그런 '변화된' 부분들이겠지만), 가장 일차적으로는 '기록'의 차원에서, 또한 페티시즘에 관한 몇몇 사항들을 통해 최근의 사유에 거름을 준다는 의미에서, 사이사이에 책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만을 첨언하여, 특별한 수정 없이 옮겨본다.

1) 초현실주의자들이 취한 '정치적인' 선택은 광인의 복권(復權), 정신병자의 권리장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병증을, 특히나 히스테리를 단순히 어떤 병리적인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대신 그것을 하나의 온전한 주체, 여러 다른 가능한 주체들 중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다. 브르통(Breton)이 프로이트(Freud)를 '발견'한 이후 초현실주의는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합리성' 중심의 이른바 '정상성'의 예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예술사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예술계 안에서 이러한 운동의 발생은 '평행적으로' 마르크스(Marx), 니체(Nietzsche), 프로이트 이후 이른바 '코기토(cogito)'라는 명제에 대한 회의와 재검토의 사상사와 그 궤도를 같이 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차라리 상식에 가깝다. 사람들은 과거 이러한 예술 운동을 가리키기 위해 군대용어를 차용하여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흡사 군대의 전위 부대를 연상시키는 파괴적이고도 저돌적인 힘, 그리고 이 힘이 촉발시킨 혁명의 시급성은, 이제껏 흔히 '정상'이라고 상정되어 오던 것을 상대화시키고, '산술적' 이성에 의해 배제되었던 감성과 상상력을 복권시킴으로써, '정치적'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방가르드 역시 이미 하나의 정치이다, 아마도 내재적 의미와 외재적 의미 모두에서.



▷ 트리스탕 쟈라, 앙드레 브르통, 『 다다/쉬르레알리슴 宣言 』(송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1987.
*) 차라(Tzara)의 다다 선언문들과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문들을 모아서 번역한 책. 1987년에 출간된 국역본이니, 이런, 벌써 20년이나 지났다!

2) 그래서였을까? 초현실주의자들은 프로이트보다 더 '극단'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에 정치적 진보성과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정당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새로운 주체가 필요했던 것. 여기서 '광인'이 이 역사적인 예술 '혁명'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말하자면, 광인을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 영웅은 실로 이미 '고전적'이다, 초현실주의 선언문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이 이미 국민교육헌장만큼이나 진부해졌을 정도로:
"정도야 어떠하든 광인이란 상상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는 바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상상력은 광인을 어떤 규칙 위반으로 몰고 가는데, 규칙 밖에서는 양식이 목표 대상이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광인에게 가하는 비판과 또 그들에게 가해지는 여러 가지 교정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가 표시하는 깊은 초탈(détachement)은 그들이 상상력으로부터 커다란 위안을 얻고, 또 망상이 그들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망상을 충분히 음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환상환각 같은 것은 하찮은 즐거움의 원천만이 아니다. 가장 잘 조직된 관능성은 이 원천에서 자기 몫을 발견하게 된다."
ㅡ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 113쪽.

3) 광인을 치료와 격리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이성적 주체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또 다른 주체로 파악하는 이러한 시각이야말로 초현실주의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운동의 대의에 해당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의 복권, 죽었던 자의 귀환. 그러나 문제는 초현실주의들 자신은 광인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광인에 대한 그들의 예찬과 연민은 단순한 짝사랑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쩌면 우리는 브르통의 애절한 서약 밑에 깔려 있는 얄팍한 순진성을 읽어낼 수도 있을 터, 바로 이 지점에서 초현실주의의 저 유명한 선언문에 대한 독해는 '징후적'인 것이 된다:
"광인의 비밀, 나는 이 비밀을 캐내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 광인이야말로 지나치도록 양심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다."
ㅡ 『다다/쉬르레알리슴 선언』, 113쪽.

   

▷ Immanuel Kant, Kritik der Urteilskraft(hrsg. von Karl Vorälnder), 
    Hamburg: Felix Meiner, 1990[7. Auflage].
▷ 칸트, 『 판단력 비판 』(이석윤 옮김), 박영사, 1974.  
*)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은 최근 백종현 선생의 번역으로 새 국역본이 아카넷에서 출간된 바 있다. 『판단력 비판』은 아직 새 국역본이 출간되지 않은 상태인데ㅡ최재희 선생의 『순수이성비판』 국역본만큼이나ㅡ오랜 시간 동안 이석윤 선생의 번역본이 통용되어 오고 있다. 이석윤 선생의 국역본 역시 위의 카를 포를랜더 편집판을 그 저본으로 하고 있다. 

4)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낭만주의'이다. 사실 초현실주의의 '광인 예찬'은 칸트(Kant)가 『판단력 비판』으로 열어 놓은 여러 방향성들 중 하나의 방향성, 곧 낭만주의 미학이라는 줄기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칸트에게 있어 천재란 기존의 규칙과 질서에 입각하여 그에 따라 예술을 제작하는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에 [새로운] 규칙을 부여하는 재능"(포를랜더 편집판, p.160, §46)을 의미하는 것이다. 곧 이 '낭만주의' 안에서 어쩌면 칸트의 저 '천재(Genie)'가 브르통의 '광인'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음인 것? 기존 예술의 규칙을 위반하여 새로운 규칙의 예술을 창조하지만 그 자신은 그 과정을 의식하지 못하는 칸트적 천재의 그림자가 브르통의 광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automatisme)은 이러한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규칙의 창출 과정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규칙을 만들어내는 천재의 작업 방식에 가장 성공적인 형태로 부합하는 것이며 이성의 논리와 질서로 통제될 수 없는 꿈의 힘에 대한 초현실주의의 '낭만주의적 낙관주의'를 가장 흐뭇한 방법으로 만족시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아방가르드의 파괴적이고 비전통적인 기조와 그 반(反)-미학적인 성격이 어떤 계보 위에서 가능했는지를 보여준다. 미학을 파괴하는 미학이라고 하는 이상은 규칙에 대한 위반으로써 새로운 규칙을 제시하는 예술의 이상, 곧 칸트의 천재를 통해 이미 예고되었으나 가장 일반적이고 일차적인 '위반'에 대한 규정에 머무르고 만 예술의 방향성이었다. 광인으로 변신한 이 새로운 낭만주의적 주체가 바로 반-미학의 예술가가 되었음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5) 여기서 우리는 광인이라는 새로운 예술 주체가 부르주아적이고 이성적인 예술 주체와 대비되고 있음에 또한 주목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마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부르주아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예술 제도에 대한 하나의 대립항으로 설정된 광인이라는 주체가 그러한 경제 또는 제도와 '무관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어쩌면 초현실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짧고 황홀했던 '동침'의 파국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무관함'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초현실주의가 기본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무관심성의 자율주의 미학을 떠올려볼 때 어쩌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일 수 있다. 부르주아적 질서에 대한 안티테제로 등장한 광인 주체는 '더러운' 것으로 상정된 시장의 논리와 계산적인 체계로부터 초탈해 있는 '외부'로 그려진다. 브르통이 말하는 광인의 "초탈/무관심(détachement)",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에 대한 초연한 무관심, 곧 새로운 낭만주의로서의 초현실주의가 표방하는 저항성의 기표이자 도덕성의 증거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역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어떻게 사회주의자들과 '그토록 쉽게' 연대할 수 있었던가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다. 서로 구체적인 지향과 이상에서는 달랐지만, 그들은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와 부르주아적 예술 제도라는 공동의 적(敵)을 갖고 있었던 것. 따라서,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말을 차용해 말하자면, 초현실주의를 작동시키는 힘은 '희망의 원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광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예술 주체의 자유와 그것이 불러올 꿈과 상상력의 유토피아를 그려낸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와 공유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공통성은 '진보'에 대한 이러한 믿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가 열어놓은 아방가르드 운동의 기저에는 기존의 규칙을 위반하면서 새로운 규칙을 창출하는 칸트 식의 천재론의 변형된 형태인 '광인-천재론'과 함께 새로운 유토피아주의가 동시에 꿈틀대고 있는 것.

6) 그러나 사실 자율적인 미학을 갖고 있는 예술가와 그가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 체제의 산물이며 역사상 가장 특수한 형태의 경제 체계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제한 경제. 바로 여기에 또 다른 모습의 물신 숭배, 초현실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히 혐오할 만한 보다 심층적인 의미에서의 물신 숭배가 은폐되어 있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라는 역사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이 이러한 물신 숭배를 통해서 초시간적이고 초역사적인 절대성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는 '광인처럼' 세속의 질서에 대해 초연할 수 있었고 '진정한' 예술 작품의 가치는 시장의 논리를 '초탈'하여 '황금처럼' 영원한 것으로 남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는, 근대적인 '금본위(金本位) 예술 제도'의 탄생이었던 것. 이에 나는 결국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주의가 오히려 그 자신이 혐오해 마지않는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물신성에 더욱 가깝게 밀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이르게 된다.

7) 물신성의 심층, 페티시즘의 부활. 아방가르드 예술의 특징인 개개인의 개인적인 규칙, 각각이 하나의 독립된 창조주인 '예술가'의 개념, 서로 환원이 불가능한 복수의 예술 규칙들 사이에서 공통된 언어를 공유할 수 있는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이 그만큼 희박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른바 '공통성'과 '공약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은 차치하고라도, 아방가르드 예술의 등장 이후 예술을 제작하거나 평가함에 있어서 '일반적인' 문법이라는 것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는 공통적인 제작 규칙이나 평가 규준을 상정할 수 없는 아방가르드 미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생각해볼 때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인과 꿈의 질서, 그것은 곧 무질서의 질서, 무의미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 그런데 바로 여기에 또 다른 형태의 페티시즘이 숨어 있다고 한다면?

           

Sigmund Freud, Werke aus den Jahren 1925-1931. Gesammelte Werke Band XIV, 
    Frankfurt am Main: Fischer, 1991[7. Auflage]. 
▷ 프로이트, 『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김정일 옮김), 열린책들, 1996.
▷ 프로이트, 『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김정일 옮김), 열린책들, 2003.
*) 소장하고 있는 프로이트의 전집은 피셔 출판사에서 간행된 연대순 전집판이며, 색인을 포함한 18권에 유고 1권을 더해 총 19권으로 이루어진 판본이다.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은 '전집'으로서는 불완전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요 저작들을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별 이의가 없다. 구판의 편제를 다시 정리하여 신판이 나온 바 있다. 지나가는 길에 번역의 문제에 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독일어 'Fetischismus'의 번역에 대해 몇몇 언급을 해왔는데, 그 가장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절편음란증'이라는 번역어는 병리적으로 과도한 '편견'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2. 같은 단어가 마르크스의 번역에서는 '물신주의' 혹은 '물신 숭배'라고 번역되는 것을 생각해볼 때 이 '두' 용법에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ㅡ'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ㅡ서로 연관되는 번역어를 창안할 필요가 있다.  

8)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의 페티시즘은 흔히 '절편음란증' 또는 '대상성 성욕이상증' 등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이는 부인/거부(Verleugnung)라는 심리 작용과 관계가 있다. 페티시즘 안에는 여성의 거세를 인정하는 동시에 거부하고 있은 심리가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이 바로 그것:
"절편음란물(Fetisch)은 단순한 페니스의 대체물이 아니라, 절편음란증(Fetischismus) 환자의 어린 시절에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가 나중에 상실되어 버린 아주 특별하고 구체적인 페니스의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 절편음란물(Fetisch)이란 남자아이가 한때 그 존재를 믿었던 여성의 페니스, 혹은 어머니의 페니스의 대체물이다."
ㅡ 프로이트, 전집 14권, p.312.
*) 번역은 국역본의 것을 따랐다. 국역본 전집 구판 9권, 28쪽/신판 7권, 320쪽. 신판에서는 "페니스"를 모두 "남근"으로 바꿔 번역하고 있다. 다만 이 부분의 번역은 다소 부정확한데, 앞 문장의 "구체적인 페니스의 대체물"에서 "페니스"의 원어는 "Penis"인 데 반해 뒷 문장의 "남자아이가 한때 그 존재를 믿었던 여성의 페니스"에서 "페니스"의 원어는 "Phallus"이다. 다른 두 단어를 "페니스" 혹은 "남근"으로 똑같이 번역하고 있는 것. 물론 프로이트에 있어서는 이 두 단어의 번역이 라캉에게서만큼이나 '현격한' 차이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의 '섬세함'이랄까 '세심함'이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까.

9) 초현실주의는 자본주의를 벗어나고자 한다. 초현실주의는 예술이 상품이 되어버리는 부르주아적 예술 제도를 거부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초현실주의가 말하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다시 시장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방식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고 또 힘을 얻는다. 곧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의 시장성을 회의하고 거부하지만, 다시 거꾸로 그들의 예술은 지극히 부르주아적인 관념인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라는 형식과 이름에 기대고 있는 모습을 노출한다. 어떤 것이 '예술'이라고 말할 때 그러한 발화와 명명의 행위는 이른바 예술이라는 개념이 빚지고 있는 '자본주의적' 예술 제도를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 그러므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의 존재 진위를 의심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것들을 전제하고 또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적 예술관은 또한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페티시즘의 형태를 띠게 된다.

10) 페티시즘의 또 다른 축 하나. 아방가르드 예술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페티시즘적 성격을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아마도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페티시즘 분석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물신 숭배'에 대한 논의는 초현실주의가 쉽게 잊어버렸던, 그러나 그것이 예술이라면 결코 벗어날 수 없을 사회적인 장으로서의 교환 경제라는 심급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 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치환에 의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물건으로 된다. [...]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Fetischismus)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ㅡ 『자본론 I[上]』(김수행 옮김), 91-92쪽.

   

Karl Marx, Das Kapital. Erster Band. Marx Engels Werke Band 23
    Berlin: Karl Dietz, 1962. 
Karl Marx, Le capital. Livre I, sections 1 à 4(traduit par J. Roy), 
    Paris: Flammarion, 1985.

   

▷ 마르크스, 『 자본론 I[上]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1[1차 개역판].
▷ 맑스, 『 자본론 제 1권(1) 』, 백의, 1989.
*) 소장하고 있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베를린 디츠 출판사의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MEW)의 제 23, 24, 25권, 플라마리옹 출판사의 불역본(1권의 일부 번역, 알튀세르의 서문을 싣고 있다)과 김수행 선생의 국역본들, 그리고 조선노동당사에서 간행한 판본을 백의 출판사에 다시 펴낸 국역본들이다. 특히나 백의 출판사 국역본은 1989년에 내가 처음으로 구입했던 『자본론』이라 아직도 개인적으로 가장 큰 애착이 가는 책인데, 그 번역의 질은 지금 봐도 감탄을 연발케 한다. 또한 독일어 원문과의 비교 독해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책. 김수행 선생의 번역도 이 판본을 상당히 참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인용한 부분을 백의 출판사 판본의 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교해보시라(84-85쪽):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다만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으로, 그 물건들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도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물건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하는 데 있다. 이와 같은 전환(quid pro quo)에 의하여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감각적인 동시에 초감각적인 물건 즉 사회적인 물건으로 된다. [...]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붙으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 벤 파인, 알프레드 새드-필호, 『 마르크스의 자본론 』(박관석 옮김), 책갈피, 2006. 
Peter Osborne, How to Read Marx
    New York/London: Norton, 2006[American Edition].
*)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마르크스 또는 『자본론』에 관한 읽을 만한 (동시에 '가벼운') 개설서로는 위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피터 오스본의 책은 얼마 전에 국역본이 나온 것으로 아는데, 번역의 질은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11)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심급, 예술의 '제한 경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이란 개념은 그러므로 또한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물신(Fetisch)'이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보다 더 '건강한' 사회주의 예술이 될 수도 있었을 초현실주의 예술은 그것이 광인과 꿈의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예술 제도로부터 '초연'하려고 하면서부터 오히려 이러한 물신으로 '전락'한다. 초연한 척 눈을 가리는 것과 실제로 초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터. 초현실주의가 자신의 '순수한' 저항성을 통해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치부는 이러한 종류의 물신성의 개입, 기존의 부르주아적인 예술계를 탈피하려고 하면서도 다시금 그 울타리 안으로 포섭되고 편입될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다름 아닌 것.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I: écrits posthumes 1922-1940
    Paris: Gallimard, 1970.

12) 사실 이러한 물신 숭배의 기저에는 어떤 종류의 '신학적' 착각이 깔려 있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연적인' 사물을 마치 '신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오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물신 숭배의 기원에 대한 거부의 한 형식으로 '신성모독'이라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이가 바타이유(Bataille)이다. 먼저 바타이유는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적 정조를 지닐 수밖에 없는 유토피아주의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낭만주의란 기본적으로 '패배주의적' 정서를 띤 것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일종의 '낙관주의'를 통해서 가능했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바타이유에게서는 사라지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진보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는 '패배주의'가 낙관적인 낭만주의로서의 초현실주의를 오히려 '패배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게 되는 '신비적이고도 정치적인' 전도가 일어난다. 바타이유는 초기에 「D. A. F. 드 사드의 사용 가치 (1)(La valeur d'usage de D. A. F. de Sade (1))」라는 글에서 인간을 적응(appropriation)과 배설(excrétion)이라는 두 가지 충동의 대립 구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 사회적인 저항과 위반의 운동은 바로 배설이라는 충동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질론(hétérologie)은 세계에 대한 어떤 동질적인(homogène) 재현과도, 다시 말해서 어떤 철학적인 체계와도 대립되는 것이다. [...] 이를 통해 이질론은 적응의 도구였던 철학적 과정을 배설 작용에 봉사하는 것으로 이행시키고 사회적 존재가 내포하고 있는 격렬한 만족에의 요구를 드러내는 완전한 전복을 행하게 된다."
ㅡ 바타이유, 「사드의 사용 가치 (1)」, 전집 2권, pp. 62-63.

           

Georges Bataille, L'érotisme, Paris: Minuit(coll. "Arguments"), 1957.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X, Paris: Gallimard, 1987.
▷ 죠르쥬 바따이유, 『 에로티즘 』(조한경 옮김), 민음사, 1989.
*) 위의 두 판본은 이미 소개한 바 있고, 조한경의 바타이유 번역이 갖는 취약성 또한 두세 번 정도 강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젠가 직접 다시 번역하고픈 책 중의 하나. 

13) 바타이유가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계급적이고 사회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적 또는 인류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말하는 적응과 배설의 대립 구도가 단순히 순응과 저항이라고 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심급에서의 개념 틀이 아니라 오히려 에로스와 타나토스, 리비도와 죽음 충동이라는 프로이트적인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의 충동에 있어서 적응과 배설의 작용은 두 극을 이루는 것이며 그 둘의 공존과 순환에 의해서 전체 사회가 운용되고 또한 파악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바타이유가 자신의 일생 동안 끈질기게 추구했던 문제, 곧 성(聖)과 속(俗)의 관계, 혹은 신성한 것과 더러운 것의 근접성, 혹은 동질적인 것(l'homogène)과 이질적인 것(l'hétérogène) 사이의 '변증법'에 대응하는 또 다른 도식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바타이유가 "위반(transgr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운동은 인간의 한계와 금기를 극복하고 파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단지' 확인하고 가늠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오히려 위반의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한계에 대한 확인 과정, 금기의 '존재 증명', 불가능의 경계를 그리는 '작도법'에 있는 것일 터:
"위반은 금기의 부정이 아니라 금기를 통과하여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ㅡ 바타이유, 『에로티즘』, 미뉘판, p.71.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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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7-12-0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다다/쉬르레알리즘 선언> 저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어릴때(87년이면 제가 고1때네요.) 사서...거의 몇 페이지나 읽었나?...그냥 소장만 하고 있는 책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람혼 2007-12-04 01:18   좋아요 0 | URL
이네파벨님 반갑습니다.^^ 최근 들어 내공 높으신 고수 이웃분들을 계속 만나뵙게 되는 것 같아 정말 즐거운 마음입니다. 저도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격동의 87년에 고1을 보내셨으니, 한참 선배시군요.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