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뢰즈(Deleuze)는 니체(Nietzsche)의 철학에 관해 두 권의 '직접적인' 해설서를 남기고 있다. 프랑스 대학 출판부(PUF)에서 출간된 『니체와 철학』(1962)과 『니체』(1965)가 바로 그것. 이 중에서도 특히 『니체』는ㅡ들뢰즈가 생각하는ㅡ니체 철학의 주요 주제들을 아주 간략하고 명쾌하게 정리한 후 이와 관련된 니체 자신의 글들을 니체의 여러 저작에서 비교적 고루 선별하여ㅡ물론 불역(佛譯)으로ㅡ수록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니체 입문에 있어서는 건너뛸 수 없는 중요한 책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니체와 철학』은ㅡ물론 번역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ㅡ이미 1998년에 민음사에서 국역본이 간행된 바 있으므로(초판은 이데아 총서의 일환으로 출간되었던 것인데, 최근에는 '들뢰즈의 창'이라는 제목의 총서 하에 발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하에서는 『니체』의 주요 내용들을ㅡ특히 들뢰즈의 '해설'이 펼쳐지고 있는 2장을 중심으로ㅡ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 Gilles Deleuze, Nietzsche, Paris: PUF(coll. "Philosophes"), 1965.
▷ 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coll. "Quadrige"), 1962.
▷ 질 들뢰즈, 『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민음사(이데아 총서), 1998.

2) 들뢰즈는 먼저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서로 '평행'하는 두 개의 계열들을 추출해내고 있다(Nietzsche, p.17 참조, 이하에서는 쪽수만을 표시함): 1. 해석(interprétation)ㅡ의미(sens)ㅡ잠언(aphorisme)ㅡ의사/생리학자(médecin/physiologiste). 2. 평가(évaluation)ㅡ가치(valeur)ㅡ시(poème)ㅡ예술가(artiste).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기존 형이상학의 표면적 과제였던 '인식' 또는 '진리의 발견'을 '해석'과 '평가'로 대체한다. 두 계열의 첫 번째 항들은 바로 이 점을 나타내고 있다. 해석은 의미를 결정하는 작용이고, 다시 그 의미들의 위계와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평가라는 작용이다(두 계열의 두 번째 항들).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회가 취하는 서술 전략이 바로 잠언과 시가 되는 것이다(두 계열의 세 번째 항들). 들뢰즈는 니체 철학을 기존 철학들과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이러한 형식적 차이가 이미 "철학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구상(une nouvelle conception de la philosophie)"이며 동시에 "사유하는 자와 사유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une nouvelle image du penseur et de la pensée)"를 함유하고 있다고 본다(p.17). 이때 잠언은 해석의 기술임과 동시에 해석의 대상이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시는 평가의 기술임과 동시에 평가의 대상이기도 하다. 해석자로서의 철학자는 현상을 하나의 징후 또는 증상(symptôme)으로 파악하여 그에 대해 진단을 내리는 '의사'이자 '생리학자'이며, 그 의사의 언어가 바로 잠언이다. 또한 평가자로서의 철학자는 '관점들(perspectives)'을 창조하고 기존의 가치들을 비판하는 '예술가'이며, 그 예술가의 언어가 바로 시인 것이다(두 계열의 네 번째 항들). 따라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니체가 요구했던 '미래의 철학자상'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는 예술가이자 의사이다ㅡ한 마디로, 입법자(législateur)인 것이다."(p.17)


   

▷ Gilles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Paris: Minuit(coll. "Arguments"), 1967.
▷ Gilles Deleuze, Critique et clinique, Paris: Minuit(coll. "Paradoxe"), 1993.


           

▷ Gilles Deleuze, Masochism(trans. by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89.
▷ 질 들뢰즈, 『 매저키즘 』(이강훈 옮김), 인간사랑, 1996.
▷ 질 들뢰즈, 『 비평과 진단 』(김현수 옮김), 인간사랑, 2000.


3) 앞서 네 개의 항을 갖는 두 계열들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이러한 두 계열에 마지막 다섯 번째 항이라 할 것을 개인적으로 덧붙여보자면, 그것은 진단(clinique)과 비판(critique)의 쌍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철학에 관한 이러한 방식의 규정은 들뢰즈가 비교적 초기의 저작에서부터(예를 들면, 『자허-마조흐 소개』의 서문(avant-propos), 특히 p.11을 보라) 말년의 저작에 이르기까지(다시 한 번 예를 들면, 『비판과 진단』을 보라, 이 책이 지닌 내용과 편제에도 불구하고 'critique'를 굳이 내가 '비평'이 아니라 '비판'이라고 번역하고 싶은 것은 칸트 혹은 마르크스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데) 일관되게 견지한 입장으로서, 이는 철학이 지닐 수 있는 두 가지의 의미, 곧 의학적(혹은 심리학적) 또는 생리학적 의미, 그리고 문학적 또는 비판적 의미에 관한 니체의 사유에서 영향 받은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자허-마조흐 소개』는 자허-마조흐의 작품 「모피를 입은 비너스(Venus im Pelz)」의 불역본과 들뢰즈의 해설을 함께 담은 책으로, 국내에는 '매저키즘'이라는 제목으로 1996년에 번역본이 나온 바 있는데 번역의 질은 그리 좋지 못하다. 1989년에 출간된 영역본도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긴 하지만, 번역된 것을 읽으려면 오히려 이 영역본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11년만에 같은 번역자, 같은 출판사로 올해 국역본의 재판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판본이 '개역판'인지는 아직 개인적으로 확인해보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문득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정겨운' 사실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 <Venus in Furs>가 바로 이 자허-마조흐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래라는 것. 한때는 정말 '구토가 나올 정도로' 지독히도 애청했었는데... 독자들 중에서는 벌써 이들의 음악과 함께 했던 추억에 입맛을 다시는 이들도 있으리라. 번쩍, 번쩍, 번쩍, 빛나는, 저 차갑도록 매력적인, 가죽 부츠와 함께 말이다.


▷ "Shiny, shiny, shiny boots of leather..." ㅡ Velvet Underground, <Venus in Furs> 中.


4) 들뢰즈는 "입법자로서의 철학자가 지닌 두 개의 덕목들(vertus)"에 대해 말하고 있다(p.19). 니체에 따르면, 그 하나는 "기존에 있던 모든 가치들에 대한 비판"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비판된 가치들 이후에 다시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다(p.19). 니체는 철학이 이미 소크라테스 때부터 어떤 "타락/퇴화(dégénérescence)"의 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p.20). 왜냐하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 본질과 외관, 참과 거짓, 지성과 감성 등의 이항대립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야말로 바로 그 "형이상학을 발명한(invente la métaphysique)" 사람이기 때문이다(p.21). 이로부터 삶에 우선하는, 삶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갖는 가치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진, 선, 미, 신성(神性) 등등. 따라서 인간의 삶은 그러한 가치에 종속된 수동적인 것이 되며 "스스로 가치 폄하하게(se déprécier)" 되었다는 것. 칸트 역시 인식의 오류나 도덕적 오류들을 규탄했지만 인식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이상 그 자체, 도덕성(moralité) 그 자체, 그 가치들의 기원과 본질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또한 니체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물론 이러한 평가는 칸트에 대한 일면의, 부당한 평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마도 잘 알고 있을 테지만). 니체에게 있어서, 헤겔의 변증법도, 종교개혁 이후의 종교도, 상황은 같다. 그래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미래의 철학자, 곧 의사로서의 철학자(philosophe-médecin)는 동일한 악(mal)이 여러 다른 증상의 형태를 띠고 계속되고 있음을 진단하게 될 것이다."(p.22) 이러한 타락의 선이 비단 철학에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타락은 또한 가장 일반적인 생성 전반과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끈질긴 것이다. 니체는 이로부터 '반시대적 고찰'의 필요성을 끌어내고 있는 것. 이에 대해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철학은, 미래의 철학은, 영원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인 것도 아니다: 철학은 시의적절하지 못한(intempestive) 것이 되어야 하며 항상 그래야 한다."(p.23)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unzeitgemäß/intempestif'는 통상적으로 '반시대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곤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때를 잘못 맞춘', '시대에 맞지 않는'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다. 곧 이는 '일부러' 시의성을 포기한다는 것, '의도적으로' 시의성을 거스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점은 사실 간과되기 쉬운 '디테일'이지만 분명 곱씹고 되새겨봐야 할 '번역어'의 중요한 문제라는 개인적인 생각 한 자락.

5) 들뢰즈는 이른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volonté de puissance)'라고 하는 니체의 개념에 대해 흔히 일어나곤 하는 오해를 먼저 경계하고 있다. 들뢰즈가 보기에 의지는 "힘이 힘과 맺고 있는 관계(rapport de la force avec la force)"에 다름 아니다(p.24).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désir de dominer)"으로 이해하는 것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가치들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p.24 참조).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란 무언가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부여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의지가 원하는 것이 힘이 아니라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ce qui veut dans la volonté)"이 바로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p.24). "하나의 힘이 명령을 하는 것도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하나의 힘이 복종하는 것 또한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p.24) 여기서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가 갖는 두 가지 성질, 곧 긍정(affirmation)과 부정(négation) 사이의 전도를 말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는 능동적인 힘들을 긍정하는 것이며 이때 긍정은 으뜸가는 첫 번째 가치가 된다. 여기서 부정이란 단지 긍정의 향유(jouissance)에 부속되는 여분, 하나의 결과일 뿐인 것이 된다. 반대로 수동적인 힘들에게 있어서는 부정이 첫 번째 가치가 된다. 긍정과 부정에 대한 니체의 이러한 생각은 단순한 이원론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긍정이란 그 자체가 다수적이고(multiple) 복수적인(pluraliste) 것이기 때문이다. 긍정은 그렇게 복수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이며, 이에 발맞춰 부정은 하나 되기를 부정하는 것, 곧 일원적이며 단수적인 사유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6) 니체가 "허무주의(Nihilismus/nihilisme)"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긍정의 힘에 반대되는 수동적인 힘과 부정의 의지가 승리하게 되는 현상이다(pp.25-26 참조). 약자 또는 노예가 승리하는 것은 힘의 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전염(contagion)의 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힘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전염의 결과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타락/퇴화"인 것이다. 여기서 강자와 약자, 주인과 노예를 단순히 역사적인 계급 대립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문이다. 이것은 "질적 유형학(typologie qualitative)"의 문제(p.27), 곧 고귀함과 천함이라는 성질의 구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승리가 뜻하는 것은 바로 힘에의 의지가 창조하기(créer)를 멈추고 단지 의미하기(signifier)만을 행한다는 것(여기서 들뢰즈는, 니체를, 저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저자로서의 마르크스와, 또한 접속시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곧 지배하기를 욕망하고 돈, 명예, 권력 등의 기존 가치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역설적이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약자들에 대해서 강자들을 보호해야 한다."(p.27) '교조적' 혹은 '인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아마도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을 터.


7) 이어 들뢰즈는 이른바 "니체적 심리학(psychologie nietzschéenne)"이 이뤄낸 몇 가지 '위대한' 발견들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식화하고 있다: 1. 원한(le ressentiment) ㅡ 이것은 "네 탓이야(c'est ta faute)"라고 말하는 심리 상태. 심리학적으로 투사(projection)의 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곧, 약자가 자신의 불행이 강자의 행동(action)에 있다고 보고 행동 그 자체를 수치로 여기고 능동적인 모든 것에 반기를 들며 따라서 삶 자체를 죄악시하게까지 되는 수동적인 상태를 말한다. 2. 양심의 가책(la mauvaise conscience) ㅡ 이제 "내 탓이오(c'est ma faute)"라고 말하는 단계. 심리학적으로는 내사(introjection)의 기제라고 하겠다. 수동적인 힘이 자기 자신을 응시하며 어떤 잘못을 자신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는 단계이다. '원죄' 또한 이러한 작용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리의 '전염'이 수동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금욕주의적 이상(l'idéal ascétique) ㅡ 이제 심리학적으로 승화(sublimation)의 단계가 오게 된다. 수동적이고 나약한 삶을 원하는 것이 이제는 궁극적으로 삶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곧 무(無)에의 의지가 되어버린다. 삶에 우선하고 반대되는 경건한 가치들을 세우고 그러한 가치들을 통해 삶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다(우리는 이러한 비판의 모티브를 또한 기독교에 대한 바타이유의 비판 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단계는 "무로서의 신(Dieu-Néant)"과 "수동적 인간(Homme-Réactif)"의 결합으로 표현되고 있다(p.29). 따라서 인간은 '우월한' 가치들이 부과하는 짐을 짊어지고 가는 짐꾼이자 노예 같은 존재가 된다. 삶 그 자체가 짊어지기 힘든 부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이전 단계들에서 탄생하게 되는 이러한 사유의 범주들이 바로 자아, 세계, 신, 인과성, 목적성 따위라는 것이다. 4. 신의 죽음(la mort de Dieu) ㅡ 이제 회복(récupération)의 순간이 온다. 말하자면, 인간이 신을 죽이고 새로운 짐을 떠안는 단계.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며 그리하여 결국 자신이 신을 대체하고자 한다. 니체의 생각은 이렇다. 곧, 신의 죽음 그 자체는 분명 거대하고 중요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허무주의는 계속되며 실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우월한 가치들이라는 미명 하에 삶의 자기 비하와 부정이 계속되는 것이다. 단지, 우월한 가치들이 이제는 인간적인ㅡ저 유명한, '너무나 인간적인'ㅡ가치들의 모습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도덕이 종교를 대체하고 유용성, 진보, 역사 등의 개념이 이전의 신적인 개념들을 대체하는 식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노예가 "신적인 가치들의 그늘 아래에서(á l'ombre des valeurs divines)" 승리를 구가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인간적인 가치들을 통해서(par les valeurs humaines)" 승리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p.30 참조). 인간은 신을 대체함으로써 현실(la Réalité)로 복귀하고 긍정의 의미를 회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때의 긍정이란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듯 단지 "당나귀의 긍정(Oui de l'Âne)"일 뿐이라는 것이다(p.31). 5. 마지막으로, 마지막 인간(le dernier homme), 그리고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l'homme qui veut périr)의 단계 ㅡ 마지막으로 종말(fin)의 순간이 온다. 허무주의의 절정에 선 마지막 인간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인간이다: "무를 의지하기보다는 차라리 의지를 없애는 것이 낫다(Plutôt un néant de volonté qu'une volonté de néant)!"(p.32) 이 마지막 인간을 넘어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허무주의는 완성되며 또한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자정(Minuit)"의 시간이다(하지만 이 '도정'과 '완성'의 주제는, 그 자체로 얼마나 '헤겔적'인가). 니체의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제 "변화(transmutation)"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것. 덧붙여, 이러한 '니체적 심리학'에 대한 들뢰즈의 정식화가 탁월하면서도 섬세한 부분은ㅡ바로 '니체적 심리학'이란 용어의 사용에서도 드러나듯이ㅡ이렇듯 니체 철학의 주요 논점들과 심리학의 개념어들을 성공적으로 밀착시키고 있는 그의 이론적 기민함에 있다는 생각 한 자락.

8) 모든 가치의 변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힘들이 능동적이 되는 것[힘들의 능동적인 생성](un devenir actif des forces)", 그리고 "힘에의 의지 안에서 긍정이 승리하는 것(un triomphe de l'affirmation dans la volonté de puissance)"이 바로 그것이다(p.32). 이제 부정은 긍정의 힘이 갖는 공격성(aggressivité)이라는 의미, 곧 창조 행위에 수반되는 총체적인 비판 작용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차라투스트라에 이르러 부정은 수동적인 무가 아니라 하나의 행동(action)이 되며 긍정하고 창조하는 것을 위해 봉사하는 심급으로 기능하게 된다. 들뢰즈는 이를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의 긍정은 당나귀의 긍정에 대립되며, 이는 창조하는(créer) 일이 짐을 짊어지는(porter) 일에 대립되는 것과 같다."(p.33) 결국 모든 가치의 변화란 이러한 긍정-부정 관계의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들뢰즈가 니체의 옷을 입고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변화와 전도가 허무주의의 도래에 의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부정이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이 되고 긍정을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마지막 인간과 사라지기를 원하는 인간을 거쳐야만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니체의 유명한 정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 "허무주의는 극복되었지만, 그것은 그 자체를 통해 극복된 것(le nihilisme vaincu, mais vaincu par lui-même)."(p.33) 

9) 하지만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긍정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Mais qu'est-ce qui est affirmé)?" 여러 가능한 답변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대답이 존재(l'Être)는 아니다. 형이상학의 전체 역사 속에서 존재는 무엇보다 "무(Néant)와 마치 형제처럼 닮아 있기"(p.33) 때문이다. 오히려 긍정되는 것은 복수성과 다수성, 그리고 생성(devenir)이라고 할 수 있다. 형이상학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종착지로서의 허무주의는 생성을 제거해야 할 것으로, 곧 존재 안으로 용해하고 포섭해야 할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 복수성과 다수성은 부당한 어떤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일자(l'Un)에게 통합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생성과 다수성은 유죄(coupables)"인 것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니체의 변화와 전도가 지닌 네 가지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pp.34-40 참조): 1. 니체는 다수성과 생성을 최상의 힘을 지닌 것으로 승격시킨다. 2. 니체가 말하는 긍정은 긍정에 대한 긍정, 곧 이중 긍정의 모습을 띤다. 3. 일자는 다수성 속의 일자가 되며 존재는 생성의 한 양태가 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일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수성과 복수성뿐이며,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성뿐이다. 4. 니체가 말하는 변화는 초인(Übermensch/surhomme)의 존재를 포함하고 또 요청하고 있다.

10)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영원 회귀가 똑 같은 것의 반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니체의 비밀, 그것은 영원 회귀가 선택적(sélectif)이라는 것이며, 그것도 이중적으로 선택적이라는 것이다."(p.37) 이는 사유와 존재의 양태 측면에서 모두 선택적이라는 말이다. 이 중 특히 존재의 측면에서 영원 회귀가 갖는 선택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는 바퀴(roue)의 비유를 들고 있다. "바퀴의 운동은 원심력을 띠며 모든 부정적인 것을 [밖으로] 쫓아낸다. 존재는 생성을 긍정하기에 그러한 긍정에 대립하는 모든 것, 허무주의와 수동성의 모든 형식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제거한다."(p.38) 들뢰즈는 이를 정리하여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한다: "영원 회귀는 반복(Répétition)이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하는 반복이며 구원하는 반복이다."(p.40)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네 가지 주의사항을 환기하며 글을 맺는다(p.41). 첫째, 힘에의 의지를 단순히 지배하려는 욕망이나 힘에 대한 갈망으로 이해하지 말 것. 둘째, 니체가 사용한 약자와 강자라는 용어를 사회 체제의 권력에 대입하지 말 것. 셋 째, 영원 회귀를 고대 그리스나 인도 또는 바빌론에서 발견되는 시간에 관한 순환적 사유로 이해하지 말 것, 또는 영원 회귀를 똑 같은 것의 회귀, 똑 같은 것으로의 회귀로 이해하지 말 것. 넷째, 니체의 말년 작품들을 광기의 결과로 파악하지 말 것.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들뢰즈는 니체에 관한 많은 오해들을 제거하여 그를 독립적으로 독창적인 하나의 온전한 철학자로 위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의 『니체』가 지닌 '1960년대적' 목표였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목표는 현재, 어쩌면 이미 '초과하여' 달성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 Friedrich Nietzsche, Sä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änden
    Berlin/New York: Walter de Gruyter, 1988[2. Aufl.].

11) 내가 소장하고 있는 니체 전집은 발터 데 그루이터(Walter de Gruyter) 출판사에서 간행된 15권짜리 학습판(Studienausgabe)이다. 물론 이는 온전한 '전집'은 아니다. 현재까지 니체 전집은 역시나 데 그루이터 출판사에서 계속 간행되고 있으며 여전히 아직도 채 완간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따라서 얼마 전 책세상 출판사를 통해 선보인 국역본 니체 전집 역시 사실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전집'은 아닌데, 이는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간행된 프로이트 전집이 역시나 온전한 의미에서의 '전집'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하지만 이 학습판은 사실상의 '니체 전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콜리(Colli)와 몬티나리(Montinari)가 편집했으며, 초기의 문헌학 관련 저술 등 극히 일부의 저술만을 제외하고는 유고들까지 포함하여 니체의 철학적 저작들 모두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학습판은ㅡ시대순 프로이트 전집판에 기초하여 편집/간행된 피셔(Fischer) 출판사의 프로이트 학습판 또한 그러하지만ㅡ본래의 니체 전집에 비해 책의 크기가 작고 휴대가 간편하며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여간 쓸모가 있는 게 아니다. 일독을 권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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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7-22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번역도 되지 않은 책을 소개해주셨군요. 잘봤습니다.^^
한가지 질문드리자면 위에서 소개해주신 <니체>라는 저작과 <니체와 철학>간에는 어떤 내용상의 차이점이 있는지요. 그리고 위에서 소개해주신 두 계열중 첫째 계열에 나오는 의사/생리학자라는 비유는 철학에 대한 진단을 내리는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진단이라는 것이 뒤에 나오는 예술가의 평가(비판)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그리고 그 "진단(해석)"과 "평가(비판)"이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인식"과 "진리의 발견"과는 또 어떻게 다른 것인지. 또 그를 현대의 최고의 형이상학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으로(이정우씨의 경우)아는데 그럴 경우 또 어떤점에서 전통형이상학과 같은 계열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초면에 너무 복잡한 질문을 드리는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람혼 2007-07-23 0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격적인 저작으로는 <니체와 철학>이 들뢰즈가 바라보는 니체 철학에 대한 보다 정치하고 상세한 '해설'을 담고 있고, <니체>는 '대학교재' 형식의 축약판 내지는 작은 앤솔로지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말씀해주신 문제들에 관해서는 제가 정치하고 자세하게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은 되지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드는 생각은 '지평의 차이'에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인식'과 '진리의 발견'을 '해석(진단)'과 '평가(비판)'로 대체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 아마도 니체의 '관점주의'가 개입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말하자면 '절대성'을 '상대성'으로 치환했다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성' 또는 '외관상의' 순수성을 일종의 '정치성'으로 치환했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 아마도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모토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yoonta 2007-07-2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무슨 이야긴지 불분명했던 구절들이 보다 또렷해지는 느낌이 드는군요.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아 그리고보니 위에서 소개해주신 <니체>가 이번에 박찬국씨 번역으로 출간된것 같네요. (들뢰즈의)니체이해를 위해서는 아마도 이 책이 <니체와 철학>보다 더 먼저 독해되어야 할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람혼 2007-07-2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야 번역되는군요.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순서의 독서 방법도 [들뢰즈의] 니체 이해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