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아이님의 댓글에서 힌트를 얻어 잊어버리기 전에 급히 쓴다.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생각과 주위에 잡히는 책 몇 권을 사례로 들다보니 소설이나 가벼운 글보다는 주로 딱딱한 글을 쓰는 저자들을 위주로 분류한 것이 이 페이퍼의 한계다. (소설을 워낙 안읽다보니 국내 소설가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소개하는지조차 모르겠다.) 나머지 유형 분류과 이 글에 대한 사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많은 댓글을 바람.

1. 기본적인 유형으로 이력을 소개하시는 분들.

많은 책에서 이러한 소개를 사용한다. 주로 교재로 쓰이는 딱딱한 글들을 쓰는 저자들이 이런 경우에 속한다. 딱딱한 글에서 딱딱한 저자 소개는 당연한 것이겠지만.

<출신 지역과 생년월일, 출신 학교, 현재 하고 있는 일, 맡고 있는 직책, 지금까지 출판한 책 이름 나열>

한 책의 저자 소개가 다른 책의 역자 소개보다 훨씬 부실한 경우에는 저자의 책에 대한 애정도를 의심하기도 한다. 내 주위의 어느 선생도 출판 일정에 맞춰 급조해서 만든 조잡한 책을 내다보니 쪽팔려서 어쩔 수 없이 대충 학력만 써서 제출했다고 증언했다. 애정도 없는데 뭐 그리 자신을 소개하고 싶을까? 드물지만 머리말 부분에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쓰느라 저자의 약력을 등한시 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야말로 '정석'이라고 생각하시는 부류도 있지 않을까. 이들은 의도적으로 이런 형식의 자기 소개를 할 것이다. 물론 추측이다. 추측이 맞다면 주로 학자들이 이런 방식을 고집할꺼다. 자신의 학력과 지금까지 출판한 책의 제목이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시고 이 유형을 고수하신다면 우리야 할 말이 없다. 글의 내용과 상관없이 사적인 경력을 늘어 놓는 것은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물며 저자 소개에 주저리 주저리 자신의 이야기를 써놓는다면, 혀를 쯧쯧찰 것이 분명하다.

2. 자신의 이력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쓰는 분들

지금 맡고 있는 또는 예전에 맡았던 (보도 듣도 못한 이상한) 직책을 적어도 10개 이상씩 저자 소개에서 밝히는 부류이다. 특히나 정치와 관련된 사람은 (현) .... 대표, (전) .... 회장 이런 식의 직책 나열이 셀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이건 학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괜찮은 학자일지라도 선거 직전에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책을 내는 경우에는 자신의 이력을 적느라 책의 속지 한장이 모자랄 정도다. 사람 됨됨이와 별 상관없이 정치판에 뛰어들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책을 낸다면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내가 제법 존경하는 어느 분도 현실 정치판에 입문하려니 이런 소개가 담긴 책을 급히 출판하시더라. 주위 친분있는 사람들이 모여 허허 하고 웃으며 그 책을 비판했지. 허허, 그런 책일수록 내용도 2프로 부족하다는 것은 그 분도 인정하고, 여러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정년퇴임할 때 내는 기념논문집은 부담스런 약력의 압권이다.  대부분 하드커버인 기념논문집의 첫 페이지엔 영정사진으로 쓰여도 될만큼 인자한 모습의 그 분 사진이 떡하니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는 약력 소개. 전현직 맡으셨던 직책은 모두 적어 놓으셨다. 그리고 하찮은 학회지일지라도 기고된 글이 있다면 빠짐없이 소개를 한다. 아참, 그리고 그 책에서는 사모님이나 자녀분들의 이름을 한자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경우도 많다. 운이 좋다면 자녀들의 직업이나 지금 다니는 대학명까지도 알 수 있다. 물론 좋은 직장, 좋은 학교에 다닐 경우 그러하다.

3. 자신이 나온 학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분들

이런 유형은 딱히 한 부류로 나눌 수는 없다.

먼저, 학벌을 의도적으로 숨기는 경우가 있다. 학벌주의를 비판하는 한 교수는 자신의 이력을 이렇게 썼다. "A대학을 졸업하고 B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를, 독일의 쾰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외국의 대학을 졸업한 것만 밝힌 것으로 봐서, 자신의 학벌주의 저서를 쓰는데 있어 국내 특정 대학 출신이라는 것을 굳이 알리기 싫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분들은 명문대학을 졸업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신의 출신학교를 밝히는 것이 독자들이 글을 객관적으로 읽는데 조금이라도 방해요소가 되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자신이 그 명문대학 출신이라는 것이 부끄러워 일부러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그 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 부끄럽다기보다는 지금 그 대학(또는 대학 출신 사회 고위층)이 사회에서 해야 하는 역할들을 충분히 못하고 있다고, 오히려 편가르고 사회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출신 대학을 일부러 밝히지 않는 것 아닐까? 출신 대학들을 숭배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항의 표시다. 일부 여성운동주의자들이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의미로 아버지, 어머니 성을 같이 쓰는 운동을 전개하듯이, 이런 분들은 자신의 학력을 쓰지 않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학벌사회에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

임용고시용 수험서, 특히 교육학 수험서의 저자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의외로 교육학 저자는 교육학과를 나오지 않은 분들이 태반이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학벌이 그리 좋지 않은 분들이 많다. 그래서 자신이 나온 대학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수험생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수험생들은 강사의 실력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학벌도 신경쓰기 마련이니깐. 그리고 이 분들은 학벌 세탁을 시도한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세탁이란 거북스러운 단어를 쓰는 이유는? 그건 공부를 목적으로 대학원에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졸업장을 위해서 대학원에 간다. 대학원공부와 임용고시 공부는 같은 과목이라 해도 엄연히 다르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수험서에 써있는 최종학력은 OO대 대학원이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책을 쓰는데 있어서 저자의 학력을 반드시 밝힐 필요는 없다. 멋들어지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 그가 명문대 출신이거나 중졸이라도 독자들이 받는 감동은 같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또, 한 사람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데 출신학교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법이 없다. 어떤 이의 경험에서 출신학교는 인생을 좌우할만큼 크게 작용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에게 그가 다닌 학교의 의미는 진짜 미미할 수도 있으니깐. 물론, 학자들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력을 쓰는 것은 조금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학자가 자신의 출신 대학이 자신에게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4. 저자 소개도 또 하나의 글쓰기다. 솔직하고 담백하게 자신을 짧은 글로 표현하는 분들.

주로 신진 학자들의 저서에서 보이는 방식이다. 저자 소개가 문장으로 이어져 있으며, 뼈있는 수식어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저자 소개만으로 그 저자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주로 씨름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를테면 "입시는 전쟁이다 라는 구호를 아침저녁으로 주입받으며", "회색빛 병영생활", "한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라는 문장을 통해 그의 생각의 근원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책세상 문고의 경우 이런 저자 약력쓰기를 주도한다. 이미 이런 식의 약력 소개가 책세상문고의 문화가 되었다. 소설가나 다른 저자들에게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는 형식인지는 몰라도 학자들의 책에서 이런 소개를 받는 경향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저자 소개가 되어 있는 책은 그 내용이 상대적으로 소프트(영어 써서 죄송~)하여 읽기 쉽거나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을 담는 경우가 많다. 또는 아주 새로운 시각으로 기존의 판을 깨고 싶어하는 진취적인 선각자들이겠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식의 저자 소개를 경박스럽다고 말하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이나 이런 방식이 멋져 보이지는 않는다.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말도 안되는 책을 쓰는데 저자 소개 화려한 문장으로 멋지구리구리하게 한들 그 소개가 좋아 보일까? 역시 책은 내용으로 승부하는거다.

5. 누구인지 사전 정보를 전혀 주지 않는 분들.

90년대 하이텔과 같은 온라인에서 활약했던 듀나(DJUNA) 같은 사람들. 이 사람이 도대체 남자인지 여자인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집단 창작의 결과물일 뿐인지, 혹시 유명한 사람의 필명은 아닌지. 지금까지 몇 년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지만 아직 나는 이 사람의 실체를 모른다. 그렇게 멋진 글들을 쓰면서 얼굴이나 이름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굴 들이대기 좋아하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듀나는 얼굴이 너무 잘생겼거나 못생겼거나, 전과를 가지고 있거나, 너무 염세적이거나(글은 그렇지 않다), 너무나 겸손한 것은 아닐까? 아님 진짜 유명한 사람이거나,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전략일 수도 있다. 씨네 21을 비롯한 몇몇 편집자들은 그의 정체를 알까? 모를까? 누구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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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11-03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듀나.. 음. 한번도 궁금해본적 없는데, 서림님의 글을 읽고 나니, 역시.. 안 궁금한데요? -_-a

paviana 2005-11-03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전 듀나라는 분이 여자분이라고 혼자 생각했는데, 님의 말을 들으니 내가 왜 그사람을 여자라고 생각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저도 궁금해지네요.

엔리꼬 2005-11-03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스하이드님.. 놀라운 반전이.. 크헉.
paviana님.. 음.. 저도 듀나가 여자분일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초창기 제 서재를 보고 저를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하신 분도 많다는 것을 생각해주세용 용 용 ~~~

페일레스 2005-11-03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JUNA는 이영수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초기 하이텔에서 활동할 때는 그의 오빠를 비롯한 몇 명의 공동 필명이었지만 지금은 혼자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 써놓고 보니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네요. -_-;

진주 2005-11-0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조마조...저도 서림님이 저더러 누님이라고 불러서 남잔줄 알아봤으니...켁~)

흠...저는요...기본형이 좋아요. 짤막하면서도 할 건 다하고, 또 튀지도 않고...약력에서 튀고 싶은 건 그만큼 책 내용이 자신없다는 것 같아서...저는 본질에 충실한게 좋아요. 본질-우리가 책 읽는 가장 근원적인 목표는 책의 내용에 있지 않겠어요?^^;

가시장미 2005-11-0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런 것을 분석하시다니.. 대단하세요!! ㅋㅋ ^-^

엔리꼬 2005-11-03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일레스님.. 아, 그러고보니 이영수란 이름이 어렴풋이 생각나네요.. 잊었나봐요.. 호호 그래도 저는 아직도 궁금한데요? 듀나, 널 보여다오.
진주누님 ... 음.. 진주님은 튀기를 싫어하시는 TK 보수층이시군요. 히히.. 약력에서 튀고 싶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리면 그 책을 쓰게 된 배경이라든지 그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시장미님.. 분석이라뇨, 그냥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갑자기 주저리 주저리 옮긴 것에 불과해요.

엔리꼬 2005-11-03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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