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일련의 과정들이 내가 나에게 내리는 하나의 테스트였다는 걸 낮은 첼로음을 듣다가 스스로 알았다. 사가와 치카를 조금 더 읽었다. 여름이 끝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왜 여름이 시작되고 여름이 끝나는 걸 두려워했을까. 가을을 맞이하고난 후에야 알았다. 왜 그렇게 불안에 떨었는지를. 왜 그토록 밀어내지 못해서 난리법석을 떨었는지를. 왜 버리라고 소리 소리를 질러댔는지를. 왜 그 지랄 발광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일련의 테스트라는 걸 그 누구도 말한 적은 없지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걸 한 사람 탓으로 돌리고 싶어 했다는 걸. 한 사람이 곁에 없기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온갖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걸 알았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한참 전부터 시작되는 거겠지만. 아침 무리하지 않고 스트레칭을 하고 조카들 데리러 이동. 민이는 간만에 수학 문제 풀다가 새벽 두 시 넘어 잠들었다. 조카들 데려와 집에 당도하면 그때쯤 일어날듯. 늦은 밤 디카페인인 줄 알고 마신 에스프레소는 카페인이 잔뜩 들어있는 거였다. 일어났다가 다시 잤다가 일어났다가 그러는 동안 계속 웃음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고양이가 품에 안겨 계속 그르렁거린다. 우리가 한데 다리를 겹쳐 잠든 그 수많은 밤들, 네 털뭉치가 내 맨발에 닿지 않을 날이 오면 나는 절망에 빠져 온몸의 털을 뽑고 싶을 정도로 광분하게 될 텐데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알아들은 것 마냥 내 배 위에 올라와 그 거대한 덩치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맡길 때 또 웃음이 일어났다. 슬픔을 앞당겨 가불받지 말자. 어떤 형식으로든지 온전하게 머물러 있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을 떠나고 있다는 걸 아는 동안, 솔직히 이러한 모든 것까지 내다본 건 내 마음이었다. 언제 올 거야? 내게? 라고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는 그에게 물었다, 나 혼자서. 아마 내게는 그게 시작점이었던 거 같다. 그걸 후회하겠다는 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 삶의 요소가 되리라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마음이론 안에 깃들어있는 그 보편성이 진리일 수도 있겠다. 내가 원하는 건 그 이론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진리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 헤글에 맞춰서 나를 맞출 생각이 없다는 거다. 내 마음이 그러하고 우리 관계가 그러하고 그러한 것들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그런 거 혹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그런 거. 물론 그럴 수 있다. 그걸 거부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그 마음. 시간이 흘러서 나중에 이불킥을 찰 정도로 부끄럽게 여겨질지라도 지금은 이걸 따라가보자.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가을이 오면 따뜻한 옷감으로 된 싸구려옷을 걸치고 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일종의 고행이었다. 지금은? 가봐야 알겠지. 그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면 된 거다. 바라는 게 지금으로서는 그거니까. 루시드폴을 들으면서 선크림을 바르고 있다. 어떤 것들을 읽어야 할지 대략 감 잡아가는 중. 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해야 하는가. 두려움을 억지로 주입시키는 것 또한 하나의 길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왜 내가 그 두려움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왜 우리들이 바보들의 배에 탑승하기를 주저한다고 여기는가 말이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매일 마주하면서도 좋았던 그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그때도 그러했고 지금도 나의 그 말을 기억하는 후배가 신기하기만 했다. 8년이 훌쩍 흘렀고 8년이 마치 어제였던 것 마냥 서로 마주하자마자 덥석 서로를 끌어안으면서 8년의 시간을 먼지로 만드는 모션이 지닌 것들. 누나 정확히 15키로 빠졌어, 라고 해서 어떻게 알았어? 놀라서 물어보니 나 패션 전공한 남자야. 왜 이래. 그래서 또 웃었다. 이것도 알고리즘인가 싶었다. 우연에 우연을 겹쳐놓으면 그것이 알고리즘화된다는 걸 마치 운명처럼 믿는 거 같기도 해서. 한때나마 공통분모였던 이들의 안부를 서로 주고받고. 그 말이 지닌 힘 안에서 또. 민이는 내 후배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고 후배는 예의 바르게 가슴과 가슴이 닿지 않을 정도로 아이의 어깨를 안아주며 토닥거렸다. 우리 꼬꼬마 아가씨가 이렇게나 커버렸다니, 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고보니 얼마나 어렸고 어리석었는지 또 알았다. 8년 전만 해도 모든 것들을 다 해보겠다고 까불고 다녔구나. 겁대가리 상실하고. 지쳤는가? 설마. 관계의 본질을 따질 것도 없이 옭아매기 위해서 다가갔던 건가 물어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 언어가 나를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은 착각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과자와 과일을 먹고 있는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는 정신이 약간 나간 여자를 마주보면서 문장. 저 여자와 내가 다른 게 뭐가 그리 있을까 싶은. 커피는 식어가고 여자가 아이패드 속 화면을 바라보면서 가짜 웃음을 짓는 동안 내가 내 감정에 몰입해서 바로 보지 못했던 게 무엇이었더라 헤아리고 있다. 놓친 것들. 그 속눈썹들. 소중한 걸 놓칠뻔 했구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