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유형의 명시적인 반성적 의식에서 ‘우리는 자각의 명시적 대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각을 주시할 때 그 집중된 의식을 주의해서 의식한다.... 즉, 우리는 자기 몸에 대한 자신의 지각적 주시를 자기 의식적으로 자각한다. 몸을 명시적인 지향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더 미묘한 사전 반성적 자아 자각을 ‘수행적 자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몸 부분을 명시적 방식이 아니라 행위의 목표에 더 가까운 방식으로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하는감각‘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르그랑(Dorothée Legrand, 2007)은 전문 무용수의 수행적 자각 개념의 특징을 묘사한다. 르그랑에 따르면 무용수는 춤을 추면서 반성적으로 몸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몸을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 몸에 집중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오히려, 주체로서의 자신의 몸에 대한 무용수의 자각은 고양된 사전 반성적 자각이다. 전문성은 경험이나 행위를 단순한 지향적 대상으로 바꾸지 않고 사전반성적 자각의 수행적 특징을 자기 경험의 ‘앞에‘ 놓을 수 있다. 자신의운동 체계가 [고유감각적으로나 운동감각적으로] 올바르게 배열된 때가 언제인지를 느낄 수 있는‘, 타석에 들어선 크리켓 선수나 야구 선수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경우에 몸 이미지는 완전히 전경화되지 않더라도 다양한 전문화된 자각 형태에 의해 향상된다. - P88
우리는 병을 앓기도 하지만 밖에 있는 병이 몸으로 들어오거나 (병들다), 안에서 생긴 병이 밖으로 드러나기도 (병나다) 한다. 또 밖에 있는 병에 걸려 넘어지기도 (병 걸리다) 한다. 병을 앓는 것은 몸의 주체적 경험이지만 병이 들거나 나고 병에 걸린다고 말할 때 그 병은 객관적 실체가 된다. 이렇게 병은 객관적 대상이기도 하고 주관적 경험이기도 하다. ‘앓다‘라는 말은 ‘알프다‘, ‘알프다‘, ‘아프다‘로 변해 왔는데, 아픔을 뜻하는 ‘앎‘에 ‘ㅂ/브‘가 결합된 형태라고 한다. 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아프다‘, ‘슬프다‘, ‘고프다‘는 단일어 또는 파생어라고 한다. 몸이 아프고 배가 고프며 마음이 슬픈 것이 모두 실존에 부정적인 경험이고 그래서 그 기원이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말 ‘앓다‘에는 실존과 관련된 질병의 ‘의미‘가 담겨있다. 병을 앓는 것은, 몸 안에서 생기거나 밖에서 침입한 병을 ‘겪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그 병을 앓아가는 체험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반영된 말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병ㅎ다‘가 ‘앓다‘의 옛말이라고 하는데, 우리 조상들이 질병을 경험하는 방식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이었다는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여성의 월경 경험을 ‘몸하다‘라고 표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 P102
행화적 접근법(enactive approach)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것은 한 마디로 "걸으면서 길을 내기"이다. 신경계는 단순한 정보처리 장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미를 창조하고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조절하는 살아있는 체계다. 마음은 지각과 행위의 반복되는 감각과 운동의 패턴에서 솟아오른다. 맛있는 음식에 기쁜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것을 보고 냄새 맡고 맛을 본 경험의 패턴이 몸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몸과 환경은 감각과 운동의 쌍 결합으로 공동체가 된다. 몸의 지각은 환경의 수용이고 행위는 환경에 개입하는 능동이지만, 여기서 능동과 수동은 관점의 문제일 뿐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그렇게 몸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환경과 경혐의 시공간이 몸 크로노토프다. - P114
이미 몸속에 들어와 자리 잡은 수십억 년 진화의 시간, 세포와 조직 속을 걷는 분초단위의 시간, 그리고 삶의 경로를 만들면서 걸어가는 수십 년 생애의 시간은 몸이라는 공간 그리고 몸과 쌍으로 결합한 환경과 얽히고설키면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간다. 생명의 진화는 우리 몸속에 욕망과 감정의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생존과 생식이라는 지향이 만든 것이다. 인간은 큰 전두엽이라는 기관을 진화시켜 이성의 힘으로 그 지향에 거스를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그러므로 욕망과 감정이라는 지향의 큰길을 완전히 벗어나는 건 무척 위험한 선택이다. 건강과 질병의 길과 도덕의 길도 그렇다. 생물의학은 건강과 질병의 길을 해부학과 생리학이 만든 고정된 길에 종속시켰지만, 진화의학은 우리 조상이 걸어 온 진화의 지향이 만들어 온 길에서 건강과 질병을 사유한다. 예컨대 현대인의 비만은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던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이 진화시킨 과도한 식욕이 먹을 것이 넘쳐나는 현대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우리 몸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화의학은 우리의 몸이 그 속에서 진화해 온 환경과 현재 환경의 어긋남을 질병의 중요 요인으로 파악한다. 진화의학은 몸을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자연주의 의학이다. 진화가 아무리 큰 지향성을 가졌더라도 그 힘을 느끼면서 살기는 어렵다. 삶의 주인은 누구보다 백 년이 채 안 되는 생애를 살아가는 개체 생명의 몸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생애의 시간 속에서도 여러 갈래의 길이 만들어진다.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몸의 경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생애 초기의 경험이 생애 후기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 질병을 세포와 분자의 공간적 배치가 아닌 시간의 축을 따르는 삶의 질적 변화로 파 - P118
악하려는 일단의 의학자들은 생애경로접근(life course approach)이라는 새로운 연구와 임상 방법론을 제시했다. 생애 경로의 변화는 생물학적 변화와 함께 오며 세대를 거치면서 그 변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어려서 경험한 학대나 기근이나 질병이 후반기 삶에 심각한 생물학적- 심리적-사회적 장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생애의 시간을 잘라 그 단면을 들여다보는 방법으로는 몸의 삶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질병을 환자의 경험과 그 경험에 부여하는 가치와 의미 그리고 삶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파악하려는 임상의학자들도 나타났다. 이를 서사의학(narrative medicine)이라 한다. 생애경로접근법을 몸의생물학적 변화뿐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포함한 몸의 실존으로까지 확장한 것이다. 서사의학은 앞에서 분석한 현대 생물의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환자의 체험과 실존을 중히 여기는 인간주의 의학이며 체험주의 의학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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