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건지 누군가 물어봤다. 사는 건 다 똑같은데요.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별 느낌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제가 상위 3프로의 소득을 내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냥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살아간다는 건 기생하는 느낌입니다. 상위 3프로에게. 너무 솔직했던가, 다들 당황스러워했다. 먹고 자고 싸고 먹고 자고 싸고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라이프에서 상위 3프로라는 형용사가 그 무엇을 더 덧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다른 이들의 상상력에 내 상상력을 조금 보태어봤다.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노라고 한 남자 입술을 쓰다듬으면서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대략 20년 전에. 난 그런 건 바라지 않아, 그냥 내가 읽을 수 있는 만큼 책을 살 테니 그 책을 다 사줘, 커피를 좋아하니까 커피를 넉넉히 준비해주고, 술은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 덜 마시겠지. 하지만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걸 갖고 싶은 욕망이 더 심해질 테니까. 나는 그 정도면 충분해. 아마 아이가 생기겠지. 내가 딸아이가 갖고 싶으니까 너의 정자가 만일 내 뜻을 알아차린다면 우리는 딸아이를 갖게 될 거야. 그 아이도 책을 좋아하면 좋겠다, 너와 나만큼. 그 아이도 커피를 마시겠지, 사춘기가 다가올 무렵. 아마 성인이 되기 전에 술을 접하게 될 거야, 우리 아빠가 내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때 처음 맥주를 따라주었던 것처럼. 그럼 그렇게 같이 오순도순 살면 될 거야. 난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아. 결혼을 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그 오순도순 꿈은 파탄이 나버렸다. 아이가 생겼으니 이혼은 지금 안 된다, 우리 엄마는 단호했다. 버석버석. 버석버석. 아침이면 영혼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곤 했다. 그때부터 쭉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적마다 내 친구들과 엄마는 나를 말리곤 했다. 유일하게 이혼을 지지해주는 이는 여동생 진이뿐이었다. 상위 3프로의 남자의 여자로 사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어떤 모임에서 물어보더라고. 그 이야기를 진이에게 했더니 진이가 말했다. 한번 살아보라고 해, 어떤 기분인지, 어떤 인생인지. 둘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푸후후 웃었다.
샌드위치 가게라도 해볼게, 그러면서 살고 싶어, 아이 키우면서 둘이서. 남자는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어디에서 감히 이혼 이야기를 꺼내냐는 반응이었다.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이혼을 하자고 할 적마다 응했어, 그러다가 번번이 끝을 맺지 못해 여기까지 온 거고. 네가 내 손을 더 이상 잡지 않겠다고 했을 때 항상 고개를 끄덕였어. 마음은 잡을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우리가 맞잡고 있는 두 손은 헐거워. 그냥 서로 마지못해 잡고 있는 것처럼 걸쳐져 있어. 나는 이제 네 손을 놓을 거야. 자유롭고 싶어. 가난이 두렵지 않냐고 능력도 없으면서 전업주부가 아무 준비도 없으면서.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두려운 건 두려운데 그렇게 있다가는 그냥 네 돈만 보고 너한테 기생해서 계속 살아야 돼. 네가 죽거나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어있을 거야. 할머니가 되어서 은발이 되어 얼굴과 몸이 온통 주름으로 뒤덮여 너를 탓하고 나를 탓하게 될 거야. 나 스스로를 그 누구보다 탓하겠지. 내가 나를 잃어버린 삶을 택했으니까. 근데 이제는 내가 소중해져버렸어. 나를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만나서 한 번뿐인 이번 인생을 살 거야. 더 이상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은 이어갈 수 없어. 남자는 비웃었다. 나이 오십이 되어 그 누가 여자로 봐줄 거 같냐. 예순 먹은 할배들이라면 모를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이제 여자로 살 거야. 나를 여자로 봐주지 않는 네 옆에서 오래 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여자로 봐주는 남자를 만나서 뭐 만나지 못할 수도 있지, 내 환상일 수도 있지, 그래도 나는 이제 네 곁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그 후로 남자는 몇 번 나를 더 설득하려고 했다. 언제나 돈 돈 돈 이었다. 당신이 나를 매어둘 수 있는 게 겨우 돈뿐이구나, 그래서 가련했다. 이혼을 준비하면서 알았다. 돈과 사랑. 사랑과 돈.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게 그것들이라는 걸. 슬기롭다는 생각을 했다. 이혼을 하지 않기로 하고 다시 한 번만 더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6년 전, 1년이 흐르고 시댁에 갔을 때 어머님이 이야기하셨다. 능력도 없는 별볼 일 없는 게 어디서 감히 이혼을 하겠다고 설치고 다녔냐, 라고 눈도 안 마주치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당신 아들이 내게 이혼을 원한 거다, 난 응한 거다, 그 이야기를 했는데도. 그때 나 혼자 시댁 마당에서 울면서 그랬다. 아이가 스물이 되면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고. 좀 앞당겨졌다. 슬기롭게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내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블랑쇼를 읽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