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처는 20대 초반의 미국인으로 부모 없이 결혼한 언니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물려받은 유산이랄 것도 없어서 수입이 거의 없었으나 그런 물질적인 것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다소 무모한 이상주의자였다. 독립심이 강한 성격에 세상을 두루 보겠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많은 독서량으로 지적인 면모도 빼어난데다 사회에 대한 정의감이 있어서 진보적인 여성 기자와 절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20대 초반으로 세상 경험이 별로 없으면서도 자신의 정의감과 독립심에 자만하는 성향이 있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에서 배운 정의가 올곧게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다는 고집스러움이 그녀의 성격적 결함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사벨의 나이엔 그런 자만심이 그렇게 큰 결함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시기에는 다들 내가 아는 게 다 인줄 알면서 세상 무모하게 살 그런 시기니까.
하지만 이 소설이 쓰여진 19세기에는 이사벨 또래의 여성은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늘 앞두고 있고 한번 잘못 선택한 결혼은 되돌리기가 쉽지가 않았으니 이사벨의 고집과 자만심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 이상한 사람과 결혼을 하면 인생을 송두리째 비극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영국으로 이주해서 부유하게 살고 있던 이사벨의 이모는 이사벨을 영국으로 데리고 온다. 아름다운 대저택에서 살고 있던 이모부와 사촌 랠프는 생기발랄한 이사벨의 상상력이 풍부하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에 단번에 매료된다. 그리고 또 한사람 랠프의 친구인 귀족 워버튼경이 이사벨에게 반하게 되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사벨은 자신의 인생은 결혼으로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너무나 조건 좋은 워버튼 경 같은 사람과 결혼하면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아내라는 존재만 남을 것이란 생각에 그 대단한 청혼을 거절한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업가 청년 굿우드도 영국으로 이사벨을 따라와서 청혼을 하지만 이사벨은 거절한다. 자신은 세상을 더 보고 싶고 앞으로 결혼 같은 건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며 집요한 굿우드의 구애를 내쳐버리는 것이다.
이사벨의 이러한 결정을 옆에서 지켜본 랠프는 결혼하지 않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자유롭게 세상을 두루 경험하고 살 것 같은 이사벨의 인생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아직 이사벨은 돈 없이 독신으로 산다는 것의 고달픈 현실을 모를 정도로 대책 없는 청춘이지만 돈이 없으면 자유로운 여성으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랠프는 아버지에게 이사벨에게 막대한 유산을 상속해 주십사 간청한다.
뜻밖의 유산 상속으로 부자가 된 이사벨은 세상을 두루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그녀를 가슴 뛰게 하는 운명의 남자 오즈먼드와 만나게 된다. 원래 미국인인 오즈먼드는 어릴 때 유럽으로 이주한 유럽 속의 미국인 이민자였고 오래전에 부인과 사별해서 이미 다 큰 딸이 있는 나이 많은 홀아비인데 이사벨은 그를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어떤 점이 이사벨을 사로잡았냐하면 세상의 부와 권력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초연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점,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품에 대한 취향이 세련된 점, 그리고 가난하다는 점이었다. 이사벨이 생각하기엔 이 사람 옆에 있으면 누구의 부인으로 종속된 삶이 아니라 독립적인 자신으로 살아가면서 남편과 예술에 대한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남편을 구원해 주는 삶을 살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이사벨은 조건이 좋지 않은 오즈먼드의 상황 때문에 관계의 주도권을 자신이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것은 오즈먼드가 가난해서 더 좋다는 이사벨의 말에서 짐작한 것인데, 오즈먼드의 가난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이사벨의 입장은 일종의 권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사벨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기질과 가난한 오즈먼드가 최적의 조합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것은 오즈먼드에 대한 이사벨의 오해였고 환상이었다. 사실 그는 이사벨이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 전혀 아니었지만 이사벨은 이미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서 자신이 만들어낸 오즈먼드 외에는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이사벨의 성격적 결함이 크게 작용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자만심과 고집. 오즈먼드가 어떤 인물인지 세상 경험 많은 이모와 랠프는 뻔히 보여서 그 결혼을 반대하는데 이사벨은 그들보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더 확실하다며 결혼에 대한 결심을 더욱더 확고하게 굳힌다.
이사벨의 결혼 생활은 역시나 예상대로 불행해진다. 결혼해서 보니 오즈먼드는 굉장히 속물스러운 사람이었고 세상에 초연한 듯 보였던 모습은 애초에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부와 권력이니 관심 없는 척 한 것뿐이고 실제로는 남의 이목에 어마어마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이사벨의 돈으로 호화롭게 살면서 이사벨에게는 남편인 자신에게 종속적인 삶을 살 것을 강요하고 이사벨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통제한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이사벨은 남편에게 맞추려는 모습, 남편이 화를 내면 그것에 대해서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애써 찾으며 남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며 결혼한 여자라는 사회적 인습에 꽉 매여서 처녀시절 자유롭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던 모습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러는 와중에 오즈먼드의 딸을 결혼시키는 문제로 이사벨과 오즈먼드는 크게 싸우게 되고 남편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어 남편을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된 이사벨은 결국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제 소설의 마지막은 과연 이사벨이 비참한 결혼 생활을 깰 수 있을까에 주목한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독립심 강한 성향과 세상을 넓게 보고 싶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아가씨 때의 이사벨을 기억하며 그녀가 하게 될 선택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아서 얼얼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 이사벨의 선택이 너무 싫어서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열린 결말이다. 이사벨의 선택은 일단은 실망스럽지만 얼마든지 독자들의 상상력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아 정말...결론을 땅땅 내주고 끝내지!!! 마지막에 이렇게 고구마를 먹이다니...
하지만 아무리 열린 결말이라도 나는 이사벨의 선택이 도저히 희망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그동안 이사벨의 행적, 잘난 남자가 자신감 있게 결혼 하자고 하면 절대 안 한다고 거절하고, 결혼을 반대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그 행적으로 보아 이사벨은 아마 다시 남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모두가 너의 결혼을 깨라고 할 때 이사벨은 ‘아니 깨지 않겠어 끝까지 내 결혼에 책임지겠어’ 할 만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사벨의 독립심 강한 성향은 이런 식의 반발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는 걸 이 소설 내내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 긴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 두드러지게 일어나지 않으면서 천 페이지 분량을 자랑하는데 거의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지루하냐면 또 그렇진 않다. 특히 이사벨이라는 인물은 분명 좋은 점이 많이 있지만 결함도 있어서 그 심리를 그리는 방식이 굉장히 입체적이라 보고 있기에 재미있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