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의 길이는 4.8킬로미터였다. 산 끝에 절벽이 있었고 도로는 그위로 나 있었다. 절벽길 아래는 바다였다. 십여 년 전에 생긴 이 해안도로엔 수만 명의 이름이 새겨진 탑이 있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되던 날, 사람들은 탑을 세우고 그 앞에 타임캡슐을 묻었다. 기한을 백 년으로 할지 천 년으로 할지 이견이 있었지만 캡슐 개봉 시기는2100년으로 정해졌다.
60킬로미터에 가까운 해안선을 갖고 있는 이 도시에서 해안도로는일부 구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떠오르는 해를 보고싶을 때 다른 곳이 아닌 해안도로로 달려갔다. 기념공원 앞에 차를 세우고 해송 사이로 이어진 산책로를 걸었다. 탑 앞에서 소망을 되뇌는것도 잊지 않았다. 가로등과 키가 비슷한 설치대에는 바다와 해를 표현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는 시의 심벌이었다.
해는 해안도로의 전 구간에서 나부꼈다. 전망이 좋은 바위 위에는 해 - P6

안 초소가 있었고 기암 괴석들 사이에는 아주 작은 해변이 있었다.
바다에 사는 새들이 해풍과 함께 도로 위를, 이상한 바위들과 초소와탑 사이를 날아다녔다.
수온이 다른 해류들이 만나 일정한 방향으로 쉼없이 움직이는 곳이었다. 바다의 성질을 간직한 석회암이 산속에 동굴을 만드는 곳이었 그곳에서 해는 매일 떴다. 매일 지기도 했다. 도로는 산과 바다사이의 절벽 위를 달렸고, 북위 37도 동경 129도 안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해안도로의 북쪽 끝에서 출발하면 차로 십 분이 걸리는곳. 걸으면 한 시간 뛰면 삼십 분 그렇게 도착할 수 있는 해안도로의남쪽 끝에 어항이 있었다. - P7

송인화는 아직까지 유리골 꼭대기에 올라가본 적이 없었다. 코끼리산에서 건너다보거나 어라항 회센터 앞에서 올려다본 게 전부였다.
산비탈에 겹겹이 올라앉은 집들은 산언덕의 칠부 능선까지만 이어져있었다. 그 위는 텃밭과 공터였다. 공터로 남아 있는 유리골 정상은오래전에 사형장 터였다. 몇백 년 전, 동해안 수군의 죄수들은 포진이있던 코끼리산 뒤편으로 끌려와 재판을 받았고 대부분 유리골 정상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인지 척주 사람들은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사형당한 죄수들의 원혼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송인화는 유리골 정상을 볼 때마다 그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숨을 쉬었을 죄수들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오래전의 사형장 흔적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유리골 정상은 지금 지진해일 대피소로지정되어 있었다. 어라진 일대의 골목골목에는 지진해일 대피로를 가리키는 화살표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고 그 화살표들은 모두 유리골 정상을 향했다. 척주시 재난안전대책본부가 관리하는 긴급대피장소, 오래전 숱한 사람들의 목이 꺾였던 곳. 그 유리골과 코끼리산을잇는 산중턱에 바다를 보고 서 있는 상이 하나 있었다. - P30

척주를 떠나기 전날 밤이었을 것이다. 송인화는 은남 마을로 가 하경희 옆에서 하룻밤을 잤다. 밤새 울었던 것도 같고 아버지 장례식 때못 잔 탓에 밤새 잠만 잤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더이상 진료소에 못놀러온다는 게 아버지의 죽음만큼이나 슬퍼서 밤새 마음이 쓰렸던 기억은 났다. 은남 해안가에 놀러갔다가 화장실을 찾아 보건진료소로들어갔던 중학생 때 이후로 하경희는 송인화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던 타인이었다. 송인화는 보건진료소의 집기부터 종이 한 조각까지그 안에 있는 것들이 그냥 다 좋았다. 장래희망이 보건진료소 직원으로 바뀔 정도였다. 동진아파트에서 탈출해 은남 바다에서 사는 게 인생 목표라고 하경희한테 정기적으로 고백을 하기도 했다. 바다와 진료소에 무턱대고 마음을 빼앗긴 외로운 여자애를 하경희는 안쓰러워하기도 하고 기특해하기도 했다. - P52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꽃냄새가 송인화를 감싸왔다. 송인화는 지하에서 내내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다가 송인화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라일락 덩어리들이 햇빛을 끌어모았다가 튕겨내며 눈앞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겨울에 보면 저게 라일락 나무인 걸 또 까먹겠지, 송인화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조금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의료원 앞 사거리 일대를 막처럼 덮고 있는 이 슬픔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로 송인화는 미세한 통증만을 느꼈다.
해가 지는지 빛이 한 겹씩 사라져갔다. - P57

"부모 잡아먹고 서방 잡아먹고 자식까지 잡아먹을 년"
송인화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노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복장에서 내장을 다 훑어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년. 잡어만도 못한 년. 냄새나는 년. 부모 자식 서방 다아아아아아 죽일 년."
노인은 정확히 송인화의 눈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들은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송인화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송인화는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몸의 반응은 몇 초 후에 왔다.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후드득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송인화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서 폐의약품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번들거리는얼굴을 닦지도 않고 보란듯이 약들을 분리했다. 허선생이 흥분하는노인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 P72

해가 지기 시작하자 공동 복장 위의 구름이 색을 바꾸었다. 붉은구름들은 해일처럼 빠른 속도로 코끼리산을 타넘었다. 등대에 불이들어온 걸 신호로 방송수신탑에도 불이 켜졌다. 뒤이어 유리골의 집들도 하나둘 불을 밝혔다. 태양광이 사라지자 여래상도 어둠 속으로모습을 감추었다. 송인화는 자신과 서상화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지는것을 느끼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맞은편 어둠을 바라보았다. - P74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제일 안쪽 평상에 앉자 모든 소음을 집어삼킬 듯 물소리가 거세게 들려왔다. 저만치 계곡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소나무 줄기가 평상 바로 옆을 지나며 위로 뻗어 있었다. 젖어 있어서인지 나무줄기에서는 송진 냄새가 짙었다. 소나무잎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닿을 듯 가까이에서 흔들렸다.
"좋다...."
숲을 보던 송인화가 말했다. 감자전과 도토리묵이 나올 때까지 둘은 물소리를 들으며 말없이 계곡을 내려다봤다. 음식이 상에 놓이자송인화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며 턱을 쓱 닦았다. 그제야 윤태진은 송인화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좋은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는 듯 송인화가 멋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집었다. 그러더니 "미쳤나봐" 하면서 또 턱을 닦았다.
평상 난간 아래쪽에는 다육이가 심어진 기다란 장화 화분이 있었다. 닭백숙에 넣는 황기 냄새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고 테이블을 덮은흰 종이 위로 작은 벌레들이 날아왔다가 다시 날아갔다. 모자를 벗으며 단체 등산객들이 들어왔고 옥수수 찜통에서 올라온 김들이 쉬지않고 창유리에 서렸다. 손을 뻗으면 닿는 테이블 맞은편에는 송인화가 있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둘 다 알지 못하던 때였다. 양손에 젓가락 하나씩을 들고 감자전을 가르는 송인화를 보면서 윤태진은 생각했다. 이 여자가 옆에서 이렇게 이유 없이 눈물을 글썽여준다면, 그러면 흔들리지 않고 갈 수도 있겠구나,
- P116

윤태진은 침대맡에 놓인 갈색 약통에서 알약 네 개를 꺼냈다. 송인화와 헤어지고부터 수치가 다시 나빠져 먹기 시작한 호르몬제였다.
윤태진은 M자가 쓰여 있는 흰색 정제를 내려다보면서 그동안 자신의몸에 들어왔던 약들을 떠올렸다. 눈두덩이 붓고 염증이 심해서 먹었던 스테로이드 경구약 돌출된 안구에 결막 출혈이 올 때마다 맞았던스테로이드 주사제 대가처럼 따라온 부작용으로 밤마다 근육이 비틀리던 일, 피를 뽑아 호르몬 검사를 하고 수치 확인을 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윤태진은 일반인들보다 두세 배는 강하게 정신줄을 잡고 있어야 일반인들과 엇비슷한 생활이 가능했다. - P121

널찍한 탕 냄비 두 개가 각각 테이블에 올려졌다. 이창규와 김순영이 왼쪽 테이블에, 김승희와 송인화와 서상화가 오른쪽 테이블에 앉았다. 육수가 끊자 주인이 살아 있는 낙지 두 마리를 들고 왔다. 뜨거운 냄비 속에 들어가자 낙지는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무와 야채를휘저으며 요동치던 낙지는 밖으로 다리를 뻗어 냄비 손잡이를 휘감았다. 그냥 두면 냄비 밖으로 기어나올 것 같았다. 송인화는 입술을 물며 낙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좋았다. 저렇게 살아 있으니, 얼마나 맛있을까. 저렇게 살아 있는데, 왜 꼭 익혀 먹어야 할까. - P143

오징어 철이었다. 울릉도 근해로 나가있던 오징어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송인화는 일주일에 한 번은 아침잠을 포기하고 어항으로 나갔다. 채낚기 오징어 입찰이 한창인 어판장을 지나 2호집으로 가면주인이 오징어 내장을 받아뒀다 탕을 끓여줬다. 방금 죽은 오징어의내장은 짠내도 없어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부드럽게 녹았다. 오징어내장탕에 맛을 들인 이후로 송인화는 씹는 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져오징어를 잘 먹지 않았다.
새벽 어판장의 외침 소리를 들으면서 칼칼한 내장탕을 먹다보면 이동네 어딘가에서 서상화가 아직 아침잠을 자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예전엔 버리는 고기라고 안 먹었는데 이제는 비싸서 못 먹는다며 곰칫국 얘기를 하던것도 떠올랐다. - P171

산속 고갯길로 들어서자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포장만 되어 있을 뿐 댓재는 구불구불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경사 높은 산길이었다. 운전이라면 도가튼 송인화였지만 핸들을 이리 꺾고 저리 꺾으며다리에 힘을 주다보니 금세 목이 뻣뻣해져왔다. 와이퍼 때문에 시야도 어지러운 상태였다. 맞은편에서 가끔씩 대형 트럭이 내려올 때마다 송인화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속도를 늦췄다. 저곳만 돌면 정상이 보이겠지 하면 다시 굽은 길이었고 저곳만 돌면, 하고 올라가면또 길이었다. 올라가도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그치고 몸이 다 굳은 다음에야 송인화는 정상으로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산꼭대기에는 작은 휴게소 건물 하나와 댓재‘라 새겨진 대형 비석이 있었다.
송인화는 차에서 내려 비석 앞으로 걸어갔다. 한여름인데도 댓재정상엔 차게 느껴지는 바람이 불어왔다. 비석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덕왕산 댓재-두타산‘이라 쓰여 있었다. 고개를 드니 비석 너머로 산줄기가 겹겹이 펼쳐져 있고 구름이 닿을 듯 낮게 내려와 있었다.  - P178

"무더위 속 소나기, 동해안 비‘
휴대폰 화면에 날씨 알림이 떠 있었다. ‘동해안 비‘라는 말을 보고송인화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들어도 가슴 아픈 지명, 동해안.
송인화는 우산도 가방도 놔둔 채 울면서 운동장 너머 밭으로 걸어갔다. 감자밭을 지나고 콩밭을 지나 대마밭으로 걸어갔다. 송인화는키 큰 대마 줄기를 휘저으며 밭 한가운데로 갔다. 빽빽하게 치솟은 대마잎에 몸을 묻자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이파리들이 모든걸 잊게 해줄 듯 아찔한 향을 내려보냈다. 송인화는 층층이 펼쳐진 잎들에 얼굴을 묻고 몇 년 동안 어디서도 풀어내지 못한 울음을 울었다.
목이 쉬도록 울었다. - P184

아빠가 모는 덤프는 브레이크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고장이 나도 바로 수리되는 게 아니었다.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바로 수리가 되었지만 어떤 아저씨들이 정비를 올리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돌아왔다. 하루에 맞춰야 되는 물량이 빡빡해 시간은 잘나지 않았고 그러면 아빠는 정비가 접수될 때까지 불안한 마음으로차를 몬다고 했다. 덤프 운전을 오래 한 아빠는 브레이크가 말을 안들을 때마다 임시로 처방하는 아빠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래도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조마조마하다고 했다. 비가 와서 노면이 흙탕뻘이 되는 날은 저 아래 크러셔 건물까지 살아서 내려갈 수 있을까,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고도 했다.
서상화를 광산에 데려간 뒤로 아빠는 광산 얘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그때 봤던 얼굴 까만 아저씨 있지, 거기 슬러그 쌓여 있던 자리에말이야, 하면서, 서상화가 기억하는 35 광구의 풍경은 열한 살 여름방학 때의 며칠과 그후에 아빠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혼합돼 있었다. 하지만 광산을 떠돌던 분위기만은 단 며칠이었다고 해도 서상화가 직접느낄 수 있었다. - P223

흰색 안전모와 노란 안전모는 같은 공간에서 작업 배차를 받고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똑같이 동진시멘트라는 곳으로부터 작업 지시를 받았지만 소음과 분진이 심한 곳에 배치되는 것은 거의 노란 안전모들이었다. 흰색 안전모들은 안전과에서 얼마든지 방진마스크를 갖다 쓸 수 있었지만 노란 안전모들은 분진이 많은 곳에 배치되는데도한 달에 열다섯 개 이상의 마스크를 쓸 수 없었다. 작업복과 귀마개와 안전화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란 안전모들이 마음껏 가져갈 수 있는 건 목캔디뿐이었다. 그런 걸 감수하고 일을 해도 아빠가 받는 임금은 흰색 안전모의 반도 안 되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댈 수 없는 금액이었다.  - P224

아빠와 동료들이 주춤하며 한쪽으로 비켜섰다. 자신들이 먼저 먹는게 당연하다는 듯 흰색 안전모들이 식판을 들고 앞으로 가서 섰다. 밥을 먼저 먹지 말라는 건 서상화의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도 좀처럼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날 서상화가 아빠의 얼굴에서 본 것은 멸시받는 게 만성이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일터에서 매일매일 오랜 세월에 걸쳐 인격적 모독을 당한다는 것. 그게 내 가족이라는 것. 그 사실이 사람의마음을 얼마나 휘저어놓는지를 서상화는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먼저느껴버렸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서상화는 광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지않았다. 아빠는 나이 어린 정규직한테 쌍욕을 듣고 오는 날도 있었고덤프에서 돌을 떨어뜨렸다고 주먹질을 당해 입술이 터져서 오기도 했다. 출근하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기 싫어 서상화는 학교도 일찍 갔다.
술만 먹으면 아빠가 중얼거리던 ‘하청 주제‘라는 말을 크러셔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 P225

고용노동부의 판정은 아빠가 방진마스크와 귀마개와 안전화를 펼요한 만큼 얼마든지 갖다 쓸 수 있다는 말이었고 터무니없었던 임금대신 정당한 보수를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전한 덤프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나지 않은 덤프, 내리막길에서 시동이 꺼지지 않는 덤프.
하지만 판정의 여운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노동부 판정이 나온 다음날, 동진시멘트는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고 하청업체는 아빠와 동료들을 전원 해고했다. - P228

여의도불꽃축제 때였다. 밤하늘에서 연이어 터지는 불꽃은 서상화가 봤던 어떤 광경보다도 멋졌다. 머리 위에서 불꽃이 터질때마다 심장도 같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눈물이 날것도 같았다. 서상화는 입구에서 집어온 행사 포스터를 펼쳤다. 거기에는 불꽃놀이를 주최하는 화약 제조회사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서상화는 불꽃이 뿜어져나오는 듯한 모양의 대문자 H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열한 살 서상화가 35 광구 대기실에서 수없이 따라 그렸던 로고였다.
울지 않으려고 눈을 올려 떠도 꼭 한줄기는 흐르는 눈물이 있었다.
안경 코받침에 한참 숨어 있다가 콧방울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눈물 불꽃이 터지는 한강에 앉아 있자 35 광구는 실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만 같았다. - P245

문서 더미가 발 위로 쏟아져내렸다. 그렇게 몇 겹을 더 뚫고난 뒤였다. 안쪽 구석으로 보따리 두 개가 보였다. 황금색 보자기에싸인 뭉치를 보자 저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태진은 다가가 보따리를 풀었다. 한 보따리에 여섯 권씩 총 열두 권이었다. 그 안에 척주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그중 한 권을 집어서 펼쳤다. 누가 봐도 한 사람의 필체였다. 윤태진은 다른 한 권을펼쳤다. 주소도 생년월일도 없어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이름들이 아래로 길게 적혀 있었다. 윤태진은 또다른 서명부를 펼쳤다. 서명란에서명이 없었다. 한 사람이 속도를 내서 친 것으로 보이는 동그라미만이 서명란을 채우고 있었다.
척주 사람 96.9퍼센트의 이름이 적혔다는 서명부 뭉치 앞에 윤태진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엉터리로 작성된 서명부 - P254

였다. 정부가 척주를 원전 건설 후보지로 선정하면서 주민 수용성의근거로 삼은 그 서명부에서는 조작을 위한 어떤 고심도 치밀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 P255

파도가 잔잔했다. 바다와 하늘 색깔이 구분이 안 되는 걸 보니 가을한복판으로 들어선 듯했다. 약사여래상 앞의 대형 기도단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삼은사에서 약사재일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최한수는 주지스님 방에 들어가 있었고 오병규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최한수의 부친은 오랫동안 삼은사 신도회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척주에서 최한수가 오병규보다 유일하게 더 대접받는 곳이 삼은사였다.
윤태진은 약사여래상 앞에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사람들을보다가 약사전 쪽으로 걸어갔다. 삼은사는 불교 주류 종단으로부터통속적이고 기복적이라는 말을 듣는 작은 종단의 사찰이었다. 하지만본찰인데다 기도처로 유명해 신도 규모는 여느 대형 사찰 못지않았다. 약사전에서 기도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어진에 너울성 파도가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P268

윤태진은 마이크 소리가 웅웅대는 경내를 벗어나 유리골 축대를 따라 걸어갔다. 담배를 꺼내다 요즘 너무 자주 피운다는 생각이 들어 유태진은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무리를 하면 안 됐다. 피곤해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안 되고 약 먹는 걸 걸러도 안 됐다. 골탕에 빠진 이후로 윤태진은 단 한순간도 몸에서 자유로워져본 적이 없었다.
지병이 없는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몸이 아픈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하나였다. ‘안 아팠으면 좋겠다.‘
해가 지면서 어항 방파제 쪽에서 피노을이 몰려왔다. 저무는 빛속에 서서 윤태진은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두 덩어리의 암흑에 대해생각했다. 다시는 그 검은 굴 속에 갇히지도, 그 검은 웅덩이 속에 빠지지도 않으려고 여기까지 달려왔다. 윤태진은 붉은빛을 받고 있는약사여래상을 돌아봤다. 인간을 가장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약이었고 순간적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약이었다. 척주 땅에서 시멘트보다 강하고 시멘트보다 독한 것. 완치 가능성 없는 인간들의 비명을 길들일 가장 강력한 진통제 - P274

몇 미터 허공 위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듯했다. 광산에서 공장으로공장에서 다시 함으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 아래에 서서 윤태진은시간을 확인했다. 저쪽의 어항 방파제 불빛이 다른 세상의 것처럼희미하게 흩어졌다. 동진 부두에는 불빛이 없었다. 덤프에 폐타이어를 싣고 있는 로더에서만 간혹 빛이 번쩍이다 사라질 뿐이었다. 해무가 끼는 날은 그마저도 보이지 않을 듯했다.
부두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던 폐타이어 조각들이 로더의 작업으로조금씩 허물어져갔다. 일본 선박이 쏟아놓고 간 폐타이어와 석탄재는덤프에 실려 35광구 야적장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석회석과 섞여 시멘트로 변신하고 나면 다시 항으로 내려올 것이다.
어라항 뒤편에 배경처럼 펼쳐진 동진 부두에 서서 윤태진은 몇 시간째 검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로더가 물건을 옮기며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촉감이 연상되는 냄새가 건너왔다. 끈끈하다고밖에는 할수 없는 고무 녹는 듯한 냄새.  - P280

송인화는 외투를 여미고 속도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선가로등은 어두컴컴했고 시커멓게 솟은 코끼리산에서는 바람 소리만들려왔다. 송인화는 뒤꼭지가 이상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의류수거함 뒤쪽으로 무언가가 후다닥 지나갔다. 고양이일 거야. 송인화는걸음을 좀더 빨리했다. 고양이가 아닐지도 몰랐다. 일행들과 헤어지길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 송인화의 머릿속으로 수만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 P297

해초와 문어, 눈이 커다란 물고기, 무지개색 고래 한마리. 서상화가 그림이 그려진 담벼락 앞에 서서 몸을 숙였다. 유릿조각을 모아서붙여놓은 고래 눈은 색이 바랜 담벼락 그림에서 유일하게 쨍하고 빛나는 것이었다. 고래한테로 몸을 숙인 서상화가 상체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깔이 바뀌는 유리 눈을 들여다봤다. 이 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다 한 번씩 고래와 눈이 맞는다고 하던 하경희의 말이 생각나 송인화는 웃었다.
은남보건진료소에서 길을 따라 죽 들어간 바닷가 끝 집이었다. 높지 않은 담에도 파묻힐 만큼 작은 슬레이트 지붕집이었지만 여름이면피서객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고 간다고 했다. 벽과 창호문 곳곳에 그려놓은 해바라기와 붓꽃과 새 들 때문이었다. 하경희가 남편과 몇 달에 걸쳐 만들었다는 마당의 나무 데크 위에 앉으면 바다와 돌섬과 마을 저쪽 끝의 등대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 P306

해가 넘어가면서 바다색이 조금씩 짙어졌다. 송인화는 맥주를 마시며 하경희가 해준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경희의 아이가 저 자잘한 갯바위들마다 이름을 다 붙여놓았다는 이야기. 어느 겨울 돌섬 위의 갈매기들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야기. 갈매기 소리가 소거된 바다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이상했었다는 이야기. 돌섬 뒤로 가끔씩고래가 지나간다는 이야기.
서상화는 별거 아닌 송인화의 말에도 테이블을 치며 웃고, 빨아들일 듯 눈을 맞추다가, 가만히 바다를 바라봤다. 서상화가 고개를 돌려바다를 볼 때마다 귓바퀴 안의 점이 도드라졌다. 복약상담을 하던 봄내내 보아온 점이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담 옆의 가로등이 켜지자 점은 귓바퀴 그늘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대신 서상화의 얼굴엔 또 안경그림자가 만들어졌다. - P309

송인화는 다시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의자에서 내려와 송인화의 맨발을 감싸쥐었다. 서상화의 손이 맨살에 닿자마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관통해갔다. 발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둘은 웃음을 멈추고 잠시숨을 몰아쉬었다. 서상화가 고개를 들어 송인화를 봤다. 상체가 올라왔고, 안경이 뺨에 와닿는 동시에 서상화의 혀가 입을 열며 들어왔다.
파도가 잠시 그대로 멈춘 듯했다.
얼굴을 떼고 닿을 듯한 거리에서 다시 본 서상화의 눈에는 송인화와 송인화 뒤로 펼쳐진 바다가 있었다. 송인화는 손을 올려 천천히 서상화의 안경을 벗겼다. 안경이 얼굴에서 떨어져나올수록 서상화의 눈에 물기가 번져갔다. 서상화의 눈 속 바다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며 송인화는 울지 마, 중얼거렸다. 안경을 벗어도 울지 마. 목을 감싼 서상화의 손이 머리카락을 헤치며 더 깊숙이 들어왔다. - P312

서상화의 안경을 본 뒤로 송인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받지 못한 서상화의 마지막 전화가, 전화가 왔던 10월 15일 저녁 일곱시 사십삼분이라는 시간이 그 시간에 서상화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이 시시각각 송인화를 흔들었다. 서상화는 광산 흙과 바닷물이 엉켜서 질척대는 부둣가에 서있었다. 서상화는 붉은 흙으로 뒤덮인 광산의 어느 능선으로 걸어올라갔다. 서상화는 어둠이 내린 해변가에 서 있었고, 서상화는 햇빛이다 사라져버린 방파제 저쪽으로 자꾸만 걸어갔다. 그날 저녁 일곱시사십삼분 속에서 서상화는 매일 모습을 바꾸면서 찾아왔다. 그러다눈이 충혈된 채 조퇴를 하겠다는 오후로 되돌아갔고, 불안한 호흡으로 송인화 옆에서 걷기를 반복했다.
그날도 맑고 추운 날이었다. - P341

송인화는 바다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한꺼번에 맞으며 고개를들었다. 광구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새천년도로의 곡선이 보였다. 코끼리산과 유리골, 어항이 손에 잡힐 듯했다.
새벽이 오는 척주 바다를 보면서 송인화는 언젠가 서상화가 했던말을 떠올렸다. 아주 맑은 날엔 35 광구 꼭대기에서 울릉도가 보인다고 했다. 야간작업을 하다보면요. 오징어배 불빛이요, 수평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촘촘하게 정말 장관이래요. 광산 사람들은 그불빛을 보면 그래요.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라고.
송인화는 수평선을 따라 펼쳐진 불빛들을 보면서 소리내어 말했다.
"상화야, 저기, 울릉도 가는 고속도로."
불빛들을 지우며 수평선 끝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라왔다.
송인화는 밝아오는 바다를 보면서 비로소 목을 놓고 울기 시작했다.
서상화가 없는 세상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P357

는 흥미 있는 말을 들을 때나 장난기가 발동할 땐 눈밑애교살에서부터 반응이 왔다. 초롱초롱하게 뜬 눈 아래로 웃음기가 삭 번져가면 송인화는 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겠구나 생각했다. 상화는 이모티콘도 꼭 자기 같은 캐릭터들만 골라서 썼다. 상화와 그동안 주고받은 메시지 창을 펼치면 척주를 몇 바퀴나 돌고도 남을 길이였다. 메시지 창안에서는 서상화가 보낸 이모티콘들이 여전히 꺅 소리를 내면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보고 싶다면서 엉엉 울기도 했다.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꺅과 엉엉을 반복하며 그 안에서 움직일 것이었다. - P360

송인화는 척주 시내를 멍하니 걷고 또 걸었다. 기계적으로 간판들을 읽으면서 걷기도 했고 땅만 보면서 걷기도 했다. 걷다보면 소망의 탑 사진이 붙어 있는 네모난 지중변압기가 나와 송인화는 그 앞에 한참씩 서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물회를 시키고는 커버가 씌워진 벽걸이 선풍기만 올려다보다 그대로 나오기도 했다. 어느날은장학문구사와 다이소와 현대서점과 봉황관광을 보면서 걸었고 어느날은 미스터피자와 홈플러스와 홍채안경원과 남양유통 앞을 지났다. 별미식당, 월드스튜디오, 녹십초알로에, 예당피아노, 제일조은약국, 김내과, 보광당, 김밥천국, 배스킨라빈스, 백두대간호프, 영동농원, 장뇌건강원……… 송인화는 그런 간판들이 붙은 건물들 사이를계속 걸었다. - P360

뉴스와 신문에는 이십 년 가까이 멕소닐을 밀수해온 사이비 종교집단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일 킬로그램으로 칠십만 명 이상을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게 할 수 있는 멕소닐이라는 약이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올 때 어떤 극적인 효과를 주는지도회자됐다. 멕소닐의 최대 제조국에 대한 얘기, 의료용이 아닌 마약용으로 쓰일 때의 유통 경로, 제약회사의 판촉 경쟁으로 인한 의사들의과다 처방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공비 침투 때 이후로 척주가 이렇게 TV에 많이 나온 건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폐타이어 배로 밀수한 약이 동굴에 보관돼 있었다는 게 밝혀지자사람들은 그게 이십일세기에 가능한 일이냐고 물었다. 약과 함께시신 몇 구가 나왔는지, 동굴에서 단체로 무얼 했는지, 그런 자극적인 얘기들 속에서 척주의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송인화는 뉴스에 나오는 그 얘기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P361

나뭇잎들은 이제 거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송인화는 아직도 은행잎이 남아 있는 곳 하나를 알고 있었다. 보건소 은행나무 옆에 서 있는 소나무였다. 은행나무보다 키가 작은 그 소나무위에는 가을에 떨어져내린 은행잎들이 여전히 노란 색종이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눈이 내리고 다시 눈이 녹는 동안에도 소나무 위의 은행잎들은 거짓말처럼 그대로 있었다. 송인화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상화의 이름을 불렀다. 푸른하늘은하수를 잘하는 상화. 샤파 연필깎이를 십년 동안 고쳐 쓴 상화, 임연수김밥을 좋아하는 상화. 보건소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던 상화, 괘종시계보다 키가 큰 상화, 여덟 평짜리 약국에서 소아용 시럽을 따르며 살 수도 있었을 상화의 이름을. - P363

눈이 그치고 하늘이 갠 날 송인화는 오십천을 따라서 걸었다. 대기가 찼지만 햇빛이 많은 날이었다. 시멘트공장에서 동진 부두로 이어지는 컨베이어 벨트가 멀리 강 끝에서 부서졌다. 십팔 년 전에도 일년 전에도 몇 달 전에도 걷던 길이었다. 송인화는 강을 따라 걷다가문득 뺨이 따뜻해서 옆을 돌아보았다. 강물 위에 빛들이 내려앉아 자글거리고 있었다. 걸어갈수록 빛 무리가 왠지 자신을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송인화는 걸음을 조금 빨리해봤다. 빛무리도 같은 속도로따라왔다. 송인화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빛무리도 속도를 늦추며 따라왔다. 송인화가 걸음을 멈추자 빛 무리도 멈춰 섰다.
송인화는 그 자리에 서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송인화는 어른거리며 따라오는 그 따뜻한 것이 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송인화는 뺨으로 흐르는 것들을 그대로 둔 채 강을 따라 계속 걸어갔다. - P363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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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책에 실릴 소설들을 다시 살펴보는 동안 봄과 여름이 지났다. 추울 때 쓴 소설, 더울 때 쓴 소설,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쓴소설, 미안해하며 쓴 소설. 소설을 쓸 때의 마음 상태가 곳곳에숨어 있어 부끄럽기도 했고 혼자 웃기도 했다. 몇몇 인물의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보기도 했다. 목련과 라라, 나리. 그리고 미처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소년과 소녀, 여자와 남자들.
「목련정전」에 나오는 배 모양의 관을 생각하게 된 건 ‘주형석관(舟形石棺)‘에 대해 쓴 강우방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서부터다. 관을 배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 배 모양을 한 관이 정말형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당장 앉아서 긴 글을 쓸 수 있을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글을 만나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같은 소설 속, 활과 숯과 칼자루가 된 나무들 이야기는 양신의 『단연총록』에 나오는「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서 떠올렸음을 덧붙여둔다.

무인정찰기 RQ-105는 추락 직전 마지막 영상을 송신했다.
군 지휘소 지상 통제 장비 모니터에는 60도 각도로 기울어진낙엽밭이 담겨 있었다. 낙엽밭과 사선으로 맞닿은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깨끗했다. 잎을 다 떨군 맨가지만이 하늘 안으로 실금처럼 뻗어나가 있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와 밭과 하늘에 물방울무늬를 만들었다. 기울어진 풍경 한쪽에 빈 벤치가있었다. 아직 누구도 앉았다 간 적이 없는 벤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산을 보며 놓여 있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뒤 그 위로 커다란 참나무 잎 하나가 날아와 앉았다. 나뭇잎은다시 바람에 실려 사각 정자 위로 내려앉았다. 둥근 해가 여러번 뜨고 졌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자 낙엽밭 위로는 눈이 내렸다.
---- [근린] - P160

그래서요?
나리는 개구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단다. 다음 날부터 나리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어.
어떡해요.
이제 개나리와 개구리에게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니었다.
어떤 하루였는데요?
아기의 몸이 한 군데씩 생겨나는 하루였지. 팔다리가 생기는하루, 꼬리뼈가 자라는 하루, 콩팥이 익는 하루. 아가,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하루란다.
---- [나리 이야기] - P182

모래알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어요. 물 위로 줄기를 내놓고나무들이 강에 서 있습니다. 강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에누군가 다리를 놓고 있어요. 무지개처럼 예쁘고 폭신한 다리예요. 다리 이쪽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꽃을 담은 소쿠리를 팔에걸고, 여인이 구름 위로 막 발을 내디뎌요. 저쪽 끝에서 누군가여인을 기다리는 게 틀림없어요. 신발코는 들려 있고요, 치맛자락이 설레듯 흩날리거든요. 여인의 볼에서부터 퍼져나온 무늬가 구름에 결을 만들어요. 여인이 웃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인이 웃으면서 걸어가요. 구름 위를 걸어서 저쪽으로 가요. 자꾸 저쪽으로 가요. - P188

그림 안에는 연못도 전각도 없었습니다. 극락조도 꽃비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림 안에는 달이 있었습니다. 달 주위로는 둥글고 얇게 빛의 띠가 퍼져나가고 있었어요. 나리가 마지막으로그린 건 달무리가 진 밤하늘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쌍꺼풀이 짙은 크고 깊은 눈으로요. 그림 어디에서도 구름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안에는 구름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알 수 있었어요. 나리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달이 아니라 달무리였습니다. 달무리로밖에는*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구름이었습니다. 아이는 방문을 열고뜰로 나왔습니다. 세상의 구름들이 한꺼번에 우는 것처럼 비가쏟아졌어요. 아이는 손을 뻗어 빗물을 만져보았지요. 어머니. - P189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임종 때가 되면 서쪽으로 누워 극락도를 바라보았습니다. 화공들은 불보살과 연못과 구름을 그렸지요. 그러나 나리의 구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리가 그렸던 그림들이 극락도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어느 외진사원의 먼지 쌓인 불단 뒤에 개구리들이 머물다 갈 뿐이었습니다. 달무리가 지는 밤에 개구리가 울면 8만 4천 명중에 한 명은 기도를 한다지요. 강물이 불지 않게 해달라고요. 개구리가오래 울면 나리가 슬퍼할 테니까요. - P190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새벽어둠 속에서 검은 선으로 서 있던 나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1,458 미터, 기상 실황판에 나타난 기온은 영하 20도였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한참 아래였다. 제욱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에서 시작해시야 끝인 하늘과의 경계선까지, 파도처럼 펼쳐진 겨울 산맥들이 흰빛으로 덮여 있었다. 밤새 영하의 골짜기를 떠돌던 물 입자들이 나뭇가지에 얼어붙으면서 피운 상고대였다.
시야가 맑은 날은 동쪽 바다까지도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운무가 자욱한 날은 봉우리들이 섬처럼 떠다녔다. 제욱은 발왕산정상에 서 있었다. 멀리 선자령의 풍력발전기와 넓게 펼쳐진목초지가 보였다. 목초지를 시작으로 조금씩 색깔을 달리하며
----[겨울 고원] - P193

며칠간 내린 비로 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용평스키장 전 슬로프에서 보강 제설이 이어졌다. 겨울 시즌 행사 준비와 사고처리로 제욱은 야근이 잦았다. 사무실에서 밤을 보낼 때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사무실 발코니로 나가면 자동제설기가 뿜어내는 눈가루가 야간 조명 위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제설기들은 슬로프 능선 곳곳에 서서 쉬지 않고 눈을 뿜어 올렸다.
흰 가루들은 밤새 발왕산을 안개처럼 채우다 흩어졌다. 발왕산정상에서 시작되는 가장 고지대의 슬로프, 레인보우에도 제설기가 돌고 있을 것이었다.
야간 작업을 마친 제설 팀이 퇴근하는 것을 보면서 제욱은병원으로 출발했다. 한 명은 무릎 십자인대 파열, 한 명은 어깨 - P199

와 팔 골절, 또 한 명은 하반신 마비라는 큰 부상을 입었다. 보험 처리를 위해 사고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사고자들은 사고의 순간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제욱은 노인의 말이 걸려 혹시 시야 장애가 있지는 않았는지 물었지만 사고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고만 했다. 그냥 갑자기, 순식간에 넘어졌다고. 잡생각이 떠올라 집중도가 떨어진 건 아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쓸모 있는질문은 아닌 듯했다. 잠깐 사이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가는 게 사람 머릿속이었다. 그걸 알아채고 다시 설명할 수 있는사람이 많지는 않을 듯했다. - P200

금세 흩어져버리는 제설기의 눈구름을 볼때, 어두컴컴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골짜기와 라이트타워의 불빛을 번갈아 내려다볼 때, 제욱은 비눗방울 속에 들어와 있는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펑 터져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산의 실체가 느껴질 때는 오직 심야 스키를 탈 때뿐이었다.
한밤에 산을 활강해 내려오다 보면 겨울 산의 컴컴한 여백들이제욱만을 감싸며 달려드는 듯했다. 어둠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대신 산 전체의 바람을 혼자서 누리는 짜릿한 순간이 오는것이다. 겨울에 맛보는 몇 번의 심야 활강을 위해 제욱은 봄과여름과 가을을 이 산골짜기에서 견디고 있는지도 몰랐다. 떠나고 싶어서 몸을 비틀 때쯤 겨울은 다시 왔다. 아이를 어르는 얼음 마녀의 주문처럼 겨울은 정말 매년 왔다.  - P208

산들이 푸르스름한 흰빛을 내보내면서고원 가까이 다가왔다. 밤새 피어난 상고대가 모습을 드러내려고 뒤척이는 것이 대기 가득 느껴졌다. 여명이 밝고부터 해가뜨기 전까지의 시간, 그들은 마침내 사방에 피어난 얼음꽃을보았다. 차고 시린 결정이 가지가지마다 매달려 능선을 덮고있었다. 겨울 새벽에만 볼 수 있는 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은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발왕산왼쪽 등성이로 해가 들고 있었다. 햇빛으로 덮인 산등성이 쪽나무들이 미세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산이 왜 저렇게 반짝이지."
필상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꽃이 녹느라 그래."
불쏘시개로 드럼통 안의 숯 덩어리를 뒤적이며 사내가 말했다. 겨울 산속에 있다 보면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는 것을 보게된다고 해가 뜨자마자 그 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도 보게 된다고 햇빛이 서서히 산 아래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물이번지듯이 꽃이 지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보면서 필상은 고백하듯이 사내에게 말했다.
- P216

봉산리 사내는 필상보다 하루 먼저 황탯집을 떠났다.
겨울 점퍼를 허리에 돌려 묶고 배낭을 멘 채 사내는 그들이건너왔던 송천교를 혼자 건넜다. 다리를 지나 걸어가는 사내옆으로 고원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보였다. 발왕산 쪽 길로 접어들면서 사내는 뒤를 돌아 손을 한번 흔들었다. 배낭 위로 솟아오른 탐침봉에 햇빛이 쨍 박히고는 곧 흩어졌다.
필상은 메토끼 귀를 잡고 산에서 덜렁덜렁 내려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산막 앞으로 순간순간 스쳐가던 전짓불 빛과흙바닥에 엎드려 어린 아들의 신발께를 보았을 그의 어머니.
같이 인제에 가자 했을 때 강돌을 손에 쥐고 몸을 일으키던 모습과 꾹 다문 입으로 한참 동안 물수제비를 뜨던 그의 벗은 등을 생각했다. - P220

목나무 가지 사이였다. 야광 눈빛 두 개가 제욱을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욱은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떠 있는 높이가 네발짐승의 눈높이가 아니었다. 그건 두발짐승의 눈빛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망상이야, 중심을 잃을 거야. 제욱은눈빛을 보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갑자기 몸이 떠올랐고,
동시에 산비탈이 달려들었다.
야광 눈빛이 다시 보였던 걸 보면 뒤를 돌아봤던 것도 같았다. 이건 제욱이 RR-10 근처에 누워서 한 생각이었다. 달빛도없어서 하늘은 암흑처럼 검었다. 멀리서 야영객들의 소리가 들렸다. 비상용으로 챙겨왔던 무전기가 작게 삐삐거리는 소리도들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멀리 있었고 제욱은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위쪽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욱은 입술을 물며 눈을 감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욱은 검은 허공에 뚫려 있는 두 개의 야광빛을 보았다. 누군가 제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때 제욱이 느낀 것은 두려움도 반가움도 아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살았다. 중얼거리면서 제욱은 정신을 잃었다. - P224

마을로 들어서면 여섯 개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산들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마을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봉우리들은 해발 5백 미터가 조금 넘었다. 공기도 구름도 그 위로 잘 넘어다니지 못했다. 마을은 바람이 없고 안개가 많았다.
산 경사면에서 미끄러진 공기가 밤새 마을을 떠돌다 아침이면산허리에 하얗게 차올랐다.
제이봉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있었다. 다른 봉들과 달리 삼부능선쯤에 구릉지가 있었는데 산은 거기서부터 방향을 틀면서동물의 꼬리처럼 휘어져 내려와 제이봉 안쪽에 또 다른 공간을만들었다. 제이봉이 감싸고 있는 그곳은 분지 속의 분지, 골짜기 마을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라고 할 수 있었다. 
--- [백일동안] - P227

불안이라. 현장소장이 건축주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강상기는 취한 소장을 차에 태워와 컨테이너 한쪽에 눕혔다. 제이봉에 걸려 있던 찬 안개가 밤공기를 타고 소리 없이 내려왔다. 강상기는 어둠이 내린 제이골을 천천히 훑었다. 낮에 다녀간 배목수의 털냄새가 제이골에 그대로 배어 있었다. 축축한 단백질냄새, 다른 수컷의 누린내였다. 강상기는 소주병을 따 들고는집터 여기저기를 돌며 소주를 뿌렸다.
- P238

그때 강상기에겐 어떤 생각들이 왔다 갔을까. ‘어린애를 놔두고 외간 남자랑 붙어먹는 그렇고 그런 여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같은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아이의 아비가 아닌 다른남자의 품에 있는 여자들을 다 색출해서 찢어버리고 싶다‘는생각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강상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저 밑바닥에서 맴도는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강상기는 다만 허 주임과같이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무작정 일어나 제이봉 안쪽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걷지라도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강상기는 그날 자신이 걸어 올라갔던 제이봉의 길들이 선명히 보였다. 옮겨 심은 자미화에 기대앉은채 강상기는 제이봉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휘청거리면서 산을 올라가고 있다. 그 뒤를 한 여자가, 배 속에 아이를 품은 한여자가 따라 올라가고 있다. 허 주임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했을까. 허 주임을 찾으면 그는 꼭 묻고 싶었다.
- P247

치목이 끝나고 기둥이 세워진 날 큰비가 내렸다. 기둥 사이로 비계가 설치되고 들보가 올라간 날도 비가 내렸다.
목수와 일꾼들이 내려가고 혼자 남은 밤에 강상기는 덧집에앉아 비 내리는 집터를 내다보았다. 빗물은 들보를 덮어놓은방수포를 타고 내려와 그 아래의 강철비계를 두드렸다. 제이봉의 토사와 제이골의 진흙도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렸다. 강상기는 땅이 움직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며칠 동안의 비에 다시 습기를 머금은 금강송들도 그의 등뒤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금강송은 그의 집이 되기 전에 그와는전혀 상관없는 생물의 집이 되려는 것 같았다. 비가 모든 것을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원망했다.
이곳엔 15 년 동안 이런 비가 내렸을 것이다. 강상기는 제이골 땅 밑 어딘가에서 빗물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허주임을 생각했다.  - P252

강상기는 자미재 대청에 반듯하게 누웠다. 이대로 몸을 누였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해도 아무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이 내려왔다. 강상기는 누운 채로 멍하니 서까래를 보았다. 그때 긴가민가한 기척이 느껴졌다. 강상기는 집도 땀을 흘리는가,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을 쓸었더니 손바닥에 끈끈한액체가 엉겨 붙었다. 송진이었다. 강상기는 고개를 들었다. 송진은 배 목수가 흘린 체액이라도 되는 듯이 서까래와 들보 곳곳에서 배어 나와 기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상기는 발밑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송진이 흐르는 나무위를 새파란솜털들이 뒤덮고 있었다. 솜털은 천장과 처마, 기둥과 벽을 빼곡히 채우면서 자미재 전부를 장악하려는 중이었다. - P261

불꽃과 습기의 경계를 가늠할 수없는 채로 집은 고약한 연기만을 쉬지 않고 뿜어냈다. 상기는 연기에 먹힌 금강송이 우지끈 부러지면서 대청 위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자미재는 붉게 타오르는 대신 시커멓게스러지고 있었다.
그때 강상기의 눈에 빛깔 하나가 스쳤다. 강상기는 눈을 크게 떴다. 무너지는 자미재 옆에 창창히 서서 잎을 펼치고 있는것은 자미화였다. 완성된 자재를 둘러보면서도 강상기가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던 나무, 자미화는 검은 연기에 장단을 넣듯가지를 풀어 헤치면서 일렁였다. 강상기는 그 가지마다 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다. 꽃은 세상에서 가장 진한 거름이라도 받아마신 듯이 그가 이제까지 봤던 어떤 자미화보다도 붉었다.
"더러워. 더러워."
꽃을 본 강상기는 더는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한여름 밤이었다.  - P263

주인아주머니가 소의 머리와 목을 껴안았고 류가 소의 엉덩이와 뒷다리를 잡았다. 마취제는 없었다. 연의 방호복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소의 성기에 소염제가 분사되는 치익치익 소리. 그런 소리들 끝에 무언가 질기고 축축한 것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류는 반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음낭의 표피가 절개되는 소리였다. 표피를 찢은 연은 뿌리에서부터 소의 고환 덩어리를 짜내리기 시작했다. 소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헉, 헉,
숨을 내뿜다 고환이 다 빠져나올 때쯤 길게 한번 울었다. 소의뒷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류의 팔로 전해졌다. 어디선가국이 끓고 있는 것 같다고 류는 생각했다. 무언가가 뭉근하게오래오래 끓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따뜻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껍질만 남은 음낭을 봉합한 뒤 연은 소의 엉덩이에 진통 주사를 놓았다. 
---- [어느 작은] - P277

사람들은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공은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잔디밭 위로는 햇빛이 쏟아졌다.
그날처럼 눈부신 햇빛이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한봄, 냇가를 끼고 있던 풀밭, 소는 풀을 뜯었고 산골 소년 공은 토끼풀꽃을 엮어 왕관을 만들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일 때부터 몇 년을 공과 함께 지내온 소였다. 덩치도 커지고 먹는 양도 늘면서그만큼 공과 함께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이름도 공이 지었고털 관리도 공이 했다. 공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데리고 냇가로 가 풀을 먹였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풀을 먹던소가 꼬리를 빳빳이 들어올렸다. 소변이 나왔고, 구멍이 서서히 열리면서 검은 똥이 쏟아졌다. 다시 구멍이 닫혔고 소의 꼬리가 내려갔다. 소는 꼬리로 엉덩이와 다리를 쳐가며 계속 풀을뜯었다.
수 없었다.  - P291

공은 토끼풀꽃을 내려놓고 소에게 다가갔다. 햇빛이 내려앉은 등은 따스했고 소털 특유의 냄새가 공을 간질였다. 공은 소의 등을 쓸었다. 왼손으로 꼬리를 들어 올렸고, 조금 전에 닫힌 그곳, 소의 직장으로 조심스레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소년 공에게 비닐장갑 따위는 없었다. 소가 풀을 뜯어 먹던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시냇물 소리도 멈추고 바람 소리도 멈추었다. 공의 손과 팔이 끝도 없이 소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어깨까지 들어갔을 때 공은 자신의 몸 전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속인 것처럼 귀가 먹먹해셨다. 공은 눈을 감았다. 놀라운 정적이 그 속에 있었다. 공의팔을 감싼 점액과 혈관과 굴곡들. 그리고 따뜻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면서 팔을 뺐다. 팔이 조금씩 빠져나올 때마다 바깥세상과의접촉면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손까지 모두 빠져나왔을 때 공은도망치듯 뒤를 돌아 뛰었다. 허겁지겁 어찌할 새도 없이 공은풀밭에 넘어져 사정을 하고 말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공은 소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 P292

창가 쪽 테이블이었다. 물잔 옆에 누군가의 휴대폰이놓여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산골 소년의사랑 노래였다. 남편의 속옷 양말처럼 여기는 그의 아내인지, 암소가 앓고 있는 어느 농가인지, 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누군가 계속해서 공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숯불을 빼던 식당 직원이 멈춰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소금 알갱이와 핏물이 자작한 고기 접시, 계란노른자만 남은 냉면 그릇. 그런 것들이 노래와 함께 지나갔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워 냇물 위로 떠내려가던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주저앉아서 어느 날 밤의 하늘을떠올리고 있었다.
두 아름도 넘을 것 같던 느티나무가 있었다. 두부 찌꺼기처럼 비어져 나오던 수소의 고환이 있었고, 인공수정 교육 때마다 도축장에서 갖고 오던 암소의 자궁이 있었다. 땅속에 묻혀있을 가축들의 뼈와 어딘가로 헤엄쳐 갔을 산골 소년의 정충.
그리고 소년의 어떤 순간을 지켜보던 황색 소가 있었다.
테이블을 다 치운 주인은 노래가 끝나가는 휴대폰을 카운터로 갖다 놓았다. 직원은 방석을 정리하다가 노란색 스트로 몇개를 발견했고, 이리저리 돌려보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 P294

통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조금이라도 체중을 실어 앉으면살들이 뜯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변기에도 간신히 걸터앉을 수만 있을 뿐 아랫배에 힘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끔거리고 가렵고 축축했다. 밖은 겨울이었지만 실내는 한여름
---- [한밤] - P304

보다 더한 온도와 습도로 무더웠고 땀이 수시로 흐르는데도 씻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방마다 개인 샤워실이 있었지만 물은세면대에서밖에 나오지 않았다. 산모의 체질별로 샤워가 허락되는 시기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태반이 떨어진 자궁벽에서는붉은 진물이 계속 흘러나왔고 갖은 분비물로 오염된 회음부로는 바람 한 줄기 통하지 않았다. 몸이 썩어가는 느낌을 떨칠 수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일주일? 열흘?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밤이 조금씩 길어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자고 일어나거나 밥을 먹고 나면 여자들은 타원형 실내를 느릿느릿 돌았다. 운동을 위해 걷는 사람도 있었고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 걷는 사람도 있었다.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것보다는여자들과 복도를 걷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나 또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복도에서 걸으며 보냈다. - P305

산모들의 회음부는 점차 회복이 되었고 그에 맞춰 하루 한시간씩 원장의 모유 수유 교육이 시작되었다. 원장이 다녀간그날 밤 이후로 내 회음부도 정상 상태가 되었다. 실을 뽑아버린 건지 소독약을 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원장은 어쨌든 회음부의 세균들한테 타격을 준 것 같았다. 수유 교육이 끝나고 나면 산모들은 소파 앞 유축기 앞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유축 작업을 시작했다. 흡입기를 가슴에 대고 버튼을 ‘강‘으로 올려도 젖량은 30밀리미터를 밑돌았다. 반면에 분홍은 젖이 뿜어져 나왔다. 많은 젖량을 주체하지 못해 심지어 젖을 짜서 버리기까지 했다.
"여기선 재력, 미모, 학력 다 필요 없어. 젖량 많은 여자가 갑이지."
임신을 하면서 다들 유두가 거뭇해진데 반해 분홍의 젖꼭지는 복숭앗빛 분홍이었다. 분홍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풀어헤쳤고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리원 실내를 누비고 다녔다.  - P312

내 안에 있었던 아기. 나는 아기의 뺨에 코를 대고 냄새를들이켰다. 아기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입이점점 내 가슴 쪽으로 돌아왔다. 자기를 낳은 엄마한테 온 것을본능적으로 안 것일까. 나는 서둘러 가슴을 열었다. 순간 아기가 걸신들린 악귀처럼 달라붙었다. 젖꼭지가 아파 나는 반사적으로 아기를 밀어냈다. 아기는 다시 쥐처럼 파고들더니 젖꼭지를 찾아 물었다. 그러고는 무서운 힘으로 빨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았을까. 실이 한 올씩 풀려나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고천년 묵은 변비가 해결되는 것 같은 말로 다 하기 힘든 시원함이 몰려왔다. 유축기로 해결하지 못한 몸의 울혈들이 아기가빨자 그대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뜨거운 탕 속에 잠겨드는 것처럼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30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산모들의 유관이 막히지 않도록 아기가 양쪽 젖을 비워줄 딱 그 시간만큼만 허락이 된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웠는지 아기 입이 느슨해졌다.  - P320

나는 실장을 밀치고 싸개를 풀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것이 나와 신랑의 유전자를 나눠 가진 몸이라는 것을 믿을 수없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고 어느 기록에서도 본 적이없는, 손상된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아니었다. 팔인지 다리인지 알 수 없는 갈라지고 뭉쳐진 덩어리들이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비껴난 채 펼쳐져 있었다. 성기만이 나를 비웃듯 몸통의 제자리에 박혀 움찔거렸다. 아기는 그 와중에도 다시 젖을 찾는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꽃게처럼 버르적거렸다.  - P321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사방이 마비 상태였다. 크지 않은 누각이 저런 불길을 품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문은거세게 타올랐다. 포효하는 괴물처럼 몸을 뒤트는 북문 앞에서소방차도 빌딩들도 장난감 같았다. 이 땅에 가장 오랫동안 서있어온 건물이 가장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보도 기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이 되지만 아직 방화범은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 이어졌다. 수차례의 협박 전화를 무시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당국의 안이한대처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산호를 보았다. 산호는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기대앉아있었다. 산호의 뺨 위로 북문의 불꽃이 반사돼 어른거렸다. 나는 그 불꽃 앞으로 다가갔다. 이월을 말리던 산호가 이월을 돕기로 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산호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왔다. 사람들은 다 같이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누각의 기왓장들이 쏟아져 내리면서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늘 보아왔던 건물. 타버릴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건물. 폴리스라인 너머를 채운 사람들이 믿어지지않는 광경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생물체처럼 북문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셋, 둘, 하나, 정렬. - P330

새로운 2만 6천 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문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흐느껴 울기시작했다. 나는 뒤편의 통유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속싸개로 몸을 가린 콩이, 송이, 바람, 봄빛, 행복, 사랑, 희망 들이 누워 있었다. 누군가 몸을 긁었다.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다시번식을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이제 또 다른 고열이 오겠지. 들깻가루와 미역이 끓는 냄새. 젖냄새와 진물 냄새.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긴 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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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옆에서 작은아버지가 조용히 웃었다. 규는 풀들을 긁어모았고 나는 술을따랐다. 참 좋았지. 참 좋았어. 나는 출근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았다. 졸면서 꿈을 꾸면 아버지가 나왔다. 그날을 잊을수가 없다. 아버지는 버스 창에 깃발처럼 매달려 따라왔다.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추면 좌석 어디쯤에서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흔들었다. 버스가 다시 속력을 내면 아버지가 검은 얼굴로펄럭이며 창을 두드렸다. 나는 창이 열리지 않게 안간힘을 쓰다가 머리를 찧고 깨어났다. 그날도 그랬다.  - P11

가려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가려웠다. 봄가을에는정신없이 가려웠고 여름에는 못 견디게 가려웠고 겨울에는 그냥 가려웠다. 어떻게 하면 상처 안나게 긁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긁을 수 있을까, 날이 더워지면 그 생각에만 몰두했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어떻게든 긁었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려움이 시작되면발가락을 짓누르다 자리를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의사들은 오래 앉아 있는 게 좋지 않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외근보다 파티션이 하체를 가려주는 사무실 근무가 편했다. - P16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세상은 더럽고 우리에겐 락스가 있다고.
락스를 사랑하는 내 어머니는 여전히 명절날의 대장이었다.
작은어머니와 형수가 일할 분량과 범위를 정해놓고 더는 넘어오지 않게 했다. 어머니는 며칠동안 락스를 풀어 걸레를 삶고집안 구석구석을 닦으면서 명절 때 오갈 사람들의 동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윤이 나는 바닥을 네 살이 된 규의 딸이 내달리며 놀았다.  - P29

불길 속에서 아이를 건져내듯, 납치범한테서아이를 낚아채듯, 뒤집개를 내던진 형수가 한달음에 달려와 어머니한테서 아이를 빼갔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형수의 눈빛에서 한순간 혐오가 지나갔다. 큰소리는 오가지 않았다. 형수는아이한테 휴대폰을 쥐여주고 한쪽에 앉힌 뒤 일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작은어머니는 겪을 만큼 겪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아무 말이 없었다.
혼자 멋쩍게 앉은 어머니를 보는 게 힘들어 나는 밖으로 나왔다. 자기 시어머니였어도 저런 눈빛이 스쳤을까 하는 서운함에, 어머니의 락스 신봉이 이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충격까지이래저래 마음이 쓰렸다. - P31

마지막 통의 뚜껑을 열 때쯤 시야가 기울었다. 편도선에 바늘이 들어오는 것처럼 목이 아팠다. 메스꺼움과 함께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가까스로 세면대를 잡고 서서 거울을 보았다. 독성이 스며든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샤워기의 온수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락스 원액에 내리꽂히며 증기를 끌어올렸다. 거울이 흐려지면서 욕실 안은 염소 기체로 들어찼다.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음을 뱉으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감각이 마비되는 듯한몽롱함 속으로 몸이 꺼져들어갔다. 눈앞에 욕실등이 어른어른했다. 젖은 눈썹에 맺힌 물방울들이 몇 겹으로 번져나갔다. 고리처럼 이어진 물방울들 끝으로 잡힐 듯 말 듯 무엇인가가 보였다. 겨울이고 한낮인 어느 거리였다. 공기가 시리고 하늘이맑았다. 그녀가 거울 앞에 서서 떨잠을 꽂아보고 있었다. 옛 여인들이 좋은 날 꽂았다는 장신구였다. 둥근 백옥판 위에서 여러 빛깔의 유리 장식이 반짝였다. 그녀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은사로 된 떨새가 파르르 떨리며 진동했다. 지구는 소리 없이 돌고, 한겨울 햇빛이 구슬 가닥가닥을 파고들며 빛을 흩뿌렸다.
- P46

라라가 할딱이기 시작합니다. 라라는 파자마 자락을 꼬깃꼬깃 뭉쳐서 가랑이 사이에 끼웁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꽈배기처럼 꼬아서 가랑이로 가져갑니다. 유리의 손바닥도 세워서 가져갑니다. 잡히는 건 다 가져가서 끼워 넣더니 라라는 힘을 줍니다. 엄청난 힘에 놀라서 유리는 손을 뺍니다. 라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숨이 가빠지면서눈이 희미하게 풀립니다. 그렇게 몇 번 더 끙끙대던 라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듭니다. 이제야 무언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울음 끝에 잦아드는 숨처럼 떨리는 숨을 한번 내뿜고, 라라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잡니다. 유리는 라라의 뺨에 손등을 대봅니다. 혼자 노는 라푼젤, 모서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유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들어갑니다. - P67

유리는 지금 몸도 마음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라라를 가만히 둘 수가 없습니다. 유리는 라라를 처음 때렸던 때가 생각납니다. 유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화가 치밀었고 탁상달력으로라라의 머리를 두 번 후려쳤습니다. 라라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유리는 우는 라라를 안아주었습니다. 유리는 울음이 잦아든 라라에게 밥을 먹여주었습니다. 자신한테 맞아서 울고, 자신이 달래서 울음을 그치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는 밥을 받아먹는 라라를 보자 유리는 라라가 진정 자기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전율을 유리는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생각이 듭니다. 유리가 이러는 건 아주 오랜만입니다. 유리는아무 때나 라라를 때리지 않습니다. 힘들 때만 때립니다.
- P70

칩니다.
주방 조명등 아래, 밀고 밀리는 육박전은 끝나지 않을 듯 보입니다. 거실 저쪽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는 산발입니다. 산발인 머리를 쥐가 파먹었습니다. 눈을 올려 뜨고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가 금발머리 라푼젤을 집어듭니다. 아이가 도어록 버튼을 누릅니다. 주방에서 뒤엉킨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한 칸, 또 한 칸. 아이는 맨발로 기다란 계단을 내려갑니다. 복도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분홍 파자마 자락이 나부낍니다. 아이는 수백의 머릿니 군단을거느리고 여왕처럼 걸어갑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누구아이를 본 사람 없나요? 나이는 여섯 살, 이름은 라라. 가까이가면 이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낯 뜨거운 행동을 하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신고는 탑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어요. - P83

물조리개를 들고 나무를 빙빙돈다.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인 것처럼 나무를 쓰다듬다가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와락 매달린다.
목련은 하루하루 빛이 난다.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 종아리는토실토실하고 햇살을 타고 뛰어노는 발걸음엔 막힘이 없다. 나무 밑에 자기 세계를 꾸미는 손은 야무지다. 나무한테 들려주는 얘기 속엔 그리움과 공상과 장난이 가득하다. 엄마라면 당장 가서 끌어안고 만져보고 싶어 못 견딜 만큼, 목련은 사랑스럽게 커간다.
바람이 잦아들자 다래덩굴이 빛에 잠긴다.
목련은 나무에 기대앉아 눈을 감는다. 눈꺼풀 위로 햇살이 - P90

고이고 빛은 수만 갈래 파편이 되어 어린 목련의 머릿속에서흩어진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백설기 파편이 되었다가 다시 목련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된다.
엄마.
목련은 엄마를 불러본다. 엄마 얼굴도 목소리도 생각이 나지않는다. 선명한 것은 오직 냄새, 엄마 손에 밴 참기름 냄새다.
시금치 데친 물에서 훈김이 올라온다. 바가지에 도라지를 박박문질러 씻는 소리 들통 가득 탕국이 끓고 엄마는 메밀전병에넣을 김치를 다지기 시작한다. 목련은 엄마 옆에서 산자에 묻힐 튀긴 밥알을 주워 먹는다. 시루 위로 떡 찌는 냄새. 뜰에 자리가 깔리고 제기가 날라진다. 사람들 발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온다. 목련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백중날. 7월 보름 한여름. - P91

목련은 목발을 세워둔 채 홀로 절 마루에 앉아 있다. 7월 보름 달빛에 밤이 환하다. 어슴푸레하게 언덕의 나무가 건너다보인다. 달빛에 잠긴 능선과 나무와 다래 덩굴. 다래 덩굴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절 뜰로 고인다. 목련은 다섯 살까지 엄마와 이절에서 살았다.
목련에게 엄마는 물을 끓이는 주전자이고 김장독을 묻는 삽이고 강아지 집을 수리하는 망치다. 목련의 엉덩이를 찰싹 쳐가며 목욕을 시키는 손이고, 무엇보다 매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노란 장판이 깔린 뜨끈뜨끈한 방구들, 목련은 거기서태어나고 거기서 기어 다니고 거기서 잠을 잤다. 목련은 절구석구석을 어디든 걸어다녔다. 4월이 되면 초파일 연등에 붙일꽃잎 종이를 안고 다니고 7월이 되면 옷을 태우고 남은 재를 후후 불며 휘저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담 한편의 돌탑을 몰래 무너뜨리면서 놀았다.
- P101

목련은 서서히 턱을 내린다. 올라갈 때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가 목련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그동안 단련된 목련의 팔 힘은 아직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 털실 고리와같은 눈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목련은 멈춘다. 반쯤 굽혀진 팔이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린다. 한여름 해가 기울어간다. 허공어디쯤에서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뒤이어 어느 집의빨래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언젠가 목련이 쏘아올린 종이비행기가 떨어져 내린다. 담 위에서 발을 헛디딘 고양이가 떨어져내리고, 세상의 모든 열매들이 자기 무게만큼의 속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목련은 본다. - P125

목련의 팔에 갑자기 엄청난 힘이 들어간다. 그것은 목련이이 세상에서 내는 마지막 힘이자 자신을 걸고 내는 모든 힘이다. 목련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가지 마 가지를 잡은 팔을바꾼다. 심장이 격렬한 박동을 뿜는 동시에 목련의 몸은 바로거기, 다래 덩굴 쪽으로 돌아간다.
목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해지는 자신을 본다. 손에 맞물린 나무의 감촉을 목련은 어느 때보다 실감한다. 나무를 향한 단단한 믿음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목련은 느낀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목련은 목도리의 고리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목련은 가지 마 가지를 잡은 두 손을 놓는다. 땅이 모든 힘을 동원해 목련을 잡아끌고 목련은 자기 무게만큼의 강도로 목도리에 목이 매달린다. 그 강도 그대 - P125

로 줄이 목련의 대동맥을 누르고, 목련은 급작스러운 뜨거움과동시에 혀가 빠질 듯한 숨 막힘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다래 덩굴이 열린다.
다래 덩굴,
그 안에 울부짖는 한 여인이 있다.
덩굴을 몸에 감고 갇혀 있던 여인. 머리채를 잡힌 채 눈앞을보는 여인. 지금 막 지옥에 빠지는 여인. 복수당하는 여인.
가지 마 가지에 목이 매달린 목련이 허공을 차기 시작한다.
"악-아-엉- 윽-"
토막음으로 우는 사람은 손과 입을 결박당한 여인, 10년 동안 언덕에 갇혀 목련을 보아온 여인이다. 두 팔을 휘저으며 헤엄치던 목련의 얼굴이 검붉게 질려간다. 세차게 버둥대던 다리움직임이 어느 순간 둔해지기 시작한다. 목련의 눈이 하얗게넘어간다. 여인의 재갈이 풀린다. - P126

"아-가-아-가아아아아아————— !!"
눈앞의 것을 식별할 정도의 빛과 울부짖을 기력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 지난 10년간 그 둘만 제공받아온 여인이 두 눈을 뜨고 울부짖는다. 눈이 넘어간 목련의 몸이 풀어진다. 목련은 나무 막대기처럼 곧게 펴져 경련하기 시작한다. 여름 생물들이일제히 소리를 멈추고, 결박당한 여인만이 짐승처럼 몸을 뒤틀며 목련을 부른다. 그러나 설골이 부러진 목련의 몸은 이미 마지막 떨림으로 치닫는 중이다. - P126

능선으로 해가 진다. 나무의 그림자가 맞은편 산을 뒤덮는다. 하루의 빛이 사라지기 직전. 모든 것들이 가장 반짝이는 순간, 목련은 드디어 괄약근이 완전히 풀어지면서 움직임이 멎는다 포개진 꽃잎이 저녁을 준비하는 오후의 막바지. 언덕 아래로 밀잠자리가 걷히고 구름이 새털처럼 풀어지며 하늘을 채운다. 귀를 후비는 괴성만이 능선을 타고 미끄러진다.
마을 어디에서나 나무와 나무에 매달려 죽은 목련이 보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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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으로인해 바깥의 네온사인이 매혹적으로 보여 주는 약속과 가능성은 깊은 무관심을 남겼다. 결국 그 경험은 삶을 너무나 부정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옆방에서 누군가가 살해되는 소리가 들릴 경우 느껴질 첫 번째 충동은 소음에 대한 불평일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사람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일 게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술을마셔서 죽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모텔 네온사인의 망가진 약속에대해 말할 경우, 시그먼의 사진 속에 있는 많은 간판들이 그이후 망가졌다는 것은 완벽하게 타당하다. 그들은 예전의 자신이 낮에 드리우던 그림자 안에서 깜박이는 다른 병든 간판을 되살리는 데 사용되던 부품들을 약탈할 수 있는 죽은 간판의 묘지가 된다. 시대의 진정한 상징(sign, 간판) 라스베이거스는 네온사인 박물관으로서의 위세를 뽐내고 있다.  - P206

이것은 워커 에반스에 관한 질문이다. 에반스가 촬영한 쓰러져 가는 판잣집, 버려진 차, 지역 특색을 보여 주는 간판 등은그것들이 촬영되기 여러 해 전에도 똑같이 매력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런 것을 촬영하는 행위 자체가 여태껏 사람들이 거기서 의식하지 못했던 미적 차원을 드러내 주는 걸까?
어느 쪽이든 『미국의 사진들이 출판되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 사진들이 전시된 1938년 이래로 그것은 미국의 모습이었고 우리가 미국에서 찾던 모습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이중의 창작이다. 관찰한 세계를 단순히 창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찰한 결과를 판단할 용어와 기준을 창작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단순히 미학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정치도 존재하지 않는다"148 는 에반스의 반대되는 유명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공황을 일으킨 더 큰 이념, 경제적·정치적 힘을 포착하고 묘사하고 반영했다. - P217

버거는 10대로서 자신이 느꼈던 것을 되돌아보고 있지만, 나이가 들고 현명해질수록 우리는 그런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임을 깨닫게 된다.
루프의 누드는 간절히 기다렸던 순간들, 기억하거나 상상했던 가장 사적인 순간들이 보존되고 뒤틀리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레플리칸트인 레이첼이 자신의 기억을 보증하고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스냅 사진을 데커드에게 보여 주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데커드는 그녀에게 그건 네 기억이 아니라고, 단지....…… 이식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이것들은 우리의 추억이 아니다. 말하자면 완전히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창작 과정에서 각인된 이미지들 역시 루프의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 사진들이 그의 것,
그의 유일한 것으로 즉각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 P233

행동보다는 말이 쉽다. 특히 그 어떤 관념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 미에 대한 오랜 역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20세기까지 미국 서부의 사막은 겉으로 보이기로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채로 완전히 혐오스러운황무지였다. 이 황량함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게 한 것은 1901년 출간된 존 C. 반다이크의 『사막 The Desert]이 유일했다. 너무나 완전한 그 변화를 통해 우리의 행성, 우리 대부분이 경험한 유일한 행성이 제공해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몇 가지는 ‘기이한(unearthly, 지구 같지 않은)‘
혹은 ‘마치 다른 세상 같은otherworldly‘이라는 표현으로 지칭되었다. 그러므로 루프의 화성사진에 대한 우리의 반응 역시비슷한 종류여야 할 것이다. ‘사진 같지 않은unphotographly‘
또는 ‘다른 사진 같은otherphotographly ‘이 루프의 그 사진과이미지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 P235

갈망이 항상 미래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갈망은 쉽게, 자주회고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것을 갈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적 환상은 떠올리려고 해도 희미해질 위험이 있는기억이지만, 그 기억은 종종 만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약간개선되기도 한다. 반대로 기억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쩌면 그 자체에 발명의 요소가 있는지도 모른다.
갈망이 사람 또는 사물에 특정된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일반화된 갈망의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갈망이자, 가장 달래기 어렵고, 가장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래 지속되어서 존재의 일반화된 조건과 거의 구별할 수없게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절망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갈망이 절망의 이면이자 전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키르케고르의 관찰과의 유사성이 있다. 절망의 증상은갈망의 절대적 부족이다.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 P236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과 유사한 어떤 것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조건 중 어떤 것으로 발생하는 고통의 정도는 고통받는 이가 자신의 장애를 인식하는 정도에 의존해야 한다.
심리적 척도로 계산해 보면 고통의 정도는 행복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갈망, 슬픔, 좌절, 절망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이러한 차이는 어떤 사진에서도 사라져 버린다. 구별하고자 아무리 강력하게 갈망하더라도, 한 상태를 다른 상태와 구별하기는 어렵다. - P243

"살아 있을 때, 나는 갈망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빛을 배우는 학생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 - P244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은 제프 월의 거대한 사진 죽은 군인이 말한다(1986년 겨울 붉은 군대 순찰대의 아프가니스탄 모코르 근교 습격 후 장면)」에 대한 토론으로 끝을 맺는다.
이 ‘만들어진 사건‘의 이미지는 ‘사려 깊음과 힘의 모범 사례‘
로 월의 스튜디오에서 구성되었다. "다큐멘터리에 대응"162 하는 이 효과는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전투 사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월의 모형과 비교해서 축소되었는가? 아니면 강화되었는가?
예를 들어 2007년 아프가니스탄의 누리스탄에서 바위투성이의 잿빛 배경을 바탕으로 헬리콥터의 하강 기류를 피해움직이는 미군들의 행렬을 찍은 피터 반 아그트마엘의 유명한 사진을 생각해 보자.
- P245

비교적 느린 셔터 스피드가 거의 완벽한 선명함으로 모든 이를포착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많은 행동이있다. 많은 것이 진행되고 있고, 이미 진행되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중의 고요함이 있다. 전투에 뒤따르는 아득한 고요함과 유화의 고요함, 즉 (빠른 셔터 스피드로 시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담고 있는 고요함 말이다. 유화를 그리는 화가가 과일 또는 꽃 한 병을 묘사하는)정물화에 쏟는 끈기 있는 관찰력으로, 전투와 활동의 소용돌이가 상상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사진은 실제 전투를 기록할수 있지만, 카파의 유명한 사진 즉 스페인 내전에서 사망한 공화당 군인을 찍은(다만 이 사진은 조작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사진이나 디데이 상륙 장면을 찍은 사진처럼 약간 긴박하고 흐릿하게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극심한 폭력의 여파안에서만 사진과 유화의 두 가지 힘이 단일하게 연장된 순간에 결합될 수 있다. - P249

각각의 사진 안에 시간의 비정상적인 양이 축적된 역설적 결과로, 감지된 시간의 부재는 공허함의 밀폐된 분위기를심화하는 또 다른 결여에 의해 두드러지며, 결과적으로 교통체중과 혼잡함이 없는 사진적 과거와의 연결을 강조하고 있다. 촬영 이후 후반 작업 과정에서 차량을 빼내는 대신 차량이 없는 막간을 촬영한 결과, 차량 운행이 결여된 이 세상에는 버논 로드와 하이 로드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시신 안치실‘이 목적지와 종착역에 편리하게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부터 어슬렁거리며 건너오는, 즉 과거의 긴 노출 시간으로 촬영한 마치 좀비나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은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게 소환된다.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 이 질문은 말이 안 된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 P264

그 단어 자체의확장된 개념 속에서 사진은 정확해지고 진실성을 얻는다). 요즘우리는 고지된 시간에 맞춰 영화관에 도착하려고 노력하지만, 런던 이스트 엔드의 꿈의 시간에 발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에세이 거기 없는것은 아무것도 아니다The Nothing That Is Not There」에서 레너드마이클스는 "호퍼의 시대에는 처음부터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종 중간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표현인 ‘여기가 내가 들어온 곳이다This is where I came in‘ 라는 표현으로 이어졌다"173 고말했다. 언제when가 아니라 ‘어디where‘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각 사진마다 30분씩 시간을 할애하면서 보고 있는
‘어디‘인 것이다. - P266

그녀의 사진은 조용하고 친밀하고 사적이고 내성적인 사진, 즉 점점 더 부재의 예술에 이르기 위한 사진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찍은 사진 중 하나에서 아기 다야니타는거의 알아볼 수 없다. 다른 두 장의 사진에서는 호텔 방의 멋진 환경을 위해 완전히 간과된다. 다 큰 딸은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녀의 사진은 빈방과 빈 침대, 그리고 빌리 콜린스가 말하는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로 가득 차 있다. "아무도잔을 내려놓지 않는, 책을 엎어 놓지 않는 곳"176 말이다. 이 시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비어 있는 의자를 생각하고 있지만, 물론 사진에서는 그 순간조차도 영원하다.
- P271

사생활Privacy』에 실린 사진의 절반 정도는 부와 육체로가득 찬 호화로운 집과 넓은 방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이다.
이것의 효과는 사진의 나머지 절반인 텅 빈 내부를 더욱 텅비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네루가 알라하바드에서살았던 집인 아난드 바반 박물관의 전시실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배가된 몇 배나 더 커진 공허감을 얻는다. 입지 않은 옷이 빈방의 열리지 않은 문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사진들, 이방들에서 두드러지는 부재는 멈춰진 천장 팬으로 상징되는현재에 있다. 역사가 흘러간 후 죽은 채로 남겨진 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워커 에반스는 자신의 빈 실내 사진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끔 그 부재를 통해 사람들을 표현하고싶다. 실내에 누군가가 거의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다" - P271

벽에 걸려 있거나 선반 위에 세워진 실제 사진, 또는 반짝이는 바닥과 광이 나는 가구와 창문, 거울에 반사되는 형태의 덜 선명한 사진 등 방에 포함된 다른 사진에 의해 자기감시의 분위기가 방 곳곳에서 드러나고 강화된다(사진에서 거울과 사진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종종 불가능하다. 사실 거울은 사진 속에서 자동으로 사진으로 변형된다. 말하자면 사진은 시간이 제거된 거울이다). 죽은 것 같고 수동적이며 스스로보는 자기 관찰의 층위들은 정물 사진의 정적 stillness 이라는 본질을 드러내는 누적된 효과를 자아낸다. 이것이 보고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2007년 바라나시의 크리티 갤러리에서 열린 ‘더 가까이 가버리다‘ 전시를 방문한한 관객이 파이즈의 가잘 훔 데켄제(우리는 보게 된다, We WillSee)」의 몇 줄을 방명록에 우르두어로 베껴 쓴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알라의 이름뿐이다.
그는 부재하지만 존재한다.
그는 보이는 존재이자 보는 존재다. - P273

‘꿈의 빌라‘ 시리즈의 형형색색의 외부가 해체된 후, 다야니타의 흑백 사진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파일 룸』이 출간되었다. 이는 문서documents에 대한 다큐멘터리 기록이다! 여기에는 공허의 여지가 없다. 가방,
찬장, 기록 보관소 및 캐비닛은 지질학적 지층의 무게와 영구성을 지닌 책, 종이, 폴더로 가득 차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무게와 영구성은 제외해야 한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결국 그것들은 단지 사진일 뿐이지만, 사실은 얼마나 쉽게 가상의 물건이 되는가! 그리하여 여러 방중 하나에서 충분한수의 서랍을 열어 보면 더 가까이 가버리다」, 「자키르 후세인』, 『사랑의 집House of Love』, 그리고 이전의 모든 책이 인쇄된사진과 밀착 시트들과 함께 보르헤스의 방식으로 깔끔하게보존된 것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결국 여기가 그녀가 끝나게 된 지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278

그래서 특히 최근에 발간된 『예고되지 않은 이야기들Unheralded Stories』에서 헌터의 사진들은 점점 더 몽환적으로변하는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실내또는 초자연적 풍경 속에서 마치 프레임 속을 떠돌아다니는인물처럼 보류된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많은 사진들처럼, 그 이야기들은 미술사적 과거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마치 앤드루 와이어스의 그림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기어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속박된다는 악몽 같은 암시와 함께 분위기가 불길할 때도 있다. 다른 장면들은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 - P291

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유 의지의 몽유병적 결여라는 특징이있다. 어느 쪽이든 이 꿈의 독특한 특징은 시간의 부재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는 보류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결국 시간 안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 결국 말이다. - P292

마라도나의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이야기는 길게 계속되지만, 그가 나폴리에서 보낸 시간의 본질은 매우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이 이 도시에 와서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함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로베르토 칼라소의책의 주제로는 가치가 있지만, 영화화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사당에 있는 증거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마라도나의 등번호 10번을 새긴 파란 셔츠를 입은 순례자 무리가 벽화 아래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도 그들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몇 장 찍었다. 나는 그 재미있는 장면, 이 성스러운공간에 대한, 혹은 적어도 시각적 유물 몇 가지에 대한 영원한 기록을 갖고 싶었다. - P304

하지만 내의 사진을 통해 그들은 결국 미술관의 예술 작품 속에 있게 되었고, 그 이유로 그들의 믿음은 결국 정당화되었다. 이곳 스트라우스의필라델피아는 매우 다른 세계다. 이곳에서 가난은 에반스의앨라배마 시골 사진 속의 가난만큼이나 현실적인 문제다. 에반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트라우스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낸이 자신의 허구와 친밀했던 것만큼 현실과 친밀했다는점이다. 또한 스트라우스는 다이앤 아버스가 교활하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 자신을 상황 속으로 밀어 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 묘사된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녀가 더 먼 곳, 말하자면 라스베이거스에 닿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는 고향에서 키워 온 친밀함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친구와의 페이스북 대화(필라델피아 국제 사진 센터 도록에 실려 있다.)에서 그녀는 이것을 꽤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난항상 모든 걸 들어오게 하고, 나 자신의 일부로서 중요한 모든 사람과 함께할 뿐이야." 친구의 대답은 당연히 이렇다. "우와……… 놀라운 인생관이네." - P310

스트라우스의 사진적 관점을 관통하는 흔적과 선례는 주로 미국인이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펜실베이니아주 리머릭 근처에서 찍은 「풀이 난 파란 건물Blue Building withGrass」이나 밤의 불빛 사진 같은 것도 있다. 이 사진들의 크기가 더 크다면 거스키의 신봉자가 만든 작품으로 착각할 수도 - P310

있다. 망설이면서 제안해 본다면, 심지어 루이지 기리의 반향도 있다. 나는 스트라우스가 포착한 매우 공허하고 고요한 장면, 종종 웅덩이에 반사된 것을 찍은 장면을 생각한다. 웅덩이에는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동시에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것, 즉 그녀가 안으로 들여놓은 ‘모든 것‘의 평범함에 의해 발이 묶인 세상이 반사된다. 이는 마치 그녀가 셔터뿐 아니라 시각적 리모컨의 음소거 버튼도 누른 것처럼 느껴진다.
- P311

나는 수년 동안 런던을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바로 서두르는 것이었다. 늦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지하철역이나 다음 신호등에서 몇 분의 배당을 양도할지 결정하고몇 초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나 지름길에 주목하는 것 말이다. 크리스토퍼 레이드의 『점심의 노래 The Song of Lunch』의 주인공처럼 "꾸물거리거나 바보처럼 멈춰 서 있는 보행자들을 피해 깡총거리며 뛰어가는 것"은 재미있었다. 이후 그것은 재미와는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굳어지거나 강화되었다. 단순히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고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의 웰빙은 런던의 기본 배경음인 욕설의 청각적 침입을 차단하고 시각적 진동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눈가리개를 착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해외에 있는 동안 여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즉 허락이나 방해 없이,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디든, 이상적으로는 집에 도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 P312

인류라는 급류의
물살과 회오리에
운반되는 게 아니라 올라타는
그 덧없는 즐거움을느끼게 되었다. 

매트가 전직 스케이트보드 선수라는 점에서 이 구절은특히 적절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 서커스라는 급류의 가장 깊은 곳, 너무 깊어서 전혀 급류가 아닌 곳에서 기꺼이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계시였다. 특히 현재 이른바 세계에서 공해가 가장 심한 거리에 속한다고알려진 옥스퍼드 스트리트는 사람들이 런던에서 절대 예정보다 더 길게 머무르지 않는 거리다. 원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그 안에 갇히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314

리카드가 선택한 장소는 경제적으로 황폐한 도시의 변두리, 즉 망가져 버린 미국의 약속이 끊임없는 여파를 형성하는황량한 땅과 적막한 길이다. 이런 장소들은 길을 잃은 인물들로 가득한데, 이는 그들이 자동차의 360도 시야 안으로 헤매고 다녔으므로 모두 길을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번영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번영의 길이 그들을 지나쳐간 것이다. 길을 가로질러 허우적대며천천히 달리는 이 쓸쓸한 인물들은 마치 방랑하듯, 마치 후기자본주의(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그 뒤에는 더 큰 자본주의가오는)의 막다른 골목에 영원히 갇힌 듯, 반대편 도로 경계선까지 결코 가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 P330

결정적으로 서정주의는 불결함에 의해 과소평가된다. 계속해서 연기되면서 새로워지는 약속의 감각은 흙먼지에 의해절대 부서지지는 않되억제된다. 흙먼지가 없다면 이 사진은코린 데이와 케이트 모스가 시작한 반항적인 패션 화보처럼보일 것이다. 셔츠와 카우보이 부츠는 멋지지만, 옷은 그냥 찢겨 있는 게 아니고 흙먼지는 단지 흙먼지가 아니다. 그것은 재이자 쓰레기다. 우리는 모두 버닝맨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휴대용 변기와 손소독제를 들고 먼지를 뒤집어쓸 준비가되어 있지만, 여기 담긴 손은 1930년대에 도로시아 랭이 찍은손만큼이나 더럽다.
- P337

팁발에 있는 솜의 실종자 추모비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경사진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에서도 보이며, 만약 이곳에 힘이모이고 뿜어져 나오는 것을 의심한다면, 표지판은 방문객들에게 그들이 ‘성스러운 땅 위에 서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1차 세계대전 공동묘지들도, 무덤이 10여 개밖에 없는 묘지들도 주변의 풍경을 장악하고 있다. 세월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은 낮은 경계선 밖에 놓인 것이 무엇이건목적대로 돌아가게 한다. 밭은 일궈야 하고, 과일은 재배해야하며, 농작물은 경작해야 하고, 생명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P342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죽음에 다다른다. 목가적이긴 하지만 들판에는 전투의 풍경을 희미하게 상기시키는 것들이 흩뿌려져 있다. 가파른 둑은 등산객들에게 꼭대기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선사하고, 철조망은 수천 마일에 걸쳐서 있고, 배수로는 마치 물이 고인 참호의 잔해처럼 보인다.
불길한 동시대의 울림도 있다. 나무와 덤불의 클로즈업은 크리스마스에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숲을 고생스럽게 수색하는 수색대에 대한 뉴스 보도 속 지형을 연상시킨다.
물론 시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배경의 전원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지식과 결합하면서, 죽은 사람들이 무시무시하게 존재하는 최근의 사진 시리즈들을 떠올리게 한다. 2011년 페르난도 브리토는 멕시코 북부 마약 전쟁의 피해자들을 보여 준 작품 「풍경 속에서 사라진 Lost in the Landscape으로 세계 언론 사진상을 수상했다.  - P346

어떻게 보였는지 알려 주는 몇분의 1초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런 짧은 노출의 결과인 이미지는 때때로 개인의 삶이 멈춘순간부터 그 풍경을 에워싸는 참사의 오랜 여파를 통과해 망각에 젖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현재까지 이르는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시간의 문제는 기억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게 된다.
D. H. 로렌스의 소설에서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어 마비 환자가 된 남편을 둔 채털리부인 코니는 남편의 사유지이며 ‘전쟁 중에‘ 벌목된 숲속을 걷다가 갑자기 그리고 감사한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의식하게 된다. "잔주름 많고 무수한잔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갈색 고사리 사이에서 자라난 잿빛의 완강한 밑동을 가진 나무들은 얼마나 고요한지!
새들이 얼마나 평화롭게 나무 사이를 스쳐 날아다니는지! 이장소는 기억하고 있어.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199듀이 매슈스의 사진들은 어떤 장소에서 잊혔던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식물에 대한 코니의 순간적 기억에 공감하게해 준다. 사진은 단순히 추모비 역할을 하기보다 기억에 대한다큐멘터리적 묘사일 수 있다. - P347

하지만 이런 특정장소에서 특정 순간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즉 시간이 멈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상황을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면, 다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사진들은 거의 한 세기의 시간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진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으며 묘사된 장소들이 시간과 무관한 현재에 존재한다는 엄연한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사진이 시간을 멈춘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이사진 중 일부에서는 풍경 자체가 시간 속에서 정지된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이 사진이 적절하게 기록한 것이다. 시그프리드서순은 새벽 공격으로 고지를 탈환하려는, 죽게 될 남자들의손목에서 얼마나 "시간이 멍하고 바쁘게 똑딱거렸"203 는지 썼다. 그 후에 남은 것은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 죽은 시간이다.
- P348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며」에 "죽음으로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일이 일어난 날, 정확히 말하면 그날의 남은 부분이고,
시간은 더욱 짧다"고 썼다. 이런 의미에서 새벽의 처형은개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삶, 많은 시간을 빼앗아 가는반면, 해 질 녘에 쏜 총알은 그들의 인생에서 오직 황혼만 잃도록 고안되었다. 어느 쪽이든 이 사진들은 잃어버린 것, 그리고 그 잃어버림에서 남은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 P349

이런 칠흑 같은 형태를 더 많이 볼수록, 시간적 원근법은더 깊어진다. 늘어진 실루엣은 자코메티의 앙상한 조각의 원초적 특성만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동굴 벽에 그려진 인물처럼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막아 내고 싶은 짐승과 폭력의 위협에 취약한 인간들 말이다. 동굴에는 항상 위협이 풍부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여기서 위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이 바로 위협이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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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어떻게 삶의 성찰로 이어지는가

제프 다이어는 삶과 사진의 세계를 겹쳐 보여 준다. 그는 사진을 논하면서 이론이나 역사의 무게에 눌리지 않는다. 그가 사진에서 읽어 내고자 하는 건 사진가와 감상자의 욕망이다.
어떤 욕망이 어떻게 이미지에 담겼는지, 또 그 욕망은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그래서 이 짧은사진 비평들은 때로는 에세이로, 때로는 세계에 대한 단상으로 변모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사진이라는 매체가 내재한 사색의 가능성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사진을 읽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다양한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것은 보통 캡션을 통해 설명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사진이 보는 경험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다층적 의미를 지닌 다른 것들(엄밀히 말해 다층적 의미의 사진들)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의미는 몇 겹의 층위 아래에 숨겨진것이 아니다. 그 신비로운 진실은 이런 층위에 의해 성취된 침식과 축적의 결합이다. 따라서 이 사진의 몇 가지 특징을 순차적으로 검토하겠지만, 사진 속에 이러한 특징이 노출되면서 동시에 은폐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 P56

헬렌 레빗처럼 어린 시절을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혹은 사회적 사진의 초창기 역사와 그 가능성은 우리의 어린시절만큼이나 확실하게 지나가 버린 걸까?
레빗의 사진들은 진정으로 독창성이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그녀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은혜를 분명히 입었기 때문이다. 카르티에 브레송의 전례가 없었다면 그녀는 거리에서볼 수 있는 미묘한 시詩, 즉 시각적 뒤엉킴과 메아리, 운율, 카르티에 브레송이 세상 곳곳에서 발견해 낸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사소한 기하학에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카르티에 브레송 이전에는 삶에 내재해 있는 그 넘쳐흐르는 시정詩情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단 그가 알아차리자,
돌아다닐 공간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눈에 보이는것이 그렇게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숨어 있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레빗은 돌아다니면서 "실재하는 세상 안에서 미학적 현실을 지각" 하는 제임스 에이지의 공식을 무심코 시도하게 되었다. - P59

그리하여 레빗의 눈앞에는 많은 생명이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노는 아이들의 다큐멘터리 기록을 제작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실재하는 세상이 너무도 쉽게 흉내나 상상속으로 녹아 없어지는 상황에서 도시 아이로 사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아이들의 경험을 담아냈다. 물론 이것은 그 자체로 위험하다. 현관문 너머에 있는 난간에 올라가서 싸우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분명히실존하는 위험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아이들의 전투적인 열광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긴장으로 인해 그런 장면이 복잡해지거나 악화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손쉬운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이다. 인종의 혼합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사진은 목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감상주의의 흔적은 없다. 아무것도 희미하게 가려지지 않고, 아무도 이 사진이나 그 안에 있는 아이들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P60

레빗의 경이로운 사진 중에서 아이들과 자전거, 거울을찍은 이 사진이 단연코 가장 어수선하고 복잡하다. 아이들이옷장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 중 첫 번째 작품인 『사자, 마녀, 옷장과 유사한 멋진리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진에서는 거울을 통해 (어린 시절의) 다른 세계를 힐끔 볼 수 있는데, 반사된 모습이 아니라 깨끗하고 직접적인 시야를 제공하므로, 더 큰 작품의 일부와 연결되는 일종의 포털 또는 도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와 이아이들의 세계를 갈라놓는 것은 없다. 또는 다르게 표현하자면, 액자를 들고 있는 두 소년은 그들이 거울을 깼다는 것을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자전거 탄 아이의 모습을, 실재하는 생명체를 담은 그들만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앞서 나는 레빗의 사진에 내재된 위험이라는 요소에 대해 언급했다. 이 사진에서 위험은 거울의 깨진 파편으로 표현된다. - P62

그녀의 작품에는 분명 자신감이 있지만, 완전히 제도화된 자신감은 아니다.
그 사진들은 절대 포스트모던하거나 개념적이지 않을뿐더러,
‘무엇이 ‘현실‘인지 묻거나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에 관해 묻는일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씨름할 필요가 없는 많은 것들로 인해, 레빗은 자신의 눈앞에서 끝없는 종이접기처럼 펼쳐졌다가 다시 접히는 것들에게 완전히 집중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이제 사진은 스스로를 진지하고 어른스럽게 여기면서(그것이 꽤 유치해 보일 수 있다는 예측 가능한 역설적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역사를 너무도 의식하고 있으므로, 아마도 다시는그 시절의 신선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길거리에서노는 모습을 찍은 오늘날의 사진은 반드시 레빗의 사진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뿐 아니라, 레빗이 어린 시절을 묘사한 방식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 사진들은 레빗에대한 논평, 혹은 헌사가 될 것이다. - P64

비비안 마이어는 사후 발견의 극단적인 예로, 온전히 그녀가 본 것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진계에 전혀알려지지 않았을뿐더러, 그녀가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조차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아이는 물론 가까운 친구조차 없었다는 사실의 여파 혹은 부작용으로 여겨지는 이런 사실은 불행하고 심지어 잔인해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인간에 잠재된 알 수 없는 능력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있다.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시 센서스Census」에 호머에 대해 쓴 것처럼, "여가 시간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 P66

1960년대 이후 종종 좌절된 자유 사이에서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억압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 마이어는 빅토리아 시대 소설의 전형적 인물인 보모(혹은 가정교사)로서 생계를 꾸렸다. 가정생활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외부인으로서, 관찰력 말고는 다른 어떤 재능도 발달시킬 수 없었다.
마이어는 오랫동안 그녀를 규정해 온 특유의 늘어진 모자와코트 등으로 완벽하게 표현된, 주변 환경에 정교히 적응하게해 준 감성을 통해 시카고와 뉴욕 거리를 조심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 같다. 마이어가 마치 그녀의 운명을 예언하는 역할을 하는 듯한 할머니를 촬영한 사진에서는필연적인 신랄함을 찾아볼 수 있다. 외롭고 괴상한 모습으로외투를 걸쳐 입은 채 순간적으로 꿰뚫어보는 카메라의 능력을 통해 직감한, 평생의 비밀을 감내하는 듯한 운명 말이다. - P69

아직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구성 요소가 하나 있다. 맨 앞으로 비집고 들어가 플래카드 사이에 서 있는 바가지 머리를한 외로운 소년 말이다. 열세살정도로 보인다. 사람들이 긴장할 때 가끔 그러듯이, 오른팔이 배 위를 가로질러서 왼팔을잡고 있다.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무늬가 있는 반팔 셔츠를입고 있다. 살짝 웃고 있는데, 백인이다. 그는 거기에 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며, 심지어 그의 손목시계는 그가 거기에 있던 때와 사진이 찍힌 정확한 순간을 알려 주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사진을 보았으며, 우리의 입가에 맴도는 질문은 그신비함과 마술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는, 다른 방법으로 말하면, 이 사진은 우리의 질문에 대해 완강히 침묵을 지키고있다. 그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설튼의말로 돌아가 보면, 이 생명체가 어떻게 방으로 들어온 걸까? - P73

사진 속 모든 인물 중에서 이 소년은 어리다는 이점으로인해 60년이 지난 먼 미래인 지금 자신의 존재로 인해 제기된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그의 설명을 듣고 싶다. 로리의 말에 따르면,
전시에 소개된 사진 속 몇몇 사람들은 옛날 사진 앞에서 자기자신을 확인하고 다시 사진을 찍기 위해 전시를 방문했다. 이는 역사적 사건의 한가운데에서 사진에 찍힌 다른 많은 사람들이 여러 다른 상황에서 했던 일이다. 사람들의 기억이 사진의 존재에 의해 반박되거나 강화되거나 심지어 창조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는 부분적으로는 종종 이해에 도움이 된다. - P75

가득 찬 프레임을 통해 나이와 시대 차이는 줄어들고, 디커라바가 방해하기보다는 보존한 순간의 친밀함이 더해지고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사진 속 두 사람과 가까이에 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재즈 음악가의 지위,
더 정확히는 3단계로 구성된 그들의 지위와 관련된 사실이 드러난다. 인종 차별은 그들이 2류 시민임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디커라바는 그런 불평등한 환경에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거리에 있는 다른 흑인들을 촬영하는 것처럼 콜트레인과 웹스터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는 "음악가를 음악가가 아니라 사람으로, 그리고 일꾼으로 생각한다"고말했다. 그의 다른 음악가 사진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은 할렘의 사람들을 찍기 위해 진행 중이었던 더 큰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1951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지원금을 신청할 때 말했듯이, 그는 "오직 흑인 사진가만이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흑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이해에서 나온 창의적인 표현을 원한다." - P83

흔히 말하듯 재즈는 순간 안에 존재한다. 디커라바는 서사의 맥락을 배제함으로써 순간의 중요성을 확정 짓고 동시에 순간을 확장한다. 어떤 면에서는 셔터 속도가 너무 느려서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명확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실패는 더 많은 시간이 사진 속으로 새어 들어가고 넘쳐흐르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므로 이사진이 프레이밍된 방식을 즉흥 연주라는 다른 형태를 통해명확히 설명해 보자. 이 사진이 이미지의 패턴으로 된 카펫의일부라고 상상해 보자.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패턴 내부의 어디에 있던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역사가 그 시작(재즈에서는버디 볼든 또는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한 사건의 연대기적 순서와 관련이 있는 반면 카펫의 패턴은 중앙으로 집중된다는것을 알고 있다. 이 사진은 주변의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해 집어삼켜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항상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하거나 되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진은 재즈의 중심에 위치하는 사진이다. - P86

트럼펫 연주자 찰스톨리버의 말처럼 콜트레인이 "우주로 가 버리기‘로 선택하면, 곧바로 존스는 이쯤에서 끝내자며 드럼 연주자 라시드 알리를 놔두고 색소폰연주자를 따라 우주 공간으로 따라갔다. 엘빈은 지구의 무아지경의 순간을 보존한 사진가처럼 실재와 현실에, 가장 작은시간에 뿌리를 두며 남겨진다. 콜트레인, 엘빈과 다른 밴드 멤버들은 「마이 페이버릿 스」를 수없이 연주했다. 디커라바의작품 설명 또한 수없이 자주 인용되어왔다. 하지만 다시 들을 가치가 있다. "내 사진은 즉각적인 동시에 영원하다. 너무나 심오한 순간을 보여 주므로 그 순간은 영원이 된다……… 마치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사람이 달리기 시작해서, 쏘아 올려졌다가, 내려오는 것과 같다. 맨 꼭대기에서는 움직임이 없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는다. 바로 그것이 내가 기다리는순간이다. 다른 생명력과 균형을 이루는 순간………… 모든 힘이융합하는 순간,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는 순간, 그것이 영원이고...... 재즈이며..... 인생이다.  - P90

워홀이 일찍이 깨달았듯이, 의미가 명백하다고 해서 그것을만들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워홀이 만들기 전까지는 죽음과 재앙에 대한 이런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만큼 이 이미지들은 우연한 사고 같다.
사고가 나기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평범하고, 눈에띄지 않으며, 정상이다. 그리고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사고 이전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포함해 모든 것은 완전히 바뀐다. 워홀의 엄청난 성공과 영향력으로 인해 그가 얼마나 극단적인 사례인지는 쉽게 잊히지만, 이와 같은 사례는 그전에는 없었고 그 후에만 있을 뿐이다. (죽음과 재난에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실크 스크린 회화는 단순히 그것들이 보이는 방식만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식을 창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  - P91

순간은 심지어 순간이 아니라(순간은 시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글쎄, 뭐라고 칭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해 보자.
그는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그 순간을 확장하는 것이아니다. 반대로 시간 자체가 수축하는 것, 수축 포장에 더 가깝다. 동일한 순간이 아닌, 약간 새로운 순서로 크기와 색이변화하는 순간들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리하여 그 사건은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간에, 마취제 역할을 하는미학적 영역에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 이디세지윅을 두고 워홀의 연적으로 유명했던 한 인물이 나중에 말했듯이, 아무도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워홀은 "똑같은 것을 많이 볼수록 더많은 의미가 사라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폭력과 죽음의 사진으로부터 파생된 예술품에서 하나의 의미와 가치를표백하는 일은 다른 일들의 급진적 발전과 보폭을 맞춰 진행된다. - P95

‘아무것도‘라는 말을 지금까지 기다려야만 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워홀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정수"라는이유로 수프 캔을 그리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아닌 것이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이해하려면, 여러 종류의「전기의자」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에세이의 도입부에서 그랬듯 뻔한 것부터 시작해 보자. 그것은 의자다. 존 자코우스키는 아제에 관한 책에서 사진의 발명 이후 빈 의자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했다. 빈 의자가 부재의 이미지가 된 것이다." 이 경우 부재는 "남은 것은 침묵"이라는 햄릿의 마지막 대사가 압축되어 조용히 울리는 가운데) ‘침묵‘이라는 자기 설명만큼이나 절대적이다. 검은색의 강렬함은 마치 망각이 작품의 바탕이 된 원본 사진에는 완전히 부재하는방식으로 이미지를 잠식하거나 먹어치워 버린 것처럼 보이게한다. 진공은 이미지로부터 빠져나와 이미지에 모여든다. 이사진의 모든 것, 즉 고요함, 공허, 밀실공포를 느끼게 하는 침묵은 상응하는 시간의 부재에 대해 언급할 것을 촉구한다. 다시 한번,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종말론적 장면의 목격자라고상상하면서 다양한 작품에서 인용한 계시록의 이상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다. "더는 시간이 없을 것이다." - P101

하지만 기억하라. 이것은 워홀의 작품이다. 그러니 모순적 감각을 잊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특히 외부의 시간이 우리가 사진에서 의자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간략하게 말하면, 의자는 곧 사라질 것이다. 미국에서 사형 제도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동안, 독극물 주 - P101

사로 인해 전기의자는 대부분쓸모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집행할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처벌의 상징, 낡은 두려움의상징이 된 제 처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거기 놓여 있는 의자는 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결과전기의자는 은퇴의 기념비로서, 망해 버린 이발소에 놓인 의자 같은 특징을 지닌다. 전혀 밝지 않은 미래의 모습에서 그의자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악마의 섬‘ 알카트라즈와 같은 용도로 전환되는 것이다. 관광객들은 잠시라도 거기에 앉아서, 그것이 항상 하기로 했던 일, 즉 매 순간을 마지막처럼 사는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의자는 의자가 하는 일을 할 것이다. 의자는 자신의 다리에 가해진 하중을 삭제하고는 기다릴 것이다. 마치 자신이 영원이 된 것처럼. - P102

또한 그에게는 어떤 사진가보다도 단순하고 중요한 재능이 있었다.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다. 단지 워홀하고만 같은 방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해변의 모래 빛 금발 머리였던 데이비드 호크니, 그리고 놀랍도록 잘생긴 루샤와 친밀한 사이였다. 이런 종류의 가벼운 친밀함은 낸 골딘의 『성적종속물에 관한 발라드 Ballad of Sexual Dependency』와 연관되지만, 골딘의 사진이 그들 자신의 역사적 중요성을 기록하는 거울이 된 데 반해 (골딘은 그들 중에서 마약이 아닌 다른 일을 하게 된 유일한 사람이다), 호퍼의 작업은 현재의 세상이 보이는대로 만들어지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전기적 자료의원천이다. 그의 사진 속에서 우리는 일어난 그대로의 역사뿐아니라, 신화의 형성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증거도 볼수 있다. 이런 작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치가 더욱 커진다.  - P110

수많은 인상적인 작품들 사이에 여러 걸작이 있다. 철조망 펜스의 그물 같은 그림자가 조용한 여성스러움을 드리운,
셔츠를 벗은 폴 뉴먼(1964)의 모습이 담긴 유명한 사진은 남성을 찍은 가장 아름다운 사진 중 하나로, 내면을 드러내는 배우의 미묘한 재주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1964년루샤의 주유소 회화 전시의 포스터로 사용된, 일명 「이중 잣대Double Standard」라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는 자동차 앞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두 개의 스탠다드 주유소 간판과 반사되어 보이는 후방의 차, 선루프를 통해 엿보이는 하늘이 매우 영화적으로 표현된 동시에 스스로 캡션 역할을 하고 있다. 워커에반스, 프랭크, 프리들랜더, 스티븐 쇼어 등 너무나 많은 사진적 흐름이 여기에 모여 있다. 전후 미국의 사진을 단 하나의이미지로 정제해야 할 때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훨씬더 못한 작품을 고를 수도 있다. - P112

스턴펠드의 발언이 시사하듯, 1970년대 중반이 되자 많은 사진가들이 단색의 거의 전적인 지배와 경쟁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발터 벤야민이 사진 자체의 여명에 대해 "발명의 시기가 무르익었고, 같은 목적을 위해 독자적으로 노력했던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은 그 시기를 감지했다"고 말한 것은 1970년대에 사진이 컬러 매체로 재창안된 일에도 적용할수 있다. 놀랍게도 사진의 바깥에서는 남극을 탐험하고 4분안에 1마일을 달리고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등 오랫동안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라고 여겨져 온 것들이 갑자기 실현될 가능성이 커져서, 결승선이 아닌 출발선을 향해 달려가는 단거리 육상 선수 같은 모습을 띠었다. 그러므로 많은 비평가와관객에게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이글스턴이 바로 그 정상에서컬러 스냅 사진(!)으로 미학적 공격을 감행하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결정된 데는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 담당 디렉터 존 자코우스키의 영향이 매우 컸다. - P114

흑백 사진에서는 어떤 일이 막 일어났거나 일어나려고 할수 있다. 비록 그 일(종종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밝혀지더라도)이 이전에 일어났거나 나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과 인과관계가 없다 해도 말이다. 여기에는 플롯 대신 파편과 패턴,
패턴의 파편들이 있다. 체호프의 작품에서 주변에 총이 있고1막에서 벽에 총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모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 하지만 여기에는 2막이 없다. 생각해보면 1막도 없으며, 제작되지 않은 영화를 위해 섭외하지 않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읽지 않은 대본을 위한 예고편만 있을 뿐이다. 종종 여기에는 식별이 가능한 동시에 응집력이 뛰어나며 수집 조사가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심리 상태의 시각적 표현인 운명이 명백하게 결여되어 있음을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진단하려는 바로 그것의먹이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 P121

에반스는 컬러 사진이 ‘천박하다‘고 선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헤어조크의 많은 사진은 그 경계에 불안하게 서있다. 문제는 코다크롬이 붉은색을 너무도 강렬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쪽 지방인 밴쿠버에 있는 부식되고 빛바랜 표면들이 마치 남쪽의 아바나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그 효과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붉은색은 마치 아동용 플라스틱 접시의 섬뜩한 표면처럼 다른 모든 흥미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과도하게선명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편집자들은 그림자를 드리운오아시스로 쓰일 흑백 사진 몇 장을 영리하게 이 책에 포함한 것 같다. 하지만 그중 몇 작품, 특히 당구대와 당구공은 색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밝게 빛나고 있다! 헤어조크의 컬러팔레트는 최상의 상태일때 탄력 있고, 때로는 쓸쓸한 분위기로 제프 월이 서문에서 "페인트의 노화, 시간에 따른 색의 변화"라고 말한 것을 증명한다. - P130

날씨가 아주 좋기로 유명한 이곳에도 항상 숨기거나 막아야 할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검은 편백나무가 하얀 벽 앞에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D. H. 로렌스는 『이탈리아의 황혼Twilight in Italy』에 "밤의 어둠을 밝힐 촛불이 있는 것처럼, 편백나무는 완연한 햇빛 아래에서 어둠이 불타오르게 하는 촛불"이라고 썼다. 이 사진들은 로렌스가 산 가우덴초에서 관찰한 것이 로스앤젤레스의 긴 햇살 아래에서도 사실이었음을증명한다. - P143

이 현실은 마치 꿈만 같다. 그 꿈이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친숙하지만 여전히 신비롭다." 그리고 미스터리는 매우 투명하기때문에 그 깊이를 알 수 없다(‘투명성‘은 기리의 개인적 단어 목록의 또 다른 키워드다. 앞서 살펴본 현실/형이상학의 패턴을 반복하면서 문자 그대로 투명성을 만드는 것은 "투명성 그 자체의개념에 접근하는 방식이었다. 감춰진 것은 없고 모든 것이보류되어 있다. 눈이 뇌에 요구하는 투명도가 어떻게 불투명할 수 있겠는가? 또한 모든 거울은 창이며, 그 반대의 경우 우리는 잠재적 출구를 제공하는 거울 안에 밀폐되어 있다. 탈출가능성은 감금의 환영과 구분되기 어렵다(모든 사람이 이자각몽에서 깨어나 탈출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 너머에놓여 있는 것은 표면에 더 깊이 잠긴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섬 해안 근처의 화장실처럼, 경이로운 세계의 모든 조각은 다른 조각들과 일치하며, 심지어 그 프레임 너머의 아직 보이지않는 부분과도 일치한다. 큰 세계는 가장 작은 조각에 함축되어 있다. 가장 작은 부분은 전체를 포함한다.  - P149

흔들리는 나무나 서두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없는 개별사진의 고요함은 징후와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다시말하지만 논리는 순환적이고 밀폐되어 있다. 고요함은 시간의 부재를 공간적으로 발현하고, 공간을 통하는 움직임의 결여를 시간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서사가 부족한 것이다. 순간을넘어서는 움직임은 없다. 기술적 의미를 제외한다면 250분의1초든 뭐든 순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무한대의 거리에 초점을 맞추는 기능을 제공한다. 내 생각에 셔터스피드에서 무한대의 등가물은 아마 영원일 것이다. 기리의사진은 하나하나 우리에게 영원의 특정한 순간을 제공한다.
그 사진들은 자신을 완전히 제공하면서, 순간적으로 우리가오랜 시간 동안뿐만 아니라 영원이라는 한계점 위에 서서볼수 있다는 느낌을 전한다. - P150

사진은 사진에 찍힌 사물과 같지 않다. 그러나 사진은 사물 자체에서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게 해 주기도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진은 사물에 관해 거의 의식하지 못했거나 완전히 망각하고 있던 것을 알려 준다. 에드워드 웨스턴은 고추나 변기 같은 것을 촬영하면서, 카메라는 "사물 자체의실체와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101 특별히 준비된 기계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당시는 카메라의 잠재력을 탐색하고 확립하던 과정이었고, 그래서 카메라가 필연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었다. 피터 미첼의 허수아비 사진에서 사진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전에 산책하면서 이 허수아비들을 수백 번마주쳤던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허수아비를 지나쳤을까? - P152

나는 허수아비가 노숙자라고 말했지만, 허수아비보다 더단단하게 한 장소에 붙어 있는 것은 동상이나 나무뿐이다. 어떤 허수아비는 걷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존재론적 한계라기 보다는 사진이 발걸음을 얼어붙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정도로 허수아비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완전히 편안하게존재한다. 그리고 허수아비들은 잠을 전혀 자지 않는다. 영원한 각성 상태는 그들의 좌우명이자 생활 양식이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존다면, 새들을 막는 그들의 효율은 저하될 것이다.
그들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사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므로) 이는 명백하다. 그 의식은 대개 깊은 명상을 통해 얻어진다. 자아가 결여된 그들은 땅과 하늘, 그리고 더나아가모든 창조물과 하나다. 음……… 까마귀도 포함해서?
- P156

나는허수아비의 평균 기대수명을 알지 못한다. (패션계처럼) 계절단위일까? 아니면 연단위일까? 어느 쪽이든 그들이 걸친 눈옷은 서리가 내리는 끔찍할 정도로 오랜 시련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처럼 피로 얼룩지게 된다. 피 묻은 상처는 까마귀들이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먹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결국옷은 썩어 없어져서, 허수아비들은 황야에 서 있는 리어 왕같은 비극의 분위기를 얻게 된다. "꺼져라, 꺼져 버려라!" 차이점은 리어 왕의 옷 밑에 ‘가엾고 벌거벗은 사람‘이 있는 반면 허수아비들은 옷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난당한 신체 부위가 아니라 얻어 온 천들을 모아서 기우면프랑켄슈타인의 특징을 얻게 된다. 그것들은, 정의상, 무섭다.
허수아비들이 스스로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은 마치 그들이 살아 있기 위해 체지방을 소비한 것과 같다. 어떤 사진은범죄 현장을 보는 경찰의 시선과 닮아 있다.  - P160

빌 브란트에서 리처드 애버던, 다이앤 아버스까지, 사진가들은 사진이 일종의 예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인생의 특정한 순간에 찍은 사진이 앞으로의 삶에 대해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스는 헤밍웨이와 마릴린 먼로에 대해 말하면서, 그 얼굴에 자살의 기미가 어려 있었고 운명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매력적인 개념이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 P165

그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다. 돌이켜 보았을 때 그 미래가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도록 말이다. 한편 우리는 세월을산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세월이 우리를 산다. 이 사실이이 시리즈를 매우 흡인력 있게, 어떤 면으로는 무척 끔찍하게만든다. 불변의 계시는 여기서도 그리스 비극에서만큼 강력하다. 특히 촬영이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므로, 또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글쎄, 달력으로는 여전히 1년에 한 번이지만,
자매와 사진가가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매년촬영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 든다. 앞으로 10년 이상촬영을 계속한다면, 사진들은 한 번의 촬영에서 나온 다양한이미지들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적인 사진시리즈는 해마다 가속도를 얻게 된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조급함을 쉽게 억누르며 새로운 사진들, 즉 정지된 에피소드를 기다린다. 무엇이 드러날까? 실은 드러나는 것이 많지 않다. 1년에서 다음 1년까지는 차이가 그리 크지 않지만,
10년에서 다음 10년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1년에서 40년사이라면 거의 무서울 정도다. - P166

시간은 여러 면에서 효과를 달성한다. 하지만 이 사진에명백하게 드러나듯, 어느 시점 이후로 시간은 우리의 얼굴을똑바로 쳐다보는 단 하나의 일만 한다. 시간은 이 여성들을죽음으로 이끌고 있다. 또는, 약간의 재량이나 모호함을 허용해서 다시 말하자면, 시간은 그들과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준비하게 한다. 처음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찍은 사진들은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이사진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지가 명백해진다.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더라도 말이다. - P167

인정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시선을 피하고 다른 곳을 보는 것이다. 앞서 나는 이 시리즈가 가속도를 얻었다고 말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말년의 가속도를 얻었다. 소설가 수전 미노는 이 프로젝트에 관한 사려 깊은 에세이에서 1981년,
1983년, 1984년의 사진 속에 사진가의 그림자가 들어 있음을지적한다. 그녀는 이것을 그의 속하고 싶어하는 욕망, 즉 모든외동아이의 욕망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낙관적인 해석이다. 나는 그림자를 더불길하게 본다. 특히 닉슨의 그림자뿐아니라 카메라 자체의 그림자, 또는 사진 자체의 그림자가 침범해서 마치 엑스레이로 드러난 덩어리처럼 스스로의 존재를느끼게 할 때 말이다.  - P167

어느 해에는 네 자매가 아니라 세자매가 될 것이다. 자매중 한 명이 죽은 후에도 닉슨이 이 프로젝트를 계속한다는가정하에 말이다. 현악 사중주는 삼중주로 계속될 수 있지만,
보통은 새로운 바이올리니스트를 영입한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서는 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사중주가 더는 불가능하다면 중단을 선언하거나,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의 사진적 등가물처럼 축소된 상태로 단 한 명의 자매가 남을 때 비로소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결국 외동아이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숨겨진 가정이 있다. 즉 사진가가 대상보다 오래 산다는 것이다. 그가 자매보다 먼저 죽는다면 프로젝트 자체가 끝날 수도 있다. 또한 제3의 가능성도 있다. 무슨일이 일어나든 내가 더는 그것을 볼 수 없는 경우 말이다. - P168

말년에 다이앤 아버스는 "사진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되었다. 브라사이의 사진에는 빌 브란트의 사진에는 실제로물리적인 어둠의 요소가 있으며, 어둠을 다시 보는 것은 매우흥분된다" 고 말했다. 이는 짜릿하지만 위험하다. 존 자코우스키는 윌리엄 게드니가 제안한 ‘밤The Night‘ 시리즈에 다소경멸적으로 반응하면서 "사진은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인 반면 그 시리즈는 볼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볼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한다는 이 딜레마는 복잡한 만큼 간단하다. 황혼이 매력 있는 건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사라지려는 시간이기 때문이며 낮의 빛이 비추는 현실의 세계가 꿈의 영역으로 미묘하게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 P169

매우 고요한 사진 속에 결여된 움직임, 오염되지 않은 침묵은 시간에서 벗어나고 상호 작용의 순환과 동떨어진 세계를 느끼게 해 준다. 현재 팔고 있는 상품과 그 실마리를 보여 주는 간판이 사라진 텅 빈 상가는 시대를 추정하기가 어려워서, 때로 시간뿐만 아니라 역사로부터도 동떨어진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대부분이 일시적이거나 덧없는 현상이라는 것을 의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간에서 벗어난 세계 대신, 시간에서 벗어난 순간들에 대해 더정확하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이미지에는 드라마 또는 긴장감이 현저히 부족하다. 그 공허함은 공간적이면서 시간적이며, 『어두운 도시』는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 - P174

『건널목들Crossings』이 가장 명백하게 보여 주듯, 웹은 경계에끌린다. 그러니 사진의 경계, 즉 가장자리가 작품의 중심임을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다. 이런 점에서그는 가장자리였던 것이 중심이 되어 버린, 장벽이 붕괴한 후의 (분단된 도시라고 불렸던) 베를린과 등가를 이루는 사진가다. 웹은 독특하게 기둥이나 나무, 또는 벽의 가장자리로 사진을 나눈다. 분할된 것의 양쪽에는 잠재적으로 상당히 다른 두세계, 또는 서로에 대한 두 개의 거울에 가까운 이미지가 있다. - P192

예상된 일이다. 사람들은 사물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런 다음 그 기록은 애가의 특징을 가지게 된다. 특별한 것은 그것이 일어나는 속도와 ‘그런 다음‘의 짧은 시간이다.
이미지가 현상용 트레이에 나타나는 즉시, 또는 심지어 셔터를 찰칵 누르는 순간에도, 이미지는 미래에 보이게 될 모습에고취된다(물론 이제는 이러한 공정 자체도 애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 P201

제프 다이어 GEOFF DYER

‘제프 다이어가 곧 장르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영국의 대표 작가․ 사진,
재즈, 여행 등 한 작가가 다뤘다고 보기 어려운 다양한 소재를 소설,
에세이, 르포르타주 등 여러 장르에 담아내며 독창적인 글쓰기를선보인다. 전 세계 독자들은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알랭 드 보통 등동시대 작가들에게도 사랑받는 작가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전공했고 2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1992년 『그러나 아름다운』으로서머싯 몸상, 2004년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로W. H. 스미스 최우수여행도서상, 2006년 지속의 순간들』로국제사진센터 인피니티상, 2011년 달리 말하면 인간의 조건 otherwiseKnown as the Human Condition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등 다수의상을 수상했고 2009년에는 ‘지큐GQ』에서 선정한 올해의 작가로뽑혔다.
의외로 그는 사진을 찍지도 않고, 심지어 카메라도 없는 상태에서사진에 관한 글을 써 왔다. 그 결과 롤랑 바르트, 수전 손택, 존 버거 등사진 비평으로 널리 알려진 대가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비평 세계를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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