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책에 실릴 소설들을 다시 살펴보는 동안 봄과 여름이 지났다. 추울 때 쓴 소설, 더울 때 쓴 소설,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쓴소설, 미안해하며 쓴 소설. 소설을 쓸 때의 마음 상태가 곳곳에숨어 있어 부끄럽기도 했고 혼자 웃기도 했다. 몇몇 인물의 이름을 입속에서 굴려보기도 했다. 목련과 라라, 나리. 그리고 미처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소년과 소녀, 여자와 남자들.
「목련정전」에 나오는 배 모양의 관을 생각하게 된 건 ‘주형석관(舟形石棺)‘에 대해 쓴 강우방 선생님의 글을 읽고 나서부터다. 관을 배 모양으로 만든다는 것, 배 모양을 한 관이 정말형상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당장 앉아서 긴 글을 쓸 수 있을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글을 만나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같은 소설 속, 활과 숯과 칼자루가 된 나무들 이야기는 양신의 『단연총록』에 나오는「생구자설(龍生九子說)」에서 떠올렸음을 덧붙여둔다.

무인정찰기 RQ-105는 추락 직전 마지막 영상을 송신했다.
군 지휘소 지상 통제 장비 모니터에는 60도 각도로 기울어진낙엽밭이 담겨 있었다. 낙엽밭과 사선으로 맞닿은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깨끗했다. 잎을 다 떨군 맨가지만이 하늘 안으로 실금처럼 뻗어나가 있었다. 어디선가 빛이 새어 들어와 밭과 하늘에 물방울무늬를 만들었다. 기울어진 풍경 한쪽에 빈 벤치가있었다. 아직 누구도 앉았다 간 적이 없는 벤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산을 보며 놓여 있었다.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난뒤 그 위로 커다란 참나무 잎 하나가 날아와 앉았다. 나뭇잎은다시 바람에 실려 사각 정자 위로 내려앉았다. 둥근 해가 여러번 뜨고 졌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자 낙엽밭 위로는 눈이 내렸다.
---- [근린] - P160

그래서요?
나리는 개구리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단다. 다음 날부터 나리는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어.
어떡해요.
이제 개나리와 개구리에게 하루는 그냥 하루가 아니었다.
어떤 하루였는데요?
아기의 몸이 한 군데씩 생겨나는 하루였지. 팔다리가 생기는하루, 꼬리뼈가 자라는 하루, 콩팥이 익는 하루. 아가,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하루란다.
---- [나리 이야기] - P182

모래알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어요. 물 위로 줄기를 내놓고나무들이 강에 서 있습니다. 강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 사이에누군가 다리를 놓고 있어요. 무지개처럼 예쁘고 폭신한 다리예요. 다리 이쪽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꽃을 담은 소쿠리를 팔에걸고, 여인이 구름 위로 막 발을 내디뎌요. 저쪽 끝에서 누군가여인을 기다리는 게 틀림없어요. 신발코는 들려 있고요, 치맛자락이 설레듯 흩날리거든요. 여인의 볼에서부터 퍼져나온 무늬가 구름에 결을 만들어요. 여인이 웃고 있기 때문이에요. 여인이 웃으면서 걸어가요. 구름 위를 걸어서 저쪽으로 가요. 자꾸 저쪽으로 가요. - P188

그림 안에는 연못도 전각도 없었습니다. 극락조도 꽃비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림 안에는 달이 있었습니다. 달 주위로는 둥글고 얇게 빛의 띠가 퍼져나가고 있었어요. 나리가 마지막으로그린 건 달무리가 진 밤하늘이었습니다.
아이는 그림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쌍꺼풀이 짙은 크고 깊은 눈으로요. 그림 어디에서도 구름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안에는 구름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알 수 있었어요. 나리의 마음을 흔든 것은 달이 아니라 달무리였습니다. 달무리로밖에는*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구름이었습니다. 아이는 방문을 열고뜰로 나왔습니다. 세상의 구름들이 한꺼번에 우는 것처럼 비가쏟아졌어요. 아이는 손을 뻗어 빗물을 만져보았지요. 어머니. - P189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임종 때가 되면 서쪽으로 누워 극락도를 바라보았습니다. 화공들은 불보살과 연못과 구름을 그렸지요. 그러나 나리의 구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리가 그렸던 그림들이 극락도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지요. 어느 외진사원의 먼지 쌓인 불단 뒤에 개구리들이 머물다 갈 뿐이었습니다. 달무리가 지는 밤에 개구리가 울면 8만 4천 명중에 한 명은 기도를 한다지요. 강물이 불지 않게 해달라고요. 개구리가오래 울면 나리가 슬퍼할 테니까요. - P190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새벽어둠 속에서 검은 선으로 서 있던 나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1,458 미터, 기상 실황판에 나타난 기온은 영하 20도였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한참 아래였다. 제욱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밑에서 시작해시야 끝인 하늘과의 경계선까지, 파도처럼 펼쳐진 겨울 산맥들이 흰빛으로 덮여 있었다. 밤새 영하의 골짜기를 떠돌던 물 입자들이 나뭇가지에 얼어붙으면서 피운 상고대였다.
시야가 맑은 날은 동쪽 바다까지도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운무가 자욱한 날은 봉우리들이 섬처럼 떠다녔다. 제욱은 발왕산정상에 서 있었다. 멀리 선자령의 풍력발전기와 넓게 펼쳐진목초지가 보였다. 목초지를 시작으로 조금씩 색깔을 달리하며
----[겨울 고원] - P193

며칠간 내린 비로 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용평스키장 전 슬로프에서 보강 제설이 이어졌다. 겨울 시즌 행사 준비와 사고처리로 제욱은 야근이 잦았다. 사무실에서 밤을 보낼 때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사무실 발코니로 나가면 자동제설기가 뿜어내는 눈가루가 야간 조명 위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제설기들은 슬로프 능선 곳곳에 서서 쉬지 않고 눈을 뿜어 올렸다.
흰 가루들은 밤새 발왕산을 안개처럼 채우다 흩어졌다. 발왕산정상에서 시작되는 가장 고지대의 슬로프, 레인보우에도 제설기가 돌고 있을 것이었다.
야간 작업을 마친 제설 팀이 퇴근하는 것을 보면서 제욱은병원으로 출발했다. 한 명은 무릎 십자인대 파열, 한 명은 어깨 - P199

와 팔 골절, 또 한 명은 하반신 마비라는 큰 부상을 입었다. 보험 처리를 위해 사고자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어느새 늦은 저녁이었다. 사고자들은 사고의 순간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제욱은 노인의 말이 걸려 혹시 시야 장애가 있지는 않았는지 물었지만 사고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갑자기 중심을 잃었다고만 했다. 그냥 갑자기, 순식간에 넘어졌다고. 잡생각이 떠올라 집중도가 떨어진 건 아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쓸모 있는질문은 아닌 듯했다. 잠깐 사이에도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가는 게 사람 머릿속이었다. 그걸 알아채고 다시 설명할 수 있는사람이 많지는 않을 듯했다. - P200

금세 흩어져버리는 제설기의 눈구름을 볼때, 어두컴컴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골짜기와 라이트타워의 불빛을 번갈아 내려다볼 때, 제욱은 비눗방울 속에 들어와 있는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펑 터져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산의 실체가 느껴질 때는 오직 심야 스키를 탈 때뿐이었다.
한밤에 산을 활강해 내려오다 보면 겨울 산의 컴컴한 여백들이제욱만을 감싸며 달려드는 듯했다. 어둠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는 대신 산 전체의 바람을 혼자서 누리는 짜릿한 순간이 오는것이다. 겨울에 맛보는 몇 번의 심야 활강을 위해 제욱은 봄과여름과 가을을 이 산골짜기에서 견디고 있는지도 몰랐다. 떠나고 싶어서 몸을 비틀 때쯤 겨울은 다시 왔다. 아이를 어르는 얼음 마녀의 주문처럼 겨울은 정말 매년 왔다.  - P208

산들이 푸르스름한 흰빛을 내보내면서고원 가까이 다가왔다. 밤새 피어난 상고대가 모습을 드러내려고 뒤척이는 것이 대기 가득 느껴졌다. 여명이 밝고부터 해가뜨기 전까지의 시간, 그들은 마침내 사방에 피어난 얼음꽃을보았다. 차고 시린 결정이 가지가지마다 매달려 능선을 덮고있었다. 겨울 새벽에만 볼 수 있는 꽃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둘은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발왕산왼쪽 등성이로 해가 들고 있었다. 햇빛으로 덮인 산등성이 쪽나무들이 미세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산이 왜 저렇게 반짝이지."
필상이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꽃이 녹느라 그래."
불쏘시개로 드럼통 안의 숯 덩어리를 뒤적이며 사내가 말했다. 겨울 산속에 있다 보면 죽은 나무에도 꽃이 피는 것을 보게된다고 해가 뜨자마자 그 꽃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것도 보게 된다고 햇빛이 서서히 산 아래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물이번지듯이 꽃이 지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보면서 필상은 고백하듯이 사내에게 말했다.
- P216

봉산리 사내는 필상보다 하루 먼저 황탯집을 떠났다.
겨울 점퍼를 허리에 돌려 묶고 배낭을 멘 채 사내는 그들이건너왔던 송천교를 혼자 건넜다. 다리를 지나 걸어가는 사내옆으로 고원으로 올라가는 샛길이 보였다. 발왕산 쪽 길로 접어들면서 사내는 뒤를 돌아 손을 한번 흔들었다. 배낭 위로 솟아오른 탐침봉에 햇빛이 쨍 박히고는 곧 흩어졌다.
필상은 메토끼 귀를 잡고 산에서 덜렁덜렁 내려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산막 앞으로 순간순간 스쳐가던 전짓불 빛과흙바닥에 엎드려 어린 아들의 신발께를 보았을 그의 어머니.
같이 인제에 가자 했을 때 강돌을 손에 쥐고 몸을 일으키던 모습과 꾹 다문 입으로 한참 동안 물수제비를 뜨던 그의 벗은 등을 생각했다. - P220

목나무 가지 사이였다. 야광 눈빛 두 개가 제욱을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제욱은 알 수 있었다. 눈빛이 떠 있는 높이가 네발짐승의 눈높이가 아니었다. 그건 두발짐승의 눈빛이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돼, 망상이야, 중심을 잃을 거야. 제욱은눈빛을 보는 동시에 그렇게 생각했지만 갑자기 몸이 떠올랐고,
동시에 산비탈이 달려들었다.
야광 눈빛이 다시 보였던 걸 보면 뒤를 돌아봤던 것도 같았다. 이건 제욱이 RR-10 근처에 누워서 한 생각이었다. 달빛도없어서 하늘은 암흑처럼 검었다. 멀리서 야영객들의 소리가 들렸다. 비상용으로 챙겨왔던 무전기가 작게 삐삐거리는 소리도들렸다. 그러나 그것들은 멀리 있었고 제욱은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위쪽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제욱은 입술을 물며 눈을 감았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제욱은 검은 허공에 뚫려 있는 두 개의 야광빛을 보았다. 누군가 제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때 제욱이 느낀 것은 두려움도 반가움도 아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었다. 살았다. 중얼거리면서 제욱은 정신을 잃었다. - P224

마을로 들어서면 여섯 개의 산봉우리가 보였다. 산들은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마을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봉우리들은 해발 5백 미터가 조금 넘었다. 공기도 구름도 그 위로 잘 넘어다니지 못했다. 마을은 바람이 없고 안개가 많았다.
산 경사면에서 미끄러진 공기가 밤새 마을을 떠돌다 아침이면산허리에 하얗게 차올랐다.
제이봉은 마을 제일 안쪽에 있었다. 다른 봉들과 달리 삼부능선쯤에 구릉지가 있었는데 산은 거기서부터 방향을 틀면서동물의 꼬리처럼 휘어져 내려와 제이봉 안쪽에 또 다른 공간을만들었다. 제이봉이 감싸고 있는 그곳은 분지 속의 분지, 골짜기 마을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라고 할 수 있었다. 
--- [백일동안] - P227

불안이라. 현장소장이 건축주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강상기는 취한 소장을 차에 태워와 컨테이너 한쪽에 눕혔다. 제이봉에 걸려 있던 찬 안개가 밤공기를 타고 소리 없이 내려왔다. 강상기는 어둠이 내린 제이골을 천천히 훑었다. 낮에 다녀간 배목수의 털냄새가 제이골에 그대로 배어 있었다. 축축한 단백질냄새, 다른 수컷의 누린내였다. 강상기는 소주병을 따 들고는집터 여기저기를 돌며 소주를 뿌렸다.
- P238

그때 강상기에겐 어떤 생각들이 왔다 갔을까. ‘어린애를 놔두고 외간 남자랑 붙어먹는 그렇고 그런 여자 주제에 어디서
‘감히‘ 같은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아이의 아비가 아닌 다른남자의 품에 있는 여자들을 다 색출해서 찢어버리고 싶다‘는생각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강상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저 밑바닥에서 맴도는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강상기는 다만 허 주임과같이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무작정 일어나 제이봉 안쪽으로 들어섰다. 성큼성큼 걷지라도 않으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강상기는 그날 자신이 걸어 올라갔던 제이봉의 길들이 선명히 보였다. 옮겨 심은 자미화에 기대앉은채 강상기는 제이봉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휘청거리면서 산을 올라가고 있다. 그 뒤를 한 여자가, 배 속에 아이를 품은 한여자가 따라 올라가고 있다. 허 주임은 왜 그렇게 모진 말을 했을까. 허 주임을 찾으면 그는 꼭 묻고 싶었다.
- P247

치목이 끝나고 기둥이 세워진 날 큰비가 내렸다. 기둥 사이로 비계가 설치되고 들보가 올라간 날도 비가 내렸다.
목수와 일꾼들이 내려가고 혼자 남은 밤에 강상기는 덧집에앉아 비 내리는 집터를 내다보았다. 빗물은 들보를 덮어놓은방수포를 타고 내려와 그 아래의 강철비계를 두드렸다. 제이봉의 토사와 제이골의 진흙도 빗줄기와 함께 흘러내렸다. 강상기는 땅이 움직이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았다.
며칠 동안의 비에 다시 습기를 머금은 금강송들도 그의 등뒤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금강송은 그의 집이 되기 전에 그와는전혀 상관없는 생물의 집이 되려는 것 같았다. 비가 모든 것을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원망했다.
이곳엔 15 년 동안 이런 비가 내렸을 것이다. 강상기는 제이골 땅 밑 어딘가에서 빗물과 함께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허주임을 생각했다.  - P252

강상기는 자미재 대청에 반듯하게 누웠다. 이대로 몸을 누였다가 다시 일어나지 못해도 아무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이 내려왔다. 강상기는 누운 채로 멍하니 서까래를 보았다. 그때 긴가민가한 기척이 느껴졌다. 강상기는 집도 땀을 흘리는가,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는 코를 킁킁거리며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을 쓸었더니 손바닥에 끈끈한액체가 엉겨 붙었다. 송진이었다. 강상기는 고개를 들었다. 송진은 배 목수가 흘린 체액이라도 되는 듯이 서까래와 들보 곳곳에서 배어 나와 기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상기는 발밑에서부터 소름이 올라왔다. 송진이 흐르는 나무위를 새파란솜털들이 뒤덮고 있었다. 솜털은 천장과 처마, 기둥과 벽을 빼곡히 채우면서 자미재 전부를 장악하려는 중이었다. - P261

불꽃과 습기의 경계를 가늠할 수없는 채로 집은 고약한 연기만을 쉬지 않고 뿜어냈다. 상기는 연기에 먹힌 금강송이 우지끈 부러지면서 대청 위로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았다. 자미재는 붉게 타오르는 대신 시커멓게스러지고 있었다.
그때 강상기의 눈에 빛깔 하나가 스쳤다. 강상기는 눈을 크게 떴다. 무너지는 자미재 옆에 창창히 서서 잎을 펼치고 있는것은 자미화였다. 완성된 자재를 둘러보면서도 강상기가 시선을 피하며 외면했던 나무, 자미화는 검은 연기에 장단을 넣듯가지를 풀어 헤치면서 일렁였다. 강상기는 그 가지마다 꽃이 피어난 것을 보았다. 꽃은 세상에서 가장 진한 거름이라도 받아마신 듯이 그가 이제까지 봤던 어떤 자미화보다도 붉었다.
"더러워. 더러워."
꽃을 본 강상기는 더는 서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한여름 밤이었다.  - P263

주인아주머니가 소의 머리와 목을 껴안았고 류가 소의 엉덩이와 뒷다리를 잡았다. 마취제는 없었다. 연의 방호복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소의 성기에 소염제가 분사되는 치익치익 소리. 그런 소리들 끝에 무언가 질기고 축축한 것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류는 반사적으로 힘을 주었다. 음낭의 표피가 절개되는 소리였다. 표피를 찢은 연은 뿌리에서부터 소의 고환 덩어리를 짜내리기 시작했다. 소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헉, 헉,
숨을 내뿜다 고환이 다 빠져나올 때쯤 길게 한번 울었다. 소의뒷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류의 팔로 전해졌다. 어디선가국이 끓고 있는 것 같다고 류는 생각했다. 무언가가 뭉근하게오래오래 끓는 냄새였다. 그 냄새는 따뜻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쓸쓸했다. 껍질만 남은 음낭을 봉합한 뒤 연은 소의 엉덩이에 진통 주사를 놓았다. 
---- [어느 작은] - P277

사람들은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다시 고기에 집중했다. 공은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잔디밭 위로는 햇빛이 쏟아졌다.
그날처럼 눈부신 햇빛이었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한봄, 냇가를 끼고 있던 풀밭, 소는 풀을 뜯었고 산골 소년 공은 토끼풀꽃을 엮어 왕관을 만들었다. 갓 태어난 송아지일 때부터 몇 년을 공과 함께 지내온 소였다. 덩치도 커지고 먹는 양도 늘면서그만큼 공과 함께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이름도 공이 지었고털 관리도 공이 했다. 공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데리고 냇가로 가 풀을 먹였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풀을 먹던소가 꼬리를 빳빳이 들어올렸다. 소변이 나왔고, 구멍이 서서히 열리면서 검은 똥이 쏟아졌다. 다시 구멍이 닫혔고 소의 꼬리가 내려갔다. 소는 꼬리로 엉덩이와 다리를 쳐가며 계속 풀을뜯었다.
수 없었다.  - P291

공은 토끼풀꽃을 내려놓고 소에게 다가갔다. 햇빛이 내려앉은 등은 따스했고 소털 특유의 냄새가 공을 간질였다. 공은 소의 등을 쓸었다. 왼손으로 꼬리를 들어 올렸고, 조금 전에 닫힌 그곳, 소의 직장으로 조심스레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소년 공에게 비닐장갑 따위는 없었다. 소가 풀을 뜯어 먹던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섰다. 시냇물 소리도 멈추고 바람 소리도 멈추었다. 공의 손과 팔이 끝도 없이 소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어깨까지 들어갔을 때 공은 자신의 몸 전체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속인 것처럼 귀가 먹먹해셨다. 공은 눈을 감았다. 놀라운 정적이 그 속에 있었다. 공의팔을 감싼 점액과 혈관과 굴곡들. 그리고 따뜻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공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면서 팔을 뺐다. 팔이 조금씩 빠져나올 때마다 바깥세상과의접촉면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손까지 모두 빠져나왔을 때 공은도망치듯 뒤를 돌아 뛰었다. 허겁지겁 어찌할 새도 없이 공은풀밭에 넘어져 사정을 하고 말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공은 소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 P292

창가 쪽 테이블이었다. 물잔 옆에 누군가의 휴대폰이놓여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산골 소년의사랑 노래였다. 남편의 속옷 양말처럼 여기는 그의 아내인지, 암소가 앓고 있는 어느 농가인지, 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누군가 계속해서 공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숯불을 빼던 식당 직원이 멈춰 서서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소금 알갱이와 핏물이 자작한 고기 접시, 계란노른자만 남은 냉면 그릇. 그런 것들이 노래와 함께 지나갔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워 냇물 위로 떠내려가던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주저앉아서 어느 날 밤의 하늘을떠올리고 있었다.
두 아름도 넘을 것 같던 느티나무가 있었다. 두부 찌꺼기처럼 비어져 나오던 수소의 고환이 있었고, 인공수정 교육 때마다 도축장에서 갖고 오던 암소의 자궁이 있었다. 땅속에 묻혀있을 가축들의 뼈와 어딘가로 헤엄쳐 갔을 산골 소년의 정충.
그리고 소년의 어떤 순간을 지켜보던 황색 소가 있었다.
테이블을 다 치운 주인은 노래가 끝나가는 휴대폰을 카운터로 갖다 놓았다. 직원은 방석을 정리하다가 노란색 스트로 몇개를 발견했고, 이리저리 돌려보다 쓰레기통에 버렸다. - P294

통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조금이라도 체중을 실어 앉으면살들이 뜯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변기에도 간신히 걸터앉을 수만 있을 뿐 아랫배에 힘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끔거리고 가렵고 축축했다. 밖은 겨울이었지만 실내는 한여름
---- [한밤] - P304

보다 더한 온도와 습도로 무더웠고 땀이 수시로 흐르는데도 씻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방마다 개인 샤워실이 있었지만 물은세면대에서밖에 나오지 않았다. 산모의 체질별로 샤워가 허락되는 시기가 다르다는 이유였다. 태반이 떨어진 자궁벽에서는붉은 진물이 계속 흘러나왔고 갖은 분비물로 오염된 회음부로는 바람 한 줄기 통하지 않았다. 몸이 썩어가는 느낌을 떨칠 수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일주일? 열흘?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밤이 조금씩 길어진다는 사실뿐이었다.
자고 일어나거나 밥을 먹고 나면 여자들은 타원형 실내를 느릿느릿 돌았다. 운동을 위해 걷는 사람도 있었고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 걷는 사람도 있었다.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것보다는여자들과 복도를 걷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나 또한 하루의 많은 시간을 복도에서 걸으며 보냈다. - P305

산모들의 회음부는 점차 회복이 되었고 그에 맞춰 하루 한시간씩 원장의 모유 수유 교육이 시작되었다. 원장이 다녀간그날 밤 이후로 내 회음부도 정상 상태가 되었다. 실을 뽑아버린 건지 소독약을 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원장은 어쨌든 회음부의 세균들한테 타격을 준 것 같았다. 수유 교육이 끝나고 나면 산모들은 소파 앞 유축기 앞에 나란히 앉아 본격적으로 유축 작업을 시작했다. 흡입기를 가슴에 대고 버튼을 ‘강‘으로 올려도 젖량은 30밀리미터를 밑돌았다. 반면에 분홍은 젖이 뿜어져 나왔다. 많은 젖량을 주체하지 못해 심지어 젖을 짜서 버리기까지 했다.
"여기선 재력, 미모, 학력 다 필요 없어. 젖량 많은 여자가 갑이지."
임신을 하면서 다들 유두가 거뭇해진데 반해 분홍의 젖꼭지는 복숭앗빛 분홍이었다. 분홍은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을 풀어헤쳤고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리원 실내를 누비고 다녔다.  - P312

내 안에 있었던 아기. 나는 아기의 뺨에 코를 대고 냄새를들이켰다. 아기는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입이점점 내 가슴 쪽으로 돌아왔다. 자기를 낳은 엄마한테 온 것을본능적으로 안 것일까. 나는 서둘러 가슴을 열었다. 순간 아기가 걸신들린 악귀처럼 달라붙었다. 젖꼭지가 아파 나는 반사적으로 아기를 밀어냈다. 아기는 다시 쥐처럼 파고들더니 젖꼭지를 찾아 물었다. 그러고는 무서운 힘으로 빨기 시작했다. 얼마나 빨았을까. 실이 한 올씩 풀려나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의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고천년 묵은 변비가 해결되는 것 같은 말로 다 하기 힘든 시원함이 몰려왔다. 유축기로 해결하지 못한 몸의 울혈들이 아기가빨자 그대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뜨거운 탕 속에 잠겨드는 것처럼 몸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저릿저릿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그대로 잠이 들고 싶었다.
30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산모들의 유관이 막히지 않도록 아기가 양쪽 젖을 비워줄 딱 그 시간만큼만 허락이 된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를 채웠는지 아기 입이 느슨해졌다.  - P320

나는 실장을 밀치고 싸개를 풀었다. 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것이 나와 신랑의 유전자를 나눠 가진 몸이라는 것을 믿을 수없었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고 어느 기록에서도 본 적이없는, 손상된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아니었다. 팔인지 다리인지 알 수 없는 갈라지고 뭉쳐진 덩어리들이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비껴난 채 펼쳐져 있었다. 성기만이 나를 비웃듯 몸통의 제자리에 박혀 움찔거렸다. 아기는 그 와중에도 다시 젖을 찾는지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더니 꽃게처럼 버르적거렸다.  - P321

연기가 하늘을 뒤덮어 사방이 마비 상태였다. 크지 않은 누각이 저런 불길을 품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문은거세게 타올랐다. 포효하는 괴물처럼 몸을 뒤트는 북문 앞에서소방차도 빌딩들도 장난감 같았다. 이 땅에 가장 오랫동안 서있어온 건물이 가장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보도 기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의적인 방화로 추정이 되지만 아직 방화범은 잡히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 이어졌다. 수차례의 협박 전화를 무시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당국의 안이한대처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산호를 보았다. 산호는 눈을 감은 채 소파에 기대앉아있었다. 산호의 뺨 위로 북문의 불꽃이 반사돼 어른거렸다. 나는 그 불꽃 앞으로 다가갔다. 이월을 말리던 산호가 이월을 돕기로 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산호의 뺨 위에 손을 얹었다.
순간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왔다. 사람들은 다 같이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누각의 기왓장들이 쏟아져 내리면서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늘 보아왔던 건물. 타버릴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건물. 폴리스라인 너머를 채운 사람들이 믿어지지않는 광경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생물체처럼 북문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셋, 둘, 하나, 정렬. - P330

새로운 2만 6천 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북문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흐느껴 울기시작했다. 나는 뒤편의 통유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속싸개로 몸을 가린 콩이, 송이, 바람, 봄빛, 행복, 사랑, 희망 들이 누워 있었다. 누군가 몸을 긁었다.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다시번식을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이제 또 다른 고열이 오겠지. 들깻가루와 미역이 끓는 냄새. 젖냄새와 진물 냄새. 나는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 중에 가장 긴 밤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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