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옆에서 작은아버지가 조용히 웃었다. 규는 풀들을 긁어모았고 나는 술을따랐다. 참 좋았지. 참 좋았어. 나는 출근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았다. 졸면서 꿈을 꾸면 아버지가 나왔다. 그날을 잊을수가 없다. 아버지는 버스 창에 깃발처럼 매달려 따라왔다.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추면 좌석 어디쯤에서 어머니가 고무장갑을 흔들었다. 버스가 다시 속력을 내면 아버지가 검은 얼굴로펄럭이며 창을 두드렸다. 나는 창이 열리지 않게 안간힘을 쓰다가 머리를 찧고 깨어났다. 그날도 그랬다.  - P11

가려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가려웠다. 봄가을에는정신없이 가려웠고 여름에는 못 견디게 가려웠고 겨울에는 그냥 가려웠다. 어떻게 하면 상처 안나게 긁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티 안 나게 긁을 수 있을까, 날이 더워지면 그 생각에만 몰두했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어떻게든 긁었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려움이 시작되면발가락을 짓누르다 자리를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의사들은 오래 앉아 있는 게 좋지 않다고 했지만 나한테는 외근보다 파티션이 하체를 가려주는 사무실 근무가 편했다. - P16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세상은 더럽고 우리에겐 락스가 있다고.
락스를 사랑하는 내 어머니는 여전히 명절날의 대장이었다.
작은어머니와 형수가 일할 분량과 범위를 정해놓고 더는 넘어오지 않게 했다. 어머니는 며칠동안 락스를 풀어 걸레를 삶고집안 구석구석을 닦으면서 명절 때 오갈 사람들의 동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윤이 나는 바닥을 네 살이 된 규의 딸이 내달리며 놀았다.  - P29

불길 속에서 아이를 건져내듯, 납치범한테서아이를 낚아채듯, 뒤집개를 내던진 형수가 한달음에 달려와 어머니한테서 아이를 빼갔다. 어머니를 바라보는 형수의 눈빛에서 한순간 혐오가 지나갔다. 큰소리는 오가지 않았다. 형수는아이한테 휴대폰을 쥐여주고 한쪽에 앉힌 뒤 일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작은어머니는 겪을 만큼 겪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아무 말이 없었다.
혼자 멋쩍게 앉은 어머니를 보는 게 힘들어 나는 밖으로 나왔다. 자기 시어머니였어도 저런 눈빛이 스쳤을까 하는 서운함에, 어머니의 락스 신봉이 이지경까지 이르렀다는 충격까지이래저래 마음이 쓰렸다. - P31

마지막 통의 뚜껑을 열 때쯤 시야가 기울었다. 편도선에 바늘이 들어오는 것처럼 목이 아팠다. 메스꺼움과 함께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가까스로 세면대를 잡고 서서 거울을 보았다. 독성이 스며든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샤워기의 온수를 틀었다. 뜨거운 물이 락스 원액에 내리꽂히며 증기를 끌어올렸다. 거울이 흐려지면서 욕실 안은 염소 기체로 들어찼다.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신음을 뱉으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감각이 마비되는 듯한몽롱함 속으로 몸이 꺼져들어갔다. 눈앞에 욕실등이 어른어른했다. 젖은 눈썹에 맺힌 물방울들이 몇 겹으로 번져나갔다. 고리처럼 이어진 물방울들 끝으로 잡힐 듯 말 듯 무엇인가가 보였다. 겨울이고 한낮인 어느 거리였다. 공기가 시리고 하늘이맑았다. 그녀가 거울 앞에 서서 떨잠을 꽂아보고 있었다. 옛 여인들이 좋은 날 꽂았다는 장신구였다. 둥근 백옥판 위에서 여러 빛깔의 유리 장식이 반짝였다. 그녀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은사로 된 떨새가 파르르 떨리며 진동했다. 지구는 소리 없이 돌고, 한겨울 햇빛이 구슬 가닥가닥을 파고들며 빛을 흩뿌렸다.
- P46

라라가 할딱이기 시작합니다. 라라는 파자마 자락을 꼬깃꼬깃 뭉쳐서 가랑이 사이에 끼웁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을 꽈배기처럼 꼬아서 가랑이로 가져갑니다. 유리의 손바닥도 세워서 가져갑니다. 잡히는 건 다 가져가서 끼워 넣더니 라라는 힘을 줍니다. 엄청난 힘에 놀라서 유리는 손을 뺍니다. 라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얼굴이 새빨개집니다. 숨이 가빠지면서눈이 희미하게 풀립니다. 그렇게 몇 번 더 끙끙대던 라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이 듭니다. 이제야 무언가 안심이 된다는 듯이, 울음 끝에 잦아드는 숨처럼 떨리는 숨을 한번 내뿜고, 라라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잡니다. 유리는 라라의 뺨에 손등을 대봅니다. 혼자 노는 라푼젤, 모서리를 좋아하는 여자아이.
유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들어갑니다. - P67

유리는 지금 몸도 마음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라라를 가만히 둘 수가 없습니다. 유리는 라라를 처음 때렸던 때가 생각납니다. 유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화가 치밀었고 탁상달력으로라라의 머리를 두 번 후려쳤습니다. 라라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유리는 우는 라라를 안아주었습니다. 유리는 울음이 잦아든 라라에게 밥을 먹여주었습니다. 자신한테 맞아서 울고, 자신이 달래서 울음을 그치고, 결국에는 자신이 주는 밥을 받아먹는 라라를 보자 유리는 라라가 진정 자기 것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전율을 유리는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생각이 듭니다. 유리가 이러는 건 아주 오랜만입니다. 유리는아무 때나 라라를 때리지 않습니다. 힘들 때만 때립니다.
- P70

칩니다.
주방 조명등 아래, 밀고 밀리는 육박전은 끝나지 않을 듯 보입니다. 거실 저쪽에서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는 산발입니다. 산발인 머리를 쥐가 파먹었습니다. 눈을 올려 뜨고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가 금발머리 라푼젤을 집어듭니다. 아이가 도어록 버튼을 누릅니다. 주방에서 뒤엉킨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합니다. 한 칸, 또 한 칸. 아이는 맨발로 기다란 계단을 내려갑니다. 복도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분홍 파자마 자락이 나부낍니다. 아이는 수백의 머릿니 군단을거느리고 여왕처럼 걸어갑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누구아이를 본 사람 없나요? 나이는 여섯 살, 이름은 라라. 가까이가면 이가 옳을지도 모릅니다. 낯 뜨거운 행동을 하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신고는 탑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어요. - P83

물조리개를 들고 나무를 빙빙돈다.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인 것처럼 나무를 쓰다듬다가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와락 매달린다.
목련은 하루하루 빛이 난다. 영양을 골고루 섭취해 종아리는토실토실하고 햇살을 타고 뛰어노는 발걸음엔 막힘이 없다. 나무 밑에 자기 세계를 꾸미는 손은 야무지다. 나무한테 들려주는 얘기 속엔 그리움과 공상과 장난이 가득하다. 엄마라면 당장 가서 끌어안고 만져보고 싶어 못 견딜 만큼, 목련은 사랑스럽게 커간다.
바람이 잦아들자 다래덩굴이 빛에 잠긴다.
목련은 나무에 기대앉아 눈을 감는다. 눈꺼풀 위로 햇살이 - P90

고이고 빛은 수만 갈래 파편이 되어 어린 목련의 머릿속에서흩어진다. 그것은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백설기 파편이 되었다가 다시 목련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된다.
엄마.
목련은 엄마를 불러본다. 엄마 얼굴도 목소리도 생각이 나지않는다. 선명한 것은 오직 냄새, 엄마 손에 밴 참기름 냄새다.
시금치 데친 물에서 훈김이 올라온다. 바가지에 도라지를 박박문질러 씻는 소리 들통 가득 탕국이 끓고 엄마는 메밀전병에넣을 김치를 다지기 시작한다. 목련은 엄마 옆에서 산자에 묻힐 튀긴 밥알을 주워 먹는다. 시루 위로 떡 찌는 냄새. 뜰에 자리가 깔리고 제기가 날라진다. 사람들 발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온다. 목련은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백중날. 7월 보름 한여름. - P91

목련은 목발을 세워둔 채 홀로 절 마루에 앉아 있다. 7월 보름 달빛에 밤이 환하다. 어슴푸레하게 언덕의 나무가 건너다보인다. 달빛에 잠긴 능선과 나무와 다래 덩굴. 다래 덩굴에서 반사된 빛이 다시 절 뜰로 고인다. 목련은 다섯 살까지 엄마와 이절에서 살았다.
목련에게 엄마는 물을 끓이는 주전자이고 김장독을 묻는 삽이고 강아지 집을 수리하는 망치다. 목련의 엉덩이를 찰싹 쳐가며 목욕을 시키는 손이고, 무엇보다 매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노란 장판이 깔린 뜨끈뜨끈한 방구들, 목련은 거기서태어나고 거기서 기어 다니고 거기서 잠을 잤다. 목련은 절구석구석을 어디든 걸어다녔다. 4월이 되면 초파일 연등에 붙일꽃잎 종이를 안고 다니고 7월이 되면 옷을 태우고 남은 재를 후후 불며 휘저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담 한편의 돌탑을 몰래 무너뜨리면서 놀았다.
- P101

목련은 서서히 턱을 내린다. 올라갈 때보다 더 많은 힘이 들어가 목련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그러나 그동안 단련된 목련의 팔 힘은 아직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다. 털실 고리와같은 눈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목련은 멈춘다. 반쯤 굽혀진 팔이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린다. 한여름 해가 기울어간다. 허공어디쯤에서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뒤이어 어느 집의빨래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언젠가 목련이 쏘아올린 종이비행기가 떨어져 내린다. 담 위에서 발을 헛디딘 고양이가 떨어져내리고, 세상의 모든 열매들이 자기 무게만큼의 속도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목련은 본다. - P125

목련의 팔에 갑자기 엄청난 힘이 들어간다. 그것은 목련이이 세상에서 내는 마지막 힘이자 자신을 걸고 내는 모든 힘이다. 목련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가지 마 가지를 잡은 팔을바꾼다. 심장이 격렬한 박동을 뿜는 동시에 목련의 몸은 바로거기, 다래 덩굴 쪽으로 돌아간다.
목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침착해지는 자신을 본다. 손에 맞물린 나무의 감촉을 목련은 어느 때보다 실감한다. 나무를 향한 단단한 믿음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목련은 느낀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 목련은 목도리의 고리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목련은 가지 마 가지를 잡은 두 손을 놓는다. 땅이 모든 힘을 동원해 목련을 잡아끌고 목련은 자기 무게만큼의 강도로 목도리에 목이 매달린다. 그 강도 그대 - P125

로 줄이 목련의 대동맥을 누르고, 목련은 급작스러운 뜨거움과동시에 혀가 빠질 듯한 숨 막힘 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다래 덩굴이 열린다.
다래 덩굴,
그 안에 울부짖는 한 여인이 있다.
덩굴을 몸에 감고 갇혀 있던 여인. 머리채를 잡힌 채 눈앞을보는 여인. 지금 막 지옥에 빠지는 여인. 복수당하는 여인.
가지 마 가지에 목이 매달린 목련이 허공을 차기 시작한다.
"악-아-엉- 윽-"
토막음으로 우는 사람은 손과 입을 결박당한 여인, 10년 동안 언덕에 갇혀 목련을 보아온 여인이다. 두 팔을 휘저으며 헤엄치던 목련의 얼굴이 검붉게 질려간다. 세차게 버둥대던 다리움직임이 어느 순간 둔해지기 시작한다. 목련의 눈이 하얗게넘어간다. 여인의 재갈이 풀린다. - P126

"아-가-아-가아아아아아————— !!"
눈앞의 것을 식별할 정도의 빛과 울부짖을 기력을 유지할 정도의 음식. 지난 10년간 그 둘만 제공받아온 여인이 두 눈을 뜨고 울부짖는다. 눈이 넘어간 목련의 몸이 풀어진다. 목련은 나무 막대기처럼 곧게 펴져 경련하기 시작한다. 여름 생물들이일제히 소리를 멈추고, 결박당한 여인만이 짐승처럼 몸을 뒤틀며 목련을 부른다. 그러나 설골이 부러진 목련의 몸은 이미 마지막 떨림으로 치닫는 중이다. - P126

능선으로 해가 진다. 나무의 그림자가 맞은편 산을 뒤덮는다. 하루의 빛이 사라지기 직전. 모든 것들이 가장 반짝이는 순간, 목련은 드디어 괄약근이 완전히 풀어지면서 움직임이 멎는다 포개진 꽃잎이 저녁을 준비하는 오후의 막바지. 언덕 아래로 밀잠자리가 걷히고 구름이 새털처럼 풀어지며 하늘을 채운다. 귀를 후비는 괴성만이 능선을 타고 미끄러진다.
마을 어디에서나 나무와 나무에 매달려 죽은 목련이 보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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