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으로인해 바깥의 네온사인이 매혹적으로 보여 주는 약속과 가능성은 깊은 무관심을 남겼다. 결국 그 경험은 삶을 너무나 부정하고 있었으므로, 만약 옆방에서 누군가가 살해되는 소리가 들릴 경우 느껴질 첫 번째 충동은 소음에 대한 불평일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사람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일 게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처럼 술을마셔서 죽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모텔 네온사인의 망가진 약속에대해 말할 경우, 시그먼의 사진 속에 있는 많은 간판들이 그이후 망가졌다는 것은 완벽하게 타당하다. 그들은 예전의 자신이 낮에 드리우던 그림자 안에서 깜박이는 다른 병든 간판을 되살리는 데 사용되던 부품들을 약탈할 수 있는 죽은 간판의 묘지가 된다. 시대의 진정한 상징(sign, 간판) 라스베이거스는 네온사인 박물관으로서의 위세를 뽐내고 있다.  - P206

이것은 워커 에반스에 관한 질문이다. 에반스가 촬영한 쓰러져 가는 판잣집, 버려진 차, 지역 특색을 보여 주는 간판 등은그것들이 촬영되기 여러 해 전에도 똑같이 매력을 지니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런 것을 촬영하는 행위 자체가 여태껏 사람들이 거기서 의식하지 못했던 미적 차원을 드러내 주는 걸까?
어느 쪽이든 『미국의 사진들이 출판되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 사진들이 전시된 1938년 이래로 그것은 미국의 모습이었고 우리가 미국에서 찾던 모습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이중의 창작이다. 관찰한 세계를 단순히 창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찰한 결과를 판단할 용어와 기준을 창작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단순히 미학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정치도 존재하지 않는다"148 는 에반스의 반대되는 유명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대공황을 일으킨 더 큰 이념, 경제적·정치적 힘을 포착하고 묘사하고 반영했다. - P217

버거는 10대로서 자신이 느꼈던 것을 되돌아보고 있지만, 나이가 들고 현명해질수록 우리는 그런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임을 깨닫게 된다.
루프의 누드는 간절히 기다렸던 순간들, 기억하거나 상상했던 가장 사적인 순간들이 보존되고 뒤틀리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복잡하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레플리칸트인 레이첼이 자신의 기억을 보증하고 자신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스냅 사진을 데커드에게 보여 주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데커드는 그녀에게 그건 네 기억이 아니라고, 단지....…… 이식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이것들은 우리의 추억이 아니다. 말하자면 완전히 비인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창작 과정에서 각인된 이미지들 역시 루프의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 사진들이 그의 것,
그의 유일한 것으로 즉각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 P233

행동보다는 말이 쉽다. 특히 그 어떤 관념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 미에 대한 오랜 역사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20세기까지 미국 서부의 사막은 겉으로 보이기로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채로 완전히 혐오스러운황무지였다. 이 황량함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게 한 것은 1901년 출간된 존 C. 반다이크의 『사막 The Desert]이 유일했다. 너무나 완전한 그 변화를 통해 우리의 행성, 우리 대부분이 경험한 유일한 행성이 제공해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 중 몇 가지는 ‘기이한(unearthly, 지구 같지 않은)‘
혹은 ‘마치 다른 세상 같은otherworldly‘이라는 표현으로 지칭되었다. 그러므로 루프의 화성사진에 대한 우리의 반응 역시비슷한 종류여야 할 것이다. ‘사진 같지 않은unphotographly‘
또는 ‘다른 사진 같은otherphotographly ‘이 루프의 그 사진과이미지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 P235

갈망이 항상 미래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갈망은 쉽게, 자주회고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경험한 것을 갈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적 환상은 떠올리려고 해도 희미해질 위험이 있는기억이지만, 그 기억은 종종 만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약간개선되기도 한다. 반대로 기억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쩌면 그 자체에 발명의 요소가 있는지도 모른다.
갈망이 사람 또는 사물에 특정된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일반화된 갈망의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갈망이자, 가장 달래기 어렵고, 가장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래 지속되어서 존재의 일반화된 조건과 거의 구별할 수없게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절망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갈망이 절망의 이면이자 전일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키르케고르의 관찰과의 유사성이 있다. 절망의 증상은갈망의 절대적 부족이다.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 P236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과 유사한 어떤 것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조건 중 어떤 것으로 발생하는 고통의 정도는 고통받는 이가 자신의 장애를 인식하는 정도에 의존해야 한다.
심리적 척도로 계산해 보면 고통의 정도는 행복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갈망, 슬픔, 좌절, 절망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이러한 차이는 어떤 사진에서도 사라져 버린다. 구별하고자 아무리 강력하게 갈망하더라도, 한 상태를 다른 상태와 구별하기는 어렵다. - P243

"살아 있을 때, 나는 갈망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빛을 배우는 학생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 - P244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은 제프 월의 거대한 사진 죽은 군인이 말한다(1986년 겨울 붉은 군대 순찰대의 아프가니스탄 모코르 근교 습격 후 장면)」에 대한 토론으로 끝을 맺는다.
이 ‘만들어진 사건‘의 이미지는 ‘사려 깊음과 힘의 모범 사례‘
로 월의 스튜디오에서 구성되었다. "다큐멘터리에 대응"162 하는 이 효과는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전투 사진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월의 모형과 비교해서 축소되었는가? 아니면 강화되었는가?
예를 들어 2007년 아프가니스탄의 누리스탄에서 바위투성이의 잿빛 배경을 바탕으로 헬리콥터의 하강 기류를 피해움직이는 미군들의 행렬을 찍은 피터 반 아그트마엘의 유명한 사진을 생각해 보자.
- P245

비교적 느린 셔터 스피드가 거의 완벽한 선명함으로 모든 이를포착하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많은 행동이있다. 많은 것이 진행되고 있고, 이미 진행되었다. 하지만 움직임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이중의 고요함이 있다. 전투에 뒤따르는 아득한 고요함과 유화의 고요함, 즉 (빠른 셔터 스피드로 시간을 멈추는 게 아니라 시간을 담고 있는 고요함 말이다. 유화를 그리는 화가가 과일 또는 꽃 한 병을 묘사하는)정물화에 쏟는 끈기 있는 관찰력으로, 전투와 활동의 소용돌이가 상상적으로 재현되고 있다. 사진은 실제 전투를 기록할수 있지만, 카파의 유명한 사진 즉 스페인 내전에서 사망한 공화당 군인을 찍은(다만 이 사진은 조작 여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사진이나 디데이 상륙 장면을 찍은 사진처럼 약간 긴박하고 흐릿하게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극심한 폭력의 여파안에서만 사진과 유화의 두 가지 힘이 단일하게 연장된 순간에 결합될 수 있다. - P249

각각의 사진 안에 시간의 비정상적인 양이 축적된 역설적 결과로, 감지된 시간의 부재는 공허함의 밀폐된 분위기를심화하는 또 다른 결여에 의해 두드러지며, 결과적으로 교통체중과 혼잡함이 없는 사진적 과거와의 연결을 강조하고 있다. 촬영 이후 후반 작업 과정에서 차량을 빼내는 대신 차량이 없는 막간을 촬영한 결과, 차량 운행이 결여된 이 세상에는 버논 로드와 하이 로드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는 ‘시신 안치실‘이 목적지와 종착역에 편리하게 위치해 있다. 그곳으로부터 어슬렁거리며 건너오는, 즉 과거의 긴 노출 시간으로 촬영한 마치 좀비나 유령처럼 보이는 인물은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명백하게 소환된다.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 이 질문은 말이 안 된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다. - P264

그 단어 자체의확장된 개념 속에서 사진은 정확해지고 진실성을 얻는다). 요즘우리는 고지된 시간에 맞춰 영화관에 도착하려고 노력하지만, 런던 이스트 엔드의 꿈의 시간에 발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에세이 거기 없는것은 아무것도 아니다The Nothing That Is Not There」에서 레너드마이클스는 "호퍼의 시대에는 처음부터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종 중간에 도착하곤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표현인 ‘여기가 내가 들어온 곳이다This is where I came in‘ 라는 표현으로 이어졌다"173 고말했다. 언제when가 아니라 ‘어디where‘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각 사진마다 30분씩 시간을 할애하면서 보고 있는
‘어디‘인 것이다. - P266

그녀의 사진은 조용하고 친밀하고 사적이고 내성적인 사진, 즉 점점 더 부재의 예술에 이르기 위한 사진이었다.
그녀의 엄마가 찍은 사진 중 하나에서 아기 다야니타는거의 알아볼 수 없다. 다른 두 장의 사진에서는 호텔 방의 멋진 환경을 위해 완전히 간과된다. 다 큰 딸은 이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녀의 사진은 빈방과 빈 침대, 그리고 빌리 콜린스가 말하는 ‘아무도 앉지 않는 의자‘로 가득 차 있다. "아무도잔을 내려놓지 않는, 책을 엎어 놓지 않는 곳"176 말이다. 이 시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비어 있는 의자를 생각하고 있지만, 물론 사진에서는 그 순간조차도 영원하다.
- P271

사생활Privacy』에 실린 사진의 절반 정도는 부와 육체로가득 찬 호화로운 집과 넓은 방에 있는 사람들의 초상이다.
이것의 효과는 사진의 나머지 절반인 텅 빈 내부를 더욱 텅비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네루가 알라하바드에서살았던 집인 아난드 바반 박물관의 전시실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배가된 몇 배나 더 커진 공허감을 얻는다. 입지 않은 옷이 빈방의 열리지 않은 문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사진들, 이방들에서 두드러지는 부재는 멈춰진 천장 팬으로 상징되는현재에 있다. 역사가 흘러간 후 죽은 채로 남겨진 시간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워커 에반스는 자신의 빈 실내 사진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끔 그 부재를 통해 사람들을 표현하고싶다. 실내에 누군가가 거의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다" - P271

벽에 걸려 있거나 선반 위에 세워진 실제 사진, 또는 반짝이는 바닥과 광이 나는 가구와 창문, 거울에 반사되는 형태의 덜 선명한 사진 등 방에 포함된 다른 사진에 의해 자기감시의 분위기가 방 곳곳에서 드러나고 강화된다(사진에서 거울과 사진의 차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종종 불가능하다. 사실 거울은 사진 속에서 자동으로 사진으로 변형된다. 말하자면 사진은 시간이 제거된 거울이다). 죽은 것 같고 수동적이며 스스로보는 자기 관찰의 층위들은 정물 사진의 정적 stillness 이라는 본질을 드러내는 누적된 효과를 자아낸다. 이것이 보고 표현하는 한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2007년 바라나시의 크리티 갤러리에서 열린 ‘더 가까이 가버리다‘ 전시를 방문한한 관객이 파이즈의 가잘 훔 데켄제(우리는 보게 된다, We WillSee)」의 몇 줄을 방명록에 우르두어로 베껴 쓴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알라의 이름뿐이다.
그는 부재하지만 존재한다.
그는 보이는 존재이자 보는 존재다. - P273

‘꿈의 빌라‘ 시리즈의 형형색색의 외부가 해체된 후, 다야니타의 흑백 사진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파일 룸』이 출간되었다. 이는 문서documents에 대한 다큐멘터리 기록이다! 여기에는 공허의 여지가 없다. 가방,
찬장, 기록 보관소 및 캐비닛은 지질학적 지층의 무게와 영구성을 지닌 책, 종이, 폴더로 가득 차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무게와 영구성은 제외해야 한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결국 그것들은 단지 사진일 뿐이지만, 사실은 얼마나 쉽게 가상의 물건이 되는가! 그리하여 여러 방중 하나에서 충분한수의 서랍을 열어 보면 더 가까이 가버리다」, 「자키르 후세인』, 『사랑의 집House of Love』, 그리고 이전의 모든 책이 인쇄된사진과 밀착 시트들과 함께 보르헤스의 방식으로 깔끔하게보존된 것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 수도 있다. 확실히 지금으로서는 결국 여기가 그녀가 끝나게 된 지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278

그래서 특히 최근에 발간된 『예고되지 않은 이야기들Unheralded Stories』에서 헌터의 사진들은 점점 더 몽환적으로변하는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실내또는 초자연적 풍경 속에서 마치 프레임 속을 떠돌아다니는인물처럼 보류된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많은 사진들처럼, 그 이야기들은 미술사적 과거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예를들어 마치 앤드루 와이어스의 그림으로부터 나와서 다시 기어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때로는 속박된다는 악몽 같은 암시와 함께 분위기가 불길할 때도 있다. 다른 장면들은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 - P291

으로부터의 자유와 자유 의지의 몽유병적 결여라는 특징이있다. 어느 쪽이든 이 꿈의 독특한 특징은 시간의 부재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는 보류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결국 시간 안에서만 전개될 수 있다. 결국 말이다. - P292

마라도나의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이야기는 길게 계속되지만, 그가 나폴리에서 보낸 시간의 본질은 매우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빈민가에서 자란 소년이 이 도시에 와서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함의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로베르토 칼라소의책의 주제로는 가치가 있지만, 영화화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사당에 있는 증거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마라도나의 등번호 10번을 새긴 파란 셔츠를 입은 순례자 무리가 벽화 아래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나도 그들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몇 장 찍었다. 나는 그 재미있는 장면, 이 성스러운공간에 대한, 혹은 적어도 시각적 유물 몇 가지에 대한 영원한 기록을 갖고 싶었다. - P304

하지만 내의 사진을 통해 그들은 결국 미술관의 예술 작품 속에 있게 되었고, 그 이유로 그들의 믿음은 결국 정당화되었다. 이곳 스트라우스의필라델피아는 매우 다른 세계다. 이곳에서 가난은 에반스의앨라배마 시골 사진 속의 가난만큼이나 현실적인 문제다. 에반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트라우스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낸이 자신의 허구와 친밀했던 것만큼 현실과 친밀했다는점이다. 또한 스트라우스는 다이앤 아버스가 교활하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 자신을 상황 속으로 밀어 넣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 묘사된 삶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녀가 더 먼 곳, 말하자면 라스베이거스에 닿기 시작했을 무렵,
그녀는 고향에서 키워 온 친밀함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친구와의 페이스북 대화(필라델피아 국제 사진 센터 도록에 실려 있다.)에서 그녀는 이것을 꽤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난항상 모든 걸 들어오게 하고, 나 자신의 일부로서 중요한 모든 사람과 함께할 뿐이야." 친구의 대답은 당연히 이렇다. "우와……… 놀라운 인생관이네." - P310

스트라우스의 사진적 관점을 관통하는 흔적과 선례는 주로 미국인이다. 하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다. 펜실베이니아주 리머릭 근처에서 찍은 「풀이 난 파란 건물Blue Building withGrass」이나 밤의 불빛 사진 같은 것도 있다. 이 사진들의 크기가 더 크다면 거스키의 신봉자가 만든 작품으로 착각할 수도 - P310

있다. 망설이면서 제안해 본다면, 심지어 루이지 기리의 반향도 있다. 나는 스트라우스가 포착한 매우 공허하고 고요한 장면, 종종 웅덩이에 반사된 것을 찍은 장면을 생각한다. 웅덩이에는 즉각적으로 인식되는 동시에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모든것, 즉 그녀가 안으로 들여놓은 ‘모든 것‘의 평범함에 의해 발이 묶인 세상이 반사된다. 이는 마치 그녀가 셔터뿐 아니라 시각적 리모컨의 음소거 버튼도 누른 것처럼 느껴진다.
- P311

나는 수년 동안 런던을 돌아다녔는데, 거기에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바로 서두르는 것이었다. 늦어지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장애물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지하철역이나 다음 신호등에서 몇 분의 배당을 양도할지 결정하고몇 초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나 지름길에 주목하는 것 말이다. 크리스토퍼 레이드의 『점심의 노래 The Song of Lunch』의 주인공처럼 "꾸물거리거나 바보처럼 멈춰 서 있는 보행자들을 피해 깡총거리며 뛰어가는 것"은 재미있었다. 이후 그것은 재미와는 반대되는 어떤 것으로 굳어지거나 강화되었다. 단순히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고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의 웰빙은 런던의 기본 배경음인 욕설의 청각적 침입을 차단하고 시각적 진동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눈가리개를 착용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해외에 있는 동안 여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즉 허락이나 방해 없이, 내가 가려는 곳이 어디든, 이상적으로는 집에 도착하고 싶었던 것이다. - P312

인류라는 급류의
물살과 회오리에
운반되는 게 아니라 올라타는
그 덧없는 즐거움을느끼게 되었다. 

매트가 전직 스케이트보드 선수라는 점에서 이 구절은특히 적절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 서커스라는 급류의 가장 깊은 곳, 너무 깊어서 전혀 급류가 아닌 곳에서 기꺼이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계시였다. 특히 현재 이른바 세계에서 공해가 가장 심한 거리에 속한다고알려진 옥스퍼드 스트리트는 사람들이 런던에서 절대 예정보다 더 길게 머무르지 않는 거리다. 원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그 안에 갇히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314

리카드가 선택한 장소는 경제적으로 황폐한 도시의 변두리, 즉 망가져 버린 미국의 약속이 끊임없는 여파를 형성하는황량한 땅과 적막한 길이다. 이런 장소들은 길을 잃은 인물들로 가득한데, 이는 그들이 자동차의 360도 시야 안으로 헤매고 다녔으므로 모두 길을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번영의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번영의 길이 그들을 지나쳐간 것이다. 길을 가로질러 허우적대며천천히 달리는 이 쓸쓸한 인물들은 마치 방랑하듯, 마치 후기자본주의(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그 뒤에는 더 큰 자본주의가오는)의 막다른 골목에 영원히 갇힌 듯, 반대편 도로 경계선까지 결코 가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 P330

결정적으로 서정주의는 불결함에 의해 과소평가된다. 계속해서 연기되면서 새로워지는 약속의 감각은 흙먼지에 의해절대 부서지지는 않되억제된다. 흙먼지가 없다면 이 사진은코린 데이와 케이트 모스가 시작한 반항적인 패션 화보처럼보일 것이다. 셔츠와 카우보이 부츠는 멋지지만, 옷은 그냥 찢겨 있는 게 아니고 흙먼지는 단지 흙먼지가 아니다. 그것은 재이자 쓰레기다. 우리는 모두 버닝맨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 휴대용 변기와 손소독제를 들고 먼지를 뒤집어쓸 준비가되어 있지만, 여기 담긴 손은 1930년대에 도로시아 랭이 찍은손만큼이나 더럽다.
- P337

팁발에 있는 솜의 실종자 추모비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경사진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에서도 보이며, 만약 이곳에 힘이모이고 뿜어져 나오는 것을 의심한다면, 표지판은 방문객들에게 그들이 ‘성스러운 땅 위에 서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1차 세계대전 공동묘지들도, 무덤이 10여 개밖에 없는 묘지들도 주변의 풍경을 장악하고 있다. 세월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은 낮은 경계선 밖에 놓인 것이 무엇이건목적대로 돌아가게 한다. 밭은 일궈야 하고, 과일은 재배해야하며, 농작물은 경작해야 하고, 생명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P342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죽음에 다다른다. 목가적이긴 하지만 들판에는 전투의 풍경을 희미하게 상기시키는 것들이 흩뿌려져 있다. 가파른 둑은 등산객들에게 꼭대기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선사하고, 철조망은 수천 마일에 걸쳐서 있고, 배수로는 마치 물이 고인 참호의 잔해처럼 보인다.
불길한 동시대의 울림도 있다. 나무와 덤불의 클로즈업은 크리스마스에 실종된 아이를 찾기 위해 숲을 고생스럽게 수색하는 수색대에 대한 뉴스 보도 속 지형을 연상시킨다.
물론 시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배경의 전원은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지식과 결합하면서, 죽은 사람들이 무시무시하게 존재하는 최근의 사진 시리즈들을 떠올리게 한다. 2011년 페르난도 브리토는 멕시코 북부 마약 전쟁의 피해자들을 보여 준 작품 「풍경 속에서 사라진 Lost in the Landscape으로 세계 언론 사진상을 수상했다.  - P346

어떻게 보였는지 알려 주는 몇분의 1초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런 짧은 노출의 결과인 이미지는 때때로 개인의 삶이 멈춘순간부터 그 풍경을 에워싸는 참사의 오랜 여파를 통과해 망각에 젖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현재까지 이르는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시간의 문제는 기억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게 된다.
D. H. 로렌스의 소설에서 전쟁으로 인해 부상을 입어 마비 환자가 된 남편을 둔 채털리부인 코니는 남편의 사유지이며 ‘전쟁 중에‘ 벌목된 숲속을 걷다가 갑자기 그리고 감사한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의식하게 된다. "잔주름 많고 무수한잔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갈색 고사리 사이에서 자라난 잿빛의 완강한 밑동을 가진 나무들은 얼마나 고요한지!
새들이 얼마나 평화롭게 나무 사이를 스쳐 날아다니는지! 이장소는 기억하고 있어.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199듀이 매슈스의 사진들은 어떤 장소에서 잊혔던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식물에 대한 코니의 순간적 기억에 공감하게해 준다. 사진은 단순히 추모비 역할을 하기보다 기억에 대한다큐멘터리적 묘사일 수 있다. - P347

하지만 이런 특정장소에서 특정 순간에 어떤 일이 발생했다. 즉 시간이 멈춘 것이다. 그 후, 우리가 상황을 약간 다르게 생각한다면, 다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사진들은 거의 한 세기의 시간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진들은 그들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으며 묘사된 장소들이 시간과 무관한 현재에 존재한다는 엄연한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사진이 시간을 멈춘다는 개념에 익숙하다. 이사진 중 일부에서는 풍경 자체가 시간 속에서 정지된 것 같다.
이것이 바로 이 사진이 적절하게 기록한 것이다. 시그프리드서순은 새벽 공격으로 고지를 탈환하려는, 죽게 될 남자들의손목에서 얼마나 "시간이 멍하고 바쁘게 똑딱거렸"203 는지 썼다. 그 후에 남은 것은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 죽은 시간이다.
- P348

조지프 브로드스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경의를 표하며」에 "죽음으로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일이 일어난 날, 정확히 말하면 그날의 남은 부분이고,
시간은 더욱 짧다"고 썼다. 이런 의미에서 새벽의 처형은개인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삶, 많은 시간을 빼앗아 가는반면, 해 질 녘에 쏜 총알은 그들의 인생에서 오직 황혼만 잃도록 고안되었다. 어느 쪽이든 이 사진들은 잃어버린 것, 그리고 그 잃어버림에서 남은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 P349

이런 칠흑 같은 형태를 더 많이 볼수록, 시간적 원근법은더 깊어진다. 늘어진 실루엣은 자코메티의 앙상한 조각의 원초적 특성만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동굴 벽에 그려진 인물처럼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막아 내고 싶은 짐승과 폭력의 위협에 취약한 인간들 말이다. 동굴에는 항상 위협이 풍부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여기서 위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는 것이 바로 위협이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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