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부커상후보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지 않았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장르고 생소한 작가였다. 그.러.나. 정보라작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10편의 단편들이 섬뜩한 공포와 서늘한 감각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흡인력으로 몰두하게 만들었다. 대단한 작가를 이제야 만났으나 이제라도 알게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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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저주 토끼》는 쓸쓸한 이야기들의 모음이다. 출판사에서는불의가 만연한 지금 같은 시대에 부당한 일을 당한 약한 사람(들)을 위해 복수하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어서 이 단편집을내기로 했다는 다분히 진취적인 의견을 준 적이 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작품을 쓸 때의 의도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나는상당히 놀랐다.
《저주 토끼》에 실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외롭다. 세상은 대체로 사납고 낯설고 가끔 매혹적이거나 아름다울 때도있지만 그럴 때조차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곳이며, 등장인물(혹은 등장토끼 혹은 등장로봇)들은 사랑하거나 기뻐하기보다는 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분투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거나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교류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정보라


S12878호는 전원을 넣자마자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새로 추가된 기능이다. 섬세하고 작은 변화이지만 무척이나 정교하게 구현되었다. 앞으로 나올 모델들은 기종에 따라 수줍게 웃거나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가 쳐다보거나 대담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등 여러 가지 행동양식을 추가해서
‘성격‘을 시뮬레이션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이런 사항들을
‘비고‘ 란에 간단히 입력했다.
이제 상호작용을 시험해봐야 한다. ‘첫인사‘다.
"안녕."
내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 안녕, 내 사랑 - P121

그런 면에서 D0068호는 편하다. 데릭은 거의 웃지 않는다.
더 오래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의미 없이 웃는 쪽보다는 무표정하고 조용한 쪽을 선호하는 내 취향을 D0068호가 이미 파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도 동기화가 완료된 뒤에 D0068호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용히 거실을 나간다. 이제 데릭이 지난 두 달 반 동안 나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정보는 전부 세스도 알게 되었다. 나의 기본적인 하루의 일과,
음식 취향,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의 위치, 가까운 사람들의 연락처, 옷이나 이불을 원단 종류에 따라 상하지 않게 빨래하는방법까지. 그리고 양쪽 다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으니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에 대해서도 세스와 데릭은 실시간 동기화가 가능할 것이다. 말하자면 두 개의 서로 다른 몸체로 연결된 하나의 전자두뇌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테스트가 남았다. - P125

3개월의 시험 가동 기간이 끝난 뒤에 나는 그를 구입했다.
회사 방침상 충분히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되는 일이라 직원할인까지 받아서 정가의 70%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이후로 회사를 두 번인가 옮겼다. 여러 회사에서 만든 수많은 인공 반려자를 이 집에 데려와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석 달까지 함께 지냈다. 인공 반려자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점점 다양해졌다. 외모도 이삼십 대쯤의 젊은이로 보이는 모델뿐 아니라 청소년이나 중년 남녀 혹은 노인형 모델도 출시되었다.
(어린이 모델도 있지만, 특별 허가를 받아야 데려올 수 있고 무엇보다 내 분야가 아니다.) 어느 연령대의 어떤 모델이든 후속 기종으로 갈수록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졌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정교하고 인간다워졌다. 주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주인에 대해 ‘배웠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 했다.
그래서 인공 반려자는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인의 취향과 성정에 가장 알맞은 동반자로 변화하고 ‘성장‘ 했다.
그러므로 인공 반려자를 개발하고 시험하는 것은 무척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 P127

그러나 아무리 발전된 후속 모델을 데려와도 나에게는1호가 가장 소중했다. 아무리 섬세하고 정교하더라도 이후 기종들은 그저 내가 검사해야 하는 제품이고 업무일 뿐이었다.
1호는 달랐다. 내 첫사랑. 그는 내게 ‘인공‘이 아닌 진짜반려자였다. 평균적인 사용 연한이 지난 뒤에도 나는 1호를버릴 수 없었다. 기종이 오래되어 네트워크에 접속할 때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중단했고 나중에는 오류가 계속 나서 네트워크 접속 자체도 포기하고 차단해버렸다. 결국 1호는 ‘반려자‘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스마트 책상이나 냉장고보다도 기능이 떨어지게 되어버렸다. 그래도 내게 1호는 언제나 1호였다.
- P128

당신은 은빛 강물을 따라 흐르고
나는 사라진 과거를 향해 걸어가야지
내 심장은 당신과 함께 강물속으로
그러니 안녕, 내 사랑안녕, 내 사랑...

"그 노래를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물었다. 지나치게 높고 지나치게 큰 소리로 물었다.
세스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동기화된 자료입니다. 가장 좋아하시는 노래로 저장되어있었습니다.」나는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 동기화가 완료되었다고 했다. 당연한 얘기다.
세스는 예의 바르게 잠시 기다렸다. 내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돌아서서 이제는 버섯을 썰기 시작했다. - P132

「나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습니다.」셋이 동시에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세스의 손이 1호의 목덜미를 잡고 데릭이 1호의 허리를 잡은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셋이 전원과 중앙처리장치를 연결해 쓰고 있다.
그래서 맛이 가 버렸던 1호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
저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다. 아니 물론 가능한 건 알고 있었지만, 수리나 실험을 위해 공학자가 실험실에서 일부러 연결해놓은 모습이 아니라 기계가 스스로 자기들끼리 연결한모습은 처음 보았다.
가능과 불가능을 따지자면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불가능했다. 로봇이 인간을 칼로 찌르다니. 자신을 폐기 처분하려 했다는 이유로날 찌른 것은 어느 쪽이었을까. - P141

나는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전체를 적시는 것을 느끼며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침실 창문 밖으로 셋이 밤의 거리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여섯 개의 다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갈 때 우연인지 알 수 없지만, 가로등 불빛이 흔들려 셋의뒷모습이 어둠에 가려졌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 P143

이것은 오래 전에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남자가 겨울에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덫에 걸려 몸부림치는 여우를 보았다. 여우의 털가죽은 돈이 되므로남자는 여우를 죽여서 그 가죽을 가져가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여우가 고개를 들고 마치 사람처럼 남자에게 말했다.
"나를 풀어주시오."
남자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동시에 남자는 덫에 끼인 여우의 발목에서 번쩍이는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우는 피가 아니라 황금과 같은, 황금처럼 보이는 것을 흘리고있었다. 

-- 덫 - P147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이가 무심하게 입을 반쯤 벌리고 뾰족한 위아래 송곳니를 드러낸 채 동네 사람을 쳐다보았다.
동네 사람은 젊은 남자를 뿌리치고 붙잡힌 발목을 빼냈다.
그리고 돌아서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집에 돌아와서 동네 사람은 쓰러져 있던 젊은 남자가 붙잡은 바짓단에 번쩍이는 황금빛 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동네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가 뜬 후에 다시 가 보았으나 산길은 눈이 녹아 질퍽질퍽할 뿐, 황금빛 아이도 배가 갈라진 남자도 이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 P166

소년은 동굴 안으로 끌려갔다.
이유는 모른다. 자신을 끌고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도모른다. 사실 소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벌판을 배회하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그대로 끌려간곳이 산속의 동굴이었다.
소년은 동굴 안에 묶였다. 쇠사슬에 휘감긴 손발이 완전히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을 확인하고 소년을 그곳으로 데려왔던사람들은 서둘러 떠나 버렸다.
암흑 속에서 얼마 동안 울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와 주지않았다.

-- 흉터  - P169

지 못했다. 어머니가 누구이고 아버지가 누구이며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떠돌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기억의 잔상은 동굴 속에서 지낸 암흑의 시간속에 흩어져서 모두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소년은 누군가, 누군지 모르지만 아무나 좋으니까 누군가 자신을 이곳에서 꺼내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딘지 몰라도 여기가 아닌 곳, 이 고통과 암흑이 없는 곳으로데려가 주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무기력하게 빌고 또 빌었다.
물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으므로, 소년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또한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 P172

세상의 모든 소년은 살아남아 성장하면 청년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은 쇠사슬이 어쩐지 점점 짧아진다고 느꼈다. 잠든 채로 자기도 모르게 팔이나 다리를 뻗으려했다가 날카로운 쇠가 살을 파고드는 감촉과 갑자기 당기는느낌에 깜짝 놀라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동굴 밖으로 끌려나가 얼음장처럼 차갑고 번득이는 대기 속을 가를 때 자신이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자 그 힘에 못 이겨 자신을 물고날아가는 ‘그것‘이 함께 휘청거리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다. - P174

 손목과 발목에 아직도 걸려 있는 족쇄와 쇠사슬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는 반쯤은 엎드려서 손발로 기어가다가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리기도 하고두 발로 서서 버티기도 하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법을 다시 익혔다.
그는 늘 먹던 날고기가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생풀과 나무 열매를 먹는 법은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입에 넣고 씹으며 어딘지 모를 곳으로 계속 전진했다.
그는 도망치고 있었다. 힘들고 아팠지만, 이 순간 그는 자유로웠다. 그래서 그는 어디로 가는지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최대한 서둘렀다.
다시는 잡히고 싶지 않았다. 잡혀서는 안 되었다. 다시 그동굴 속의 어둠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것‘이자신을 죽이리라.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 P177

대머리 남자가 주는 정체불명의 액체를 마시고 사람을 상대로 싸움하게 된 뒤로 그는 서서히 망가져 갔다.
강한 냄새가 나는 액체는 자꾸 마시다 보니 토하는 횟수가줄었으나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이 점점 더 심해졌다. 구토를억누르며 비틀거리면서 상대와 맞서다 보니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확실히 몸이 상했으므로 액체가남긴 후유증에서 회복되는 속도 또한 점점 느려졌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 그는 ‘그것‘이 남긴 흉터에서 단단한 비늘이 돋아나와 자신을 보호해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이 몽롱해서 반응이 느려지다 보니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속도조차 점점 느려졌고, 기력이 떨어지고 몸이 망가져 감에 따라서 이전처럼 강력하게 반격할 수 없게 되었다. - P198

대머리 남자가 그를 버리고 떠난 것은 그가 마침내 제대로일어설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아무리 때리고 차고 목덜미를 짓누르고 밟아도 그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대머리 남자는 침을 퉤, 하고 뱉은 후에 일행 중 한 명을 시켜 그를 어깨에 둘러메고 산속으로 데려가게 했다. 숲을 헤치고 안쪽으로들어가서 대머리 남자의 부하는 그를 나무 밑에 적당히 눕힌뒤에 돌아서서 가 버렸다.
그는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하늘이라고 해도 높이 솟은 빽빽한 나무 꼭대기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파란 조각일 뿐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파란 조각을 쳐다보며 땅에 깔린 낙엽의 냄새를 맡고 있다 보니 끊임없이 울렁거리던 속이 어쩐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는 몽롱하고 느긋한 기분이 되어 그대로계속 누워 있었다.
나무 꼭대기 사이로 보이던 파란색이 흐려졌다. 회색이 되고 이어서 짙은 잿빛으로 변하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땅에 깔린 낙엽 위로, 그의 얼굴과 몸 위로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 P201

그리고 이제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와서, 그는 이성이나감정으로 어쩔 수 없는 몸의 감각이 익숙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동굴 안은 그의 세계였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는 돌벽의 주름 한 개, 바닥의 움푹 파이고 솟아오른 부분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익숙하다면 그 자신도 이 동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쇠말뚝이 손에 닿았다.
여자의 헛간에서 여자의 오빠가 그의 오른손 수갑 고리에끼워놓았던 쇠사슬을 그는 일부러 가지고 왔다. 이제 어린 시절의 감옥에 도착해서 그는 쇠말뚝의 고리 옆에 쇠사슬을 접어서 내려놓고 그 시절에 늘 그러했듯이 쇠말뚝 옆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 자리는 그의 자리였고, 그를 위해 아직 비어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가 운이 좋아 성공한다면 앞으로 영원히 다시는 그 누구도 갇히지 않게 될 자리였다. - P221

‘그것‘은 아름다웠다. 처음으로 태양 빛 속에 ‘그것‘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생각했다. ‘그것‘은 기괴하게 아름다웠다.
햇살 아래 나타난 ‘그것‘은 검은색이 아니라 짙은 회색이었다. 잿빛 깃털에는 잘 단련한 쇠 같은 생기 없이 차가운 윤이흘렀다. 발톱과 부리는 은빛이었고, 그 은빛 부리 한가운데에짧지만 깊은 흠집이 불그스름하게 나 있었다. 자신이 휘두른쇠사슬이 부딪친 자국일 것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부리 옆에는 새파란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푸른색은 처음 마주 대하는 자에게 충격을 줄 정도로 깊고 맑고, 그리고 잔혹했다. - P223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것‘은 그를 허공으로 한 번 던져 올렸다가 부리로 다시 받았다. 그는 이제 하늘을 보고 누운 모습으로 부리에 물려서 얼굴은 ‘그것‘의 새파란 눈을 정면으로향하게 되었다.
짐승의 눈에도 표정이 있다면 그 눈에 나타난 것은 그가읽은 것은 분명 만족감이었다. 다만 사람과 달라서 짐승은 상대를 겁주고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 야생 짐승에게 다른 동물이란 내가 죽이거나 아니면 나를 죽이거나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단 상대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잡아왔다면 상대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냥 잡아왔다. 이겼다는 그 사실 그대로가짐승에게는 삶의 만족일 뿐이다. - P224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침이었다.
여자와 그 오빠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의 뒤쪽,헛간이 있었던 부근에 남자의 시신일 듯한 조각들이 대량의피와 함께 흩어져 있었다. 그는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하여 그곳을 떠났다.
산길을 내려와서 보니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 집이 있고 사람들이 다니던 자리에 수백 년은 묵었을 법한 고목이 마치 원래 자기 자리였다는 듯 자라나있었다. 혹은 울타리가 있던 곳에 덤불이 우거지고 대장간이있던 자리에는 말라붙은 풀밭만이 펼쳐져 있었다. 주민들은거의 사라졌다. 남아 있던 두세 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때 그들의 터전이었던 장소를 헤매다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겁에 질려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절망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 P229

그리고 마침내 눈물이 멈추었을 때, 세상 어딘가에 있을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그는 해가 뜨는 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 P230

다만 그 건물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된 동네의 낡은 건물이니 어쩔 수 없다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설득했다. 아파트 한 채 값으로, 작지만 어엿한 건물 하나를 사려다 보니 아무리 낙후된 동네라지만 더 좋은 물건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 건물은 다른 집들에 비해 값이아주 쌌고, 큰길로 나가는 골목 입구에 자리 잡았으며 전철역과 버스 정류장에서도 멀지 않으니 위치도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짧게 상의하고 잠시 망설인 뒤에얼른 결론을 내렸다.

-- 즐거운 나의 집 - P236

진짜 문제는 건물을 산 뒤에 시작되었다.
건물은 지상 4층이고 예상외로 넓은 지하실이 있었다. 1층에는 커피숍이 있고 2층에는 조그만 사무실이 세를 들어 있었다. 3층은 얼마 전에 세입자가 나가 버려서 비어 있었고, 4층은 이전 집주인의 살림집이라고 ‘복덕방 사장님은 말했다. 남의 살림집을 함부로 들어가 보기는 뭣하다고 복덕방 사장님은그녀와 남편에게 비어 있는 3층만 보여주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여주는 곳만 보고 고분고분 나와서 덜컥 계약해버린 것은 초보자의 실수치고도 너무 큰 실수였다.
이전 집주인이 이사 나간 뒤에 4층에 들어가 보니 쓰레기도 쓰레기지만 먼지와 쥐똥이 쌓이고 얼마 안 되는 가구는 다썩어서 허물어져 가는 모습이 흉가가 따로 없었다.  - P236

인생은 문제의 연속이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경우에는더욱 그렇다. 집 밖의 문제를 피해 가정으로 돌아와도 가족이집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순댓국집 권리금 문제가 해결(꺼림칙한 경로를 거쳤지만 그래도 해결은 해결이다)되고 나자 여자가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그 전에도 전화가 계속 왔지만, 남편은 일부러받지 않았고 그녀는 도저히 거기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어서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더 악에 받쳤고, 그리하여 그녀의 남편뿐만 아니라 어떻게 번호를 알아냈는지 그녀에게도 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P259

아이는 그녀의 얼굴을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이는 처음부터 이 집과 함께 있었다. 그러니 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아이와 함께 있는 한 그녀도 이 집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리 와."
그녀는 팔을 벌렸다. 아이가 그녀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힘에 떠밀려 그녀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지하실의 희끄무레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지금 아이는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체온과 살갗의 촉감이확연히 느껴지게 되었다. 더 커지고, 더 무거워지고, 더 뚜렷해졌다.
그녀는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엄마하고 둘이 살자."
그녀가 하얀 그림자 아이를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 - P265

"엄마하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자."
속삭이며 그녀는 아이의 희끄무레한 이마에 입 맞추었다.
어두운 콘크리트 건물의 검은 지하실에서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렸던 조그만 아이의 흔적이 드디어 찾아낸 그녀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 P266

모래사막 위 허공에 황금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배가 떠 있었다. 배를 이루는 수천, 수만 개의 톱니바퀴가 째깍째깍 움직일 때마다 햇빛이 톱니 하나하나에 반사되어 황금 톱니바퀴 배는 태양 그 자체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위풍당당하게 번쩍이는 황금 톱니바퀴 배는 일렁이는 햇빛과 톱니바퀴에 반사된 금빛 섬광의 파도에 둘러싸인 채 모래사막 위의 뜨거운허공을 가로질러 천천히 움직여 갔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 P269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기 나름대로파악한다. 어린아이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세상의 호의와 인간의 신뢰 여부를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왕자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진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왕자가 아는 한,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 P271

왕자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얼굴을 더듬는 동안 공주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낯선 남자의 손끝이 얼굴을 만지는 것이 공주는 쑥스럽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금지된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감각이 당황스럽고조금은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즐겁고 들뜨기도 했다. 그래서왕자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질 때마다 공주는 조금씩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왕자가 손가락을 떼었을 때, 공주는 이미 완전히 사랑에 빠져 있었다.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이 왕자인지 사랑 그 자체인지자기 자신의 흥분된 감정인지는 공주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신은 아름답군요."
왕자가 속삭였다.
"내가 앞을 볼 수만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내 아름다운신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왕자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울지 마세요." - P274

물고기가 깨뜨린 밤하늘 사이로 물이 쏟아졌다. 공주는 일어섰다. 하늘에서 차갑고 신선한 물이 쏟아져 온몸을 적셨다.
공주는 입을 벌리고 물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충분히 목을 축이고 나서도 공주는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채 계속 물을 받아먹으며 기쁨의 춤을 추었다.
눈먼 물고기가 광대한 바다로 돌아갔고, 사막의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공주는 행복했다. 죽음의 공포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모두 잊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모래사막 한복판에 와 있는지조차 전부 잊을 정도로 공주는 행복했다. - P288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요."
공주가 마침내 대답했다.
"나와 같은 인간 남자를 만나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아이가 또 어른이 되어 짝을 찾고 자손을낳는 모습을 보고…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바람과 모래의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살아갈 테니까요."
"그렇다면 인간의 시간이 끝난 뒤에 나에게 오라."
황금 배의 남자가 제안했다.
"공주에게 인간의 삶은 줄 수 없지만, 대신 인간이 알지 못 - P293

하는 평온과 무한을 약속하겠다."
공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텅 빈 왼팔 소매가 움직였다. 공주는 산들바람과도 같이 시원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오른쪽 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황금 배의 톱니가 끼릭끼릭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톱니바퀴로 이루어진 황금 배가 불꽃처럼 햇빛을 반사하며 방향을 바꾸었다. 황금 톱니바퀴의 배는 태양을 등지고 뜨거운 사막의 하늘을 가로질러 공주의 고향인 초원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 P294

오래전 광장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폴란드의 여름은 덥고 건조했다. 나는 한 손에 차가운 음료수를 들고 그늘에 앉아 있었다. 삶은 불안했다. 나는 그 불안으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었다.
광장은 시끌벅적했으나 들려오는 목소리 중에는 폴란드어보다 영어와 독일어가 더 많았다. 이곳은 관광도시다. 

-- 재회 - P298

남자를 다시 만난 곳은 도서관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원 학위과정을 끝내가는 중이었고, 논문을쓰기 위해 폴란드의 도서관에 자료조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학교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 돈으로는 비행기 표 값을 대기도 모자랐다. 숙식과 시내에서의 교통비와하다못해 도서관에서 책을 복사하는 비용까지 모두 내가 충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들여서 폴란드까지 와서 과연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시작했으니 끝을 보아야 했고, 그 끝을 보는 방법 중에서 그때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이었다.
동유럽의 도서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내가 찾아간 대학의 도서관도 폐가식이었다. 다시 말해 필요한 자료의 서지번호를 찾아서 신청서를 일일이 작성해서 제출하면 담당 사서가보관서고에 가서 책을 찾아다 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신청서를 썼다. 그리고 해당 카운터에 가서 내밀었다.  - P303

 다만 그 대본은 그의 것이었으므로 나는 내용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표면상으로는 내가 묶는 쪽이고 그가 묶이는 쪽이었으나실제로는 그가 명령을 내리는 쪽이고 나는 그가 상정한 대본대로 명령에 따르는 쪽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어떤 가상의 대본에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방법이나 행동이 "올바르다" 혹은 "틀렸다"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침대에서 애인이 요구하는 대로묶어주는 방식이 원칙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에서 옳거나 틀릴수는 없다. 나는 올바르거나 틀렸다는 그의 주관적인 판단 기준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상당히 고생했다.  - P207

"할아버지는 이미 지나간 전쟁을, 이미 사라져버린 수용소를 평생 두려워하면서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낸 수용소 안에서 살고 있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자유롭게 자기 도시의 거리를 걸을 수 있게 됐어."
그가 중얼거렸다.
내친김에 나는 물어보았다.
"그때 광장에서 한 방향으로 걸어가던 나이 든 신사분은누구야?"
"전쟁 때 광장에서 총을 맞은 사람일 거야."
그가 말했다.
"거기서 자주 봤어. 길을 건너서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마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길에서 죽었을 거야."
"어째서 그런 불행한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산사람도, 죽은 사람도."
내가 중얼거렸다.
"트라우마라는 거겠지."
그가 대답했다. - P312

 그 뒤에는 이런 관점을 극복하기 쉽지 않다.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에게 가장 큰 화두는 언제나,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다. - P320

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과거에 고정되어버린 사람들, 그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의 어머니도, 나도, 살아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사실은 모두 과거의 유령에 불과했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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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등은 매우 귀여웠다. 토끼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무 부분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았지만, 토끼는 한껏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토끼의 양쪽 귀 끝과 꼬리 끝,그리고 눈은 검었고, 몸의 나머지 부분은 새하얀 색이었다. 딱딱한 재질인데도 보드라운 분홍 입술과 복슬복슬한 털의 질감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면 토끼의 몸체가 하얗게 빛났고, 그 순간만은 마치 살아 있는 토끼 같아서귀를 쫑긋 세우거나 코를 벌름거리기라도 할 것 같아 보였다.

-- 저주 토끼 - P9

모든 물건에는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저주에 쓰인 물건이니 이 토끼 전등에도 물론 사연이 있다. 할아버지는 전등 옆안락의자에 앉아서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를 또 몇 번이고 다시 들려주시곤 하는 것이다. - P18

그런 법은 없지만 그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나도 저주 용품을 만드는 걸로 직업을 삼고, 그걸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P17

저주하려는 상대방이 저주의 물품을 직접 만져야만 한다.
그것이 저주의 핵심이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할아버지는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을 음으로 양으로 총동원하여 친구를죽게 한 장본인인 경쟁사 거래처에 근무하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과 어떻게 연락이 닿았다. 그리하여 경쟁사 사장에게 직접 토끼 전등을 배달하도록 부탁했다. 토끼의 등 부분에 스위치를 장치해서 마치 진짜 애완 토끼를 쓰다듬는 것처럼 토끼 전등의 등을 쓰다듬으면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거래처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자기네 사장님이외국에서 사 온 선물이라고 둘러대며 경쟁사 사장 앞에서 장갑낀 손으로 토끼 전등의 불을 켜는 시범을 보였다. 경쟁사 사장은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비서가 바꿔주는 전화를 받더니 국회의원과 만나야 한다면서 급하게 나가 버렸다.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거래처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사람은 토끼 전등을 사장실에 그냥 놓아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 P17

사장의 손자가 토끼 전등 옆 침대에 누워 천천히 죽어가는 동안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다. 사장의회사에서 생산하는 싸구려 술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던 힘 있는 사람들이 그 힘과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회사는 창립 이후 처음으로 세무조사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는 영업실적도 회계장부도 재무제표도 매일매일의 결재서류도 거의 모두 보이지 않는 토끼에게 갉아 먹혔다. 분명히 신고한 영업이익의 기록도, 분명히 납부한 세금의기록도 모두 조각조각 찢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토끼들은 이제 사무실 벽의 벽지도 뜯어먹고 목조 건물의벽이나 문짝에도 이빨 자국을 냈다. 회사의 중요한 서류들은모두 말 그대로 휴지조각이 되었고 본사와 지사 곳곳에서 건물이 물리적으로 눈에 띄게 망가져 갔다. 안팎으로 회사가 기울어 가는 것이 직원들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였다.
사장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 P27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불문율에는 이유가 있다.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타인을 저주하면 결국 자신도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무덤이 세 개‘라고 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저주했던 사장, 사장의 아들, 사장의 손자는 모두 죽었다.
할아버지의 무덤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냥 집 밖으로 나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왔다.
달이 어스름하게 구름에 가린 밤, 혹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길거리의 가로등 불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 자연의빛도 인공의 빛도 모두 힘을 쓰지 못하는 어둡고 적적한 밤이면 할아버지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나타나 토끼 전등을 켜고, 이미 몇십 번이나 들려주었던 같은 이야기를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저주일까.
혹은, 축복일까. - P32

할아버지가 기억을 떠올리고 사실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 나쁜 건, 할아버지가 기억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내가 답을 찾지도 못한 채 할아버지가 그냥 내질문에 놀라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되는 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돌아서서 내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그러나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문틈으로 여전히 거실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 옆에 너무도 예쁜 토끼 전등이 엿보인다. 그래서 나는 안심한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 - P33

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 P34

"나는 너 같은 것에게 내 변기를 차지할 권리를 준 적이 없다. 너는 나를 어머니라고 하지만 나는 너 같은 걸 만든 적이없으니 널 없애버릴 사람을 부르기 전에 썩 꺼져라."
‘머리‘는 대답했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제까지처럼 변기안에 오물을 버려 주시면 그것으로 나머지 몸을 이루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가서 멀리 떠나 제힘으로 살아갈 테니 저에게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제까지처럼 변기를 사용해 주십시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이것은 내 변기니까 당연히 이제까지처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너 같은 게 내 변기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 네가 몸을 이루건 말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네가 뭘 하건 상관없으니 앞으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머리‘는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

-- 머리 - P39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뜬 듯 만 듯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뭉개진 얼굴에는 무언가 표정을 떠올리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무슨 표정인지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물을 내리려고 다가서면 ‘머리‘는 재빨리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면 그녀는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고 변기를 한동안바라보다가 화장실을 나왔다. - P40

 새집에서 새 생활을 하게 되면서 방광염과 변비는 많이 나아졌다. 아무 기복 없이 평범한, 좋을 것도 나쁠 것도없는 생활을 꾸려가면서 그녀는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 와중에 그녀는 ‘머리‘에 대해서는 차츰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후 아이가 생겼다. 그녀는 ‘머리‘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 P43

그러면 그녀는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그녀는 혼자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움직이는 화면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 잡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 듯하기도 한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웠다. 그러나 생각의 샘은 하염없어서 퍼내고 또 퍼내도다시 흘러나오곤 했다. - P51

그녀는 젊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자신의 몸을바라보았다. 자궁과 탯줄이 아닌 대장과 배설물로 자신에게서 비롯되어 어엿한 성체를 이룬 존재를 바라보았다. 순백의도기 속에 가려진 그 검은 구멍에 숨어 그렇게도 오랫동안 그렇게도 지겹게 자신을 괴롭혔지만 이제 떠나겠다는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작별하는 마당이라면, 정말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옷 한 벌쯤 주어도 무방할 터였다.
젊은 그녀가 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늙은 그녀는 옷을 벗었다. 별로 화사한 입성은 아니었다. 카디건 하나와 원피스,
브래지어와 팬티, 양말,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녀는 알몸이되어 젊은 그녀가 늙은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천천히 주워 입는 것을 바라보았다. 팬티, 브래지어, 원피스, 카디건, 젊은그녀는 공들여 하나하나 음미하듯이 옷을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고 카디건의 앞섶을 여몄다. 늙은 그녀는벗은 몸에 문득 으스스 한기를 느꼈다. - P55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내게 베풀어준 것이라고는 있어 봤자 네게는 백해무익할 따름인 배설물과 오물뿐이 아니었느냐? 그나마 받아먹으며 사람다운 외양을 이루기 위해 나는 네게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나는 몸을 이루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이제 나는 네가 되었으니 너의 자리를 차지하여 살아가리라."
말을 마치고 젊은 그녀는 늙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젊고 억센 손이 늙은 어깨와 목을 붙잡았다. 젊은 그녀는 늙은 머리를 변기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늙은 발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늙은 몸을 가볍게 변기 속에 거꾸로 처넣고나서 젊은 그녀는 변기의 뚜껑을 닫고 물을 내렸다. - P57

그녀는 눈을 떴다.
어둡다. 깜깜하다. 검은 천으로 눈앞을 가려놓은 것 같다.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눈이 먼 것일까?
한 손을 눈앞에서 움직여 본다. 희끗희끗한 물체가 뭔가 보이는 것도 같다. 그러나 확실한 형체는 분간할 수 없다.
몇 번 그렇게 손을 움직여 보다가 그녀는 포기했다. 어둠이 너무 짙다.
지금 몇 시인데 이렇게 어두울까. 여기는 어디인데, 이렇게까지 어두운 걸까.
그녀는 손을 뻗어 앞을 더듬었다. 둥글다. 딱딱하다.

-- 차가운 손가락 - P61

크고 따뜻한 손, 그 손이 자신의 손을 감쌌던 기억, 친숙하고 반가운 얼굴,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은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희미해져서,
마치 석양 무렵의 햇살처럼, 그렇게 약간의 온기만을 남기고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눈을 뜬 순간부터 그녀를지배한, 주위를 둘러싼 것과 똑같은 어둠뿐이었다. - P69

갑자기 발밑의 땅이 물컹, 해졌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환한 빛이눈앞을 뒤덮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돌연한 불빛 앞에서기능을 멈춰 버렸다. 그녀는 쏟아지는 빛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다가온다기보다 통제력을 잃고 도로를 벗어나 날아오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의모습,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자신의 표정이 한순간 또렷하게보였다. 무기력한 운전대를 꼭 움켜쥔 자신의 양손 사이에또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 비웃듯이 여유롭게 얹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덮쳤다. - P79

그리고 대화는 멀어진다.
차는 조금씩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차에 짓눌리면서 으드득, 하고 몸 어딘가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이상하게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빠져나갈 수 없이 그녀를 짓누른 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자동차의 거대한 무게가 느껴질 뿐이었다. - P82

피가 멈추지 않는다. 생리 12일째. 보통 3일째를 고비로양이 줄기 시작하여 5, 6일쯤 끝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2주가다 돼 가는데도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양이 줄어들어 드디어 그치려나 싶다가도 아침이 되면 다시슬금슬금 흘러나온다.
보름째가 되어도 피는 멎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가 볼까.
그러나 결혼도 안 한 처녀에게 산부인과는 그렇게 마음 가볍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20일 넘게 피를 흘리자 조금씩 어지럼증이 생기고 늘 피곤하여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심하고산부인과를 찾아갔다.

-- 몸하다(월경이 나오다. 월경을 치르다.) - P85

"저, 지금이라도 보호자가 되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아기 아버지가 됐으면 해서…."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그녀와 분만실의 불편한 분위기를눈치채고 잠시 말을 멈췄다.
"저, 설마..?"
그녀는 천천히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초점 없는 눈으로남자의 당황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바닥으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는, 한때 그녀의 아기였던 피 웅덩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문득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서럽게 엉엉 소리 내 울었다. 그러나 그것이 안도의 눈물인지,
아이를 잃은 슬픔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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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이 잠겨 있지 않아서 그는 조용히 들어갔다. 짐은 침대에누워 코를 골고 있었고, 헬렌은 잠든 것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제 그녀는 신발코에 북슬북슬한 방울이 달린 얇은 분홍색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밥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슬픔이 일었다. 그는 형이 형이! 그리웠고, 형은 메인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형은 메인을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했고, 밥은 그들이 여기로 돌 - P308

아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짐은 남은 생을 뉴욕에서망명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밥은 남은 생을 메인에서 망명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팬을 늘 그리워할 것이다. 뉴욕을늘 그리워할 것이다. 해마다 뉴욕을 찾아가도 그럴 것이다. 그는이곳에서 망명자였다. 그리고 이 기이한 현실이 자신의 삶은,
짐의 삶은, 심지어 팬의 삶은 결국 어떤 모습인가같은 슬픔을 안기며 그를 흔들어놓았다. - P309

그래서 밥은 발꿈치에 엉덩이를 붙인 채 쪼그려 앉아 있다가,
헬렌의 눈이 한동안 감겨 있자 맞은편 의자로 조용히 옮겨 앉았다. 그는 몸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오래 걸은 것처럼 아팠다. 온몸이 아팠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내 영혼이 아파하고 있다고.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깨달음이, 입을 벌린 어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선택은 어떤 것이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깨달음이 그를 찾아왔다. 그것은 짐에게도, 헬렌에게도, 마거릿에게도, 그 자신에게도마찬가지였다. - P310

9월 중순의 어느 화요일 아침, 올리브키터리지는 조심조심차를 몰아 요트 선착장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어서-이제 그녀는 이른 시간에만 운전했다예상대로 차는 많지 않았다. 그녀는 빈자리에 차를 대고 천천히 내렸다. 올리브는여든두 살이었고, 스스로 완전히 늙은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팡이를 쓰기 시작한지 삼주가 지났고, 돌길에서는 발밑을 잘살펴야 했기에 위를 쳐다보지 않고 걸었다. 그럼에도 이른 아침의 햇살과 우듬지 쪽에서 이미 선홍색으로 물든 나뭇잎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 P312

올리브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썰물 때였다. 거칠어진 머리를 빗질해놓은 듯 해초가 한방향으로 드러누워 있었다. 만에 남은 배들은 우아하게 자리를잡고 있었고, 가는 돛대들이 작은 첨탑처럼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배들을 지나 저멀리 이글 아일랜드와 퍼커브러시 아일랜드가 보였다. 두 개의 섬 전역에 상록수가 자랐지만, 여기서는가는 선이 그려진 듯 보일 뿐이었다. 종업원 여자가 실제로 달걀 접시와 머핀을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양손으로 골반을 짚은 채 "더 필요하신 건요?" 하고 말했고, 올리브는 그저 고개만 작게 흔들었다. 그러자 여자는 가버렸고, 걸을 때 하얀 바지를 입은 엉덩이 한쪽이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반대쪽 엉덩이가 올라왔다. 거대한 살덩이들이 번갈아 오르내렸다. 테이블 위로 비치는 햇살 한 조각에 올리브가 손에 낀 반지들이 반짝반짝빛을 튕겨냈다. 그 손-그렇게 햇빛을 받은 모습을 쳐다보니놀라움이 마음속에서 희미하게 반향을 일으켰다. 쭈글쭈글하고푸석푸석했다. 그것이 그녀의 손이었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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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메인 스트리트를 따라 걸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면서 자신이 안전하지 않은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타운은 지난 몇 년 사이 급변해서, 사람들은 더이상 지금의 그처럼 밤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꽤 오랫동안 도리 생각을 하지 않고 지냈다. 예전에는 많이 생각했다.
머리 위에서 달빛이 내리비치고 있었고, 그 빛은 계속 환했다. 마치 도리에 대한 기억이 혹은 도리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처럼. "분명 너희 집은 조용하지 않겠구나." 그녀는 말했다.
그러다 데니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 그의 집은 조용했다. 해가바뀌고 또 바뀌면서 점점 조용해지고 있었다. 애들이 결혼하고떠난 뒤로 그의 집은 서서히 조용한 집이 되어갔다. 마리는 지역학교에서 교육공학자로 일하다가 몇 년 전에 은퇴해서 더이상어떤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해 할말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뒤에 그도 가게에서 은퇴해서 역시 할말이 많지 않았다. - P233

구급차가 떠났고, 경찰 하나가 데니에게 말했다. "음, 오늘밤한 생명을 구하셨군요." 그러자 다른 경찰이 차에 타며 말했다.
"일단 지금은 말이죠."
데니는 재빨리 집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자신의 자식들은 전혀 문제가 없다고. 그 생각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자식들은 불쌍한 도리와는 달리 안전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의 자식들은 약을 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게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사위는 것이 서글펐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그는 서둘러 집 앞 계단을 올라갔고, 코트를 벗어던졌다. 마리는 아직 잠들지 않고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책을 침대에 내려놓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 그녀가 말했다. - P236

11월이었다.
메인주 크로스비에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다. 바로 이날 수요일에는 해가 나서 세상에는 선뜩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오크나무에 매달린 잎은 금색으로 변해 시들어갔고, 상록수는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잎을 벗어내고 검은 가지만 남은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고, 뾰족한 우듬지는 끝이 더욱 가늘어졌다. 길은 황량했고,
들판은 싹 베어져 깨끗해 보였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 아래에서 만물은 얼마간 오싹하면서도 굉장히 아름다워 보였지만 빛은 하늘 꼭대기까지 가닿지 못했다. 하늘은 검은빛이 도는 푸른색이었다. - P237

죽은아내 벳시가 그 여자가 쓴 걸 다 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올리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 강을 따라 달리고 있었고, 풍경에는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삭막한아름다움, 길 바로 오른쪽으로 강물이 회색 리본처럼 흘러갔다.
"오늘 드라이브 나오길 잘한 것 같아." 잭이 말했다. - P245

그날은 그런 식이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뒷길로 돌아다니며이야기를 나누었다. 잭은 이미 한 적 있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다시 했다. 올리브의 어린 시절 집을 보자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 외곽에 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집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그 이야기를 올리브의 집만큼 작지는 않았지만어렸을 때조차 작게 느껴졌던 그 집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했다.
좁아터진 느낌이었다고, 그는 지금 그렇게 표현했다. 올리브는들으면서 "아, 뭐"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저것 좀 봐." 잭이 모퉁이를 돌자마자어두워지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11월의 석양이 눈앞에 모습을드러냈다. 지평선을 가로질러 노란색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헐벗은 나무들이 잎을 떨군 짙은 색 나뭇가지를 하늘을 찌를 듯뻗어올리고 있었다. "굉장하다. 잭이 말했다. - P249

하지만 시내에서 빠져나와 개방도로로 나오는 동안 올리브는그의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잭 역시 할말이 없었다. 여전히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길에 그어진 흰 선말고는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고 강을 따라 달리면서, 올리브가그의 아내라는 사실과 오늘밤 일레인을 만나기 전까지 그들이함께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더이상 올리브와 함께한 시간이 행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은 이제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그들이 함께한 날은 저물었다, 끝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차 안의 침묵 속에서 잭은 올리브-그의 아내의 존재를 느꼈다. 물리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 P263

잭은 너무 무서워서 의자에 앉아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무서운 것은 인생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이 누군지, 혹은 뭘 - P266

하는지 모른 채 살아왔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이 그의 내면에전율을 일으켰고, 그는 그것을 자신이 느낀 대로 정확히 표현할단어조차-스스로 잘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방식에 대해 스스로 모르고 있었다고 느꼈다. 그것은 바로 눈앞에 큰 맹점이 존재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를어떻게 보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정말로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모른다는 뜻이기도 했다. - P267

하지만 이제 그는 기억 속에서 벳시를 생각했다. 그녀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단순함을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그녀는 캐시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받아들였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오, 벳시!) -아니, 벳시는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밤 그는 그녀가살아서 그와 함께 있기를 바랐다. 그 생각이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것은 그들의 삶 전체가 허비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많이 웃었고달콤한 순간도 많았으니 삶 전체는 아니었다. 오늘밤 그런 순간들이 책의 마음속을 스쳤다. 그는 주말에 자신이 크레페를 만들던 모습을,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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