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등은 매우 귀여웠다. 토끼가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나무 부분은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았지만, 토끼는 한껏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다. 토끼의 양쪽 귀 끝과 꼬리 끝,그리고 눈은 검었고, 몸의 나머지 부분은 새하얀 색이었다. 딱딱한 재질인데도 보드라운 분홍 입술과 복슬복슬한 털의 질감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전등에 불이 들어오면 토끼의 몸체가 하얗게 빛났고, 그 순간만은 마치 살아 있는 토끼 같아서귀를 쫑긋 세우거나 코를 벌름거리기라도 할 것 같아 보였다.

-- 저주 토끼 - P9

모든 물건에는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저주에 쓰인 물건이니 이 토끼 전등에도 물론 사연이 있다. 할아버지는 전등 옆안락의자에 앉아서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를 또 몇 번이고 다시 들려주시곤 하는 것이다. - P18

그런 법은 없지만 그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나도 저주 용품을 만드는 걸로 직업을 삼고, 그걸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P17

저주하려는 상대방이 저주의 물품을 직접 만져야만 한다.
그것이 저주의 핵심이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할아버지는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을 음으로 양으로 총동원하여 친구를죽게 한 장본인인 경쟁사 거래처에 근무하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과 어떻게 연락이 닿았다. 그리하여 경쟁사 사장에게 직접 토끼 전등을 배달하도록 부탁했다. 토끼의 등 부분에 스위치를 장치해서 마치 진짜 애완 토끼를 쓰다듬는 것처럼 토끼 전등의 등을 쓰다듬으면 불이 들어오도록 했다.
거래처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은 자기네 사장님이외국에서 사 온 선물이라고 둘러대며 경쟁사 사장 앞에서 장갑낀 손으로 토끼 전등의 불을 켜는 시범을 보였다. 경쟁사 사장은 결재서류에 도장을 찍으면서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비서가 바꿔주는 전화를 받더니 국회의원과 만나야 한다면서 급하게 나가 버렸다.
할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거래처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사람은 토끼 전등을 사장실에 그냥 놓아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 P17

사장의 손자가 토끼 전등 옆 침대에 누워 천천히 죽어가는 동안 해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었다. 사장의회사에서 생산하는 싸구려 술이 시장을 독점할 수 있도록 뒤를 봐주던 힘 있는 사람들이 그 힘과 지위를 잃었다. 그리고회사는 창립 이후 처음으로 세무조사라는 것을 받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는 영업실적도 회계장부도 재무제표도 매일매일의 결재서류도 거의 모두 보이지 않는 토끼에게 갉아 먹혔다. 분명히 신고한 영업이익의 기록도, 분명히 납부한 세금의기록도 모두 조각조각 찢겨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토끼들은 이제 사무실 벽의 벽지도 뜯어먹고 목조 건물의벽이나 문짝에도 이빨 자국을 냈다. 회사의 중요한 서류들은모두 말 그대로 휴지조각이 되었고 본사와 지사 곳곳에서 건물이 물리적으로 눈에 띄게 망가져 갔다. 안팎으로 회사가 기울어 가는 것이 직원들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였다.
사장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 P27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불문율에는 이유가 있다.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한다.
타인을 저주하면 결국 자신도 무덤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무덤이 세 개‘라고 해야 하나. 할아버지가 저주했던 사장, 사장의 아들, 사장의 손자는 모두 죽었다.
할아버지의 무덤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그냥 집 밖으로 나가서 그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왔다.
달이 어스름하게 구름에 가린 밤, 혹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길거리의 가로등 불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 자연의빛도 인공의 빛도 모두 힘을 쓰지 못하는 어둡고 적적한 밤이면 할아버지는 창가의 안락의자에 나타나 토끼 전등을 켜고, 이미 몇십 번이나 들려주었던 같은 이야기를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할아버지의 저주일까.
혹은, 축복일까. - P32

할아버지가 기억을 떠올리고 사실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더 나쁜 건, 할아버지가 기억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내가 답을 찾지도 못한 채 할아버지가 그냥 내질문에 놀라서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되는 건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조용히 돌아서서 내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그러나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문틈으로 여전히 거실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그 옆에 너무도 예쁜 토끼 전등이 엿보인다. 그래서 나는 안심한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 - P33

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 - P34

"나는 너 같은 것에게 내 변기를 차지할 권리를 준 적이 없다. 너는 나를 어머니라고 하지만 나는 너 같은 걸 만든 적이없으니 널 없애버릴 사람을 부르기 전에 썩 꺼져라."
‘머리‘는 대답했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제까지처럼 변기안에 오물을 버려 주시면 그것으로 나머지 몸을 이루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가서 멀리 떠나 제힘으로 살아갈 테니 저에게 신경 쓰지 마시고 이제까지처럼 변기를 사용해 주십시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이것은 내 변기니까 당연히 이제까지처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너 같은 게 내 변기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 네가 몸을 이루건 말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네가 뭘 하건 상관없으니 앞으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으면 좋겠다.‘
‘머리‘는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

-- 머리 - P39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뜬 듯 만 듯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뭉개진 얼굴에는 무언가 표정을 떠올리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무슨 표정인지는 해석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물을 내리려고 다가서면 ‘머리‘는 재빨리 변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면 그녀는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고 변기를 한동안바라보다가 화장실을 나왔다. - P40

 새집에서 새 생활을 하게 되면서 방광염과 변비는 많이 나아졌다. 아무 기복 없이 평범한, 좋을 것도 나쁠 것도없는 생활을 꾸려가면서 그녀는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쁜 와중에 그녀는 ‘머리‘에 대해서는 차츰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얼마 후 아이가 생겼다. 그녀는 ‘머리‘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렸다. - P43

그러면 그녀는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그녀는 혼자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움직이는 화면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 잡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 듯하기도 한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웠다. 그러나 생각의 샘은 하염없어서 퍼내고 또 퍼내도다시 흘러나오곤 했다. - P51

그녀는 젊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젊은 자신의 몸을바라보았다. 자궁과 탯줄이 아닌 대장과 배설물로 자신에게서 비롯되어 어엿한 성체를 이룬 존재를 바라보았다. 순백의도기 속에 가려진 그 검은 구멍에 숨어 그렇게도 오랫동안 그렇게도 지겹게 자신을 괴롭혔지만 이제 떠나겠다는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작별하는 마당이라면, 정말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옷 한 벌쯤 주어도 무방할 터였다.
젊은 그녀가 수건으로 몸을 닦는 동안 늙은 그녀는 옷을 벗었다. 별로 화사한 입성은 아니었다. 카디건 하나와 원피스,
브래지어와 팬티, 양말, 그것으로 전부였다. 그녀는 알몸이되어 젊은 그녀가 늙은 그녀의 옷을 하나하나 천천히 주워 입는 것을 바라보았다. 팬티, 브래지어, 원피스, 카디건, 젊은그녀는 공들여 하나하나 음미하듯이 옷을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말을 신고 카디건의 앞섶을 여몄다. 늙은 그녀는벗은 몸에 문득 으스스 한기를 느꼈다. - P55

"은혜라니, 무슨 은혜란 말이냐? 내가 언제 태어나고 싶어네게 부탁한 적이라도 있더란 말이냐? 네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라 하여 네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돌보아준 적이라도 있었더냐? 너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태어나게 했고 이후에도 나를 혐오하고 역겨워하여 줄곧 없애고자 하지 않았느냐? 내게 베풀어준 것이라고는 있어 봤자 네게는 백해무익할 따름인 배설물과 오물뿐이 아니었느냐? 그나마 받아먹으며 사람다운 외양을 이루기 위해 나는 네게서 갖은 수모와 박해를 받아야 했단 말이다. 하지만 드디어 나는 몸을 이루었다. 어두운 구멍 속에서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이제 나는 네가 되었으니 너의 자리를 차지하여 살아가리라."
말을 마치고 젊은 그녀는 늙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젊고 억센 손이 늙은 어깨와 목을 붙잡았다. 젊은 그녀는 늙은 머리를 변기 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재빨리 늙은 발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늙은 몸을 가볍게 변기 속에 거꾸로 처넣고나서 젊은 그녀는 변기의 뚜껑을 닫고 물을 내렸다. - P57

그녀는 눈을 떴다.
어둡다. 깜깜하다. 검은 천으로 눈앞을 가려놓은 것 같다.
작은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다.
눈이 먼 것일까?
한 손을 눈앞에서 움직여 본다. 희끗희끗한 물체가 뭔가 보이는 것도 같다. 그러나 확실한 형체는 분간할 수 없다.
몇 번 그렇게 손을 움직여 보다가 그녀는 포기했다. 어둠이 너무 짙다.
지금 몇 시인데 이렇게 어두울까. 여기는 어디인데, 이렇게까지 어두운 걸까.
그녀는 손을 뻗어 앞을 더듬었다. 둥글다. 딱딱하다.

-- 차가운 손가락 - P61

크고 따뜻한 손, 그 손이 자신의 손을 감쌌던 기억, 친숙하고 반가운 얼굴,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은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희미해져서,
마치 석양 무렵의 햇살처럼, 그렇게 약간의 온기만을 남기고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눈을 뜬 순간부터 그녀를지배한, 주위를 둘러싼 것과 똑같은 어둠뿐이었다. - P69

갑자기 발밑의 땅이 물컹, 해졌다. 그녀는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허우적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환한 빛이눈앞을 뒤덮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돌연한 불빛 앞에서기능을 멈춰 버렸다. 그녀는 쏟아지는 빛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다가온다기보다 통제력을 잃고 도로를 벗어나 날아오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의모습,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자신의 표정이 한순간 또렷하게보였다. 무기력한 운전대를 꼭 움켜쥔 자신의 양손 사이에또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 비웃듯이 여유롭게 얹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덮쳤다. - P79

그리고 대화는 멀어진다.
차는 조금씩 가라앉는다. 가라앉는 차에 짓눌리면서 으드득, 하고 몸 어딘가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이상하게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지 빠져나갈 수 없이 그녀를 짓누른 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자동차의 거대한 무게가 느껴질 뿐이었다. - P82

피가 멈추지 않는다. 생리 12일째. 보통 3일째를 고비로양이 줄기 시작하여 5, 6일쯤 끝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2주가다 돼 가는데도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저녁이 되면양이 줄어들어 드디어 그치려나 싶다가도 아침이 되면 다시슬금슬금 흘러나온다.
보름째가 되어도 피는 멎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가 볼까.
그러나 결혼도 안 한 처녀에게 산부인과는 그렇게 마음 가볍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못 된다.
20일 넘게 피를 흘리자 조금씩 어지럼증이 생기고 늘 피곤하여 일상생활에도 지장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심하고산부인과를 찾아갔다.

-- 몸하다(월경이 나오다. 월경을 치르다.) - P85

"저, 지금이라도 보호자가 되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아기 아버지가 됐으면 해서…."
남자는 피투성이가 된 그녀와 분만실의 불편한 분위기를눈치채고 잠시 말을 멈췄다.
"저, 설마..?"
그녀는 천천히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려 초점 없는 눈으로남자의 당황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돌려, 바닥으로 뚝뚝 흘러 떨어지고 있는, 한때 그녀의 아기였던 피 웅덩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문득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서럽게 엉엉 소리 내 울었다. 그러나 그것이 안도의 눈물인지,
아이를 잃은 슬픔인지 혹은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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