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죽는다는 것은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이별. 미련과 기대와 슬픔마저 사치로 만들어버리는깨끗한 결단. 종지부, 두부를 삼키면 두부가 눈앞에서사라지듯이 죽음은 그들을 삼켜없애버린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불경하고 암울한 사태, 피하고 싶은 사건일까? - P187

불건전이란, 마음속에서 자신의 죽음과 결별한어른들의 발명품이다. 현자들과 어린아이들에게죽음은 불길하거나 음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서 있는 탁자처럼, 부스러진 빵조각처럼, 이불깃을 접어 넣은 침대처럼 거기 ‘있을 뿐‘이다.

- 크리스티안 생제르『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이다』 중에서 - P187

살아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다. 새삼 이 사실이 놀랍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어떻게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온 걸까? 내 몸속을 흐르는 피는어떻게 한순간도 흐름을 멈추지 않고 지금껏 움직여 왔을까?
새들과 한철 피고 지는 꽃들과 난쟁이 같은 버섯들, 크고 작은 - P190

동물들에 비해 사람은 태어나 죽기까지의 주기가 길다. 창문 앞에흐드러진 목련은 나를 한 철 보겠지만, 나는 저 목련이 죽고나서도 내년에 다른 얼굴로 오는 목련들을 ‘또‘ 볼 수 있다.
내게 죽음은 유예되고, 유예되고, 유예되고, 한없이 유예가능할 것 같은 무거운 숙제다. 물론 오겠지. 결국엔 올 것이다.
내게도, 다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도. 죽음을 기약하지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 침대 아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죽음. 훗날 죽음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려 할 때, 피하지 않고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후회 없이 살았고, 즐거웠다고. 사랑이 충만했다고 말하며 다 읽은 책을 덮듯이삶을 탁, 닫고 싶다. 그다음 죽음의 손을 잡을 것이다. - P191

아침은 멀고, 또 진정으로 밝은 아침은 불가능하다 해도.
눈이 부신 ‘척‘이라도 하며, 꽃 피는 계절을 나는 또기다릴 것이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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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나는 것‘ 이란 생각이 시인의 산문집을 읽는 내내 따라다닌다.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였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잘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마음이 말랑했을 때되풀이해 읽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건조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안녕한지, 잘 지내는지, 자신이 없다. - P76

양지에 발을 들이는 일이 내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이든 사랑이든 생각이든, 바르고 멀쩡하게 생긴 것.
온화하고 근사한 것, 떳떳하고 따뜻한 것, 좌우대칭에 맞춰균형을 이루는 것이 힘들었다.
음악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단조인, 장조로 흘러가다가도정신 차리고 보면 여전히 단조를 노래하는, 낮은음자리표와 16분 쉼표들의 숨가쁜 행진. 전깃줄로 말하자면 얼키설키 얽혀 참새들이 앉기 싫어하는 자리 방으로 따지자면 볕은 가난하고 곰팡이만 승승장구 번식하는 곳.
이를테면 나는 서자, 변방, 덤, 가시랭이, 꽃받침, 맹장 같은존재다. 중심이나 주인공이 아닌, 원래 있으면 안 되는 것이불룩 생긴 것. 말하자면 혹 같은, 둘 곳이 없어 잠시 얹어둔존재 같은 것.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말이 많으면서도 할말이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 P79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봄은 공평하니 낮고 음침하고 축축한 곳에도 내려와 간혹 고개를 쳐든 음지식물들과 마주하기도 하니까. ‘곰팡이도 꽃처럼‘ 피어나는 거니까.
말하자면 달의 반쪽을 덮고 자던 날들이 내 생활인 것인데 시간은 흘러 ‘‘을 만들고 ‘집‘은 자라나 뭉텅이인 삶을 만들어그 삶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더란 얘기다. 몸 어느 자리는습기가 빠져 제법 뽀송해지기도 하더란 말이다. - P79

삶에 있어 영원한 양지도 영원한 음지도 없다.


걸음걸이가 땅을 만든다. 운동화를 신고 마른 흙길을걸어가다보면 알 수 있다. 짜부라진 개구리나 백발을 휘날리며시드는 중인 할미꽃, 흙탕물에서 꼬물꼬물 뒹구는 올챙이,
자동차 바퀴에 옆구리가 터져 죽은 새끼 뱀도 제각각 자기구역에서 열심히 살았다. 죽고 사는 건 모두 팔자소관. 주어진제 몫을 열심히 살아내기만 하면 된다.
희망 따위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냥 열심히 걷다가 운동화에 묻은 마른 흙을 털고, 맨발과 젖은 뿌리를공들여 말리면 된다. 양지바른 길에서 둥근 무릎을 쉬게 하면된다.
생각대로 되는 것이 없는 삶에 싫증이 나 어느 날은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술에 취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랴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말이다(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모든 게괜찮아진다). 휘청휘청, 기필코 내게 기어오겠다는 기다란 뱀같은 팔자를 긍정해야지! 즐겁게 피리라도 불며, 환영해야지. - P80

등뒤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느긋한 기다림도 요리의 즐거움중 하나다. 저쪽에서 기대를 품고 기다리는 소중한 사람(대개 소중한 사람에게만 요리를 해주는 법). 마치 이쪽의 나와 저쪽의 당신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어, 동선에 따라 흔들흔들 기분좋게 흔들리는 것 같다.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재료들, 혹은 나와 요리를 기다리는 사람과의 무언의 대화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요리하는 시간이 행복한순간으로 바뀐다. 물론 요리를 매일같이 ‘일처럼‘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재료와의 대화가 오래 살아 지겨워진 부부 간의대화 같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요리해주는 사람에게 아무쪼록 감사하면서, 엎드려 공손히, 음식을 받아먹어야 할 것이다. - P113

아프게 되면 아픈 부위가 곧 ‘손님‘이다. 머리가 아프면머리가 손님이 되고, 배가 아프면 배가, 발톱이 아프면 발톱이,
이가 아프면 이가(이는 손님 중 VIP! 각별한 고통을 주신다)손님이자 왕이 된다.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손님은 모시지않았으면 좋겠다. 몸 곳곳의 부위들이 죽을 때까지 도드라지지않고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게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다면그게 가장 감사한 일일 텐데.
재채기와 함께 눈에서 눈물이 코에서 콧물이찍, 하고나오는 순간! ‘코‘께서 유자차라도 끓여오라고 호통을 치신다.
이때 비죽, 고개를 내밀며 웃고 있는 콧물이 코보다 더 밉다.
시간이 두 배 속도로 지나 ‘코‘께서 예전처럼 부드럽게숨쉬고 심심할 때 코딱지나 모으시면서, 제발 도드라지지 않고몸의 일부로서 겸손히 살아주셨으면 좋겠다. 비죽 나온 콧물을손등으로 훔치며 유자차를 끓이러 가는 길, 가스레인지까지 멀고도 높구나. - P122

사랑이 편애라면, 나는 4월의 나무 이파리들을 편애한다.
꽃진 다음 이파리가 주인공이라고 외치듯, 막 태어난색깔인 듯 화사하게, 처녀의 종아리처럼 빛난다. 아직은 떨어질일이 없다고, 아마 영영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저 몸짓! 앳된얼굴들. 자전거를 막 배운 아이처럼 생동하는 움직임!


눈물이나 떨어짐, 기우는 일 따위는 모르는 듯 떨다 웃다선명해지는 저 잎사귀들.


저건 어느 나라 사파이어지?
그늘마저 화사한 4월의 나무들! 좋다. 참 좋다! - P145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알았다. 세상의 강물들이가난해지고 있음을, 구절초가 중심부터 썩듯이 빈 젖의 까만꼭지부터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어릴 때 할머니의 젖이나 팔뚝 안쪽, 늘어진 살을 만지며잠들었다. 할머니는 엄마는 아니지만 엄마보다 진했고나긋나긋했으며, 낙관적이었다. 엄마들에게는 없는 삶을관조하는 관록이 있었고, 엄마들에게는 있는 긴장과 호들갑이할머니에겐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적당한 늙음‘이 좋았다.
나 말고 다른 아이를 낳을 가망 없음이, 언제나 품에 나만 안을것 같은 안정감이 좋았다. - P147

고모 방은 작고 아늑했다. 하이든 사진이 걸려 있었고침대와 화장대, 키 낮은 책장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고모의 책장에서 신경숙 소설 『깊은 슬픔이나 최영미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었다. 신경숙 소설에는 야한 장면이나와 심장이 두근거렸고, 최영미의 시집은 무슨 말인지 제대로알아듣지 못하고 책장을 덮었다. 서정윤 시집 『홀로서기도있었는데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어떤 슬픈 마음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마음의 출처를 찾아서성거리는 게 재밌었다. 고모 방에는 당대의 베스트셀러들과어둡고 조용한 분위기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었다. 고모가피아노 학원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가고 나면 혼자서 책을 꺼내보거나, 침대에 잠깐 누워 졸기도 했다. - P171

어느 날 고모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혼자 영화를 봤다.
어린애들은 볼 수 없는 영화라고 했는데, 볼 수 없다니까 더욱 궁금했다. 비디오테이프 제목을 살짝 봤더니 <퐁네프의 연인들>이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고모를 바라봤지만, 보게해달라고 조를 수는 없었다. 고모는 목소리와 분위기만으로아이들을 제압하는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프랑스 영화감독 레오 까락스를 좋아해작품을 하나씩 찾아보던 중 <퐁네프의 연인들>을 발견했다.
당연히 고모가 떠올랐다. 영화를 두 번 봤고 가슴이 아팠고, 두근거렸다. 고모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고모는 씩씩하고활기차 보였고, 어떤 일이든 혼자 해결하려 했다.  - P172

피아노 학원을운영하며 살림을 책임졌던 집안의 큰 어른이었고 강해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도 나처럼, 나와 똑같이 상처받기 쉽고삶이 간단치만은 않은, 때로 삶을 힘겨워하며 어둠 속을 헤매던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랑과 예술에 대해 두근거리고 풍부한감성과 꿈이 있던 평범한 여자. 강철로 만든 사람이 아닌 그냥약한 사람. 고모는 많은 날들을 고모부와 소원하게 지내며,
외롭고 찬 시간들을 어떻게 보냈을까?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때,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 P172

생각난다. 어릴 적 철없는 내가 고모는 피아노를 아주 잘치잖아요, 그런데 왜 피아니스트가 안 됐어요? 라고 질문을 하면어두운 종이 한 장이 얼굴에 내려오듯, 슬픈 표정으로 변하곤했던 고모의 얼굴. 툭, 떨어지던 고개.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다리 위를 걷는 줄리엣 비노쉬의얼굴을 보며, 젊고 예쁜 아가씨였던 고모, 아직 삶의 어두운면을 보기 전 발랄했을 고모를 떠올려본다. 지금도 신문에서읽은 문태준이나 안도현의 시에 대해 나와 이야기하길 좋아하는고모. 작고 어두운 방에서 혼자 웅크리고 낮잠을 자던 고모.
내게 피아노와 클레멘타인 노래와 수많은 인형극과 책을보여주고, 문학의 씨앗을 심어준 고모가 벌써 육십대 중반이다.
한없이 강할 것만 같던 고모가 얇아지고 있다. 무릎 수술을해서 목발을 짚어야 걸을 수 있다. 부스러지기 쉬운 꽃잎 같은고모의 인생이 내 앞에 흘러간다. - P173

이십대는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킨 소란한 시기다. 많은젊은이들에게 슬픔은 죽음과 맞닿은 듯한 슬픔이며, 걱정과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이다. 고래떼 같은 걱정이 몰려오거나 침대를 휘감고 사라지는 파도 앞에서 젊은이들은 슬픔의 먹이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슬픈 일들은 유독 나를 통해 뿌리내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이던 그 시절.
멍하니 앉아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왜 우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데도 우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 시엔처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저녁도, 바닥에 엎드려 시를쓰다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새벽도 있었다. - P181

오랫동안 고흐의 그림들 위를 서성였고, 슬픔 속에 척추를세우고 살다 간 프리다 칼로의 고통에서 위로를 받았다. 오븐에머리를 처박고 죽을 수밖에 없던 실비아 플라스나 슬픔으로짓무른 듯한 최승자의 얼굴, 비석처럼 기괴하게 서 있는 에곤실레의 자화상을 사랑했다. 방문을 닫고 이성복의 첫 시집 중아무 곳이나 펴서 소리 내 읽기도 했다. 울기 위해서. 슬픔을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슬픔을 해소하는유일한 방법은 슬픔에 젖었던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것이었다.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독이 필요한 것처럼.
그때 슬픈 시를 많이 썼다. 슬픔에 대한 시를 쓰다, 열한편을 모아 공모전에 보내고 자연스럽게 등단을 했지만 중요한일은 아니었다. 등단보다 중요한 것은 슬픔을 적극적으로느끼고, 슬픔에 삶을 빌어먹는 일이었다. - P182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도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껴안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폭죽에 대한 기억도,
귓가를 울리던 굉음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 P185

슬퍼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이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고, 힘없는 자들을 가여워하지 않을 것이며, 나누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슬퍼하지 않으면 더이상 어떤 시나 노래도태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픔은 슬픔대로 즐겁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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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가는 봄의 등뒤에 대고 지껄이던 버릇을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볍고 투명한 ‘소란들‘을 반쯤 접힌 귀로무심히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소란은 누군가의 등뒤에서 잔잔해지기도,
어여뻐지기도 합니다.


앞은 부끄럽습니다.
등을 보고 있을 때가 좋습니다. - P6

이 일이 ‘오늘 겪은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루살이의 미소 같은 것.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이 될 테니까요. - P7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태양과 늙은 봄과 호리병 속에 잠긴 몇 송이 꽃이 서쪽에 기대공들여 기우는 곳. 토지문화관에서 내방은 서쪽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첫 느낌은 어둑하다는 것이었다. 창이난 쪽이 나무가 우거진 쪽인데다 서향이었으므로 빛이 가난한방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방에 정이 갔다. 4시와 5시 사이, 창문으로 빛이 쏟아질 때 바닥에 이는 일렁임이 좋았다. 뒤늦게들어오는 빛은 하루를 다 비추고 남은, 하루 치 잉여분의 빛이었다. 태양이 스러지기 전 빛의 부스러기들. - P15

봄은 화려한 색으로 소리를 대신했다. 피고 지는 데 이토록 조용한 생명들이라니! 내가 피었다 지느라 소란할 때도 꽃들은 반복이라는 눈을 끔백일 뿐 조용했다. 꽃과 계절의 반복을 보며 관성 속에서 싹트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꽃들은 서쪽을 향해 모가지를 드리우고 잘 자랐다. 자랐다는 말은 어울리지않을지도 모르겠다. 꽃들은 발이 묶인 채 가까스로, 시드는 순간을 최대한 유예시키고 있었으니까. 물과 햇빛과 서쪽 창이 그들을 머금고 있었다. 꽃은 약하지 않았다. 오래 머물다 시들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충분히 강하고 독립적으로 보였다.
독립적으로 살다간 꽃이 종이처럼 부스러져갈 때, 불러도 동요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때 마음은 슬프다.
꽃과 달리 우리의 얼굴은 ‘오래된 얼굴‘이다. 시간은 몰래 얼굴에 금을 긋고 도망간다. 나는 시간이 그리다 만 미완성작,
완성은 내가 사라진 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나 이루어질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그것은 조금씩 유예되겠지. 유예 불가능한 완성은 하루를 사용하고 식어가는 태양뿐인가? - P16

나는 기울어지는 것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유별난 취미가있고, 그것은 천성이나 성격과 관계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방은서쪽, 사람은 어깨가 한쪽으로 조금 기운 사람, 꽃은 말없이 피고 지는 모든 꽃, 꿈은 파닥이다 사그라지는 꿈이 좋다.
서쪽 방에서 기울어지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달 속에서 음지식물을 기르는 기분과 조금은 비슷할지 모른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울어지는 모든 것들의 목뒤에, 입술을 대고싶어진다. - P17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먼 훗날 당신이 많이 아파 내 무릎이 꺾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꺾이듯 그런 것은아니면 좋겠다. 오히려 새벽을 생각하는 아버지가 저문 언덕에서 구절초 무리를 보려고 숙인 모가지처럼. 딱 그 모가지처럼 꺾였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내 양 무릎을 당신 쪽으로 내놓고, 꺾인다는 것을 기꺼워할 수 있을까? - P20

그 뿌리를 공중에서도 오래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래요.
그게 더 진짜 같아요. 누가 사랑을 한곳에 심을 수 있겠어요?


이 말을 쓰고 나서 혼자 활짝 웃습니다. 사랑은 한곳에심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생각한 내가 마음에 듭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비가 멈추었네요. 장마가 지나고 나면여름은 더 맹렬하게 푸른 독을 뿜어내겠죠? 다행이에요.
계절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여름이 가을에게잡아먹히면 그다음은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겨울이 기다리고있을 테니, 안심이에요. 자꾸 잡아먹혀도 완전히 사라지는 게아닐 거예요.
당신, 죽지 말아요. 생생하게 살아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언제나 당신을 가슴 깊이에서 응원합니다. 항상 내 안부를걱정해주는 당신,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당도해 있는 연인.
안녕.


2013. 여름.
귀한 연꽃 향을 담아. - P36

가구나 장신구, 기계 따위는 30년 정도 지나면 무리 없이골동품 대열에 낄 수 있다. 음악이나 영화, 책도 30년 묵으면희끗한 분위기를 풍기며 반전 반열에 오를 수 있다. 30년전에 담근 술이 있다면 그 술은 보약 대접을 받는다. 한눈팔지않고 30년 동안 같은 일을 해온 사람은 전문가나 장인, 달인취급을 받는다. 그렇다면 인생은 어떨까? 30년 동안 살아온인생은 골동품 대열에 낄 수 있을까? 어림없다. 필립 로스의소설 『휴먼스테인The Human Stain』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더이상 성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면서도 아직은 노화로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간신히 폭이 좁은 터널 하나를지나온 얼굴로 서 있는 나이가 서른이다. - P39

지난밤 내가 묻어둔 꽃씨들이 보고 싶어
한밤중 잠든 화분 속을 헤집어본다
다섯 개였나, 여섯 개였나
혹시 묻어두었다고 착각했었나?
어두운 과거를 핀셋으로 발라내며
이곳은 피 한 방울 없이도 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기다려야 한다
가만히 방바닥에 앉아
기차가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갈 때까지
무사히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졸시 「서른」 중에서 - P40

여전히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 평정을 잃고 방방뛸 때가 많지만 서른이 넘었으므로 이내 괜찮은 척, 기다리는척한다. 마흔이 넘어서는 뭘 하는 척해야 하나? 쉰이 넘고예순이 넘어서는? 중요한 건 생각은 갑자기 해서 되는 게아니라는 것이다.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어른인
‘척‘도 하고, 잘 사는 ‘척‘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척‘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하는 것에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싶다. - P41

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다르다.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불러온다.


작가는 유혹하려는 사람이다. 가볍고 무거운 단어들을놓고, 비비고, 들어올리며 호객하는 자다. 고백하기 위해 가장많은 단어를 필요로 하는 슬픈 짐승이자, 나무 한 그루를이야기하기 위해 기억하는 모든 숲을 에둘러가려 하는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P67

어렵다고 느낀다면, 이미 나는 좋은 시인이 아니다. 좋은시인이 되는 것은 진작 포기했다. 물론 싱싱한 활어처럼 파닥여서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시를 쏟아내던 때가 분명히있었다. 한 달, 아니 하루 반나절, 아니 몇 시간, 몇 분이라도 싱싱했었지. 물고기는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을 몰라야 신나게헤엄칠 수 있는 거니까. 물고기가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진짜사실?)을 인지한 후, 자신이 속한 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고 난후에는 지느러미에 힘이 들어가고 꼬리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못하게 된다. 헤엄은 헤엄만이 아닌 게 되고, 물고기의 기쁨은사라지고, 아무도 물고기를 물고기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십대 초반에 시를 쓰는 공책 제일 첫 장에 김수영 시인의 산문 중 여러 부분을 발췌해 적어놓았었다. 잊지 않으려고, 각성하기 위해서. - P71

--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 - P71

-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 시인이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부터시인은 시인이 아니게 된다.


김수영의 정신은 내게 시작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작한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었다. 시를 쓰기 전에 밟거나 넘었고, 오래 서 있었다. 불안할 때 중얼거려보는 기도문이었고,
쉽게 타협한 시 앞에서는 만장이 되어 펄럭이기도 했다. - P72

끝내 포기하지 않고 시를 유예해놓을 것이다. 모든 사랑을유예하고 싶듯이, 내가 쓸 수 있는 시나 쓸 수 없는 시를끊임없이 유예하는 마음으로 그저, 지금이 아니라 다음, 그다음. 그다음에 더 잘 쓸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어리석게 믿으면서. 닿을 수 없는 먼 곳에다 쓰고 싶은 시를 기약해놓을 것이다. 그때 나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고,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냥 겨우 겨우 몇 자를 뱉어내는
‘노력‘을 할 뿐이다.
나는 믿는다. 종국에 돌아온 탕자가 되어, 시의 발아래 엎드려 대추처럼 쪼글쪼글해진 얼굴을 하고, 쇳소리를 내며 노래할 것이다. "시란 패자가 모두 갖는 게임"이라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말을 믿으며, 기어코, 살아남아노래해야겠다. 비루하고 흉한 몰골일지라도! 가늘고 길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시를 쓰는 일. 그게 내 목표다.
그러니 시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영원히, 유예하련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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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두대의 트럭에서 철모에 흰 띠를 두른 군인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이제부터 작전 개시다! 이제 너희들 앞에 평생 잊지못할 엄청난 추억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작전 시간은 삼십분. 작전이 시작되면 각자 알아서 행동한다. 마음대로 불 지르고 마음대로 죽여라. 이것이 상부의 명령이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워라! 노인,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다 죽여라. 목숨 달린 것들은 다 죽여라! 이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즉시 총살한다. 분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반드시 총살한다. 알았나? 자, 돌격!˝ P187


와흘1리에서 검은 연기구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 와흘2리 사람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군인들이 불지르레 오람져온다)! 불 지르레오람져!" 묶여 있는 소와말을 풀어 밖으로 내몰고, 병풍, 궤, 이불 따위를 마당으로 내놓고, 뒤꼍의 채소밭에 묻은 항아리 속에 식량을 갈무리하고, 놋그릇과 좋은 옷가지를 헌치마에 싸서 항아리 속에 넣고 그 위에 덕석을 덮고 또 그 위에 흙을 덮어 위장하느라 정신없이 허둥댔다. - P187

방화와 살인에 도취된 자들이 환각 속에서 계속 불을지른다. 고함치고 총을 난사한다. 겨우 불을 피해 벗어난사람들을 향해 총알이 사정없이 날아간다. 참새떼가 날고, 닭이 날고, 사람들과 개, 돼지, 소, 말들이 달아난다.
총격에 쫓긴 사람들이 혼비백산 울담을 타고 넘어 산 쪽으로 도망친다. 근처의 대숲이나 덤불에 뛰어든다. 닭들도 덤불 아래로 오르르 숨어든다. 사람과 가축이 달아나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죽어가면서 고통의 비명을지른다. 내년 농사를 위해 보관 중이던 씨앗 망태가 타고, 이집 저집 곳간에서 쥐를 없애고 곳간을 지켜주던업신 구렁배암들이 타 죽는다. 닭 한마리라도 구해보려고 옆구리에 끼고 달아나던 소년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울담을 넘어 도망치던 청년이 총에 맞아 돌덩이 하나 가슴에 안고 엎어지고, 아기 안은 아낙이 솜옷 입은 등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쓰러진다. - P189

검은 연기로 자욱해진 마을이 삽시에 주황빛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초원에 방목중이던 수백마리의 마소가 불길과 총소리에 놀라 산 쪽으로 우르르 떼지어 달아난다.
마음대로 죽이고 마음대로 불 지르며 군인들은 눈이 뒤집힌다. 천지간에 가득 찬 불이 그들을 실성하게 만든다.
자기가 쏜 총에 쓰러진 자의 붉은 피가 그들을 미치광이로 만든다. 그러한 광기의 와중에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것이 두려워 허공에다 총질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인 가운데 총성이 계속해서 터진다. - P190

노인이 외양간에 매인 소를 밖으로 내몰려고 무진 애를 쓴다. 불을 겁내 꼼짝도 하지 않는 소를 밀고 때리면서 겨우 내쫓는데, 총알이 날아와 노인과 소를 맞힌다.
노인은 쓰러지고 총알에 빗맞은 소가 울부짖는다. 무섭게 날뛰면서 뿔을 숙여 총 쏘는 군인들을 향해 돌진하다가 총알을 몇방 더 맞고 쓰러진다. - P190

지붕에 올라가 멍석을 덮어 불을 끄던 아낙이 총에맞아 굴러떨어진다.


죽창을 겨누고 소리치며 토벌대에 달려들던 청년이총에 맞아 쓰러진다.


좁쌀항아리를 맞들고 서둘러 집 밖으로 옮기다가 엎어져 쏟아진 좁쌀을 쓸어담는 노부부를 향해 총알이 날아든다. - P191

애써 마당까지는 내놓았으나 미처 땅을 파서 비장하지 못한 쌀 항아리들이 개머리판에 맞아 깨지고 쌀이맨땅에 쏟아진다. 쏟아진쌀더미 위에 건초가 덮이고불길이 솟는다.


자기 집을 태우는 불길을 보면서 급기야 실성한 노인이 소리 지른다. "아이고아이고, 시원하다! 잘 탄다, 잘도 탄다!" 그러고는 총을 맞고 쓰러진다. - P191

가슴에 총을 맞은 노파가 죽어가면서 불길이 닿지 않도록 손주 아기를 담요로 감싼다.


건초가리에 불을 지르던 군인이 죽일까봐 벌벌 떠는여자아이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날래 도망치라우! 다른 군인이 오면 반드시 독일 테니 날래 도망치라우!"


지붕에 불을 지르려는 군인에게 목초 베는 장낫을 들고 덤비던 노인이 총을 맞고 쓰러진다. - P192

마당에 내놓은 궤 안에서 명주 한필을 발견한 군인이누가 볼세라 얼른 군복 상의를 벗고 명주를 몸뚱이에둘둘 말아 챙기고는 다시 상의를 입어 숨긴다.


총성이 계속해서 터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죽여라! 숨쉬는 것들은 다 죽여라! 목숨 달린 것들은 다 죽여라!


제 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면서 노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머리칼은 불에 타고, 공포에 질린 입에서는 비명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숨이 가빠 헐떡거릴 뿐이다. - P193

"중대장님, 이건 뭐 죄다 민간인들 아닙니까? 산군새끼는 하나도 없고......"  신참 소위가 불평한다.
"하긴 대항하는 적군이 있어야 싸울 맛이 나는데 말이야. 좀 싱겁군." 일본군 출신 중대장이 말한다.
"죽을 염려라고는 없는 이런 것도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하하, 세상에 이런 싱거운 전투는 나도 처음이야.
내가 사이판에서 싸워봤는데, 그땐 정말 짜릿했지. 죽지만 않으면 전쟁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 여자와 관계하는 것보다 더 짜릿해. 생명의 위협이 있어야 짜릿한법이지." - P194

"이건 전쟁도 전투도 뭣도 아닙니다. 그냥 살인 아닙니까?"
"야, 소위, 말이 많다. 정신 차려라, 이 새끼야! 위에서 내려온 작전명령이 살아 있는 건 다 죽이라는 것 아닌가? 우린 살인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거야.
알았나?"
"옛, 알았습니다!" - P195

불타고 있는 마을은 와흘리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대흘리, 와산리, 선흘리, 교래리에서도 불길이 솟았다. 조천면 중산간 지역은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이고 연기 아래로 주황빛 불길이 넘실거렸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이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마을 안 여기저기에서 총소리와 함께 인간과 가축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불길은 마을 외곽을 향해 마른 풀밭 위로 물 흐르듯연기를 내뿜으며 번져갔다. 검은 연기와 주황색 불빛, 뜨거운 열기와 타는 소리와 냄새가 천지간에 가득했다. 성글게 눈이 내렸으나 눈은 불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증발해버렸다. - P198

이승만이 명령한다. "공비토벌을 빨리 끝내라시일을 끌면서 이렇다 저렇다 보고하지 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싶다.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지체말고 단숨에 처리하라! 가혹하게 응징하라!" 조병옥이 맞장구친다.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월남민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다. "한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서청 여러분을 위해 하느님께 축복을 청합니다. 여러분의 승리는 곧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어서 그 붉은 무리들을 소탕하고 오시오!"
연대장 송요찬이 외친다. "일본 군대는 이러지 않았어! 더 잔인하게! 더 잔인하게!"


...... 움직이는 것은 다 죽여라! 눈에 보이는 것은 다죽여라! 숨쉬는 것들은 다 죽여라!
......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진압뿐이다!
····· 지체 말고 단숨에 처리하라! 남녀노소 가리지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가혹하게 응징하라!
- P200

...... 그러니 너희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라!
...... 구세주 이승만 박사 만세!
...… 동지들이여, 조국과 하느님을 위하여!
……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 아아, 삼팔선 넘어와서, 왜 나는 여기에 와 있나? 왜 나는 여기에 와 있나?
......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P201

밤이 되었지만 지상의 불길이 하늘에 번져 불타는 마을은 오히려 대낮같이 밝았다. 하늘과 땅이 맞붙은 듯했다.
낮에 주황색으로 보이던 불빛은 이제 검게 그을린 진홍색으로 바뀌었다. 불빛은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한 크기로 확대되어 모든 그늘, 모든 그림자를 삼켜버렸다. 와흘1리와 2리의 불은 다른 세 마을, 대흘리, 와산리, 교래리를 태우는 불빛과 합쳐져 드넓은 들판을 환하게 밝혔고, 밤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떼를 붉게 물들였다. 괴로워 몸부림치는 대지를 밤하늘이 그대로 반영하여 온통 벌게졌다.  - P203

수많은 이랑을 만들고 있는 구름떼가 불빛에 물들어 마치 핏물 먹은 거대한 내장 꾸러미처럼, 묵시록의 거대한 붉은 용처럼 무섭게 꿈틀거렸다. 땅도 타고 하늘도탔다. 하늘과 땅이 모두 시뻘겠다. 화광충천(火光衝天),
어둠을 사르며 활활 타오르는 화염, 붉은색, 주황색, 푸른색 불길이 뒤섞여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저 불 보라! 저 불, 저불보라!" 숲속 아지트에서 다른 청년들과 함께 은신하고 있던 안만옥, 안창세, 부대림, 정두길들도 새미오름에 올라 그 불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해변마을 사람들도 집밖으로 나와 재앙처럼 거대한 불을 바라보았다.  - P203

양산도가 대숲에서 어머니의 시신 옆에 꿇어앉아 눈앞에서 불타는 자신의 집을 바라본다. 노여움에 주먹을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붕을 태운 큰 불더미가 바닥에 풀썩 무너져 내려앉는 것을 본다. 그 불이 다시 바닥에서 기어올라 기둥과 서까래를 휘감고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거린다. 탁탁탁탁 마구 후려갈기는 채찍질 같은 불타는 소리를 듣는다. 자욱한 검은 연기, 바람이 불어와짙은 연기를 헤집어놓을 때마다 그 열린 틈새로 널름거리며 드러나는 시뻘건 불길을 본다. 불길은 물 흐르듯 일렁거리며 흘러 뒤꼍의 감나무에 가고, 유자나무에 가고, 이제 갓 꽃이 피어난 동백나무에도 옮아가 붙는다. 불길은 나무를 휩싸고 빠르게 우듬지까지 기어오르고, 드디어 나무가 토벌대의 총소리를 흉내내면서 펑펑 폭발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 드디어 멸망한다. 마을이멸망한다. 양산도의 눈에 핏발이 선다.  - P204

불에 탄 시신은 나뭇둥걸처럼 두 다리가 뻣뻣하게 들려 있어 모로 눕혀 문어야 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불에 타 새까맸다. 화기가 미치지 않은 시신들 역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안간힘으로 땅을 후벼파느라 양 손톱이 참혹하게 젖혀져 피가 엉겨 있었다. 하나같이 아 하고벌어진 입들, 컴컴한 입, 죽음의 비명이 터져나오던 순간그대로 벌어져 있는 입들이었다. 아! 아!아! 아! 그 시신들을 타다 남은 멍석 쪼가리나 돗자리로 싸서 매장했다.
허리춤에 호상옷 보따리를 매단 채 쓰러진 노파들은 보따리에서 호상옷을 꺼내 입혀드렸다. 눈물도 곡성도 없었다. 거기에는 슬픔이 없었다. 공포가 슬픔을 삼켜버렸다. 들끓는 분노가 슬픔을 삼켜버렸다. 그들은 묵묵히 힘주어 삽질을 했다. - P210

사오일간 집중된 초토화 작전으로 한라산 둘레의 중산간 마을 백삼십여개, 일만 오천채의 집이 소각되었다.
온 섬에 가득한 화염의 붉은빛, 정두길은 그것을 피라고생각했다. 피바다가 곧 해일처럼 들이닥칠 것이고 그 피에 자신의 피도 흘러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먼바다에서 해상봉쇄의 임무를 띠고 감시 중인 미 해군 극동함대의 존재를 떠올려보았다. 캄캄한 밤바다 한가운데서 온섬을 휩싼 화염과 불빛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멀리서 본 그 불은 그들에게기막힌 아름다움이었을까? - P213

산에는 자주 눈이 내렸고, 눈이 깊이 쌓이자 토벌대의추격전이 잠시 주춤했다. 물론산군의 반격도 없었다. 정적이 온 산을 지배했다. 산군과 피란민들은 동굴 속 침묵속에 누워 있었다. 음울한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다. 해가 있는 날에도 엷은 구름에 가리곤 했다. 거무스레한 테두리 속에서 해는 창백해 보였고, 그 창백한 빛은 기우는달빛보다 더 슬퍼 보인다고 정두길은 생각했다. ‘장차이 사태는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흐린 날씨에도 어쩌다 구름 틈새가 벌어져 하늘의 파란빛이 희망처럼 나타날 때면 그 파란빛이 하느님의 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P226

어둠이 모두를 짓눌렀다. 어둠과 함께 절망이 불가항력의 막심한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 과거의 모든것으로부터, 모든 인연으로부터 단절되어버렸다는 무서운 고립감, 미래마저 단절되어 살아 있는 것은 임시일뿐이라는 두려움의 무게였다. 그들은 자주 악몽을 꾸었는데, 토벌대가 굴속으로 쳐들어와 가슴팍에 총검을 꽂는 무서운 꿈들이었다. 불안에 짓눌린 그들은 숨소리마저 위축되고 맥박도 느리게 뛰었다. 그러한 상태를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라 굴속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그들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 P238

사람은 누구나 미워하는 마음 없이는, 증오 없이는 싸우지 못하는 법, 지휘관은 신병의 마음속에 증오의 불씨를 지피려고,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 밑바닥 깊이 숨어 있는 야만성을 일깨우려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빨갱이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증오조차없이 죽여야 했다. 아무리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명령이라지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있다는 생각이 신병을괴롭혔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수가 없었다. 상관이 무서웠다. 한라산의 산군보다 더 무서웠다.  - P245

선덕은 총에맞은 노인이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뒤로 자빠진 노인의 가슴팍에서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노인의 깡마른 몸에 그렇게 많은 피가 들어 있을 줄 몰랐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엄청난 피였고, 노인의 피도 젊은이의 피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게 붉다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구역질이 발작처럼 일어났다. 사나운 군홧발에차여 앞으로 고꾸라지면서도 구역질은 그치지 않았다.
아아, 주님이 이런 일을 시킬 리 없어! 이건 주님의 뜻이 아니야!


처음에는 특별히 선량하지도, 특별히 악하지도 않은보통의 인간들이었던 그들은 그렇게 상관의 매질이 두 - P248

려워 마지못해 우물쭈물 명령을 따르다가, 차츰강제에의해 설득당하면서 그런 상황에 적응해갔다. 그들은 실체가 아닌, 머리에 주입된 관념으로만 섬사람들을 인식하려고 했다. 섬사람들에 대해 빨갱이라는 것 말고 더이상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양심을 깔아뭉개고 더 잔혹해지기 위해 용기를냈다. 그것도 용기라고 생각했다. - P249

그들 중 상당수는 광적인 신앙심과 광적인 애국심을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살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살인을 저지를 때 생기게 마련인 연민의 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양민을 학살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속 연민의 정을 학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병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주조되어갔다. 그들은 애국적으로고문하고 애국적으로 살인했다. 선악의 구별,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249

잔혹함이 군인 정신으로 여겨졌고, 명령과 지시 이상으로 잔혹해야 용감하다고 평가되고 빨리 진급할 수 있었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직급의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이 주어져 있었다. 고문과 살인이 너무도 흔해졌고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 무서운 광증은 집단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광기에 중독된 자들이 법을 가진 자, 법을 쥔 자가 되었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죽이고, 시키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마구 죽였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대단히어렵다. 인간에게 목숨을 준 신에게만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 P250

그래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때 그들은 마치 신의권능을 부여받은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 죽이는 일은죄인데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니, 게다가 그것이 애국 행위라니, 참으로 기묘한 희열이고 최상의 쾌락이자 최고의 자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힘에 도취되었다. 희생자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존재처럼 보였다. 매일한명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떠벌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 P250

피살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저항 없이 총알을 받았다. 죽음 앞에서 거부와 반항의 목소리는 매우 드물었다. 총살당하기 직전 몇십분 동안은 자유였다. 그 시간동안 군인들에게 저주와 분노를 외칠 수도 있고, 저항가를 부를 수도 있고, 통곡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기만 할 뿐 침묵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포식자의 아가리 앞에 놓인 한마리 토끼와 다름없이, 삼켜지기 직전의 의식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저주와 분노의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용했다.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 침묵, 그 무력함에 총살조의 일부병사들은 당황스러웠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양심적인 병사도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어떤 피살자도 분노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다만 총알이 가슴을 꿰뚫는 순간 터져나오는 단말마의 비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 P251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렀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겨도 이긴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의 총공세 속에 최후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예감하고 있었다. 총알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거의 바닥났다. 행필은 손깍지를 껴 무릎을 감싼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활동 중에도 틈만나면 떠오르는 것이 그리운 아내와 아기의 얼굴이었다. 포동포동한주먹을 입에 가져가 빠는 아기 얼굴과 아기 젖내가 묻어있는 아내의 적삼 냄새, 조를 추수하던 날 밤 어둠 속에서 발광체처럼 떠오르던 아내의 알몸이 생각났다. 그런생각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던 그가 고기 굽는 냄새에 화들짝 깨어났다. - P266

총알도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졌다. 이 목숨을 언제까지 지탱할 수 있을까? 완전한 패배가 분명하고 최후의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갈데까지 가버렸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전투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망을 이기는 방법은 전투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기가 싫었다. 생각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싸우다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말없이 눈을 감고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마치 혀가 아니라 영혼으로, 목숨으로 고기 맛을 음미하는 듯이 신중하고 경건하게 씹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밤의 정적 속에서 멀리 해안선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먼 우렛소리처럼 아련히 들려왔다.  - P267

동굴 생활이 한달 보름쯤 되자 한라산 피란민들은 더이상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땅이 얼어칡뿌리마저캘 수 없었다. 토벌대의 이만 병력이 한라산 둘레를 에워싸고 피란민들을 깊은 눈 속에 가둬놓았다. 그것은 토끼몰이식 포위 작전이면서 동시에 아사 작전이기도 했다.
죽음이 그들을 포위해 목에 걸린 올가미 죄듯 점점 죄어들고 있었다. 눈은 거의 매일 내렸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눈이 내렸다. 지금 이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않을 것처럼. - P301

병이 깊어 기침이 더욱 잦아진 부대림은 토벌대에 발각될까봐 기침할 때마다 눈치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어느 날 다른 굴로 옮아갔다. 정두길도 함께갔다. 곶자왈을 벗어난 억새밭 한가운데 있는 그 굴은 서너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작은 굴이었다. 옮아가면서 두길은 창세에게 자신이 쓰던 만년필을 물려주었다.
"창세야, 너, 작가가 되고 싶댄 했어? 부디 넌 죽지말앙 꼭 살아남으라이. 살아남아서 이 만년필로 좋은 글을 써라이. 나도 좋은 글 쓰고 싶었지만, 이젠 허사가고 말았구나." - P304

눈 속에서 몇번의 전투가 있었고 그때마다 산부대는 몇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백여명으로 줄어든 그들에게 이만병력은 도무지 불가항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싸웠다. 지휘 계통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그들은 홀로 싸우고, 홀로 죽어갔다. 항복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죽음이 두렵긴 했으나 그토록 격렬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도처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두려울수록 필사적으로 싸웠고,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필사적으로 싸우는것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산부대는 탄약은 물론 식량까지 바닥나면서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했다. - P305

이제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산부대가 할 수 있는 것은 피란민들과 함께 숨는 일뿐이었다. 물장올 근처의 이덕구 부대가 낮게 떠 수류탄을 투척하던 L19 한대를 격추시키고 숲에 추락하여 나무에 걸쳐진 비행기를 보면서 두 팔을 들어 환호성을 질렀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절망적 상황에서 그것조차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조직이 무너져 뿔뿔이 개인별로 움직였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다른 피란민들까지 보호해야 하는 그들은 노천에서 자면서 토벌대의 기습에 대비했다. 가마니 한장씩을 지고다니며 밤이면 눈 위에 깔아 추위를 견디면서 잠을 잤다.
그들은 피란민들이 숨어 있는 굴이 적발되지 않도록 일부러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 토벌대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메추라기가 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러듯이. - P317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강풍이 북쪽의 먼바다 수평선으로부터 검은 구름떼를 몰고 왔다. 구름떼가 하늘을가득 메우고 섬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수평선 너머 육지로부터 쳐들어오는 토벌대처럼 무섭게 달려왔다. 마치 하늘 전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강풍은거세게 파도를 일으켜 해안선을 강타하고 드넓은 초원을 질펀하게휩쓸며 오름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고 달려와 높이 솟은한라산 멧부리에 거세게 부딪혔다. 한라산 숲이 크게 흔들리며 큰 물결과 포효를 일으켰다. 숲의 나무들을 후려치는 쉭쉭 채찍질 소리, 서로를 부르며 아우성치는 숲의나무들.….… - P318

그리하여 한라산을 뒤덮은 구름은 산기슭까지 내려앉아 수천의 피란민들이 그 구름 속에 들었다. 동결의 땅,
피가 얼어붙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동굴들이숨어 있는 숲 지대에 박격포탄이 퍼부어졌다. 동굴이 잇따라 적발되면서 피란민들이 수없이 총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총 맞아 죽고 죽창, 철창에 찔려 죽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굴속 어둠 깊이 들어가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 P318

모두 뜨겁고 매운 눈물이 솟구쳐 목이 메었다. 전에는어떤 아픔, 어떤 슬픔도 참아낼 수 있는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김의봉이 치미는 울음을 참기 위해 목울대를 누르면서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뭔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아아, 우리의 죽음이 아무 보람도, 아무 가치도 없는죽음이 되어버렸어. 그게 원통해! 도대체 이건 인간의죽음이 아니여. 짐승이라도 이런 떼죽음은 없어. 너무 억울해, 원통하고 절통해 ! 우린 결코, 우린 결코 죽어도 죽지 않을 거여! 너무도 원통해 죽어도 죽을 수 없어!"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불길이 거칠게 파닥거렸다. - P323

나직이 떠 있는 구름 밑으로 눈안개가 너울거리면서하얗게 밀려오고 있었다. 눈안개는 벗은 나무들의 자잘한 빈 가지에 달라붙어 하얀 눈꽃을 만들면서 뿌옇게 화약 연기와 뒤섞였다. 눈안개가 모든 것을 지웠다. 공간도, 시간도 모조리 지웠다. 어지럽게 뿌려진 삐라, 흰 눈에 번진 붉은 피, 흰 눈 위에 흩어진 노란 탄피, 시신의벌어진 입, 고무신 자국, 군화 자국, 고무신이 벗겨진 맨발 자국도 지웠다. 시신 위에 눈을 덮어주는 청년들도, 검은 까마귀들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총성도, 비명도지웠다. 정적 속에서 눈안개는 너울거리며 날아와 수의처럼 살육의 현장을 하얗게 지웠다. - P330

억새밭 한가운데 바위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자란 서어나무, 그 뿌리 아래에 숨겨진 조그만 동굴 안에 부대림과 정두길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었다. 밖은 눈보라가 치고 있었지만 속은 불이 없어도 포근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은 지 여러날이 지났다. 보름쯤 지났을 것이라고 두길은 생각했다. 작고 비좁은 굴속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 있는 자신들이 고치 속의 유충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조만간 성충이 되어 고치를 뚫고 세상 밖으로 날아갈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더이상 먹지 않기로 결심했으므로 이제 두길은 별로 배고프다는 느낌이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위가 몹시 쓰라렸는데 이제는 그 통증마저 사라지고 위가 졸아든 느낌이었다. 배는 등에 가 붙고,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통도 욕망도 없는 텅 빈 공허, 그 공허 속으로 온몸이 삼켜진 듯했다. - P350

"대림아, 이 굴을 우리의 무덤이 아니라 대지의 사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지의 자궁 속에 들어와 있는 거야. 따뜻한 자궁! 아아, 따뜻하고 아늑하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두길은 두 무릎을 안고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자궁 속의 태아처럼 몸을 말았다.
"대지의 자궁! 멋진 말이네. 역시 시인은 달라."
"우리는 죽지만 다시 태어날 거다. 대지의 자궁은 죽음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니까. 모든 것이 불에 타고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러나 어머니 대지는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을 거여. 땅속 혈맥들이 고동치는 소리가 지금 내 귀에 들려. 대지가 자기의 자궁 안으로 죽은 자식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 낭자한 피와 총성과 비명도, 죽창, 철창에 묻은 살점도 대지는 남김없이 받아들이고 있어. 아, 그리고 마침내 그 자궁에서 새 생명들은 솟아나 대지 위에 다시 번성할 거여." - P351

왜냐고?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죽은 자"라고 했다. 그 말이 옳았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전에 증언청취를 위해 만난 노인 네명의 삶도 바로 ‘살아 있는 죽은자‘의 삶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품에 꼬옥 껴안안 엎드린 채 총알을 맞았어, 나를 살리젠…… 아, 아버지의 품이 생각나. 그 땀 냄새가 생각나! 난 이제 늙었지만 지금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어!" - P356

"하지만 창근아, 우리의 상상력이 그렇게 압도당해버리면 다큐를 만들 수가 없잖아. 그 참혹함의 무게에 압도당해서 너무 진지하고 너무 슬픈 다큐가 돼버리면 안 돼.
큰 슬픔일수록 좀 가볍게, 관객들이 견딜 수 있게…… 삼만의 슬픈 원혼들을 눈물로 애도하고, 즐거운 웃음으로기쁘게 해드리기도 하면서……"
"눈물과 웃음이 함께 있는 영화! 그래, 그렇게 풀어내자. 슬픈 영혼 영신님네 그 맺힌 설움, 그렇게 풀어내자!" - P358

불쌍한 영혼 영신님네
어서옵서, 어서옵서
젖은 구름도 넘엉 옵서
마른 구름도 넘엉 옵서


아아, 무자년 기축년에
재앙불이 대지를 덮쳐 물어뜯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고 피바람 불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네
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못 보고
저녁에 본 사람 아침에 못 보고
낫에 풀 베이듯이 사람마다 쓰러졌네 - P359

죽어도 죽을 수 없어
사무친 원한으로 저승에 못가
이승의 천공을 무리 지어 떠도는
수만의 영혼 영신님네


가슴에 피 절어
피 묻은 옷 아직도 벗지 못해
흰 두루마기, 학생복,갈옷, 무명치마, 명주 호상옷 - P359

펄럭거리며 허공을 흘러가네
바람따라구름 따라 흐르면서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을 내려다보네


자, 이제 열려 맞자
열려 맞자, 열려 맞자
애통하고 절통하신 영혼 영신님들
자, 이제 열려 맞자, 열려 맞자
아주 활짝 풀어 열려 맞자
맺힌 간장, 맺힌 설움 아주 활짝 풀어내자 - P360

사나 사나 사니나 사나
맺힌 간장, 맺힌 시름 풀어내자
날로 달로 불살라 갑서
맺힌 간장, 맺힌 설움
날로 달로 불살라 갑서
하올하올 청나비 몸으로 환생합서
하올하올 흰나비 몸으로 환생합서
사나 사나 사니나 사나 - P360

 작가의 말 


광복의 1945년에서 대한민국 수립의 1948년까지를 흔히 해방공간이라고 하는데, 온 국민이 새 국가 건설의 꿈에 한껏 부풀었던 그때는 불행히도 한국사에 유례없는무서운 폭력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그 삼년의 기간을 지나면서 국가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거의 절반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제주도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미래, 새로운 국가, 분단국가 아닌 통일국가를 꿈꾸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격렬하게 활동했던 그들이 어찌하여 그런 참사를 당하고 말았던가요?
그 당시 청년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그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는지, 삶과 죽음은 무엇이고 인간은 또 무엇인지를 작가는 이 소설에서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 P361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 대한 언급은 최소화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대부분은 실제있었던 것들입니다. 그 사건이 비록 이 소설 속의 그 시간, 그 장소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제주도 어디에선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소설 속의 에피소드는 주로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것이지만, 이미 책으로 발간된 여러 청취록 작가가 직접 취재한 내용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경우에는 역사적 인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구의 인물임을 밝힙니다. 혹여 그 허구의 인물이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과 일치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 P362

너무도 많은 참혹한 유혈에서 그 핏빛의 생생한 묘사를 될 수 있으면 자제하려 했지만, 모두 뜻대로 되지는않았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비난하더라도 마음이 슬픈 작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 P362

독자여, 그대가 이 소설을 읽기로 작심하였다면 그 길은 작가와 동행해 너무도 낯선 삶과 죽음의 비경을 찾아가는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이것저것 살피면서그 먼 길을 느리게 걸어갈 텐데, 독자도 그 느린 행보의리듬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많은 분량의 이 소설의 편집을 맡아 오랜 시간 고투하면서 작가가 저지른 오류들을 찾아 바로잡아준 박지영팀장과 김정혜 실장에게 각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3년 초여름 현기영 - P363

문이란 무엇인가? 돌이나 마음에 뜻을 새김이 아니런가? 광풍을 가르고 노도(怒濤)를 헤치며 삶으로 나아간 제주 사람들. 여기 그 영구한 의지를 알알이 새겨놓은 거비(巨碑)를 보라.

 강요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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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까지 터져 공포가 극대화된 상황에서 조 추수가 있었다. 수시로 총성이 울리는 들판에서 사람들은두려움에 떨며 곡식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해 조농사는풍년이었다. 입산자들이 가을걷이를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포고령 이후 토벌대는 들녘에 젊은 남자가 보이면무조건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가을걷이가 매우 두려운일이 되어버렸다. 여자들도 들일을 하다 총에 맞아 죽는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동산에 망꾼을 세워놓고 조를 베어야 했다. 토벌대가 보이면망꾼이 그쪽을 향해 흰 기를 매단 장대를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 - P174

늦가을의 들녘은 조밭도 목장도 누런빛으로 물들었는데, 조를 베는 사람들도 갈옷이 조밭의 누런색에 녹아들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누런색 일색의 넓은 들녘은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텅 비고밋밋하게 느껴졌다. 바람도 불지 않아 사방이 조용했다.
거대한 정적 속에서 문득 아주 미세하게 차 엔진 소리가들려왔다. 일주도로에 군용트럭 두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혹시나 하고 긴장했으나, 다행히 차들은 와흘리로 올라오는 마찻길로 꺾지 않고 그대로 서쪽으로 달려갔다. 거리가 멀어 트럭들이 풍뎅이처럼 작아보이고 달리는 속도도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 P178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지역의 통행을 금지하고어길 경우 총살한다는 포고령이 떨어진 이후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토벌대의 습격이 두려워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토벌대에게 습격을 당한 와흘리 청년들도새미오름 근처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외갓집에 머물던만옥과 창세도 곶자왈 속 아지트로 들어갔다. 토벌대의막강한 공세 앞에서 산부대는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매복 기습을 위주로 하는 산부대로서는 들판의 나무들에 낙엽이 지고 풀이 시들어 가라앉자 몸을숨기고 움직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P181

그 위로 맑은 햇빛이 가득했다. 하늬바람이 살랑살랑 가볍게 불어오고, 그 바람길을 따라 햇빛이 물결처럼굽이치며 흘러갔다. 꽃들이 하얗게 핀 억새밭 사이로 마찻길이 구불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 길 끝에 해변이있고 그들이 떠나온 내 마을, 내 집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그곳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피안처럼 느껴졌다.
"두길아, 우린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우리가 죽더라도 저런 데 가서 죽어야 하는데, 어쩌다 여기에 와 있나………" 대림이 탄식했다. "아아, 이 공포, 이 불안이 언제 끝나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애가 타고 심장이말라붙어버렸어."
"조만간에 끝날 거야. 시작된 것은 모두 끝이 있어."
두길이 아픈 벗의 등을 쓰다듬었다. - P182

11월 중순에 한라산 둘레 중산간 지역의 백육십여개마을 중 백삼십여개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대방화,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다.


우리 외가 마을 와흘리가 불탄 것은 양력 11월 13일이었주. 이웃 마을인 대흘리 와산리, 교래리도 바로 그날 불탔어. 불길이 엄청났주. 하늘과 땅, 천지사방이 시뻘겅했어! 조추수가 끝나고 이어서 고구마, 콩, 산디(밭벼), 메밀을 거둘 때였어. 그날은 눈이 성글게 희끗희끗 내렸지. 약간 추운 날씨였주


그날 조천면의 중산간 마을들에 출동하여 방화하고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함덕에 주둔한 제3대대, 서청 대대였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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