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가는 봄의 등뒤에 대고 지껄이던 버릇을버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가볍고 투명한 ‘소란들‘을 반쯤 접힌 귀로무심히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소란은 누군가의 등뒤에서 잔잔해지기도, 어여뻐지기도 합니다.
앞은 부끄럽습니다. 등을 보고 있을 때가 좋습니다. - P6
이 일이 ‘오늘 겪은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줍니다. 하루살이의 미소 같은 것.
괜찮아요. 우리가 겪은 모든 소란騷亂은 우리의 소란이 될 테니까요. - P7
서쪽은 기울어가는 것들이 마지막을 기대는 곳이다. 태양과 늙은 봄과 호리병 속에 잠긴 몇 송이 꽃이 서쪽에 기대공들여 기우는 곳. 토지문화관에서 내방은 서쪽이었다.
방에 들어섰을 때 첫 느낌은 어둑하다는 것이었다. 창이난 쪽이 나무가 우거진 쪽인데다 서향이었으므로 빛이 가난한방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방에 정이 갔다. 4시와 5시 사이, 창문으로 빛이 쏟아질 때 바닥에 이는 일렁임이 좋았다. 뒤늦게들어오는 빛은 하루를 다 비추고 남은, 하루 치 잉여분의 빛이었다. 태양이 스러지기 전 빛의 부스러기들. - P15
봄은 화려한 색으로 소리를 대신했다. 피고 지는 데 이토록 조용한 생명들이라니! 내가 피었다 지느라 소란할 때도 꽃들은 반복이라는 눈을 끔백일 뿐 조용했다. 꽃과 계절의 반복을 보며 관성 속에서 싹트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꽃들은 서쪽을 향해 모가지를 드리우고 잘 자랐다. 자랐다는 말은 어울리지않을지도 모르겠다. 꽃들은 발이 묶인 채 가까스로, 시드는 순간을 최대한 유예시키고 있었으니까. 물과 햇빛과 서쪽 창이 그들을 머금고 있었다. 꽃은 약하지 않았다. 오래 머물다 시들려고 애쓰는 것만으로 충분히 강하고 독립적으로 보였다. 독립적으로 살다간 꽃이 종이처럼 부스러져갈 때, 불러도 동요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볼 때 마음은 슬프다. 꽃과 달리 우리의 얼굴은 ‘오래된 얼굴‘이다. 시간은 몰래 얼굴에 금을 긋고 도망간다. 나는 시간이 그리다 만 미완성작, 완성은 내가 사라진 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나 이루어질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그것은 조금씩 유예되겠지. 유예 불가능한 완성은 하루를 사용하고 식어가는 태양뿐인가? - P16
나는 기울어지는 것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유별난 취미가있고, 그것은 천성이나 성격과 관계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방은서쪽, 사람은 어깨가 한쪽으로 조금 기운 사람, 꽃은 말없이 피고 지는 모든 꽃, 꿈은 파닥이다 사그라지는 꿈이 좋다. 서쪽 방에서 기울어지는 것을 생각하는 일은 달 속에서 음지식물을 기르는 기분과 조금은 비슷할지 모른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울어지는 모든 것들의 목뒤에, 입술을 대고싶어진다. - P17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먼 훗날 당신이 많이 아파 내 무릎이 꺾이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나뭇가지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꺾이듯 그런 것은아니면 좋겠다. 오히려 새벽을 생각하는 아버지가 저문 언덕에서 구절초 무리를 보려고 숙인 모가지처럼. 딱 그 모가지처럼 꺾였으면 좋겠다. 그때가 되면 내 양 무릎을 당신 쪽으로 내놓고, 꺾인다는 것을 기꺼워할 수 있을까? - P20
그 뿌리를 공중에서도 오래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래요. 그게 더 진짜 같아요. 누가 사랑을 한곳에 심을 수 있겠어요?
이 말을 쓰고 나서 혼자 활짝 웃습니다. 사랑은 한곳에심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생각한 내가 마음에 듭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비가 멈추었네요. 장마가 지나고 나면여름은 더 맹렬하게 푸른 독을 뿜어내겠죠? 다행이에요. 계절이 반복된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여름이 가을에게잡아먹히면 그다음은 차가운 미소를 짓는 겨울이 기다리고있을 테니, 안심이에요. 자꾸 잡아먹혀도 완전히 사라지는 게아닐 거예요. 당신, 죽지 말아요. 생생하게 살아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언제나 당신을 가슴 깊이에서 응원합니다. 항상 내 안부를걱정해주는 당신,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지나 미래에 당도해 있는 연인. 안녕.
2013. 여름. 귀한 연꽃 향을 담아. - P36
가구나 장신구, 기계 따위는 30년 정도 지나면 무리 없이골동품 대열에 낄 수 있다. 음악이나 영화, 책도 30년 묵으면희끗한 분위기를 풍기며 반전 반열에 오를 수 있다. 30년전에 담근 술이 있다면 그 술은 보약 대접을 받는다. 한눈팔지않고 30년 동안 같은 일을 해온 사람은 전문가나 장인, 달인취급을 받는다. 그렇다면 인생은 어떨까? 30년 동안 살아온인생은 골동품 대열에 낄 수 있을까? 어림없다. 필립 로스의소설 『휴먼스테인The Human Stain』에 나오는 구절을 빌리자면, "더이상 성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면서도 아직은 노화로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간신히 폭이 좁은 터널 하나를지나온 얼굴로 서 있는 나이가 서른이다. - P39
지난밤 내가 묻어둔 꽃씨들이 보고 싶어 한밤중 잠든 화분 속을 헤집어본다 다섯 개였나, 여섯 개였나 혹시 묻어두었다고 착각했었나? 어두운 과거를 핀셋으로 발라내며 이곳은 피 한 방울 없이도 생으로 가득 차 있는데 기다려야 한다 가만히 방바닥에 앉아 기차가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나갈 때까지 무사히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졸시 「서른」 중에서 - P40
여전히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 평정을 잃고 방방뛸 때가 많지만 서른이 넘었으므로 이내 괜찮은 척, 기다리는척한다. 마흔이 넘어서는 뭘 하는 척해야 하나? 쉰이 넘고예순이 넘어서는? 중요한 건 생각은 갑자기 해서 되는 게아니라는 것이다.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어른인 ‘척‘도 하고, 잘 사는 ‘척‘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척‘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하는 것에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싶다. - P41
쓰는 것과 시를 쓰는 것은 다르다.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불러온다.
작가는 유혹하려는 사람이다. 가볍고 무거운 단어들을놓고, 비비고, 들어올리며 호객하는 자다. 고백하기 위해 가장많은 단어를 필요로 하는 슬픈 짐승이자, 나무 한 그루를이야기하기 위해 기억하는 모든 숲을 에둘러가려 하는어리석은 사람들이다. - P67
어렵다고 느낀다면, 이미 나는 좋은 시인이 아니다. 좋은시인이 되는 것은 진작 포기했다. 물론 싱싱한 활어처럼 파닥여서 아무도 잡을 수 없는 시를 쏟아내던 때가 분명히있었다. 한 달, 아니 하루 반나절, 아니 몇 시간, 몇 분이라도 싱싱했었지. 물고기는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을 몰라야 신나게헤엄칠 수 있는 거니까. 물고기가 자신이 물고기라는 사실(진짜사실?)을 인지한 후, 자신이 속한 곳이 바다라는 것을 알고 난후에는 지느러미에 힘이 들어가고 꼬리의 움직임이 자연스럽지못하게 된다. 헤엄은 헤엄만이 아닌 게 되고, 물고기의 기쁨은사라지고, 아무도 물고기를 물고기라고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십대 초반에 시를 쓰는 공책 제일 첫 장에 김수영 시인의 산문 중 여러 부분을 발췌해 적어놓았었다. 잊지 않으려고, 각성하기 위해서. - P71
--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 - P71
-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다. - 시인이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부터시인은 시인이 아니게 된다.
김수영의 정신은 내게 시작으로 들어가기 위한 시작한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었다. 시를 쓰기 전에 밟거나 넘었고, 오래 서 있었다. 불안할 때 중얼거려보는 기도문이었고, 쉽게 타협한 시 앞에서는 만장이 되어 펄럭이기도 했다. - P72
끝내 포기하지 않고 시를 유예해놓을 것이다. 모든 사랑을유예하고 싶듯이, 내가 쓸 수 있는 시나 쓸 수 없는 시를끊임없이 유예하는 마음으로 그저, 지금이 아니라 다음, 그다음. 그다음에 더 잘 쓸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어리석게 믿으면서. 닿을 수 없는 먼 곳에다 쓰고 싶은 시를 기약해놓을 것이다. 그때 나는 시를 쓸 수 있을 것이고,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그냥 겨우 겨우 몇 자를 뱉어내는 ‘노력‘을 할 뿐이다. 나는 믿는다. 종국에 돌아온 탕자가 되어, 시의 발아래 엎드려 대추처럼 쪼글쪼글해진 얼굴을 하고, 쇳소리를 내며 노래할 것이다. "시란 패자가 모두 갖는 게임"이라는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의 말을 믿으며, 기어코, 살아남아노래해야겠다. 비루하고 흉한 몰골일지라도! 가늘고 길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시를 쓰는 일. 그게 내 목표다. 그러니 시에 대한 두려움은 두려움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영원히, 유예하련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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