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까지 터져 공포가 극대화된 상황에서 조 추수가 있었다. 수시로 총성이 울리는 들판에서 사람들은두려움에 떨며 곡식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해 조농사는풍년이었다. 입산자들이 가을걷이를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포고령 이후 토벌대는 들녘에 젊은 남자가 보이면무조건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가을걷이가 매우 두려운일이 되어버렸다. 여자들도 들일을 하다 총에 맞아 죽는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동산에 망꾼을 세워놓고 조를 베어야 했다. 토벌대가 보이면망꾼이 그쪽을 향해 흰 기를 매단 장대를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 - P174

늦가을의 들녘은 조밭도 목장도 누런빛으로 물들었는데, 조를 베는 사람들도 갈옷이 조밭의 누런색에 녹아들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누런색 일색의 넓은 들녘은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텅 비고밋밋하게 느껴졌다. 바람도 불지 않아 사방이 조용했다.
거대한 정적 속에서 문득 아주 미세하게 차 엔진 소리가들려왔다. 일주도로에 군용트럭 두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혹시나 하고 긴장했으나, 다행히 차들은 와흘리로 올라오는 마찻길로 꺾지 않고 그대로 서쪽으로 달려갔다. 거리가 멀어 트럭들이 풍뎅이처럼 작아보이고 달리는 속도도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 P178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지역의 통행을 금지하고어길 경우 총살한다는 포고령이 떨어진 이후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토벌대의 습격이 두려워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토벌대에게 습격을 당한 와흘리 청년들도새미오름 근처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외갓집에 머물던만옥과 창세도 곶자왈 속 아지트로 들어갔다. 토벌대의막강한 공세 앞에서 산부대는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매복 기습을 위주로 하는 산부대로서는 들판의 나무들에 낙엽이 지고 풀이 시들어 가라앉자 몸을숨기고 움직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P181

그 위로 맑은 햇빛이 가득했다. 하늬바람이 살랑살랑 가볍게 불어오고, 그 바람길을 따라 햇빛이 물결처럼굽이치며 흘러갔다. 꽃들이 하얗게 핀 억새밭 사이로 마찻길이 구불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 길 끝에 해변이있고 그들이 떠나온 내 마을, 내 집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그곳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피안처럼 느껴졌다.
"두길아, 우린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우리가 죽더라도 저런 데 가서 죽어야 하는데, 어쩌다 여기에 와 있나………" 대림이 탄식했다. "아아, 이 공포, 이 불안이 언제 끝나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애가 타고 심장이말라붙어버렸어."
"조만간에 끝날 거야. 시작된 것은 모두 끝이 있어."
두길이 아픈 벗의 등을 쓰다듬었다. - P182

11월 중순에 한라산 둘레 중산간 지역의 백육십여개마을 중 백삼십여개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대방화,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다.


우리 외가 마을 와흘리가 불탄 것은 양력 11월 13일이었주. 이웃 마을인 대흘리 와산리, 교래리도 바로 그날 불탔어. 불길이 엄청났주. 하늘과 땅, 천지사방이 시뻘겅했어! 조추수가 끝나고 이어서 고구마, 콩, 산디(밭벼), 메밀을 거둘 때였어. 그날은 눈이 성글게 희끗희끗 내렸지. 약간 추운 날씨였주


그날 조천면의 중산간 마을들에 출동하여 방화하고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함덕에 주둔한 제3대대, 서청 대대였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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