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이야기의 끝이 아님을 이해하기까지 나는 몇 년이 걸렸다. 죽음은 이야기를 바꾸어놓는다. 일방적인 대화체의 오류와 통찰을 수정하고 고쳐쓴다. 우리 대부분이 서로의 삶을 드나드는 건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아니라 거리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다-시공간과 마음의 권태야말로 인간관계에서 더 냉정한 사형집행인이다. 되풀이해서 꾸는 캐럴라인 꿈이 몇 가지 있다. 캐럴라인이 녹색과 청색으로 가득한 숲속 작은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꿈, 그녀에게 보낼 편지를 타이핑하는데 내가 찍은 글씨의 잉크가 계속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꿈, 꿈에서 그녀는 언제나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이지만, 끔찍하거나 고통스러 - P183
을 꿈은 아니다 손을 뻗으면 서로 닿는 지척이었기에 나는언제나 상실감을 이겨낸다. 하지만 견디기 힘든 꿈이 한 가지있다. 아파서 치료받고 있는 그녀를 내가 찾지 못하는 꿈이다. 연락이 끊어지거나, 전화가 되지 않거나, 잠긴 문 너머에그녀가 있는데 내 열쇠가 부러진다. 조금씩 다른 변주가 여러가지 있지만, 번번이 허공을 할퀴며 깨어나는 이 꿈의 메시지는 하나다.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것은 삶이지 죽음이 아니라는 것. - P184
시인 키츠는 "마음의 애정이 지니는 신성함"과 상상력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캐럴라인과 나는 서로 내면의 무엇을 잠잠히 다스려준 덕분에 밖으로 나가 더 넓은 세상에 발을 담글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실과 기억을, 그 두 가지가 서로에 미치는 영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나는 이 모든 이야기의 가닥들을 따라가다가 다다른 한 가지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다. 그녀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으스스하고 초월적인 생각. 내 주위는 온통 사실을 반증하는 삶과 죽음의 파편들이다. 요리책에서 떨어진, 조목조목 꼼꼼한 그녀의 손글씨로 쓰인 감자그라탱 레시피가 그렇고, 그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힘들게 구해준 J. R. 애컬리의 『우리 개 튤립 * 초판이 그렇고, 죽음 이후 그녀 집에서 발견한 수수께끼 같은 CD가 그렇다. ‘캐 - P184
럴라인을 위한 음악‘이라고 제목이 달린 이 CD는 노라 존스와 피오나 애플부터 에디트 피아프에 이르기까지 한 곡 한곡 우리 모두가 품은 알 수 없는 열정의 고백을 담고 있다. 언젠가 캐럴라인은 삶의 일차적인 모호성을 "기쁨의 어두운 이면"이라 말했는데, 요즘은 그 반대쪽 면이 펼쳐진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행복한 중간지대로, 작가 스스로 뛰어드는둔주상태** 속으로 내가 그녀를 데려와 함께 걷고 있으므로. 개들과 함께 뛰노는 풀밭과 숲에서, 로잉 수업과 토론과 한가한 전화통화에서 매번 그녀는 온전하게 살아 있다. 이즈음 그녀의 죽음은 저만큼 떨어진, 닫혔으되 잠기지 않은 어느 문너머에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강바람에 그을린 그녀가깔깔 웃고 있다. 곧 전화가 울리고 우리 중 하나가 묻겠지. 지금 뭐해? 그러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될 것이다. - P185
다른 한 장면은 그날 늦은 오후, 클레먼타인을 산책시키고 캐럴라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러 한참 병원 밖에 나와 있을때 일이다. 동네 공원 쪽으로 걸어내려가는데 저편 농구코트에 친구와 일곱 살배기 딸 소피가 있었다. 내가 그들을 보았을 때 마침 소피가 공을 잡아 슛을 던졌다. "엄마!" 아이가 소리쳤다. "봤어?" 아이가 코트에서 첫 승리를 거둔 순간이었고, 나는 그 승리의 우연한 목격자가 되었다. 그렇게 손만 뻗으면 쉽게 잡히는 기쁨이 얼마나 강력한지 나는 숨이 멎을 듯했다. 햇빛 찬란한 이 오후에 캐럴라인은 죽어가고 있고 소피는 슛을 넣었다. 엄마! 그렇게 아이는 지치지 않는 생명력으로 공을던지고 있었다. - P193
"이런 일이 생기기 전이었다면 말이야." 그날 밤 그녀는 이런말도 했다. "만약 누군가 폐암에 걸려서 네 군데나 전이됐다는 얘기를 들었으면 아마 나도 ‘어쩌나, 그사람 육 개월밖에안 남았네‘ 그랬을 거야." 그러고는 링거를 꽂은 날씬한 근육질의 팔을 들어올리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내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 이 모든 게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아주 옛날 일 같기도 하다. 상상 속에 고정된 시간과 공간의 깊은 균열 사이에서 벌어진일인 것만 같다. 이 모든 게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이 모든 것을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위기의 순간에 나 - P197
눈 대화는 마치 나무에 난 상흔처럼 윤이 난다. 지금은 내기억을 떠올리며 깜짝 놀라지만, 그럴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캐럴라인의 목소리를 내 가슴에 새겨놓았으니까. 그 목소리, 그 억양과 음역과 타이밍이 완벽한 유머까지. 이것을 잃을 일은 없다. 월요일이 되니 화학요법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진단을 받고 며칠 안 되어 캐럴라인이 자신의 상담치료사-그녀가 이십 년 동안 알고 지내며 좋아한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그는 아직까지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상황의 엄중함을 뒤로 미뤄보려고 캐럴라인도 상담치료사도 애를 쓰고있었을 것이다. 그날 캐럴라인은 그동안 지켜온 신체적 심리적 평정을 모두 잃었다. 지독하게 앓으며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오후 내내 누워 있는 그녀 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네덧 시간이 흐르는 동안 캐럴라인은 깨어났다 움찔했다 다시 잠들기를 되풀이했다. 나는 물수건을 차가운 것으로 바꾸러 갈 때를 빼고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힘들 것 없는 기이한 보초를 서며 시간도 생각도 다 사라졌다. - P198
우리 주위에는 화학요법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이들이 많았는데, 이 대화가 오가는 동안 우리에게 눈길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한 여성이 휴지상자를 건네주고는 다시 읽던 잡지로 눈을 돌렸다. 나로서는 이런 상황이 안도가 되고가르침이 되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누구도 낯선 이들의 감정에 불편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도 죽음에 직면한 자들의 은밀한 문화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들.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에선 심장의 맨살이 훤히드러났다. 때는 5월 초의 화창한 오후였다. 우리는 일찌감치 병원에도착해 햇살이 내리쬐는 야외에서 땅바닥에 책상다리를 한채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이때쯤 캐럴라인의 작가활동은 이미 중단된 상태였는데, 잊어버리고 미처 취소하지 못 - P203
한 미해결 원고가 하나 남아 있었다. 애견잡지에 보낼 그녀와투실에 대한 에세이였다. "무슨 얘기를 써야 하지?" 그녀가 물었다. "함께 살던 개를잃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다면 자기가 개보다 먼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고?" 그녀의 음성이 갈라졌다. 내가 가보지 못한 두려움 너머의어딘가에 그녀가 서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리고 가장힘들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듣는 일이라는 것도 희망이나 안도의 거짓 약속은 모두 우리가처한 자리에서 도망치려는 시도일 뿐이었다. 햇살이 비치는마운트 오번병원 잔디밭, 내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쥐고 앉은 이곳이 지금의 우리 자리였다. - P204
내가 루실의 변변찮은 안내자가 되었다. 결혼식에서낭송하기에 걸맞은 사랑과 언약에 관한 시를 한 편 찾아달라는 캐럴라인의 부탁도 있었다. 나는 적당한 것을 고르느라 며칠을 보냈다. 연애시들은 대부분 머리 위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캐럴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두 사람 다 해피엔딩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피엔딩을 꼭 믿지는 않았다. 어느모로 보나 인생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다는 게 입증되고 있지않은가. 어렵사리 에드나 세인트빈센트 밀레이 * 소네트한 편을 찾았다. ‘반짝이는 운명의 물레‘를 파괴하는 숙명에 - P205
대해 이야기하는 시이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었다. 마침 시를 읽고 있는데 캐럴라인에게 전화가 "하나 찾았어." 내가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너무 음하다." 그러고서 그녀에게 첫 몇 행을 읽어주었다. "원컨대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기쁨을 안아주시기를 / 잠시라도 아니라면 당신의 눈물로 내가 울게 하시기를." "됐어." 도중에 불쑥 그녀가 말을 잘랐다. "바로 이거야. 그걸 읽어줘야 해." 결혼식날 모렐리가 우리 둘을 찍어준 사진이 한 장 있다. 사진 속에서 우리는 한 쌍의 그레이하운드 새끼들처럼 꼭 달라붙어 있다. 결혼식이 끝난 밤, 캐럴라인과 모렐리와 나는그녀의 소파에 드러누워 그날 하루를 세세히 되짚었다. "기분이 어때?" 곁에 누운 캐럴라인에게 내가 물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었다. "위로받은 느낌이야." - P206
그뒤 며칠 동안, 캐럴라인을 사랑하는 우리들을 엄습한 공포는 일정 부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녀가 그것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데서 왔다. 병실에들어서서 본 캐럴라인의 두 눈은 두려움으로 사나웠다. 누군가 그녀에게 내가 왔다고 말해주었다. 그녀가 괴로운 울부짖음을 토해냈고, 내 귀에 그 소리는 두 가지 뜻으로 들렸다. 하나는 나를 알아보고 내는 단순한 소리. 다른 하나는 내가 나타난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먼 거리를 되돌아왔다면 상황이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고 내는 소리였다. 말을 걷어내면 말을 둘러싼 온갖 수식이 보인다. 몸의 언어와 손짓, 눈빛이 하는 이야기까지. 모렐리와 캐럴라인의 형제자매가 모든 의료결정 대리권을 위임받아야 했지만, 그 주에 작성된 서류들에는 아직 필요한 서명이 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캐럴라인이 상황을 파악하고 펜을 쥘 수 있는지먼저 확인하기로 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캐럴 - P208
라인, 나야.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면 내 손을 꽉 쥐어봐." 그녀가 지체 없이 세게 손을 쥐어 응답했다. "좋아." 내가 말을 이었다. "위임장에 자기 서명이 필요해. 할 수 있을 것 같으면ㅡ" 그녀의 응답에 나는 말을 멈췄다. 거의 내 손을 부러뜨릴 만큼 강렬한 힘, 그것은 조바심과 유능함이 고스란히 담긴, 완전하고 의미 있는 문장이었다. 그녀가 서류에 이름을흘려 쓰는 동안 나는 그녀의 몸을 꼭 붙들었다. 그날 이후로 양팔이 그녀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어느 밤 병실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내가 캐럴라인이 누운 매트리스에 머리를 기댔다. 모렐리는 내 피로한 기색을 읽고 목 밑에 수건을 받쳐주었다. - P209
방안의 밝기와 숨소리의 횟수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던 이후 며칠동안 그가 셀 수 없이 베푼 자상한 행동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 캐럴라인이 팔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의 며칠을 위로하고도 남는 손짓이었고, 우리는 그렇게 그대로 있다가 둘이 스르르 잠들었다. 우리는 몇 년을 수다로 보낸 사이였다ㅡ남들이 포기했을 상황에도 수다를 통해 감정과 대화와 복잡다단한 일상을 가닥가닥 해체했다. 이제 그녀가 더이상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러니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의 안무가 우리의 이야기가되었다. 몇 시간씩 그녀의 침대 발치를 지키고 있어도 내가거기 있는 것을 그녀가 알기는 하는지 모르겠는 시간이 대부 - P209
분이었다. 하지만 캐럴라인과 나의 우정은 비언어적 소통으로 우아한 진실을 추구하는 결속에서 시작되었다. 몸놀림과손짓과 눈맞춤이야말로 동물과의 대화에서 필수요소니까. 처음 그녀가 병상에 누웠을 때, 나는 그녀가 아끼던 티셔츠를병원에 가져갔다. 뉴욕의 레스토랑 바킹도그런처네트BarkingDog Luncheonette 의 티셔츠로, 등에 ‘앉아! 기다려!‘라고 쓰여 있었다.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얼마나 정직하고 중요한지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한 일도그것이었다. 앉기, 그리고 기다리기. - P210
그 담대함이란 물론, 그녀는 숨을 거두기까지 한참을 견뎠다. 뇌출혈이 일어나고 이삼일 안에 의료진이 그녀의 몸에 중심정맥관을 삽입해 모르핀을 투여했다. 이 약물이 고통을 충분히 억제해 부디 그녀가 근심 걱정 없이 자유로운 곳을 떠다녔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진실은 알 길이 없다. 임종이라는 바로 이웃한 우주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 의문은 그때도, 그녀가 떠난 뒤 몇 달 후에도내내 집요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목격자의눈에비친 고통이막막하고 무력한 세계임은 나도 안다. 의식이 또렷한 멀쩡한이들은 정녕 그 내막을 알아낼 수도, 어떻게 돌려놓을 수도없는 광경을 지켜볼 뿐이다. 고통은 삶의 마지막 판도를 바꿔 - P213
놓고 죽음의 검은 외피를 희게 탈색시킨다. 고통은 시간의 바깥에 놓인 침침한 통로이며, 그곳에서는 오직 맹렬한 탈진감만이 당신을 제압하고 윽박질러 죽음이 들어서도록 문을 열게 만든다. 캐럴라인은 출혈을 일으킨 그날 밤 이후로 열여드레를 살았다. 모렐리는 루실까지 데리고 그녀의 병실로 거의 이사를하다시피 했다. (어느 밤인가 병실을 나서던 새로운 조무사가 씨익 웃으며 "어휴 깜짝이야, 여기 개가 와 있어!"라는 말로 넘어가준 것이 투쟁 끝에 우리가 얻은 즐거움이었다고나 할까.) 이 기간동안 나는 불안할 만큼 에너지가 넘쳤다. 얼마쯤 지나면 큰슬픔이 찾아오리란 걸 알면서 가능한 한 그 사실을 외면했다. - P214
순진한 질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휘청거리며 상실의지원으로 향하고 있었음을 지금은 안다. 사망선고를 받아들하는 것은 슬로모션으로 계단을 굴러떨어지는 것과 같다. 한간에 하나씩 멍이 늘어나며 견딘다-쿡, 한 번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한 칸 떨어지면서. 나는 탈진하여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피해 달아나보겠다는 듯 맹렬한목적의식으로 계속 움직였다. 텍사스에서 돌아오던 날 밤, 허조그의 집 전화번호를 구해 병원에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병실을 찾은 그의 손에 은방울꽃 한 다발이 들려 있었고-다른 것은 몰라도 캐럴라인의 후각은 무사하리라는 배려였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꽃다발을 코에 대주었다. 이꼼꼼한 자상함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뒤 몇 주 동안 나는 캐럴라인을 사랑하는 다른 모든 이들 앞에서 억누른 괴로움을허조그와 대화할 때만은 감추지 않았다. 끝이 머지않았던 어느 밤, 병원 복도에서 지금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으니 그가 말했다. "캐럴라인에게 아직 못 한 말이 있으면 다 해요." 그래서 나는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없어요" - P215
임종의 세세한 순간들은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프다. 숨쉼, 기다림, 그리고 다시 숨쉼, 기다림. 몸이라는 훌륭한 장치는언제 어떻게 멈출지를 잘 안다. 다만 캐럴라인은 워낙 강인하고 결연한 사람이라서, 이 마지막 과제의 끝을 향해 나아갈때조차 팽팽한 힘을 놓지 않았다. 내가 여러해동안 물위에서 지켜보았던 그녀는 이제 앤 섹스턴"이 "하느님에게 가는끔찍한 뱃길"이라 부른 그 여정에 오르고 있었다. 하느님이라, 내게 하느님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주인 같은존재였다. 성인이 된 이후 주로 나는 믿음을 버린 냉담자이거나 환난에 처해서야 신을 찾는 신자로 살았다. 둘 중 어느 쪽으로든 답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나는 항상 놀라웠다. 그러나인간의 의식보다 더 크고 불가지한 존재에 대한 내 믿음이 - P216
근처로부터 시험당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따금 나는 병원의작은 예배당에 들어가 침묵으로 몸을 감싼 채 어둠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캐럴라인의 병실로 올라갔다. 유난히 힘들던 어느 밤, 바깥 복도의 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 길의 참혹한 최후가 느껴지던 일을 기억한다―그 순간에는 맞은편에 아무것도 없는 돌담에자동차를 들이받듯, 끝이 단순히 끝일 뿐인 것 같았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적막한 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날밤 그 방안의 유일한 신은 모르핀 한 방울인 것처럼 느껴졌다. 무–살고 견디고, 그리고 죽는 생래적 본능 이외에 모든 것이 무의미한 우주를 응시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냉정한 깨달음이 들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날이 새듯 일상적인 일이고 지금은 캐럴라인이 저물어야하는 때였다. - P217
거기에 광명도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 나로서는참을 수 없었다. 인간이 부활의 신화를 믿게 된 것도 무리는아니었다. 그나마 그것이 암흑 속에 한 가닥 틈을 열어, 이 끝을 견디는 유일한 방편이 되었으리라. 그 어렴풋한 통찰을 다시 불러오려고 애를 써보지만 그때의 강렬함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우리는망각하게끔 설계돼 있으니까. 우리는 다리를 세우고 언어를배우고 아이를 낳고 막대기로 바위를 두드리며 리듬을 찾는 - P217
일을 계속해나가야 한다. 죽음이 나타날 때는 이 모든 것의덧없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오래가지는 않는다. 죽음의 거센 흡입력을 기억하기란 손안에 물을 쥐려는 시도와같다. 그 어두운 통로를 벗어나며 내가 얻은 깨달음은 이것이었다. 신의 존재에 대해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것 - 그 엄연한 광경의 바깥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알지 못한다는 겸허함이 필요하다는 것. ‘없어서는 안 되는수수께끼‘ 이어진 몇 달 동안 이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우주 속의 필연적인 내 위치가, 앎과 알지 못함의 경계에, 내게는 오만해 보이는 종교적 확신과 믿음 없는 세상의절망 사이에 서 있는 내 자리가 그 안에 담겨 있기라도 한 듯. - P218
캐럴라인이 죽던 날, 나는 원고 마감을 지켰다. 강한 척을하려던 것이 아니라 앞으로 스물네 시간 안에 그녀의 심장이멈출 것이고 그뒤에는 내가 무너지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당장 서너 시간은 비교적 고통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것이 글쓰기라서 나는 그날 글을 썼다. 추측하건대 아마 그녀도 그러기를 바랐을 것이고, 그녀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일요일이었던 전날은 밤늦게까지 병원에 있다가 캐럴라인 - P218
의 형제자매와 모렐리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와 열 시간 동안 놀랄 만큼 깊이 잠을 잤다. 캐럴라인은 사흘 전부터 의식이 없었다. 나는 그녀 곁에 앉아 숫자의 의미를 알 수 없을 때까지 그녀의 숨소리를 셌다. 마지막으로 내가 부둥켜안았을때 그녀의 몸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웠고, 움직임이 없는데도격렬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수일전부터 우리 곁에 없었다. - P219
개들과 사람들과 빈 접시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채웠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나는 수면제를 한 알 먹고 잠을 청했다. 이 모든 상심과 나란히 아이러니와 경이가 느껴졌다. 캐럴라인과 나는 비슷한 고요와 고독 속에 은신하다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제 그녀는없고, 그녀가 떠나며 내문을 사방으로 활짝 열어둔 것이다. 우리가 일평생 애도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단기집중강좌가 유일하다. 캐럴라인이 죽기 전까지 나는 반대편 세상, 순진함과 선형적 기댓값의 세계에 속해 있었고, 애도라는 것이그저 쓰라린 슬픔과 그리움의 영역이며 서서히 희미해지는 - P221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의에는 일시적인 착란, 상실이 가하는 치명타, 더 복잡미묘하고 지독히도 강렬한 일련의 감정이 모두 누락돼 있었다. 몇 주, 어쩌면 몇 달간 나는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움직였지만 사망일부터 추도식까지 처음 며칠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눈물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나의일부는 금요일 아침 추도예배에서 낭독할 시를 찾아 소리내읽는 연습까지 하며 섬뜩할 만큼 민첩하게 상황에 맞는 동작들을 수행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의 나는 이 단계에서 다음단계로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그리고사람들 앞에서 캐럴라인을 놓아보낸다는 건 난해한 끈이론만큼이나 혼란스럽고 불가해한 일이라고-단단히 믿고 있었다. - P222
집을 떠나 오하이오에서 그녀의 부고를 들은 오랜 친구 피트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나는 두려워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음날 치를 추도식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피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그가 들려준 말은 영원히 내 귀에 맴돌 만큼 큰 위안이 되었다. "모르는 게 아니야, 게일." 그가 말했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오랜 세월 이런 일을 해왔어. 그러니까 이건 말이야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하면 되는 거야." - P222
조심스럽게 살아와서 비교적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고 대중의 관심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얼마쯤 믿었던 캐럴라인이추도식 광경을 봤더라면 아마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마운트오번 공동묘지 예배당은 추모객들이 차고 넘쳤다. 오전내내 차가운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고, 캐시가 집으로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예배당 입구가 보이는 차 안에서 나는캐시에게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서둘러 안심시키려 들지도 내 말을 그저 비유적인 표현으로 넘겨듣지도 않았다. "문까지는 갈 수 있겠어요?" 캐시가물었다. 4미터가 채 못 되는 거리였다. 문까지 걸음을 뗐더니, 모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부터는 괜찮았다. - P223
그날 아침 내가 읽은 루이즈 보건의 시 종막을 위한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제 당신의 얼굴을 가슴에 새기고보니, 내 눈은/ 당신의 이목구비보다 거무스름해지는 뼈대에더 머뭅니다." 추도식 이후 이틀 동안 나는 시의 운율을 머릿속에 담고 다녔다. 산책을 갈 때도 수영을 할 때도 잠들기 전마지막 생각을 할 때도 이 운율이 감미로운 배경음이 돼주었다. - P223
다. 마치 먼 옛날의 합창대가 내 안에 머물며 아름다운 성가를 들려주듯, 내 움직임에 운율이 되고 달리 표현할 길 없는슬픔에 반주가 되었다. 이틀이 지나자 시는 도로의 빗물처럼자연스럽게 사라졌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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