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을 맹세한 대상이 문제의 원인일 때는 그런 경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깨진 유리로 뒤덮인 길을 한참 기어서 빠져나온 뒤라면 모를까. 최대한 상냥하고 위협조가 아닌 도움이라 할지라도-알코올중독자에게 그런 게 있을 수 있다면 말이지만 문을 부서뜨리지는 못했다. 혹시 문이 부서졌으면 아마 나는 야반도주라도 했을 것이다. 나는 도움을 원치않았다. 내가 원한 것은 나를 안심시켜줄 말이었다. 잠깐이어도 좋고 억지스러워도 상관없으니, 그저 내가 별 탈 없이 계속 술을 마실 수 있을 거라는 위로를 받고 싶었다. 어느 오래된 농담처럼 말이다. 무인도에 간 사내에게 호리병 요정이 두가지 소원을 빌라고 하자 사내는 맥주 한 병을 부탁한다. 요정이 즉시 맥주를 대령하며 이것은 시원한 맥주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병이라고, 이제 소원 한 가지를 더 빌라고 한다. 그랬더니 사내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냥 맥주를 한 병 더 줘요, 라고 말한다는 이야기. - P89

이런 무한반복이 남기는 최악의 심리적 앙금은 지속적인배신감이었다. 매일 아침 술을 마시지 않기로 계약을 맺지만, 밤 여덟시나 아홉시쯤 계약은 다시 깨진 뒤였다. 돌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끊이지 않는 침식작용이 일어났다. 나는운좋게도 양친의 장점을 고루 물려받아 어머니의 독립심과아버지의 강한 결단력을 모두 지녔다. 그리고 삼십 년 동안제법 괜찮은 성과를 거둔 나 자신에 대한 신뢰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적수는 그간의 도전 상대들보다 훨씬 가혹하고 끈질기고 강력했다. 승부가 이미 판가름났다는 건 앞선 한 해로증명이 됐다. 실제로 링에 올라 잭다니엘 병에게 흠씬 두들겨맞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술을놓지 않으려고 신들과 협상을 벌였다. 마감시간을 지키면 술을 사기로, 일감을 따내면 술을 마시기로, 내 글이 흡족할수록 하루의 끝에 받는 보상도 더 커졌다. - P97

연료가 충분한지 외양은 괜찮은지 점검을 거듭하며 한심한 영웅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물가로 나오게끔 내게 밧줄을던져준 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였음을 이제는 안다. 술을 지키고 글쓰기를 잃은 세상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술이 없는 세상보다 훨씬 더 견디기 힘들었다. 비참했던 마지막 몇 달 동안은 밤늦게 술에 취해 내가 나에게 끼적거린, 반쯤은 이해되고반쯤은 이해되지 않는 메모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낮에 맑은 정신으로 쓴 글은 최소한 알아볼 수 있고 명료했는데, 내어두운 반쪽이 남긴 메모들은 마치 한물간 왕년의 브로드웨이 탕녀를 싸구려 술집에서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내 나이 서른셋이었다. 고뇌하는 낭만주의자의 환상이 아무리 심하게나를 몰아붙였던들, 비극적인 몰락을 맞기엔 아직 너무 이른것 같았다. 수년간 나는 위스키로 재능을 길들인 작가들을 모아 술에 전 명예의전당을 만들었다.  - P101

작가가 되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리라 생각하며 살던 다락방은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엘리베이터 없는 삼층 건물에있었다. 타자기가 놓인 자리는 거실이었고, 그곳에 난 건물전면 창밖으로 지붕들과 뉴잉글랜드의 하늘이 이어졌다. 아래로는 사람들이 삶을 꾸려가는 거리 풍경 - 우편배달부,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도시생활의 후경을 이루는 친숙한 타인들이 내려다보였다. 부러진 갈비뼈 때문에 집에서 꼼짝을못하던 어느 겨울 오후, 그저 주류판매점에 걸어가 버번 한병만 사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심정으로 창가에서서 눈발이 휘날리는 바깥을 내다보는데, 문득 내 꿈의 경로가 이만큼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작가가 되겠다는 의지로 아무런 일자리도, 가족도, 발판도 없는이곳까지 그 먼길을 와놓고 지금은 저 아래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비좁은 내 삼층 독방에 발이 묶인 채 어서 술을마실 수 있도록 이 하루가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다니. 수년간의 자유낙하가 끝이 났고, 불안은 절망이 되었고, 나는 정말로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 P102

술을 끊자 몇 가지 즉각적이고 드라마틱한 효과가 나타났다.
집을 청소하고 날마다 1500미터씩 수영을 했고, 전에 없이단것이 당겼다. 여러 AA 모임에 참석하고,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소설책을 쌓아놓고 읽었다. 지역 문예평론지 편집자로 취직되어 첫 출근을 하던 날, 그곳에서 짙은 음색에 키가크고 점잖은 매슈를 만나 좋은 친구가 되었다. 매슈는 다시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었다-그와 함께 있으면 장애물 훈련장 같던 세상도 놀이공원이 되었다. 창밖 매스 애비뉴에 눈발이 휘날리는 늦은저녁까지 매슈와 나는 사무실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산더미같은 투고들을 읽었다.  - P113

그리고 얼마 뒤, 훨씬 덜 취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열망의1대상이 되었다. 나는 술에 절어 있는 사교의 장에서 길을 잃지 않는 법, 그리고 때로는 사교생활 자체를 피해가는 법을익혔다. 한때는 내게 손짓하던 마법 같은 삶도 시간이 흐를수록 별로 부럽지 않고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 나에게 일어난근본적인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어느 날 밤 보스턴 시내에서 한 명사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였다. 모임장소는 리츠칼튼호텔이었고, 다른 참석자 전원 남성이었다 - 모두 폴란드산 보드카와 더블스카치 같은 독주를 주문했다. 나는 웨이터에게 웃으며 물었다. 생수는 어떤 게 있어요?" 주문을 마친 내게 그날의 초청명사가 조롱하는 눈빛을던졌다. "술 안 마셔요?" 그가 말했다. "얼마나 지루할까."
"전혀요. 지루하지 않아요." 바로 쏘아붙였다. 탄산수나 마시는 연약한 여자로 남들 눈에 비쳤다는 생각보다 그 남자의무례함에 도리어 기가 막혔다. 나는 더이상 그 남자든 아니면누가 됐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연연하지 않았다. - P117

첫인상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캐럴라인의 직감이 빗나간 몇 안 되는 경우였다. 알코올에 얽힌 각자의 과거사가 친숙했다면, 변화 가능성에 관해 우리가 공유한 명제는 더 복잡하고 질겼다ㅡ삶은 고되고 때로 가장 치열한 싸움은 고독하게 치러야 하지만, 두려움 속으로 걸어들어가 상처를 입고 나올지라도 여전히 숨을 쉴 수 있다는 믿음. 우리는 이것을 공유했다. 우울증 환자의 시각에서 해석한희망일지언정 이는 신중한 숙고를 통해 얻은 믿음이며, 우리는 진정한 난관에 직면할 때도 일상의 소소한 사건사고를 마주칠 때도 항상 이 믿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캐럴라인은이십대 후반에 거식증의 물살을 헤쳐나왔고, 나는 처음엔 기어서 나중엔 절뚝거리며 소아마비를 이겨냈다. 그 긴 오르막덕분에 나는 술을 끊는 데 반드시 필요한 두 가지 자질, 결단 - P119

과 집요함을 기를 수 있었다. 상대방에게서 이런 생존방식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캐럴라인과 나는 서로 안전거리를 유지했다 우리는 자신보다 상대에게 관대해지기가 훨씬 쉽다는 것도 여러 해의 경험으로 깨달았다. 캐럴라인이 루실을데리고 6킬로미터를 걷겠다고 고집하면 내가 절반으로 충분하다고 설득하고, 거꾸로 내가 내리막길에서 무려 16킬로그램이나 되는 커다란 보트를 머리 위로 들겠다고 고집하면 그녀가 보트하우스에 차를 몰고 와 운반을 도와줬다. 우리는 각자 내면에 도사린 고약한 감독관을 ‘내면의 해병대‘라 명명했다. 그렇게 부르니 내가 녹초가 되도록 노를 젓고 그녀가 지칠 때까지 수영을 해도 큰 가책이 들지 않았다. - P120

타인의 너그러운 배려로 충만한 인생을 산 사람들은 애착관계 자체를 복잡하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내향적인 사람에게 이것은 더 막연한 영역이다. 내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감정표현에 적극적이고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끝이언제 어떻게 날지, 하루의 끝, 파티의 끝, 산책의 끝, 관계의 - P129

끝이 어떨지 알았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던 시절에는 버번이소울메이트이자 변치 않는 애인으로 등뒤에 버티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피하거나 뿌리쳐야 했다. 하지만 벽돌담이든 고립의 담이든 이미 쌓은 담은 마땅한 수고 없이는 허물어지지 않는다. 캐럴라인과 나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서로를 밝은 바깥으로 나오도록 이끌었다. 서두르지 않고 상대방의 자율을 분명히 배려한 덕분에 우리는 주춤거리며 서로에게서 물러설 필요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친구가 되던 첫 한 해 동안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던 단계에서 매일 붙어 다닐 만큼 편안해지기까지아주 조금씩 신뢰를 쌓아갔고, 그 과정의 많은 부분이 지금보니 신중하고 심지어 말이 오가지 않는 교환과도 같았다.  - P130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에게 기대게 됐다. 텍사스에서 마음에 드는 스웨터가 눈에 띄면 나는 이제 두 개씩 사올 줄도 알았다. 하나만 사들고 돌아와 캐럴라인이 실망하는 얼굴을 보느니 두 개를 사오는 게 속이 편했다. 캐럴라인은 바람이 심한 날 보트하우스에서 배를 끌고 나갈 때면 내게 미리 자기스케줄을 알려주었다. 배가 뒤집히거나 노에 머리를 맞아 루실 혼자 집에 남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는 방책이었다. 나는 아직도 캐럴라인의 집 열쇠를 가지고있다. 그 열쇠로 열 자물쇠와 문은 이제 없지만, 내 차 글러브박스에 열쇠는 그대로 들어 있다. 지난 몇 년간 이 차에서 저차로 옮겨다녔을 뿐. 언젠가는 이 열쇠도 찰스강에 던질 생각이다. 내가 빠뜨린 그녀의 보트시트와 다른 많은 것이 그곳에 있으니. - P131

"뭐해?" 글 쓰는 시간이 끝나고 아직 산책시간은 되기진한 이른 오후, 나는 전화를 걸어 묻곤 했다. "전화 기다리고있었지.‘ 반쯤 농담처럼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면, 우리는 수다로 뛰어들었다. 조간신문 기사(각자 두 종류씩), 로잉과 수형 기록(강에서 8킬로미터, 수영장에서 1500미터), 하루의 끝에서 끝까지 ‘스물네 시간‘ 사이의 사건사고 일지까지. 통화를 마치고 해가 지기 전에 물가에서 만나면 캐럴라인은 내팔에 팔짱을 끼고 물었다. "그래서어어………?" 그럼 우리는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며 끝없는 대화의 또다른 문장을 시작했다.
낡은 규범에 따르면 모름지기 남자는 운동, 여자는 수다였다.
그러나 캐럴라인과 나는 두 가지 모두를 연마했고, 물에서 그리고 뭍에서 함께 이동한 거리가 길어질수록 우리가 디딘 내면의 땅도 단단히 다져졌음을 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지금 깊은 유대와 일상 속에서 피어난 우정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공기를 붙잡으려는 시도와 모든 면에서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의 결합에는 일상의 묵묵함과 종요로움이함께 있었다. 장미에게 자리를 내주는 격자 울타리처럼. - P132

이런 그날그날의 사건을 우리는 서로에게 털어놓았고,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만으로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한번은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가는 저녁모임을 앞두고 캐럴라인이 안절부절못하며 전화를 했다. 숫기가 너무 없는 그녀는 며칠을 이 일로 전전긍긍했다. 나는 참석만 하고 일찍 빠져나오라고 말해줬고, 그날 그녀는 간신히 십일 분을 버텼다.
내가 빈둥댈 때는 그녀가 나를 몰아쳐주었고, 그녀가 과하게능률을 추구하다 곤란에 처할 때, 가령 주차장에 급하게 진입하다 보트캐리어가 차에서 떨어질 뻔한 날에는 내가 그녀를 위로했다. 우리는 각자의 강점에 따라 영역을 나눴다. 나는 컴퓨터와 수의학 관련 일을 잘했고, 캐럴라인은 집수리와체력을 요하는 일을 담당했다. 정신과 영혼에 관한 일이라면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알았다. 그래도 수용의폭이나 외교술은 캐럴라인이 나보다 나았다. - P143

그러나 초코루아에서 캐럴라인이 그 불꽃을 보여준 첫해여름으로부터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세상에 나쁜 로잉이란 없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로잉이 열어준 세상은하루하루가 다르고 강렬해서 우리는 2월이든 8월이든 기대에 부풀어 달력에 열성적으로 로잉 일정을 표시했다. 내가 처음으로 강에서 온전히 한 시즌을 보낼 때부터 캐럴라인은 오래전 자신이 겪은 과정을 기분좋게 떠올리며 내 넘치는 의욕을 기꺼이 받아주었다. 수면상태가 완벽한-거울처럼 잔잔한-날은 만사를 제쳐두고(그것이 치과 예약이든 저녁 약속이든) 보트를 타러 갔다. 나는 주로 이른 저녁, 야생동물도 쉬러가고 현란하게 빛나던 수평선이 모네의 황혼으로 바뀌는 시간에 강에 나갔다가 황금색 빛을 받으며 다시 선착장으로 노를 저었고, 그때쯤 다른 보트들은 반딧불이처럼 물위를 오가곤 했다. - P152

이 사고가 남긴 껄끄러운 교훈과는 별개로, 그날 오후 내가캐럴라인에게 들려주었던 사고의 한순간은 몸의 상처가 모두 아물고 차를 바꾼 뒤로도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몸이공중에 떠올랐을 때 뇌리를 스치던 생각. 위기의 복판에서 세상은 맹렬한 총천연색을 띤다. 허공에 들린 몸이 그리던 선명한 포물선, 평소보다 50센티미터 정도 높아졌던 내 시선이십 년이 지나도록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지만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허공을 가르며 느꼈던 분노, 내 영역을 침범당했다는감각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감히 몸과 마음이 동시에 분노에휩싸였다. 나는 지금 한창 생의 한가운데 있는데, 이 스토리라인을 위해 몇 년을 공들여왔기에 나는 노여움이 북받쳤다. 그리고 아직 이대로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 P167

"환상을 한 겹 벗기면 악몽이 보인다." 이것은 캐럴라인이좋아했던 문구로, 본래 우리 둘과 가까운 한 친구가 꿈꾸던삶을 좇아 타국에 갔다가 결국 불행의 덫에 빠지게 된 이야기를 하다 나온 말이다. 그뒤로 이 말은 다른 어딘가에서 더나은 직업이나 파트너를 갖고, 혹은 더 나은 내면으로 살아가는, 겉보기에 완벽한 삶을 총칭하는 우리만의 암호가 되었다.
"우리가 왜 여기 사는 거지?" 내가 종종 (겨울철이나 길이 막히는 날, 혹은 운수 나쁜 날) 이렇게 푸념하면 캐럴라인은 "프레시폰드와 스타벅스가 있어서"라고 지체 없이 응수하곤 했다. - P170

아직 스타벅스가 미국의 거리 모퉁이마다 들어서기 전이긴했지만, 캐럴라인의 대답은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는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것은 길모퉁이의 까칠한 시인일 수도, 해질 무렵 강일 수도, 우리 이름을 아는 정육코너 점원일 수도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사는 것은 서로가 있어서였고, 반경 30킬로미터 거리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있어서였다.
사람들이 현재 사는 곳을 떠나지 않는 타당한 이유가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밀밭이나 바다의 풍경이필요하고, 폭우의 내음이나 도시의 소리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혹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 P170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거의 포기상태였던 5월, 꽃들이 흐드러진 어느 날에 매물공지를 보았다. 목련이 줄지어 늘어선 케임브리지 어느 거리의 비늘판으로 외벽을 두른 허술한1920 년대 주택 공간 절반을 판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집 크기도 작은데다 주인이 벽을 겨자색으로 칠해놓고 식당에는 빨간 벨벳커튼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이런 건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집안에 들어가보기도 전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긴 진입로를 내려다보는 우뚝솟은 단풍나무들, 그리고 그 안쪽으로 층층나무와 라일락과키가 무려 20 미터에 가까운 개버즘단풍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아늑한 도심 속 정원이었다. 뉴잉글랜드에서 이십 년을 살았어도 여전히 텍사스 사람인 나는 땅 위에 있는 것보다 땅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나는 나무들을 택하기로 했다. - P175

11월 초 캐럴라인의 생일날, 나는 새집으로 이사했다. 아침에 그녀에게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클레먼타인도 맡겨놓은뒤 나는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층계를 오르내리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평상시라면 숨막히도록 우수에 젖었을 뉴잉글랜드의 가을이 역사의 비극으로 뒤집히고 빛을 잃었다.
이웃의 누군가는 자살을 했다. 세계무역센터에서 약혼자를잃은 여성이었다. 친구의 친구는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다고했다. 모두가 열 손가락으로 다 꼽지 못할 만큼 이런 사연들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사연이 재앙의 동심원 안에 있었고,
조목조목 애달픈 조각들이 트라우마와상실 사이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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