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가득 부풀어오른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갑자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검은 경계선을 굳게 지킨 채 떨어져 있다.


...... 마침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오랫동안 익혀 이젠 내 것이나 다름없어진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를 빠져나왔지요. 누군가와 몸이 가까워질 때마다 실례합니다, 라고 독일어로 말하고 싶었어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 싶었어요. 입국장을 빠져나온 순간 깨달았어요. 가족이며 친구들을 마중 나온 한국 사람들의 사이를, 어깨로 헤치며 나아가면서...... 이제야 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겐 웃거나 인사하지 않는 문화 속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 P170

토할 것 같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수개월 전 그녀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여러 날 동안토한 적이 있었다. 재판에 패해 아이를 잃은 직후였다. 일주일 만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를 가까스로 만들어준 뒤 그녀는 저녁 내내 양배추만 먹었다. 믹서기에갈아 먹고, 냄비에 쪄서 먹었다. 그것 말고는 속이 견뎌낼 수 있는것이 없었다.
그러다 엄마 토끼 되겠다. 아이가 말했다. 온몸이 초록색 되겠어. 그녀는 아이와 함께 웃고는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토했다. 위산으로 시어진 입을 헹구고 나와 아이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토끼는 초록색이 되지 않는다니? 풀만 먹는데, 아이가 대답했다. 그거야, 토끼는 당근도 먹으니까. 구역질을 참으며 그녀는 웃었다. - P173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올리며, 그녀는 설핏 꿈에 잠기듯 해가 저물던 옛집 앞의 골목을 떠올린다. 젊은 어머니와 함께가까운 외가에 가려고 나서던 참이었다. 시장에 들러서 귤을 좀사가자. 어머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트의 지퍼를 혼자 잠그지 못해 쩔쩔매던 어린 그녀는 그 순간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주황색 감귤들을 보았다. 그것이 진짜 귤이 아니라는 사실에 정말로 보는 것이 아닌데도 그토록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른 생각을 바꿔 나무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마술같았다. 그녀의 눈이 보는 풍경은 오직 저무는 골목과 한없이 길게 펼쳐진 콘크리트 담장뿐이었는데, 그녀는 분명히 나무를 보고있었다.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자의 형상들이 거기 겹쳐졌다. 나무, 소리내어 발음하며 그녀는 혼자 웃었다. 나무, 나무, - P181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환한 봄날, 공원 벤치에 겹겹이 덮인 신문지 아래 발견된 노숙자의 시체 속에 늦은 밤의 지하철, 끈끈한 땀에 젖은 어깨들을 겹치고 각기 다른 곳을 보는 사람들의 흐릿한 눈 속에 폭우가 퍼붓는 간선도로, 끝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의 행렬 속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들로 할퀴어진 하루하루 속에. 그토록 쉽게 부스러지는 육체들 속에. 그 모든 걸 잊기 위해 주고받는 뚝뚝 끊어지는어리석은 농담들 속에,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적는 말들, 그 속에서 어느새 부풀어오른 거품들의 악취 속에.

어느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밤, 혼자 오래 있거나 몸이 아픈 뒤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고요한 말이 문득 방언처럼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화해의 증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 P186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어디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색색의우산들로 붐비는 방학식 날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버즈라이트이어가 그려진 우산을. 그 아래 보이는 아이의 반바지를무릎에 박힌 팥알만한 갈색 점을 알아본 것을 모른다. 오늘 왜 왔어. 내일이 만나는 날이잖아. 겁내는 듯 작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것을 모른다. 그 얼굴에 흘러내린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준 것을 모른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준비한 말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열었던 것을 모른다. 멀리 안 가도 돼. 아무데도 안 가고 엄마랑 있어도 돼. 같이 도망가도 돼.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어, 라고 말하기 위해. - P203

닫힌 창틀 사이로 빗소리가 파고든다. 거리의 모든 도로를 건물들을 움푹 파이게 하고 금가게 하려는 듯 세찬 소리다. 누군가신발을 끌며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다시 어디선가 문이 거칠게닫힌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 P204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것이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 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205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P213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 P278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 P279

마크 로스코와 나
ㅡ 2월의 죽음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나의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점 생명이 - P280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 P281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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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 P75

나는 서둘러 복도로 뛰어나갔어. 캄캄한 비상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았어. 그 사람이 천장의 환한 조명을벗어나는 순간 난 더이상 볼 수 없게 되니까. 나는 말과 수화로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했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냐고, 모르고 있었다고. 불편하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고. 그게 독일어 수화라는 사실을, 당연히 한국어 수화와는 다를 거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87

한 계절에 한두 벌뿐인 검은 옷을 제때 세탁해 입고, 최소한의식료품을 가까운 가게에서 장 봐오고, 최소한의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바로 치운다. 그 기본적인 일들을 하지 않는 낮시간에는 대채로 거실의 소파에 꼼짝 않고 앉아서, 키 큰 나무들의 두꺼운 밑동과 푸르른 가지들을 내다본다. 저녁이 오기 전에 집은 벌써 어두워진다. 나무들의 윤곽이 검어질 때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초록색 신호등이 금세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걷는다.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해지기 위해 걷는다. 이제 돌아가야할 집의 정적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검은 나무들과 검은 커튼과 검은 소파, 검은 레고 박스들에 눈길을 던질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격렬한 졸음에 취해, 씻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설령 악몽을 꾸더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이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 생생한 새벽시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끈덕지게 되불러 모으지 않기 위해 걷는다. - P101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없기 때문이다. - P103

무더운 칠월의 밤이다.
흑판 양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선풍기 두 대가 맹렬히 돌아가고있다. 강의실 양쪽의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 P104

연한 녹색 안경알 뒤의 담담한 눈길로 그는 그녀의 또렷한 눈을응시한다. 학생들이 유난히 집중하지 않기 때문인지, 십 분 가까이 그는 희랍 문법 대신 텍스트의 내용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 강독의 성격은 희랍어와 철학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진 것이 되었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 ㅡ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ㅡ 믿는 자신이. - P105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럼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 P115

너와 함께 내가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P135

아직 식지 않은 늦가을의 흙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들.
어질머리나게 피어오르는 이른봄의 아지랑이.

고요하고 희미한 그 기척들,
믿어본 적 없는 신의 파편들.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

안경을 벗은 채 이 침대에 누워, 모호하게 휜 저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그 세계를 생각하고 있어.
눈을 부릅뜨고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 - P136

이제 곧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다른 사물과 구별할 수 없게 되겠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얼굴들은 기억 속에 굳게 얼어붙겠지.

너라면 이 순간 나에게 거침없이 충고하겠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과장되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하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점자를 배워. 백지에 구멍을 뚫어서 시를써. 근사한 리트리버를 사귀는 법을 배워.

만일 네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로 돌아가 널 다시 만날 때 난 네 얼굴을 만져야 했을까, 내 손으로 더듬어 네 이마를, 눈꺼풀을, 콧날을, 뺨과 턱의 주름들을 읽어야 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너는 나를 욕망했으니까.
그 욕망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쳤으니까. - P139

우리 사이의 모든 걸 네 손으로 무너뜨렸으니까.
난 전속력으로, 너를 깊게 상처 입히며 도망쳤으니까.
널 원망했으니까.
네가 아닌 네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네가 아닌 너만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으니까.


그 쓸쓸한 몸은 이제 죽었니.
네 몸은 가끔 나를 기억했니.
내 몸은 지금 이 순간 네 몸을 기억해.
그 짧고 고통스러웠던 포옹을.
떨리던 네 손과 따스한 얼굴을.
눈에 고인 눈물을. - P140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고개를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들,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들이 잡히지 않는다.
몸이 없는 헛것처럼, 형체가 만져지지 않는다. - P141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물.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P142

연한 사과향의 목욕비누 냄새가 코끝으로 끼쳐온다. 차갑고 날렵한 두 손이 그의 두 겨드랑이에 끼워진다. 손들이 일으키는 대로 그는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단단히 두 발로 디디려 애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에 의지해 그는 한 발 한 발 계단을오른다. 그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붙든 팔에 힘이 실린다.
어둠의 명도가 달라진다. 계단이 끝났다는 것을, 불 켜진 현관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볼 수 있다. 희끄무레하고검은 것들의 윤곽이 보인다. 우편함으로 짐작되는 회색과 흰색의벽면, 아마도 현관문 바깥일 압도적인 어둠이 보인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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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 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ㅡ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ㅡ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 P9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P10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 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 P11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여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도 검정색이며, 커다랗고 검은 헝겊 가방에 넣어둔 목도리는 검정색 털실로 짠 것이다. 상가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 같은 그 복장 위로, 그녀의 거친 얼굴은 일부러 길게 빚은진흙상처럼 여위어 있다.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 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 P12

강단에 선 남자는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체구는 약간 작은편이고 눈썹과 인중의 선이 뚜렷하다. 감정을 자제하는 엷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다. 짙은 밤색 코르덴 재킷은 팔꿈치 부분에 밝은 갈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약간 짧은 소매 밖으로 손목이 드러나 보인다.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엷은 녹색을 넣은 두꺼운 안경알 뒤로, 남자의 눈이 여자의 꾹다문 입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신다. 그는 굳은 얼굴을 돌린다. 짧은 희랍어 문장을 빠르게 흑판에 쓴다. 악센트들을 채 찍기 전에 백묵이 두 동강나며 떨어진다. - P13

구두를 벗지 않은 채 그녀는 현관 턱에 걸터앉는다. 두툼한 회랍어 교본과 사전, 공책과 납작한 필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노란빛이 도는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린다. 어두워지자 그녀는 눈을 뜬다. 어둠 때문에 검게 보이는 가구들을, 검은 커튼을, 정적에 잠긴 검은 베란다를 본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악문다.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여전히 말라 있는 뺨을 그녀는 손등으로 닦아낸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 P26

그녀 자신이 방금 사용한 단어들의 형상을 들여다보다가, 때때로 입술을 열어 그것들을 읽을 때가 있었다. 핀에 꽂힌 육체 같은그 납작한 형상들과, 뒤늦게 그것을 읽으려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얼마나 이질적인 것인지 그녀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읽기를멈추고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베인 곳을 바로 눌러 지혈하거나, 반대로 힘껏 피를 짜내 혈관 속으로 균이 들어가는 걸 막걸막아야 할 때처럼. - P34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그때 나는 불현듯 낯선 슬픔을 느꼈는데, 방금 받은 상처나 모욕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모든 것을 못 보게 될 나이는 아직 나에게서 멀리, 충분히 떨어져있었습니다.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 P40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8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카페와 식당에서 
그녀는 스스럼없이 큰소리로 대화하거나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서건-강의할 때만 예외였다누구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른 체구였지만, 자신의 부피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어깨와 등을 웅크렸다. 그녀는 유머를 이해했고 퍽 낙천적인 미소를 가졌지만, 웃음소리만은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 P57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때로는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느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을 잃은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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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의 편지는 감정적이지 않았다. 분노의 기미조차 없었다. 그러나 구구절절,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받았고 실망했다는 암시가 담겨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방탕했던어린 시절을 극복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사랑이 그가 진지하고 점잘게 살도록 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여겼다고 했다. 그러나이제 그녀의 부모님은 단호한 입장을 취하여 파혼하라고 명하셨다. 부모님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행복한 것일 수가 없었고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던 거라고 했다. 편지 전체에서 그녀는 단 한 번 아쉬움을 드러냈는데, 그게 마틴에게는 쓰라렸다. "당신이 어느 직장에 자리를 잡고 성공하려고 노력하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었어. 당신의 예전 삶이 너무 거칠고 불규칙적이었으니까. 당신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이해할 수 있어. 당신은 자신의 본성과 일찍이 받은 훈련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나는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마틴, - P158

이 점을 기억해 줘. 우리의 관계는 단순히 실수였어. 부모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맞지 않고, 너무 늦지 않게 알게 된 걸 둘 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어. 나를 만나려고 해 봐야 소용없어." 편지 막바지에 그녀는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물론이고 우리 둘다에게 즐겁지 않은 만남이 될 거야. 나는 내가 어머니께 크나큰 고통과 걱정을 안겨 드렸다고 느끼고, 그건 사실이야. 나는 속죄하기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하며 살 거야."
그는 끝까지 읽었고, 주의 깊게, 두 번째로 다시 읽었다. 그러고 앉아서 답장을 썼다. 사회주의 집회에서 자신이 했던 발언을 간략히 개괄하고, 어느 모로 보나 그 발언은 신문에 그가 한 말로 적힌 내용과 반대임을 지적했다. 편지의 막바지에는 자신이 열렬히 사랑을 갈구하는, 신이 선택한 연인이라고 썼다. "제발 답장을 해 줘." 그는 말했다. "답장에서 한 가지 대답만 해 줘. 당신은 나를 사랑해? 그게 다야.
내 질문은 이것 하나뿐이고, 당신이 할 대답도 하나야." - P159

그녀는 소리 내어 울면서 갔다. 그녀의 무거운 몸과 꼴사나운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그의 가슴이 슬픔으로 찢어졌다. 멀어져 가는 누나를 보고 있자니, 니체주의적인 사고체계가 흔들려 기우뚱대는 듯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의 노예 계급이야 아무 문제 없지만, 그게 제 가정사일 경우에는 괜찮지만은 않았다. 강자에게 짓밟히는 노예가 있다면, 바로 제 누나 거트루드였다. 그 역설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다 감정 혹은 정서를 느끼자마자 흔들리다니, 아아, 노예의 도덕에 흔들리다니, 자신은 어지간히 훌륭한 니체주의자였다. 그가 누나에게 느끼는 연민은 사실 노예의 도덕이었다. 진정으로 강한자는 연민과 동정을 초월했다. 연민과 동정은 지하의 노예 수용소에서 생겨났고, 비좁게 욱여넣어진 비참한 약자들의 몸부림과 땀에 지나지 않았다. - P161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당신 자신의 뜻인가?" 그는 물었다.
"그래." 그녀는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신중하게 말했다. "내 뜻이야. 당신이 나를 망신스럽게 해서 나는 친구들 만나기도 부끄러워.
다들 당신 얘기를 하고 있어. 난 알아. 내가 당신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야. 당신이 나를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고, 나는 다시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친구들! 뒷말! 신문의 허위보도! 이런 것들은 절대로 사랑보다 강하지 않아! 난 당신이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밖에없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사랑하라고?" 그녀는 희미하게 말했다.
"마틴, 당신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 난 쉬운 여자가아니야"
"봤지? 누나는 당신과 어떤 인연도 맺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노먼은 소리치고 그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마틴은 그들이 지나가도록 옆으로 물러서서, 외투 호주머니 속을더듬어 거기 있을 리 없는 담배와 종이를 찾았다. - P163

북 오클랜드까지는 먼 길이었으나, 계단을 올라 제 방에 들어서고나서야 그는 그 길을 걸어왔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침대 가에 앉아막 깨어난 몽유병자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식탁 위에 있는 『기한 초과를 보고 그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서 펜을 찾았다. 그 - P163

의 천성에는 완성을 향한 논리적 충동이 있었으며, 여기 완성해야할 것이 있었다. 다른 일 때문에 미뤄져 왔으나, 이제 그 다른 일이끝났으니 그는 이 일에 전념하여 이것을 끝낼 것이다. 그다음에 뭘할지는 알지 못했다. 인생의 전환기가 끝났다는 것만 알았다. 그 기간이 다했으므로, 그는 노동자다운 자세로 마무리하려는 것뿐이었다. 미래는 궁금하지 않았다. 미래가 그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두었을지 곧 알게 될 터였다.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 어떤 것도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 P164

오래지 않아 그는 일본 식당의 단골 노릇을 그만두게 되었다. 투쟁을 포기한 바로 그때,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일이었다. 아무런 흥분 없이 그는 「천년 왕국지에서 온 두툼한 봉투를뜯어 300달러의 액수가 적힌 수표를 훑어보았고, 『모험』을 수락하고 보낸 원고료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세상에 진 빚의 총액은 전당포의 고리대를 포함해서 100달러가 채 안 됐다. 빚을 다 갚고 브리슨덴의 변호사에게 써준 100달러의 차용증서를 청산해도 100달러이상이 수중에 남았다. 그는 양복점에 정장을 주문하고 시내에서 가장 좋은 카페에서 매끼 먹었다. 여전히 마리아가 세놓은 제 작은 하숙방에서 자긴 했지만, 새 옷을 입은 그의 모습에 동네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더 이상 헛간 지붕 위나 뒷담 너머에서 그를 ‘떠돌이‘라든지 ‘부랑자‘라고 놀려대지 않았다. - P176

하와이에 대한 그의 단편 소설 『위키위키는 워런스 먼슬리에250달러에 팔렸다. 「노던 리뷰」가 그의 에세이 『미의 요람』을, 「매-킨토시 매거진이 「손금쟁이 그가 매리언에게 써준 시 - 를 가져갔다. 편집자와 독자들이 여름휴가에서 복귀해 원고들이 빠르게처리되었다. 그런데 무슨 변덕으로 그들이 2년 동안 줄기차게 거절했던 원고들을 이처럼 한꺼번에 수락하는지 마틴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원고는 이전에 한 번도 출판된 적이 없었다. 그는 오클랜드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았고, 오클랜드에서도 몇몇이 그를 악명높은 행동대원이자 사회주의자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의 상품의 이처럼 급작스러운 수락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순전히 운명의 장난질이었다. - P176

어느 날 마틴은 자기가 외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건강하고 힘이 넘쳤으나 할 일이 없었다. 글쓰기와 공부의 중단, 브리덴의 죽음, 그리고 루스와의 결별로 그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카페에서 호사스런 식사를 하고 이집트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삶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남태평양이 부르고 있었지만, 그는 미국에서의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느꼈다. 두 권의 책이 곧 출간될 것이고, 출간될지도 모를 다른 책들도 있었다. 그 책들로부터 돈이 나오면, 그는 한 자루 가득 돈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태평양으로 가져갈 것이다. 칠레 달러로 천 달러면 살 수 있는 마르케사스 제도의 한 골짜기와 만을 알고 있었다. 말굽 모양의 육지로 둘러싸인만으로부터 구름을 머리에 인 까마득한 산꼭대기까지, 내내 이어지는 골짜기는 대략 만 에이커는 되리라. - P180

마틴은 예전에 느꼈던 싸움의 전율을 다시 느끼며 싸움을 즐겼다. 하지만 즐거움은 빠르게 사라지고 그는 커다란 슬픔에 짓눌렸다. 거리낌 없고 속 편한 저 지난 시절의 친구들보다 자기는 훨씬 나이를더 먹은 ㅡ수백 살은 더 먹은ㅡ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먼 길을,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한때는 자기도 그렇게 살았건만, 이제는 싫었다. 전부 다 실망스러웠다. 그는 외계인이 되어 버렸다. 맥주 맛이 조야했듯이, 그들의 우애도 지금의 그에게는 조야하게 보였다. 그는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수천 권의 책들이 그들과 그 사이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가 그자신을 추방했던 것이다. 지식의 광대한 영토로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나머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그는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어디에서도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패거 - P191

리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 자신의 가족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부르주아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그가 매우 존경하는 옆자리의 아가씨는 그도, 그가 그녀에게 바친 영예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슬픔은 씁쓸함으로 물들어 갔다.
- P192

한 가지는 분명했다. 모스 가 사람들은 그라는 사람 자체나 그의작품 때문에 그를 만나려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금 그들이 그를-원하는 이유는 그라는 사람 자체나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닌, 그가 가진 명예 때문이었다. 그가 발군의 인물이고, 왜 아니겠는가? - 또수십만 달러쯤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부르주아 사회가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이니, 어떻게 그렇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있었다. 그런 평가를 경멸했다. 그 자신으로서, 혹은 그 자신의 표현인 자신의 작품으로 평가받기를 바랐다. 리지가그렇게 그를 평가했다. 그녀는 그의 작품조차 개의치 않았다. 그만을, 그라는 사람만을 높이 평가했다. 배관공 짐과 옛 패거리도 그를 그런 식으로 평가했다. 그가 그들과 어울리던 시절에 이 점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셸 마운트 공원의 일요 야유회에서도 입증되었다. 그의 작품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좋아하고 싸움마저 마다하지 않고 지키려 한 대상은 자기들 중 하나이며 꽤 괜찮은 녀석인 마틴 에덴, 그냥 그였다.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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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경우가 달라.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소설들은 내가 하루 종일 문체와 씨름하고 나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써내는 거야. 그러나 기자라는 직업은 아침부터 밤까지 기사만 써내야 하는 일이고 삶 전체를 바쳐야 하는 일이야. 소용돌이 같은 삶, 과거도 미래도 없이 당장의 그 순간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해. 문체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보고체만 써야 하는데, 그건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 내 문체가 막 형성되려는 지금 기자가 된다는 건 문학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지금도 신문에 실리는 가벼운 소설 한 편마다, 가벼운 소설의 단어 하나마다, 나 자신과 나 자신에 대한 존중과, 나의 문학에 대한 존중에 위배돼. 정말 구역질이 난다고. 나는 죄를 지었어. 그래서 나는 그것들이 팔리지 않게 되자 속으로 기뻤어. 옷을 전당포에 맡겨야 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연애시 연작』을 쓸 때의 기쁨이란! 지고의 창조적 기쁨이란! 만사가 그걸로 보상되고도 남았어." - P67

마틴은 루스가 창조적 기쁨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창조적 기쁨‘이란 말을 종종 썼다. 그는 그 말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처음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에 대해 읽었고,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따는 과정에서 그것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그녀는 독창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았으며, 그녀가 문화에 대해 하는 말이란 다른 사람이 어디선가 듣고 되풀이한 말을 또 되풀이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바다 서정시를 손 본 편집자가 옳지 않았을까?" 그녀는 의문을 제기했다. "생각해 봐, 편집자는 자격을 검증받았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편집자가 되지 못했을 테니까." - P67

"그 말은 기존 체제를 지속시키는 논리와 같아." 편집자라는 족속에 대한 분노로 그는 열변을 토했다. "이미 있는 것이 옳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중에 최상이라는 논리.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존재하기에 적합하다는 증명이 충분히 된다는 논리. 보통 사람들은 현재의 조건에서 그럴뿐더러 모든 조건에서도 그럴 거라고 믿어. 그런 헛소리를 믿는 이유는 물론 무지 탓이야. 그들의 무지는 바이닝거 (오스트리아의 사상가 - 옮긴이)가 묘사한 몽매한 상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그런생각 없는 사람들이 진짜 생각하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목줄을틀어쥐고 있단 말이야."
그는 자신이 루스가 이해하기에는 무리인 얘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멈추었다. - P68

물론 순전히 허튼소리지. 지나치게 신경 쓰고 정신을 혹사해서 생기는 증상이야. 요점은 이거야. 내가 왜 이렇게 지내왔을까? 자기를위해서야. 수련 기간을 단축하고 성공을 앞당기기 위해서야. 이제 나는 수련을 마쳤어. 내 장비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아. 맹세컨대, 나는 매달 평범한 대학생이 일 년에 걸쳐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이 배워. 정말이지 나는 알아. 하지만 자기가 이해해 주기를 내가 이토록절실히 바라지 않는다면 얘기하지 않았을 거야. 자랑하는 게 아니라고 읽은 책을 보면 결과를 알 수 있지. 지금 시점에서 자기의 남동생들은 나에 비하면 무지한 야만인들이야. 그들이 자는 동안 나는 책을 비틀어 지혜를 짜냈어. 예전에는 유명해지기를 원했지만, 이제는 별로 개의치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음식보다, 옷보다, 인정받는 것보다 나는 네게 굶주려 있어. 내 꿈은 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수억 년쯤 잠자는 거고, 그 꿈은 남은 한 해가 가기 전에 이루어질 거야." - P75

"그것들은 염병에 걸려 버리라지!" 마틴이 브리슨덴의 작품을 잡지사들에게 보내 보겠다고 자청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들은 내버려 두고, 자네는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사랑하게. 배를 타고 자네의 바다로 돌아가. 그게 내가 자네에게 하는 충고야, 마틴 에덴. 이 병들고 썩은 도시에서 뭘 바라나? 자네는 잡지계의 천한 요구에 맞춰 아름다움을 팔아 보려는 헛수고로 날마다 제 목을 조르고 있어.
전에 자네가 인용한 구절이 뭐였더라? 아, 그래, ‘인간, 최신 하루살이 자네, 최신 하루살이는 명성을 얻어서 뭘 하려는가? 명성은 자네에게 독이 될 거야. 그따위 이유식을 먹고 크기에는 자네가 너무 단순하고, 너무 원초적이고, 너무 합리적이라고 나는 믿네. 자네가 시한 줄도 잡지에 팔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네가 섬겨야 할 단 하나의 주인님은 아름다움이야. 아름다움을 섬기고 대중은 무시해 버려! 성공! 헨리의 유령」을 능가하는 자네의 스티븐슨에 관한 소네트, 『연애시 연작』, 그리고 바다에 관한 시들이 성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면, 성공이란 게 대체 뭔가? 자네의 기쁨은 글을 써서 성공하는 데있지 않고, 글을 쓰는 데에 있어. 자네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지. 난 알아. 자네도 알아. 아름다움이 자네를 아프게 해. 아름다움은 자네 - P94

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이고, 치유되지 않을 상처이며, 화염의 칼이야.
자네가 왜 잡지사와 흥정해야 하지? 아름다움을 자네의 목적으로삼아. 왜 자네가 아름다움을 거푸집에 넣어 금화를 찍어 내야 해? 어쨌거나 자네는 할 수도 없어. 그러니 내가 흥분할 필요도 없지. 잡지를 천 년 동안 읽어 봤자 키츠의 시 한 줄 만한 값어치도 없어. 명성과 돈은 내버려 두고, 내일 당장 선원 계약을 해서 바다로 나가라고."
"명성이 아니고,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마틴은 웃었다. "당신의 우주에는 사랑이 있을 자리가 없는 모양이죠? 내 우주에서 아름다움은 사랑의 시녀죠."
브리슨덴은 연민과 동경이 담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참 젊네, 마틴, 참 젊어. 자네는 높이 날아오를 텐데, 날개가 가장 섬세한 실로 짜여 있고 가장 선명한 염료로 물들여져 있지. 그걸 그을게 하지 마. 그런데 물론 자네의 날개는 이미 그을었어. 『연애시 연작』을 쓰려면 찬미의 대상인 어떤 여자가 있었을 테고, 그게 그 시에서 아쉬운 점이야." - P95

이제 내 목을 졸라 봐야 소용없어. 난 할 말을 할 거니까. 명백히 이번은 자네의 풋사랑이야. 그런데 아름다움을 위해서, 다음번에는 보다 나은 취향을 보여 줘. 부르주아의 딸과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그런 여자애들은 내버려 두라고. 삶을 비웃고 죽음을 야유하며, 사랑을 마다하는 법 없는 대단한 여자,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은 여자를 고르라고. 그런 여자들이 있고, 그들도 부르주아의 온실 같은 삶에서 배출된 여느 겁쟁이만큼 기꺼이 자네를 사랑할 걸세."
"겁쟁이라고요?" 마틴은 항의했다.
"바로 그거야, 겁쟁이. 자기들에게 지껄여진 오밀조밀한 도덕을 지껄이면서, 삶을 제대로 살기는 겁내지. 그들은 자네를 사랑하겠지만,
마트, 자기들의 오밀조밀한 도덕을 더 사랑할 거야. 자네가 원하는것은 삶의 멋진 방기, 위대하고 자유로운 영혼, 불타는 나비야. 조그맣고 칙칙한 나방이 아니지. 오, 자네는 그 멋진 나비들도 역시 지겨워하게 될 거야. 불행히도 그때까지 살아 있게 된다면, 여자라면 다지겨워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자네는 그때까지 살지 못할 거야. 배를 타고 바다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그래서 이 역병이 창궐하는 도시들을 배회하다 뼛속 깊이 썩어 문드러져, 죽어 버릴 거야." - P97

그러나 브리스덴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금욕적인 얼굴에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놓고 쾌락을 탐닉했다. 그는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삶의 모든 방식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그러면서도, 죽어 가면서 삶을 철저히 사랑했다. 그는 살려는 광기, 짜릿한 흥분을 느끼려는 광기, 그 자신이 언젠가 썼듯이 ‘내가 태어난 우주 먼지 속, 나의 작은 공간에서 꿈틀거리려는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새로운 짜릿함과 새로운 감각을 추구하여 마약에 손대고 여러 이상한 짓을 한 적도 있었다. 마틴에게 말한 바로는, 한번은 갈증이 해소될 때의 그 격렬한 쾌감을 경험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3일이나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자인지, 마틴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에게 과거는 없고 미래는 임박한 죽음이며, 현재는 삶의 모진 열병이었다. - P98

추운 방에서 루스는 몸이 떨리고 방으로 맞아들이는 그의 손이 너무 차가운 데에 이미 충격을 받았건만, 그의 얼굴은 창작열로 환히 빛났다. 그의 낭독을 그녀는 경청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따금 못마땅한 기색이 비칠 뿐이었으나, 그는 끝까지 읽고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어때?"
"나.... 나는 모르겠어." 그녀는 답했다. "그게 과연... 당신은 그게이팔리리라 생각해?"
"안 팔리겠지."라는 고백이었다. "잡지에 실리기에는 너무 강해. 하지만 이건 진실이야, 맹세코 진실이야."
"팔리지 않을 줄 알면서 왜 그런 걸 꾸역꾸역 쓰는 거야?" 그녀는가차 없이 따지고 들었다. "당신은 먹고살기 위해 글을 쓰는 거잖아, 안 그래?"
"그래, 그렇지. 그런데 이 처절한 이야기가 나를 낚았어. 나는 쓰지 않을 수가 없었어. 나더러 써야만 한다고 했어."
"하지만 그 주인공, 그 위키위키를 왜 그렇게 거친 인물로 만들었어? 독자들에게 분명히 거슬릴 거고, 그러니 편집자들이 당신 작품을 거절하는 거야." - P108

"왜냐하면 진짜 위키위키는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그건 좋은 취향이 아니야."
"인생이지." 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그게 현실이야. 그게 진실이라고. 나는 인생을 내가 본 대로 써야만 해."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았고, 둘은 거북한 상태로 잠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가 그녀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는 탓이었고, 그녀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그녀의 지평 너머의 너무나 거대한 존재인 탓이었다.
"아, 「트랜스콘티넨탈」에서 원고료를 받아 냈어." 그는 보다 쉬운 화제로 말을 돌렸다. 지난번에 본 구레나룻의 삼중창단과 그들이 4달러 90센트와 배표를 물어내던 장면이 떠올라 그는 낄낄댔다.
"그럼 당신은 올 거네!" 그녀는 기쁘게 외쳤다. "사실 나는 그걸 알려고 왔어" - P109

"오다니?" 그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어디를?"
"내일 저녁 만찬 말이야. 그 돈을 받아 내면 정장을 찾겠다고 당신이 말했잖아."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는 순순히 말했다. "오늘 아침 시청의 단속원이 마리아의 암소 두 마리와 송아지를 끌고 갔어. 그런데 마리아는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내가 그 암소와 송아지를 찾아 줘야 했어. ‘트랜스콘티넨탈」에서 받은 5달러, 종소리」의 원고료는 단속원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린 거야."
"그럼 당신은 오지 않겠다는 거야?"
그는 제가 걸친 옷을 내려다보았다. - P109

"갈 수가 없다고."
실망과 질책의 눈물이 그녀의 푸른 눈에서 반짝였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추수감사절에는 당신이 나와 함께 델모니코 레스토랑에서저녁 식사를 하게 될 거야." 그는 기운 내서 말했다. "아니면 런던이나 파리, 당신이 바라는 어디에서건. 내가 장담할게."
"며칠 전 신문에서 읽었어." 그녀는 불쑥 밝혔다. "이 지역에서 몇명이 철도우편국 발령을 받았다. 당신은 그 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했잖아?"
그는 제게 소집장이 왔으나 거절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고, 지금도 믿어." 그는 결론지었다. "일 년 후 나는 철도우편국 직원 열댓 명의 월급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거야. 자기는 기다려만 봐." - P110

"오." 그가 말을 마치자 그녀가 한 말은 이게 다였다. 그녀는 일어나서 장갑을 끼었다. "난 가야 해, 마틴. 아서가 기다리고 있어."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으나, 그녀는 수동적이기만 했다. 몸에 긴장이 없었고, 팔은 그를 감싸지 않았으며, 그의 입술을 맞는 그녀의 입술도 여느 때와 달리 마주 누르지 않았다.
대문간에서 돌아서면서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화가 났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단속원이 마리아의 소를 채간 것은 불운한 사건이었다. 운명의 일격이었다. 그 일로 누구도 비난받아서는 안되었다. 그는 그 일에 대해 자기가 달리 처신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래, 맞아, 자기가 약간은 비난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다음에 들었다. - P110

그러나 그보다 그녀를 더 속상하게 한 것은 그의긍지와 자존심의 결여였다.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그녀는 그 일을 통해 그가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씻어 내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 사실 자체로 낙인이건만 부끄러움도 없이온 세상에 드러내고 다니다니, 선을 넘어선 행동이었다. 그녀와 마틴의 약혼은 비밀로 지켜졌으나 둘의 오랜 교제에 대한 뒷말이 없지않았으며, 그 제과점에는 그녀의 연인과 그를 따르는 무리를 암암리에 힐끗거리는 몇몇 지인들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마틴과 같은 넓은포용력이 없었고 환경을 뛰어넘을 능력도 없었다. 그녀는 깊이 상처받았으며, 수치심에 예민한 기질이 발동했다. 그리하여 그날 늦게 그녀를 찾아간 마틴은 선물을 상의 호주머니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보다 적당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격하게 분노의 눈물을 쏟아 내는 루스의 모습이 그로서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그녀가 고통받는 광경은 그로 하여금 자기가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 인정하게 했지만, 그의 영혼은 그 이유도 경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자기가 아는 사람들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결코 해 본 적이 없었으며, 크리스마스를맞아 마리아의 가족에게 한턱내는 것이 루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을 듯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나니 그녀의 관점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는 그것을 최고로 훌륭한 여자를 포함한 모든 여자에게 다 있는 타고난 연약함으로 여겼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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