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이제 묻히고 싶어했던 도시 제네바에서 그의 임종을 지켰다.
한 연구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 이라고 썼다.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ㅡ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식 글쓰기 사이에 가로놓인 칼ㅡ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 P9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스위스를 여행한 적이 있지만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의무덤을 굳이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보았다면 무한히 황홀해했을 성 갈렌의 도서관을 둘러보았고(천년 된 도서관의 마루를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들에게 덧신게 했던 털슬리퍼의 까슬한 감촉이 떠오른다), 루체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저물녘까지얼음 덮인 알프스의 협곡 사이를 떠다녔다.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P10

여자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이마를 찡그리며 흑판을 올려다본다.
자, 읽어봐요.
알이 두꺼운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인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여자는 입술을 벌렸다 다문다. 숨을 멈췄다 깊이 들이마신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겠다는 듯, 남자가 흑판 쪽으로 한 발 물러서며 말한다.
읽어요.
여자의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여자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는 순간 자신이 다른 - P11

장소로 옮겨져 있기를 바라는 듯이.
흰 백묵 자국이 깊게 박힌 손가락으로 남자는 안경을 고쳐쓴다.
어서 말해요.

여자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웨터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킷도 검정색이며, 커다랗고 검은 헝겊 가방에 넣어둔 목도리는 검정색 털실로 짠 것이다. 상가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 같은 그 복장 위로, 그녀의 거친 얼굴은 일부러 길게 빚은진흙상처럼 여위어 있다.
젊지도,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은 여자다. 총명한 눈빛을 가졌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경련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기 어렵다. 마치 세상으로부터 검은 옷 속으로 피신하려는 듯 어깨와 등은 비스듬히 굽었고, 손톱들은 지독할 만큼 바싹 깎여 있다. 왼쪽 손목에는 머리칼을 묶는 흑자주색 벨벳 밴드가 둘러져 있는데, 여자의 몸에 걸쳐진 것들 중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것이다. - P12

강단에 선 남자는 삼십대 중후반으로 보인다. 체구는 약간 작은편이고 눈썹과 인중의 선이 뚜렷하다. 감정을 자제하는 엷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다. 짙은 밤색 코르덴 재킷은 팔꿈치 부분에 밝은 갈색 가죽이 덧대어져 있다. 약간 짧은 소매 밖으로 손목이 드러나 보인다. 그의 왼쪽 눈시울께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가늘고희끗한 곡선으로 그어진 흉터를 여자는 묵묵히 올려다본다. 첫 시간에 그것을 보았을 때, 오래전 눈물이 흘렀던 곳을 표시한 고지도 같다고 생각했었다.
엷은 녹색을 넣은 두꺼운 안경알 뒤로, 남자의 눈이 여자의 꾹다문 입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신다. 그는 굳은 얼굴을 돌린다. 짧은 희랍어 문장을 빠르게 흑판에 쓴다. 악센트들을 채 찍기 전에 백묵이 두 동강나며 떨어진다. - P13

구두를 벗지 않은 채 그녀는 현관 턱에 걸터앉는다. 두툼한 회랍어 교본과 사전, 공책과 납작한 필통이 들어 있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노란빛이 도는 센서등이 꺼질 때까지 눈을 감고 기다린다. 어두워지자 그녀는 눈을 뜬다. 어둠 때문에 검게 보이는 가구들을, 검은 커튼을, 정적에 잠긴 검은 베란다를 본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가 이내 악문다.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춘 승강기의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여전히 말라 있는 뺨을 그녀는 손등으로 닦아낸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 P26

그녀 자신이 방금 사용한 단어들의 형상을 들여다보다가, 때때로 입술을 열어 그것들을 읽을 때가 있었다. 핀에 꽂힌 육체 같은그 납작한 형상들과, 뒤늦게 그것을 읽으려 하는 자신의 목소리가얼마나 이질적인 것인지 그녀는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읽기를멈추고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베인 곳을 바로 눌러 지혈하거나, 반대로 힘껏 피를 짜내 혈관 속으로 균이 들어가는 걸 막걸막아야 할 때처럼. - P34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그때 나는 불현듯 낯선 슬픔을 느꼈는데, 방금 받은 상처나 모욕감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나 좌절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모든 것을 못 보게 될 나이는 아직 나에게서 멀리, 충분히 떨어져있었습니다. 쓰라리고도 달콤한 그 슬픔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는 당신의 진지한 옆얼굴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고 있을것 같은 입술에서, 그토록 또렷한 검은 눈동자들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 P40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8

말할 수 있었을 때, 그녀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이었다.
성대가 발달하지 않았거나 폐활량이 문제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간을 차지하는 것을 싫어했다. 누구나 꼭 자신의 몸의부피만큼 물리적인 공간을 점유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훨씬 넓게퍼진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넓게 퍼뜨리고 싶지 않았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카페와 식당에서 
그녀는 스스럼없이 큰소리로 대화하거나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지 않았다. 어느 자리에서건-강의할 때만 예외였다누구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른 체구였지만, 자신의 부피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어깨와 등을 웅크렸다. 그녀는 유머를 이해했고 퍽 낙천적인 미소를 가졌지만, 웃음소리만은 낮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다. - P57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동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말을 잃기 직전,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활달한 
다변가였다. 어느때보다 오래 글을 쓰지 못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이 쓴 문장이 침묵속에서 일으키는 소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때로는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두 단어의 배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구토의 기미를느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말을 잃은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었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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