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력이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나간다.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번역하지 않는다.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 P75
나는 서둘러 복도로 뛰어나갔어. 캄캄한 비상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았어. 그 사람이 천장의 환한 조명을벗어나는 순간 난 더이상 볼 수 없게 되니까. 나는 말과 수화로 동시에 미안하다고 말했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냐고, 모르고 있었다고. 불편하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다고. 그게 독일어 수화라는 사실을, 당연히 한국어 수화와는 다를 거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지만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은 물끄러미 나를 건너다보았어. 그때 내가 느낀 이상한 절망을 너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여자의 침묵에는 두려운 데가 어딘가 지독한 데가 있었어. 오래전, 죽은 삐비의 몸을 하얀 가제수건에 싸려고 들어올렸을 때……우리가 얼어붙은 숟가락으로 파낸 작은 구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정적 같은. 상상할 수 있겠니.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그런 침묵을 본 건 처음이었어. - P87
한 계절에 한두 벌뿐인 검은 옷을 제때 세탁해 입고, 최소한의식료품을 가까운 가게에서 장 봐오고, 최소한의 음식을 만들어 먹은 뒤 바로 치운다. 그 기본적인 일들을 하지 않는 낮시간에는 대채로 거실의 소파에 꼼짝 않고 앉아서, 키 큰 나무들의 두꺼운 밑동과 푸르른 가지들을 내다본다. 저녁이 오기 전에 집은 벌써 어두워진다. 나무들의 윤곽이 검어질 때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어둑어둑 저물어가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초록색 신호등이 금세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계속 걷는다. 더 견딜 수 없을 만큼 피로해지기 위해 걷는다. 이제 돌아가야할 집의 정적을 느낄 수 없게 될 때까지, 검은 나무들과 검은 커튼과 검은 소파, 검은 레고 박스들에 눈길을 던질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걷는다. 격렬한 졸음에 취해, 씻지도 이불을 덮지도 않고 소파에 모로 누워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설령 악몽을 꾸더라도 중간에 잠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까지 뜬눈으로 뒤척이지 않기 위해 걷는다. 그 생생한 새벽시간, 사금파리 같은 기억들을 끈덕지게 되불러 모으지 않기 위해 걷는다. - P101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없기 때문이다. - P103
무더운 칠월의 밤이다. 흑판 양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선풍기 두 대가 맹렬히 돌아가고있다. 강의실 양쪽의 창문들은 모두 활짝 열려 있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 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플라톤은. - P104
연한 녹색 안경알 뒤의 담담한 눈길로 그는 그녀의 또렷한 눈을응시한다. 학생들이 유난히 집중하지 않기 때문인지, 십 분 가까이 그는 희랍 문법 대신 텍스트의 내용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 강독의 성격은 희랍어와 철학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진 것이 되었다.
아름다운 사물들은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 ㅡ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ㅡ 믿는 자신이. - P105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럼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 P115
너와 함께 내가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 어떤 질문과 대답 어떤 인용과 암시와 논증보다 절실하게 너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은어쩌면 정작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P135
아직 식지 않은 늦가을의 흙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송이들. 어질머리나게 피어오르는 이른봄의 아지랑이.
고요하고 희미한 그 기척들, 믿어본 적 없는 신의 파편들.
태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 이데아.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
안경을 벗은 채 이 침대에 누워, 모호하게 휜 저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그 세계를 생각하고 있어. 눈을 부릅뜨고 그걸 들여다보고 있어. - P136
이제 곧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다른 사물과 구별할 수 없게 되겠지. 내가 기억하는 모든 얼굴들은 기억 속에 굳게 얼어붙겠지.
너라면 이 순간 나에게 거침없이 충고하겠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과장되게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하겠지. 그게 어쨌다는 거지? 점자를 배워. 백지에 구멍을 뚫어서 시를써. 근사한 리트리버를 사귀는 법을 배워.
만일 네가 죽지 않았다면, 독일로 돌아가 널 다시 만날 때 난 네 얼굴을 만져야 했을까, 내 손으로 더듬어 네 이마를, 눈꺼풀을, 콧날을, 뺨과 턱의 주름들을 읽어야 했을까.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을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너는 나를 욕망했으니까. 그 욕망을 견딜 수 없어서 몸부림쳤으니까. - P139
우리 사이의 모든 걸 네 손으로 무너뜨렸으니까. 난 전속력으로, 너를 깊게 상처 입히며 도망쳤으니까. 널 원망했으니까. 네가 아닌 네가 보고 싶어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까. 네가 아닌 너만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으니까.
그 쓸쓸한 몸은 이제 죽었니. 네 몸은 가끔 나를 기억했니. 내 몸은 지금 이 순간 네 몸을 기억해. 그 짧고 고통스러웠던 포옹을. 떨리던 네 손과 따스한 얼굴을. 눈에 고인 눈물을. - P140
그녀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고개를 더 수그린다. 단어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입술을 잃은 단어들, 이뿌리와 혀를 잃은 단어들, 목구멍과 숨을 잃은 단어들이 잡히지 않는다. 몸이 없는 헛것처럼, 형체가 만져지지 않는다. - P141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물.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P142
연한 사과향의 목욕비누 냄새가 코끝으로 끼쳐온다. 차갑고 날렵한 두 손이 그의 두 겨드랑이에 끼워진다. 손들이 일으키는 대로 그는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바닥을 단단히 두 발로 디디려 애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에 의지해 그는 한 발 한 발 계단을오른다. 그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붙든 팔에 힘이 실린다. 어둠의 명도가 달라진다. 계단이 끝났다는 것을, 불 켜진 현관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볼 수 있다. 희끄무레하고검은 것들의 윤곽이 보인다. 우편함으로 짐작되는 회색과 흰색의벽면, 아마도 현관문 바깥일 압도적인 어둠이 보인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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