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 가득 부풀어오른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갑자기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 없이, 검은 경계선을 굳게 지킨 채 떨어져 있다.


...... 마침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오랫동안 익혀 이젠 내 것이나 다름없어진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를 빠져나왔지요. 누군가와 몸이 가까워질 때마다 실례합니다, 라고 독일어로 말하고 싶었어요.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고 싶었어요. 입국장을 빠져나온 순간 깨달았어요. 가족이며 친구들을 마중 나온 한국 사람들의 사이를, 어깨로 헤치며 나아가면서...... 이제야 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겐 웃거나 인사하지 않는 문화 속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 P170

토할 것 같아.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수개월 전 그녀는 한 시간에서 두 시간 간격으로 여러 날 동안토한 적이 있었다. 재판에 패해 아이를 잃은 직후였다. 일주일 만에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를 가까스로 만들어준 뒤 그녀는 저녁 내내 양배추만 먹었다. 믹서기에갈아 먹고, 냄비에 쪄서 먹었다. 그것 말고는 속이 견뎌낼 수 있는것이 없었다.
그러다 엄마 토끼 되겠다. 아이가 말했다. 온몸이 초록색 되겠어. 그녀는 아이와 함께 웃고는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토했다. 위산으로 시어진 입을 헹구고 나와 아이에게 장난스레 물었다. 그런데 왜 토끼는 초록색이 되지 않는다니? 풀만 먹는데, 아이가 대답했다. 그거야, 토끼는 당근도 먹으니까. 구역질을 참으며 그녀는 웃었다. - P173

무거운 눈꺼풀을 가까스로 치켜올리며, 그녀는 설핏 꿈에 잠기듯 해가 저물던 옛집 앞의 골목을 떠올린다. 젊은 어머니와 함께가까운 외가에 가려고 나서던 참이었다. 시장에 들러서 귤을 좀사가자. 어머니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코트의 지퍼를 혼자 잠그지 못해 쩔쩔매던 어린 그녀는 그 순간 문득 눈앞에 떠오르는주황색 감귤들을 보았다. 그것이 진짜 귤이 아니라는 사실에 정말로 보는 것이 아닌데도 그토록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얼른 생각을 바꿔 나무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마술같았다. 그녀의 눈이 보는 풍경은 오직 저무는 골목과 한없이 길게 펼쳐진 콘크리트 담장뿐이었는데, 그녀는 분명히 나무를 보고있었다.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자의 형상들이 거기 겹쳐졌다. 나무, 소리내어 발음하며 그녀는 혼자 웃었다. 나무, 나무, - P181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환한 봄날, 공원 벤치에 겹겹이 덮인 신문지 아래 발견된 노숙자의 시체 속에 늦은 밤의 지하철, 끈끈한 땀에 젖은 어깨들을 겹치고 각기 다른 곳을 보는 사람들의 흐릿한 눈 속에 폭우가 퍼붓는 간선도로, 끝없이 붉은 미등을 켠 차들의 행렬 속에 수천 개의 스케이트 날들로 할퀴어진 하루하루 속에. 그토록 쉽게 부스러지는 육체들 속에. 그 모든 걸 잊기 위해 주고받는 뚝뚝 끊어지는어리석은 농담들 속에, 그 어떤 것도 잊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적는 말들, 그 속에서 어느새 부풀어오른 거품들의 악취 속에.

어느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밤, 혼자 오래 있거나 몸이 아픈 뒤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고요한 말이 문득 방언처럼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그것이 화해의 증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 P186

어둠을 향해 두 눈을 뜬 채 그는 아직 그녀의 어깨를 안고 있다. 틀려서는 안 되는 무게를 재는 것 같다고 느낀다. 틀려버리고 말것 같다고 느낀다.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고 느낀다.
그녀가 이곳에 오기 직전에 어디 있었는지 그는 모른다. 색색의우산들로 붐비는 방학식 날의 학교 앞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버즈라이트이어가 그려진 우산을. 그 아래 보이는 아이의 반바지를무릎에 박힌 팥알만한 갈색 점을 알아본 것을 모른다. 오늘 왜 왔어. 내일이 만나는 날이잖아. 겁내는 듯 작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본 것을 모른다. 그 얼굴에 흘러내린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닦아준 것을 모른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준비한 말을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열었던 것을 모른다. 멀리 안 가도 돼. 아무데도 안 가고 엄마랑 있어도 돼. 같이 도망가도 돼.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어, 라고 말하기 위해. - P203

닫힌 창틀 사이로 빗소리가 파고든다. 거리의 모든 도로를 건물들을 움푹 파이게 하고 금가게 하려는 듯 세찬 소리다. 누군가신발을 끌며 층계를 내려가고 있다. 다시 어디선가 문이 거칠게닫힌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그녀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들의 갑옷을 모른다. 그녀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비친 눈에 그녀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그녀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 P204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것이다.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 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205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다.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축인다.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이 조용히, 빠르게 뒤치럭거린다.
두 눈꺼풀이 떨린다. 곤충들이 세차게 맞비비는 겹날개처럼.
금세 다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
끈질기게, 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 P213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 P278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 P279

마크 로스코와 나
ㅡ 2월의 죽음



미리 밝혀둘 것도 없이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는 1903년 9월 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 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 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그의 죽음과 내 출생 사이에 그어진
9개월여의 시간을
다만
가끔 생각한다

작업실에 딸린 부엌에서
그가 양쪽 손목을 칼로 긋던 새벽
의 며칠 안팎에
나의 부모는 몸을 섞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점 생명이 - P280

따뜻한 자궁에 맺혔을 것이다
늦겨울 뉴욕의 묘지에서
그의 몸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나는 아직 심장도 뛰지 않는
점 하나로
언어를 모르고
빛도 모르고
눈물도 모르며
연붉은 자궁 속에
맺혀 있었을 것이다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이
버티고 - P281

버텨 마침내 아물어갈 무렵

반 녹아 더 차가운 흙 속
그의 손이 아직 썩지 않았을 때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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