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그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그 운동으로 보아 이런생각이 너무도 그럴싸하므로 플라톤이 그렇게 확언했고, 우리시대의 많은 이들도 그것을 확신하거나 또는 감히 부인하지 못한다. 그들은 하늘, 별들,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구성 요소들도 신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피조물로 조립된 것으로 보면 멸할 것들이지만, 조물주의 결정에 의해 불멸한다는 고대의 견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만일 데모크리투스, 에피쿠로스 등 거의 모든철학자들이 생각했듯이 세상이 여럿이라면, 우리 세상의 원칙과규칙들이 다른 세상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떻게알겠는가? 어쩌면 그것들은 다른 모습과 다른 제도를 가졌을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그것들이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거리만 떨어져 있어도 무한한 차이와 다양성이 있음을 바로 이 세상에서 본다. 우리 선조들이 발견한 신세계에서는밀도 포도나무도 볼 수 없고, 우리 고장에 있는 동물들도 전혀 없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또 옛날에는 이 세상의 얼마나많은 곳에서 바쿠스도 케레스도 알지 못했던가. - P322

자연에는 오직 의심만이 있을 뿐이라고 프로타고라스는 말한다.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바로 그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것이다. 나우시파네스는 우리 눈에 존재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것들 중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보다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유일한 확실성은 불확실성뿐이라고 주장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우리눈에 보이는 것들 중 어느 것 하나도 보편적인 것은 없고 ‘하나‘만이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제논은 ‘하나‘조차 존재하지 않고 전혀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하나‘가 존재한다면 그 자체에, 또는다른 것에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것에 존재하면 둘이 될 것이다. 그 자체에 존재한대도 품고 있는 것과 담긴 것이 있으니 여전히 둘이다. 이런 이론을 따라가자면, 세상은 가짜이거나 공허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P325

스콜라 학파의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의 칙령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스파르타에서 뤼쿠르고스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과실이다. 그의 학설은 우리에게는 철칙이지만 아마도 다른 이의 학설만큼 그릇된 것이다. 왜 플라톤의관념이나 에피쿠로스의 원자, 또는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공(空)과 만(滿), 탈레스의 물, 혹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자연의 무한성, 디오게네스의 공기, 퓌타고라스의 수와 균형, 파르메니데스의 무한, 무사이우스의 일자(一者), 아폴로도로스의 물과 불, 아낙사고라스의 유사 부분들, 엠페도클레스의 불화와 우정,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또는 전혀 다른 견해, 그리도 훌륭한 인간의 이성이제가 참견하는 모든 것에서 확신과 통찰력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무한 잡탕의 견해와 판단들 중 한 견해를, 사물의 원리, 질료, 형상, 결여라는 세 요소를 기점으로 구축한 원리들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만큼 기꺼이 수긍하지 못할 이유를 나는 알 수 없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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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람들



빌과 알린 밀러는 행복한 부부였다. 그러나 때로 그들은 그들이 속한 그룹에서 어쩐지 자기들만 별볼일 없이 사는 것 같다고느꼈다. 빌은 부기 업무에 매달리고, 알린은 비서의 잡무에 파묻혀 지내면서 말이다. 그들은 가끔씩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개는 이웃인 해리엇과 짐 스톤 부부의 삶과 비교해볼 때의 얘기였다. 밀러 부부에게는 스톤 부부가 더 충만하고 빛나는 삶을 사는듯이 보였다. 스톤네는 저녁때면 언제나 외식을 했고, 집에 손님을 초대했으며, 짐의 일과 관련하여 국내 여기저기를 여행하고다녔다.
스톤 부부는 밀러네와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짐은기계 부품 회사의 세일즈맨이었는데 종종 일과 유람을 결합하는 - P18

재주를 부렸고, 이번에는 부부가 함께 열흘 동안 여행을 하며 친척들을 만난다면서 먼저 샤이엔으로 갔다가 그 다음에는 세인트투이스를 방문한다고 했다. 그들이 여행 가고 없을 때면 밀러 부부는 스톤네 아파트를 보살피고, 고양이 키티에게 먹이를 주고, 나무에 물을 주곤 했다.
빌과 짐이 차 옆에서 악수를 했고, 해리엇과 알린은 서로 팔을잡고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즐겁게 지내세요."
빌이 해리엇에게 말했다.
"그럴게요. 두 분도 즐겁게 지내요."
해리엇이 인사했다. 알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그녀에게 윙크했다.
"잘있어요, 알린, 남편 잘 돌보세요."
"네."
알린이 대답했다. - P19

그가 부엌으로 가서 반짝이는 싱크대 위에 쌓여 있는 깡통 중에서하나를 고르자 재빨리 뛰어올랐다. 그는 고양이가 얌전하게 먹이를 먹도록 놔두고 욕실로 갔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약장을열고 알약통 하나를 찾아냈다. 통에 붙은 종이에는 ‘해리엇 스톤. 지시대로 하루 한 알‘ 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는 약통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부엌으로 돌아와 물주전자를 꺼내어 거실로 갔다. 화분에 물을 준 다음 주전자를 바닥의 깔개 위에놓아두고 술을 넣어둔 장을 열었다. 뒤쪽에 놓인 시바스 리갈 병을 꺼내어 두 잔을 따라 마신 후, 소매로 입술을 닦고 술병을 장안에 도로 넣었다.
키티는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다. 그는 불을 끄고 천천히 문을닫은 후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뭔가 놓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21

그들은 복도를 건너는 짧은 시간 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말을 했을 때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거의 알아들을 수가없었다.
"열쇠, 나한테 줘."
"뭐?"
그녀는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열쇠 말야. 당신이 가지고 있잖아."
"이를 어째, 열쇠를 안에 놔뒀어."
그는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잠겨 있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손잡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두 팔을 벌렸고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걱정 마. 제발, 걱정하지 마."
그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들은 서로 꼭 끌어안았다.
그들은 바람에 맞서듯이 문에 기대어 서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 P29

그들은 당신 남편이 아니야



얼 오버는 세일즈맨으로 현재 실직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아내 도린은 시내 변두리에 있는 24시간 커피숍에서 밤마다 종업원으로 일했다. 어느 날 밤 술을 마시다가 얼은 그 커피숍에 들러 뭘 좀먹기로 했다. 그는 도린이 일하는 곳을 보고 싶었고 공짜로 주문할 수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는 카운터에 앉아서 메뉴를 들여다보았다.
"당신 여기서 뭐 해요?"
그가 거기 앉아 있는 걸 보고 도린이 말했다.
그녀는 주문서를 주방장에게 주었다.
"얼, 뭘 주문할거예요? 애들은 괜찮아요?"
"괜찮아. 커피하고 2번 샌드위치 중 하나를 먹겠어." - P39

얼은 커피를 마시면서 샌드위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양복 차림에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깃을 열어젖힌 남자 둘이 그의 옆에앉아서 커피를 시켰다. 도린이 커피를 따르고 가자 그중 한 사람이 옆의 남자에게 말했다.
"저 여자 엉덩이 좀 보게. 놀랍군."
다른 남자가 웃었다.
"그리 대단하진 않은데."
"내 말이 그거야."
처음 남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어떤 바보들은 엉덩이에 살이 많은 걸 좋아하지."
"난 아니야." - P40

그녀는 커피 주전자를 가지고 돌아와서 그와 그 옆의 두 남자에게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접시를 하나 집어들더니 아이스크림을가지러 갔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통 안으로 몸을 굽히고 아이스크림을 뜨기 시작했다. 흰색 스커트가 엉덩이에 들러붙고 다리위로 끌려올라갔다. 거들이 보였다. 분홍색이었다. 주름이 지고창백하며 털이 약간 있는 허벅지와 보기 흉하게 퍼져나간 핏줄이 보였다.
얼 옆에 앉은 두 남자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 중 하나가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른 남자는 헤벌쭉 웃으며 도린이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 위에 초콜릿 시럽을 끼얹는 동안, 커피를 마시며그녀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녀가 휘핑 크림 깡통을 흔들기 시작했을 때 얼은 음식을 다 먹지도 않고 일어서서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계속 걸었다. - P41

"나 조금씩 먹어요. 하루 종일 굶다가 일하면서 조금씩만 먹죠. 그게 상당한가봐요."
일 주일 후에 그녀의 몸무게는 5파운드가 줄었다. 그로부터 또 일주일 후에는 9파운드 반이 줄었다. 옷들이 헐렁해졌다. 그녀는 새 유니폼을 사기 위해 집세 낼 돈에 손을 대야 했다.
"커피숍에서 사람들이 말이 많아요."
그녀가 말했다.
"뭐라고 하는데?"
"첫째로는 내가 너무 창백하다고요. 내가 나 같아 보이지 않는대요. 살을 너무 많이 빼는 게 아닌가 하는거죠."
"살 빼는 게 뭐 잘못됐나? 그 사람들 말에 신경 쓰지 마. 자기들일이나 잘하라고 해. 그들은 당신 남편이 아니야. 그들과 함께 사는게 아니잖아."
"그 사람들과 일을 하잖아요."
도린이 말했다.
"그렇지. 하지만 그들은 당신 남편이 아니야."
얼이 대답했다. - P47

학생의 아내



그가 자신이 찬미하는 시인인 릴케의 시를 읽어주고 있는 동안그녀는 그의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그는 큰 소리로 읽는 걸 좋아했고, 잘 읽기도 했다. 확신에 찬 맑은 목소리가 낮고 음울하게깔리다가 높아지는가 하면 흥분으로 떨리기도 했다. 읽을 때면절대로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담배를 찾아 침대 옆 작은 탁자로 손을 뻗을 때에만 멈추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막 출발한 대상(商)과 긴 옷을 입고 수염기른 남자들이 나오는 꿈속으로 그녀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잠깐동안 그가 읽어주는 것을 듣다가 눈을 감곤 스르르 잠에 빠지는것이었다. - P205

밖이 환해지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창가로 걸어갔다. 언덕 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하얗게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나무들과 길 건너편에 한줄로 늘어선 2층짜리 공동주택들이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동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하얘지면서 언덕 뒤에서부터 빛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밤새 깨어 있었던 때를 제외하고는(그러나 그럴 때면 밖을 내다보지 않고 침대나 부엌으로 서둘러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해돋이를 몇 번 보지 못했다. 그것도 다 어렸을 때 본 것이었다. 그녀는 그 해돋이 중 어느 것도 지금 것과 같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그림에도, 어떤 책에도 해돋이가 이 - P219

렇게 끔찍하다고 나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리다가 문을 따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녀는 가운의목 주변을 여몄다. 공기는 축축하고 차가웠다. 조금씩 조금씩 사물들의 모습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눈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 바라보다가 건너편 언덕 위의 라디오 송신탑 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붉은 빛에 눈길을 고정시켰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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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보



나는 친구 리타네 집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담배를 피워가면서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음은 내가 그녀에게 얘기한 내용이다.
허브가 그 뚱뚱한 남자를 내 담당 테이블에 앉힌 건 손님이 뜸한 어느 수요일 저녁이었어.
그 뚱뚱한 남자는 단정한 외모에 아주 잘 차려입고 있긴 했지만, 난 그렇게 뚱뚱한 사람은 처음 봤어. 모든 게 다 크더라구. 하지만 가장 잘 기억나는 건 손가락이야. 그 사람 테이블 가까이에앉은 노부부의 시중을 들러 그 옆에 섰을 때 그 손가락들을 처음보았어. 보통사람 크기의 세 배는 되어 보이데. 길고 두껍고 말랑말랑하게 생겼어. - P9

나는 다른 테이블의 시중도 들어야 했어. 요구가 많은 사업가네 명이 앉은 테이블하고 남자 세 명과 여자 한명이 앉은 테이블, 그리고 노부부의 테이블이었지. 리앤더가 그 뚱뚱한 남자에게 물을 따라주었고, 나는 그 남자가 결정할 시간을 충분히 준 다음 그테이블로 갔어.
안녕하세요? 주문 받을까요? 내가 말했지.
리타, 그 남자는 덩치가 컸어, 정말 크더라구.
안녕하세요, 좋은 저녁이네요. 우리 이제 주문할 준비가 된 것같은데요, 하고 그가 말했지. - P10

그는 이런 식으로 말했어 ㅡ이상하지 않니? 그리고 때때로 조금씩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더라.
시저 샐러드로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고 나서 괜찮으시다면 수프에 빵과 버터를 곁들이구요. 양고기 요리가 좋을 것 같군요. 사워크림 얹은 구운 감자하고요. 디저트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시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메뉴를 건넸어.
세상에, 리타, 그 손가락이라니.
나는 서둘러 주방으로 가서 루디에게 주문서를 내밀었어. 그는인상을 쓰면서 그것을 받았어. 너도 알잖아. 그 사람 일할 때면 늘그런 얼굴이지. - P10

나는 침대에 들어가서 가장자리에 딱 붙어 배를 깔고 누웠어. 그런데 불을 끄고 침대로 들어오자마자 루디가 시작하는 거야. 나는 원치 않았지만 바로 누워서 몸의 힘을 뺐어. 그런데 바로 그거였어. 그가 내 위로 올라왔을 때 난 갑자기 내가 뚱뚱하다고 느낀 거야. 내가 끔찍하게 뚱뚱하다고, 너무 뚱뚱해서 루디가 조그맣게 되어버리고 날 제대로 안지도 못한다고.
말도 안 돼, 라고 리타가 말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어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우울해진다. 하지만 그녀와 그 얘기를 계속 하지는 않을것이다. 벌써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말했다.
그녀는 우아한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기다리고앉아 있다.
뭘 기다리는 걸까? 난 알고 싶다.
8월이다.
내 인생은 변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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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너무한 일


이제 겨우 배가 떠서 기어다니기 시작하는 첫애기에게봉숭아 꽃물을 들여주겠다고 덤비는 엄마가 있었으니 그건 해도 너무한 일.
아이와 실랑이를 하는 엄마에게 남편은 핀잔은 주어도 그 맘속에는 엄마와 한가지인 어떤 게 있던 터라 외면하며 바라보는 여러 가지가 다 꽃 피어나듯 잔잔한 물결속인데, 그렇기는 해도 그 예닐곱 달 된 애기에게 봉숭아꽃물을 들이겠다고 한 것은 너무하긴 너무한 일이다. - P21

초승달에서



어스름 막 지난 때
노란 불을 하나 켜서 맞는
마지막 저물어가는 하늘빛 속으로
오너라
아픈 사람의 이마를 짚는 손길처럼
떡쌀에 머무는 흰빛처럼

오늘 하루
마음에 가장 오래 머문 일,
시들어 떨어지는 분꽃들
눈여겨 바라봐야 했던 일
말갛게 삭이러

허공을 파낸 이 풀씨만한 석굴(石窟)로. 분꽃이 지듯,
오너라
분꽃이 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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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오,
저 물위를 건너가는 물결들
처럼.

서른넷, 初
장석남

개정판 시인의 말


고맙게도 ‘서른넷, 初‘라고 쓴 그 아래에
나란히 이렇게 한번 더 써본다.
‘쉰여덟, 初!‘

그 사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여전히 젖은 눈이다.


2022년 3월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
일생을 잘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일생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

일모



저기 뒹구는 것은 돌멩이
저것은 자기 그늘을 다독이는 오동나무
저것은 어딘가를 올라가는 계단
저것은 곧 밤이 되면 보이지 않을 새털구름
그리고 저것은 근심보다 더 낮은 데로 떨어지는 태양

화평한 가운데
어디선가 새소리 짧게 들리다 만다
오늘 저녁은 새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시장기

밤의 창변



적적한 가정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종일 선배들의 에세이를 읽었다 때로
사랑은 헤어졌다가 나뭇잎 몇 번 지게 하고는 다시 만나더군
음악은 귀를 툭툭 치며 장마 지난 밭고랑을 따라갔고
어둠은 늘 말이 없는 가장처럼
슬픔 몇 송이를 오므려 갓더군
돋을새김한 불빛들
자세히 봐도
더 자세히 봐도 이곳에 온 내 생에서
참을 만한 것은
연애를 잃은
슬픔 정도뿐이더군
약관의 나라에 태어난 것 말고는
(이제 협궤열차도 없어지고......
남동 갯벌의 노을도 참을 만은 했었는데......)

돌멩이들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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