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오,
저 물위를 건너가는 물결들
처럼.

서른넷, 初
장석남

개정판 시인의 말


고맙게도 ‘서른넷, 初‘라고 쓴 그 아래에
나란히 이렇게 한번 더 써본다.
‘쉰여덟, 初!‘

그 사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여전히 젖은 눈이다.


2022년 3월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후일 꽃이 피고 씨를 터뜨릴 때
무릎 펴고 일어나
일생을 잘살았다고 하면 되겠나
그중 몇은 물빛 손톱에게도 건너간
그러한 작고 간절한 일생이 여기 있었다고
있었다고 하면 되겠나
이 애기들 앞에서

일모



저기 뒹구는 것은 돌멩이
저것은 자기 그늘을 다독이는 오동나무
저것은 어딘가를 올라가는 계단
저것은 곧 밤이 되면 보이지 않을 새털구름
그리고 저것은 근심보다 더 낮은 데로 떨어지는 태양

화평한 가운데
어디선가 새소리 짧게 들리다 만다
오늘 저녁은 새의 일생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시장기

밤의 창변



적적한 가정의 지붕들을 바라보며
종일 선배들의 에세이를 읽었다 때로
사랑은 헤어졌다가 나뭇잎 몇 번 지게 하고는 다시 만나더군
음악은 귀를 툭툭 치며 장마 지난 밭고랑을 따라갔고
어둠은 늘 말이 없는 가장처럼
슬픔 몇 송이를 오므려 갓더군
돋을새김한 불빛들
자세히 봐도
더 자세히 봐도 이곳에 온 내 생에서
참을 만한 것은
연애를 잃은
슬픔 정도뿐이더군
약관의 나라에 태어난 것 말고는
(이제 협궤열차도 없어지고......
남동 갯벌의 노을도 참을 만은 했었는데......)

돌멩이들



바닷소리 새까만
돌멩이 너덧 알을 주워다
책상 위에 풀어놓고
읽던 책 갈피에도 끼워두고 세간
기울어진 자리도 괴곤 했다
잠 아니 오는 밤에는 나머지 것들
물끄러미 치어다도 보다가 맨 처음
이 돌멩이들 있던 자리까지를
궁금해하노라면,

구름 지나는 그림자에
귀 먹먹해지는 어느 겨울날 오후
혼자 매인
늦둥이 송아지 눈매에 얹힌
낮달처럼
저나 나나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듯 외따로 있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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