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



모든 창에 불이 꺼질 때 야간열차는 떠난다. 머리를 푼 혼령 같은 어둠이 검은 산을 적시고 검은 강물에 섞이다가 아득한 지반(地盤)아래로 가라앉을 때, 야간열차는 오래 참아왔던 고함을 내지르며달려간다. 수많은 눈(眼) 같은 차창들이 번쩍인다. 식어가던 선로이 불꽃이 튄다. 제 정수리로 어둠을 짓부수며 야간열차는 무서운속력으로 새벽을 향해 미끄러져간다.
나는 그 야간열차에 대한 이야기를 동걸에게서 들었다.
동걸은 덩치가 좋은 녀석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만큼큰 키에 가슴이 벌어졌다. 녀석의 목소리는 그 우람한 공명(共鳴)통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니만큼 남달리 굵고 우렁찼다. 한번 웃어젖히면 주위에 있던 모르는 사람들까지 놀란 얼굴로 돌아보곤 했다.  - P149

내가 보기에는 몸이 세 조각이라도 모자랄 것 같은 것이 동걸의 생활이었다. 다른 사람이 염려하거나 관심을 둘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그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했다. 완벽해 보이는 녀석의 모습을 나는 속으로 선망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모든 것에 실망하고 있었고 그 실망을 견디기 위해모든 것을 빈정거리고 있었다. 나에게 정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것을 부려둘 데가 없었다. 정열이 달구어질수록 나는 그것을 짐스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내보일 수 있는 행동은 술을 마시는 일과 친구들이 놀랄 만한 냉소적인 농담을 적시에 내뱉는 일뿐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겉늙었다고 말했다.
동걸은 나와 달랐다. 일분일초를 맹렬하게 싸워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볼 때면 서커스에서 불을 토하는 사나이를 떠올리곤 했다. 얼굴은 검댕투성이이고 벗은 상체에 번들번들 땀이 흐르는 동걸의 입에서 뜨거운 바람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상상은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 P153

동걸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오래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녀석이 무서워졌다. 녀석은 누구보다 당당했고 누구보다 강했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리분별이 정확했으며 모두에게 열정 어린 선의를 베풀었다.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나는 지난밤 동결이 어둠 속에서 지어보였던 뜻 모를 미소를 기억해냈다. 내 머리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멍해졌다. 그렇다면 그웃음은 무엇인가. 그때 녀석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실낱 같은 탈출의 희망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일까. 체념해버린 채 웃고 있었던 것일까. - P176

나는 음험하게 엎드린 여러 겹의 선로들을 보았다. 검은 화물차들이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광활한 역의 동쪽에는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있는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서편 하늘에는 우는 눈썹을 걸쳐놓은 것 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껍데기였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이 새벽,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감는 선주, 아침 밥상, 주름살투성이의 어머니, 석유곤로에 데워진 세숫물, 아랫목에서 뒤척이는 동걸의 분신, 그것이 현실이었다. 삼 년 전 야간열차를 탔을 때 그러했듯이 그 서울의신새벽을 내가 헤매고 있었다.
객실의 환한 차창이 비추지 않는 곳으로 걸어가면 마음은 어두웠고, 객실의 창이 비추는 곳으로 가면 다시 마음이 밝았다.
발차를 알리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를 나누던 차장과 승객들이 객실로 올라왔다. 호루라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간열차의 마지막 객차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휑뎅그렁한 승강장에 혼자 남아 있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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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사육제


모두 그것을 미친 여름이라고 불렀다.
사월이 다 가도록 우박 같은 진눈깨비가 흩뿌려대더니 오월이 되자 봄도 없이 수은주가 삼십 도를 오르내렸으며, 유월로 접어들면서는 유황 가스 같은 아열대 기류가 창백한 행인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태양은 제 혈관의 뜨거움에 지레 숨이 막힌 미친 여인처럼습기 찬 옷자락을 섶섶이 열어젖힌 채 비지땀을 흘렸다. 행인들은무더위에 단련되지 못한 허약한 몸을 이끌고 높다란 빌딩의 그늘이나 가로수 그림자를 찾아 어기적거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지친 호흡기와 사타구니를 식혀줄 선선한 밤바람이었으나, 하지가 가까웠으므로 땅거미가 깔리기까지의 긴 오후 동안 끈적거리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묵묵히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마른 화선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이 거리는 황급히 어둠에 뒤덮였다. 러닝셔츠 바람의 남자들이 둘씩 셋씩 무리를 지어 소줏집으로 들어갔다. 찻집과 상점들이 불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거리 여기 - P82

저기에서 숨구멍을 틔우는 것 같은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때 묻은 적갈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두 손으로 내민 거지들이 지하보도에포진하고 앉았다. 그들 앞을 무심하게 지나쳐 가는 행인들 저마다의 얼굴에는 지나간 한낮의 무더위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구두 소리에는 차츰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마침 밤이 왔으므로이제는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는 것처럼, 더 이상 죄지을 필요도 뉘우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등과 어깨를 겹겹이 포갠 그들은 옆과뒤를 살피지 않고 앞만을 향해 피로한 미소를 지으며 지하보도를흘러가고 있었다.
그 행인들의 물결에 떠밀려 나는 후텁지근한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 P83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방금 빠져나온 지하철역 출입구를 뒤돌아보았다. 사각의 출구는 마치 수많은 새끼들을 줄지어 해산하는 짐승의 피 묻은 자궁 같았으나, 나는 오히려 그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출입구의 더러운 계단 턱으로 되돌아가주저앉고 싶은 충동도 함께 느꼈다. 지하철 안에서부터 간신히 지탱해온 두 무릎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후들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베어 먹다 말고 뱉어놓은 살덩어리 같은 달이 떠 있었다. 이지러진 달의 둥근 면은 핏기 없이 누리끼리했고, 베어져 나간 단면에는 검푸른 이빨 자국이 박혀 있었다. 그 깊숙한 혈흔(血)을타고 번져 나온 어둠의 타액이 주변의 천체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몸을 먹빛 피멍으로 물들인 채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뒤척이고 있었다.
이따금씩 머리를 들어 그 하늘을 치어다보면서, 고꾸라지려는 무 - P83

릎을 힘주어 가면서 나는 꼿꼿이 앞을 향해 걸었다. 어둠은 수천수만의 현란한 색채를 띠고 눈앞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어둠들이 창(槍) 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족족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파리한 가로등 불빛의 입자들. 차량들의 꽁무니마다 매달려 몸부림치는 붉고 노란 후미등의 불빛들을 나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마침내 아파트 정문에 이르러서야 나는 사방을 탐색하던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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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규는 언제부턴가 비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신 독이 그의 얼굴에 냉정한 껍질을 응고시켜오고 있었다. 때로 인규는 자신의 비정함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껍질을 부술 수는 없었다.
그는 늦은 밤에 숲을 헤매다가 덫에 걸린 짐승과 같았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는 덫에 걸렸다. 그는 새벽을 기다렸다.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으므로, 울부짖고 신음하는 것에마저 지쳐버렸으므로 이제 그는 날카로운 덫에 찢겨 피가 흐르는 다리를 핥으며 기다렸다.
새벽은 고통을 멎게 해줄 것이었다. 박명 속에서 신(神)의 얼굴올 한 사냥꾼이 걸어올 것이었다. 자신의 노획물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솜씨 좋은 사냥꾼은 일격에 그를 사살해줄 것이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고 인규는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진규가 자신의 인생의 덫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한다 해도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에 그가 할일은 없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새벽을 만날 것이 아닌가? 인규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 P76

인규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유흥가를 걷고 있었다. 아직 집으로돌아가지 못한 수십 명의 취객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로 내려서 있었다. 인규는 그들의 어깨를 헤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대학병원의 담길이었다. 외등을 에워싼 가로수 잎들이 서늘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음습한 길을 따라 걸어온 연인 한 쌍이 인규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이 인규에게는 꿈과 같이 느껴졌다. 물 먹은 솜 같은 다리가 내딛는 보도블록, 칼칼하게 목구멍으로 감기는 밤공기, 이 모든것들이 어느 하나 인규에게는 살아 있지 않았다.
달리고 싶다. 라고 인규는 생각했다. - P77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가 바깥 공기와 섞여 춤추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그때에만 인규의 영혼은 자신의 가련한 몸뚱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몸뚱이는 인규의 어린 시절 동구 밖 공터에 버려져 있었던 진규의 몸뚱이와 같았다.
그러나 인규는 더 이상 달리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숫제다리를 끌며 걷고 있었다. 한기를 느꼈다.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어깨를 움츠린 채 그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 어떤 덫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야근을 마치고 몸살을 앓으며 혼자서 아파트로 돌아가던 길들을 인규는 기억했다. 양손에는 일거리를 싼 짐이 들려 있었고 오한 때문에 이가 부딪쳤다. 가등이 꺼진 도로변을 걸으며 인규는 "걷다 보면 끝난다. 걷다 보면 이 길은 끝난다"라고 소리 내어 중얼거려보곤했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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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ㅡ김명인의 시 「여수」 - P9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것이다.
얼마만큼 왔을까.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간간이 벼락이 빛났다. 무엇인가를 연달아 부수고 무너뜨리는 듯한 기차 바퀴소리,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 P9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무수한 보릿잎 같은 빗자국들이 차창과 내 충혈된 눈을 할퀴었다.
손목시계는 얼추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차가 종착역인 여수에 닿으려면 앞으로도 두 시간 가까이 철로를 달려야 했다.
나는 깍지 끼고 있던 손매듭을 풀어 허리 아래로 늘어뜨렸다. 캐시밀론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좌석 등받이에 상체를 밀착했다. 며칠 잠을 설쳤던 탓에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으나, 심장은 여전히 초조하게 두근거리며 의식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감은 눈앞에 물고기들이 맴돌기 시작했다. 반경 이십 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둥그런 어항, 그 속에 감질나게 몇 가닥 흔들리고 있는 청록색 수초들, 수초를 투명한 지느러미로 건드리며 빙글빙글 맴을 그리는 금붕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불현듯 나는 두 개의 층계를 한꺼번에 헛디딘 것처럼 소스라치며 가수면에서 깨어났다. - P10

그 물고기들은 죽었다.
어제 아침 나는 여섯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죽은 금붕어를 비닐봉지에 싸서 대문 밖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동안 그녀의 물고기들은 아침마다 한 마리씩 두 마리씩 허연 배를뒤집으며 수면으로 떠올랐다. 자흔이 하던 것과 똑같이 정성껏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었지만 나는 그것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어항의 물을 쿨링쿨렁 소리를 내며 수챗구 - P10

멍에 비웠다. 미끈거리는 어항 유리 안쪽을 물비누로 씻고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아낸 뒤 높다란 선반 위에 엎어놓았다. 갑작스러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욱, 하는 신음과 함께 타액과 물이 싱크대 홈통에 토해졌다. 뱃속에 남은 것들을 마저 게우기 위해 나는 목젖 깊이 검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용해되지 않은 파랗고 노란 알약과 캡슐들이 흐물흐물한 위액을 뒤집어쓴채 토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챗구멍으로 알약들을 밀어 넣었다.
구토한 다음이면 으레 입속에 고여 드는 낯익은 체념과 회한 따위를 곱씹으며 나는 거칠게 수도꼭지를 틀었다. 맵싸한 소독 약품냄새가 풍기는 수돗물에 입을 헹구었다. 세면장의 계단 턱을 무릎으로 짚고 방문을 열었다. 고무 슬리퍼를 벗어 던졌다. 장판 바닥에 쓰러지듯 상체를 엎디었다. 이런 순간에 자흔의 목소리를 떠올리고싶지 않았으므로 이마를 방바닥에 찧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나직한 목소리의 환청은 이미 귓전까지 다가와 내 먹먹한 고막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P11

뭐가요? 뭐가 더럽다는 거예요?
자흔이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어깨를 붙들고 있는 자혼의 몸을 밀어냈다. 다시 홈통에 머리를 처박고 토하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씻어낸 쓰라린 뺨을 타고 생리적인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이, 목줄기가 따끔따끔하게 젖었다. 눈물로흐릿하게 가려진 시야 옆으로 자흔의 맨발은 차가운 세면장 바닥을 안타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 그만해요.
자흔은 내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녀의 서늘한 손가락이 내뜨겁게 젖은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내가 그 손짓을 뿌리치자 자흔은 둘 데 없어진 열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허공에 펼치며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었다.
이젠 괜찮아요...... 그만해요. - P12

해질녘에 밀려 나가는 썰물처럼 환청은 
천천히 귓가에서 잦아들었다. 자취방 유리창 가득 늦가을 오전의 다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장판 바닥에 엎디었던 몸을 굼벵이처럼 모로 누이며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명치 끝이 찢기듯이 아파왔다. 적요한 햇빛 속으로 무수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먼지는 진눈깨비 같았다.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따뜻한 바닷물결 위로 흐느끼듯 스미는 진눈깨비……, 여수의 진눈깨비였다.
열차는 여전히 비바람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습기 먹은 스피커를 통해 차장은 불분명한 목소리로 남원(南原)역이 가까웠음을 알려왔다. 추레한 차림의 아낙들이 둘씩 셋씩 일어나 선반에서 짐을 내리고 우산을 챙기느라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기시작했다. 여수까지 열차는 아직도 많은 역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 P13

그때 나는 얼핏 그 어둠이 자흔의 지성의 그늘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지 외로운 표정일뿐이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발견되는 표정이기도 했다.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서 있는 얼굴들, 늦은 밤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차창 밖의 휘황한 네온사인을 바라다보는 눈빛들, 출근 무렵 살갗이 터질 듯한 지하철에 올라 말없이 몸 부대끼는 사람들의 메마른 광대뼈 같은 데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기쁠 흔(欣) 자예요‘라고 뇌까리는 자혼의 목소리는 마치 그 모든 사람들의 외로움을 쌓아다가 반죽해놓은 흰떡살같이 고즈넉했다. - P14

심지어 자흔은 자신의 몸조차 함부로 
다루었다. 옷을 갈아입을때 보면 얻어맞은 사람처럼 몸 여기저기에 푸릇푸릇한 멍이 들어있기 일쑤였고, 공장에서도 바늘에 곧잘 손이 찔리는지 검지나 엄지손가락에서 소형 밴드가 떠나는 날이 없었다. 주말 같은 때에 시장에 같이 다니다 보면 자흔은 유난히 사람들과 어깨를 잘 부딪쳤다. 유리문이 없는 줄 알고 심상하게 지나쳐 가려다가 이마와 무릎을 찧곤 했고, 뒤에서 다가오는 승용차나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곤 해서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자흔과 함께 걸을 때면 나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사람처럼 그녀가 행여 차에 치이지나 않는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지를 살피느라고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자흔은 마치 알지 못하는 무슨 거대한 뒷힘에 보호라도 받고 있는 양 태평하고도 무심하게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 P25

결국 기찻간에서 발견된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평생토록 떠돌아다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하며, 자흔은 짐짓 일그러뜨린 입술로 웃어 보였다.
......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자흔은 갑작스럽게 정색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잔뜩 웅크려서 모로 누웠던 몸을 반듯이 누이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괴롭지도 않아요. - P40

여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인과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울컥울컥한 무더위가 한 달도 넘게계속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잘 지내고 있는 룸메이트를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탓에 차츰 사그러들고 있었던 내 결벽증이발작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온갖 눈병과 귓병이 지하철과 버스 손잡이를 통해 옮겨다녔다. 나는 내 살갗에 다른 사람의 살이 닿는 게 싫어서 기를 쓰고 세 정거장 네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다녔다. 복사열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위에서의 체감 온도는 오십 도에 가깝다고 했다. 땀은 이마에서.
목에서, 겨드랑이에서, 사타구니와 종아리와 발가락 하나하나에서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렸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퇴근하여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온몸의 피부가 발갛게부어오르도록 비누칠을 하고 수건으로 문질러대곤 했다. 몸에 땀이 차는 끈적끈적한 느낌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땀샘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 P41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부두 시멘트 바닥이 급경사로 기울었다. 미선이를 집어던진 아버지는 이번에는 반항하는 나를 목에 감아 안은 것이다. 짙푸른 물살 속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눈과입과 코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짠물, 짠물.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젖은 시멘트 바닥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서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흰 적란운 덩어리들이었다.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살았다‘ ‘살았다‘ 하는 낮은 탄성들이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갔다. 방금 짠물과 음식을 토해 엉망이 된 윗옷자락에 손바닥을 비비며, 누운 채로 나는 빠개질 듯한 고개를 쳐들었다.
죽을라면 혼자 죽을 것이지 어쩐다고 죄 없는 어린 것들을.... - P53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 동안 나는 한 번도 책장과 창틀의 먼지를 닦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집요한 걸레질도, 때묻을 겨를도 없는 흰 걸레를 몇 번이고 두들겨 빨아야만 했던 강박 증상도 사라지고 없었다. 퇴근하여 돌아와 누우면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평화가 피로한 육신을 어루만지며 밀려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 틈으로 적요한 햇빛이 춤을 추었다. 자흔의 말간 얼굴이 그 햇빛과 먼지 속에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예리한 칼날이 겨드랑이로부터 젖가슴까지의 살갗을 한 꺼풀 한 꺼풀 저미어오는 것같은 슬픔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토악질만은 멈출수 없었다. 이제는 ‘왜 그런 짓을 해요?‘라고 물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흔이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 놓고 구역질을 했다. 그녀의 부재를 확인할 때마다, 내 더러운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내가 뿌리친 자흔의 손, 그녀가 가지런히 허공에 펼쳐보이곤 했던 열 손가락들이 내 수많은 혈관들을 비집고 살갗 속으로, 숭숭 구멍 뚫린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 P57

저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승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듯이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쳤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 키득키득, 한옥식 역사의 검푸른 기와 지붕 위로 자혼의 아련한 옷음소리가 폭우와 함께 넘쳐흐르고 있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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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기 전에는 이 사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집집마다 흔하게 있는 사진, 흔하게 있는 소풍으로 여기며 사진철의 첫 장을 넘기곤 했다. 이제는 생각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며 아버지가 부양의 의무를 맡았던 넓지 않은 집에 늘 함께 있었던 삼촌, 고모들, 작은집 식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니까 이날은 그들이 모두 어디론가 가고 오붓이 네 식구만 남았던 명절이나 휴일이었을까. 아버지는 이날 아침 쉬고 싶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어린 나를 옷 입히고(무척 두꺼운 스웨터를 입히셨다) 나들이 가방을 싸느라 힘들지 않았을까. 한 사람이 나를 안으면 다른 한 사람은 가방을 들고 오빠의 손을 잡는 식으로 두 분은 버스를 타고 왔겠지. 유원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가리키는 풍선을 사주었겠지. ‘사진 찍어요‘라는 사진사의 권유에 따라 얌전히 정해진 장소에 섰겠지. 여기 봐요. 여기. 사진사가 외치는 소리에 오빠와 내가 동시에 렌즈를 바라보기까지는 몇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을까.
그날, 두 분은 행복하셨을까. 돌아오는 길은 멀지 않았을까. 어린 내가 너무 무겁진 않았을까.  - P304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아버지의 가장 지배적인 인상은 ‘피곤하시다‘는 것이었다. 낮이면 국어교사로, 밤이면 글쓰는 사람으로 네다섯 시간밖에 못 자며 아버지는 꽤 오랜 시간을 버텼다. 새벽 네시쯤부터 안방에서 타자기 소리가 들렸다(오랫동안 아버지에게는서재가 따로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아득히 들려오던, 타닥, 타다다닥, 드르륵, 땡, 하는 소리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러다 아침결에 아버지가 잠깐 토막잠을 붙이는 동안 우리 형제들이 일어나 이른 아침을 먹을 때면, 어머니가 우리에게 수저 소리를 못 내게 했던 것이다. 예민한 아버지가 숟가락 소리에 깰까봐 우리는가만히 숟가락을 상에 놓고, 쉬쉬 귓속말로 얘기하며 가만히 밥을 덜어먹었다. 그러다 누군가 실수로 큰 쇳소리를 내면 숨죽여 키득키득 웃기도 했다.
- P305

불우한 시절이라 이사를 많이도 다녔는데, 중흥동에서도, 삼각동에서도, 풍향동에서도, 서울 올라와 수유리에서도 어김없이 새벽이면 타자기 소리가 들렸다. 수유리에 이사온지 이 년쯤 뒤 워드프로세서를 들여놓으며 처음으로 그 소리가 사라졌다. 새벽 네시부터 여덟시까지 일하는 아버지의 습관은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이어져, 낙향하신 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집안에 어떤 우환이 있어도, 아무리 몸이 아파도, 입원을 하거나 상가에서 밤을새우거나 하지만 않으면 자명종 없이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신다. - P305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허리디스크를 앓으셨는데, 의자에 앉기어려울 만큼 통증이 심할 때는 워드프로세서 밑에 두꺼운 책을 여러 권 깔아 높이를 맞춘 뒤 서서 일하셨다.
고백하자면 아버지를 잘 이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 늘 저랑게 피곤하실까. 인생은 꼭 저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막연히 그런 의문을, 때로는 불만을, 때로는 연민을 가졌을 뿐이었다. - P306

단 하루. 잠깐의 기억이 남아 있다. 여덟 살 즈음, 중흥동의 조그만 한옥에 살던 때다. 식구들 모두 마당에 나와 대청소를 하고있었다. 햇빛이 밝은 초여름날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바가지를 들고 작은 화단에 물을 주고, 어머니는 시멘트가 얇게 발라진 마당에 양동이로 물을 부어가며 비질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커다란적갈색 ‘다라이‘에 호스로 물을 받고 있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긴가를 나누다 웃는가 싶더니, 어머니가 갑자기 양동이를 들고 가아버지의 등에 물을 끼얹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아버지는, 늘 지쳐 보이고 어렵기만 하던 아버지는, 화를 내는 대신 껄껄 웃으며 호스를 들고 어머니에게 물줄기를 쏘았다.
그 순간이 나에겐 일종의 개벽이었다.
아! 어른들도 장난을 하는구나!
두 어른은 숨이 넘어가게 웃으며, 차갑다고 외쳐대며 서로에게 - P306

물을 끼얹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다. 껄껄껄, 까르륵꺄르륵 웃어대는 그이들을 향해 우리는 누가먼저랄 것 없이 달려가 소리지르며 합세했다. 서로서로 물을 뿌리고 쫓아가고 도망가고 비명을 질러댔다. 온통 부서지고 튀어오르고 흩어지는 게 햇빛인지 웃음소린지, 눈부신 물줄기, 물방울들인지 알 수 없었다. - P307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따뜻함과 차가움, 노동과 휴식, 병과 치유, 꿈과 현실, 애정과 오해, 기대와 실망, 잠깐 마주잡는 손길, 잠깐 마주치는 눈빛들...... 속에서 우리는 나아간다. 사실 식구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아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식구가 주는 애틋함을 말하려 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 모든 삶의 국면들을 함께 매만지며, 상처를 공유하며 나아갔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한 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따뜻한 기억들이 떠오른다는것이다. 아홉 살 즈음, 걸을 수 없을 만큼 고열이 오른 나를 아버지가 업고 소아과로 달리던 기억.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버지의 발소리. 그 등의 온기. 고등학교 때 내가 급체했을 때, 카이로프랙틱치료를 받으시던 기억을 떠올려 척추 마디 하나하나를 한 시간 가 - P307

까이 꾹꾹 눌러주시던 밤. 방학 때면 늦잠 자고 싶어하는 우리 남매들을 억지로 깨워 뒷산 손병희 선생 묘 앞까지 데리고 가 맨손체조를 시키시던 것이 지극한 사랑이었음을.


어느 순간, 갑자기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자식에게 찾아온다. 그것이 자식의 운명이다. 인생은 꼭 그렇게 힘들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 없이. 불만도 연민도 없이, 말도 논리도 없이. 글썽거리는 눈물 따위 없이. 단 한 순간에. - P308

오랫동안 아버지에 대한 글을 피해 도망다녔다. ‘귀밑머리 희어질 때쯤 쓰겠습니다‘라는 말이 내가 정해둔 변명이었다. 아직 귀밑머리는 희어지지 않았지만, 가르마 오른쪽으로 희끗한 머리칼이 부쩍 눈에 들어온다. 기억들은 모두 조각조각이고, 그 조각들 하나하나에 어린 빛은 제각기 다른 말을 한다. 씌어지는 것보다 씌어지지 않는 것, 씌어질 수 없는 것이 더 진한 말이라는 것을 간신히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이 글을 마쳐야 하는 지금은 아침 일곱시 십분 전, 아버지가 아직 책상 앞에 앉아 계실 시각이다. 이곳 서울에서 남해 바닷가의 외풍 센 방까지, 쏜살같이 공간을 넘어...... 지금 아버지가 책상앞에 앉아 계신다. 십수 년 된 회색 오리털파카를 입고, 돋보기안경을 끼고, 서리처럼 머리가 희어진 아버지가. - P308

언젠가 읽었다. 우리들 각자는 평생에 걸쳐 한 사람을 집요하게감시하고 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행동을 지시하고, 그 사람의 감정을 느끼며 울고 웃는다고. 그 사람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이 감시자이자 감시당하는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때로 과거를 골똘히 돌아보려 할 때 (자전적인 산문을 써야 하는지금처럼), 그와 비슷한 느낌이 찾아올 때가 있다. 한없이 비좁고 기다란 어항의 입구에 한쪽 눈을 대고 있는 것 같다. 그 어항 안에서 움직이는 어둑한 ㅡ때로 놀랍도록ㅡ선명한 영상들을 나의 기억이라고 불러야 할 테지만, 그것들이야말로 나의 역사, 내가 경험한 전부임이 분명할 테지만, 어째서인지 곧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 - P310

서울로 올라온 뒤 열세 살 즈음, 아버지가 광주에서 구해온 사진집과 비디오테이프를 보았던 것. 꼭 그 영향만은 아닐 테지만그후 오랫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근본적인 의문을 지울 수 없게 된 것. 그즈음 가방에 넣어가지고다니며 읽기 시작한 책들. 연필로 줄을 긋거나 베껴 적었던 문장들, 활판으로 꾹꾹 눌려 찍힌 그 활자들이, 이따금 눈이나 살갗에도 꾹꾹 박히는 것 같았던 것.
스물여섯 살의 여름, 첫 책을 출판사에서 받아든 오후에 느낀, 말로 옮기기 힘든 복잡한 감정, 증정본으로 받은 ‘내 책‘ 다섯 권을 가방에 넣고, 꺼내보지도 못한 채 혼자서 한동안 일층 카페에 앉아 있었던 것. 그후 지금까지 보낸 시간. 쓰고, 쉬고, 쓰고, 때로오래 쉬고, 다시 썼던 그 밖의 다른 말로는 요약하고 싶지 않거나, 달리 요약할 수 없는 시간. - P312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등신대의 종이 화폭 앞에 선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이 형상에 대해 느끼는 고통은 무슨 고귀한 창작의 진통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피부가 찢어지는 것같이 괴로운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그는 화면을 찢어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나는 그 그림을 이해했다.
문장들과 단어들, 구두점들의 날카로운 자국.
약간만 발을 잘못 디뎌도, 아니, 잘 디뎠다고 믿은 순간마저 기다리고 있는 구역질의 기미. - P313

지워야 하는 문장들.
단호하게 송곳으로 뚫어, 깨끗이 찢어버려야 하는 단어들.


이젠 정말 글을 못 쓰려는가보다. 생각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글을 안 쓰고 퍽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늦여름, 리모델링하기 전의 광화문 교보문고 소설 코너에 갔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일이 있어서 책을 고르려던 것이었다. 수천 권의 소설들이 꽂힌 벽면 앞에 섰을 때 나는 왜 눈이 뜨거워졌던 걸까. 마침 매장에 조용히 울리고 있었던 피아노곡 때문에? 수천 권의 소설들이 뿜어낸 어떤 에너지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낯익은 세계로 돌아왔다는 감정 때문에?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인생을 그 세계에서 보냈기 때문에? - P314

그 모든 소설들을 쓴 수천의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등신대의회색 종이 앞에 서서 한 줄씩 점을 뚫었을 것이다. 생존한 사람들은 지금도 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 일에 고통을 느낄 때도 있고, 충일감이 더 클 때도 있을 것이다. 한순간 깨끗한 생명이 차오르며 기쁨을 느낄 것이다. 건너가야 할 생각의 고리들, 꿰뚫어지지 않는 감정 때문에 서성거릴 것이다. 퀼트를 짜거나 건축물을 설계하듯 오 년, 십 년, 그보다 더 긴 시간을 소설 한 편에 골몰해 - P314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이 지워지고 있을 것이다. 늙어가고 있을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움직이지 못한다.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 가장 수동적인 자세로, 글쓰기 외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고 한 단어씩 써간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그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다행이다. 움직일 수 없어서 다행이다. 나의 것이라고 이름 붙은 삶의 모든 것을 괄호 속에 넣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P315

소설을 쓰다 말고 잠깐 골목을 걸을 때, 어항 밖으로 감고 있던한 눈을 뜬 것처럼 아슴아슴 눈동자가 시릴 때가 있다. 그런 순간에, 나는 그 어항 속에서 움직이던 어둑한(때로 찬란한) 기억들의주인이 아니다. 침묵하는 거울 속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곳에서 나를 마주보던, 낯익고도 낯선 얼굴의 주인이 아니다.
감시자도, 감시당하는 자도 아니다. 천구백몇년생도, 어떤 도시들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사람도 아니다. 수십 년 동안 어떤 사람들과 어떤 사물들, 어떤 풍경들을 만나고 사랑해온 사람도 아니다. 몇 권의 초라한 ‘내 책‘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 P315

그렇게 수없이 나는 삶으로부터 구원/버림받는다. 그 구원/버림의 힘으로 계속 등신대의 종이에 점을 뚫는다. 그 행위가 두렵거나 고통스럽다고, 스스로에게조차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막 소설 한 편이 끝나려고 할 때, 괄호 속에 들어가 있던 모든것이 둑을 넘듯 조용히 몸속으로 다시 흘러들어올 때, 언제나 나는 더 머뭇거리고 싶어진다. 더 쓰고 싶어진다. 더 숨을 불어넣고싶어진다.


지금 내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이미지는, 펜촉 또는 송곳을 들고 자신이 뚫다 만 종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어렴풋한 옆얼굴이다. 그들이 내쉬는 더운 숨이 구멍들을 통과해 가장 단순한언어가 된다. 그들은 어떤 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데, 간결한 부호 같은 언어들이 그 구멍들에서 새어나온다(들립니까. 나는 지금 온 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내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실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따뜻한 피 같은, 우리가 가진 생명의 가장 연한 부분. 또는 어떤 목소리의 이미지. - P316

2012년 겨울부터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으면서 나는 내면의 투쟁을 치르고 있었다. 인간의 잔혹함을 증거하는 자료들과, 다른 한편에서 인간의 존엄을 증거하는 자료들 사이에서 나는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광주는 더이상 하나의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극단적으로 공존한 시간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어 있었다. 신대륙의 학살, 아우슈비츠, 보스니아, 관동과 난징의 학살을 가로지르는 인간의 잔혹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그 폭력 앞에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했던 연약한 몸짓들에 대해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P331

이 소설을 쓰는 일을 거의 포기하려 했던 어느 날, 5월 27일 새벽 군인들이 돌아와 모두를 죽일 것임을 알면서 광주의 도청에 남았던 한 시민군, 섬세한 성격의 야학 교사였던 스물여섯 살 청년의 마지막 일기를 읽었다. 기도의 형식을 한 그 일기의 앞부분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토록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내가 쓰려는 소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떻게든 폭력에서 존엄으로, 그 절벽들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기어서 나아가는 일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그러기 위해 먼저 이 소설의 맨 앞과 맨 뒤에 촛불을 밝히기로 - P331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를 하고 싶었다. 촛불의 불꽃의 중심을 통과하여, 삼십여 년을 건너 우리에게 오는 넋들의 걸음걸이를생각했다. 그 불가능한 재생을 단 한 순간이라도 가능케 하고 싶었다. 열다섯 살에 그곳에서 죽어 여름으로 건너오지 못한 소년 동호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떠오르게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다만 애도하고 온 힘을 다해 존엄에까지 가자고 결심은 했지만, 소년이 온다』를 써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스스로 흔들리곤 했다. 4장 ‘쇠와 피‘ 같은 경우에는 내가 흔들리며 회의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달리 방법이 없어서 소년에게 매달렸다. 그가 나를 밝은 쪽으로 이끌고 가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에게 끌려가듯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므로 만일 지금 누군가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폭력보다 먼저, 인간의 참혹보다 먼저, 6장에서 어린 동호가 엄마의 손을 잡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는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것 같다고 느낀다. - P332

그 마음으로 에필로그에 이 대목을 썼다.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 P332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하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P333

출간 후에


소설이 출간되었다.


더이상 새벽에 일어나 초를 켜지 않아도 된다.
외딴집이 정전됐을 때 촛불이 얼마나 밝은지 보려고 보일러 센서 등을 가리고 냉장고 코드를 뽑지 않아도 된다. 거인 같은 그림자가 천장에 일렁이는 걸 보려고 초를 들고 서성이지 않아도 된다. 촛불의 빛이 지나갈 때마다 낮은 목소리처럼 일어섰다가 어두워지는 책의 제목들을 읽지 않아도 된다.


살갗에서 눈이 녹는 감각을 기억하려고 손이 빳빳해질 때까지 - P342

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눈이 내리기 시작할때마다 가장 가까운 산을 향해 택시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 산아래 다다랐을 때 눈이 그친 것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 등산객들을 위한 식당에서 반쯤 나물밥을 먹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일어서지 않아도 된다. 등산로를 벗어나 숲속으로.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자료를 읽지 않아도 된다. 검색창에 ‘학살‘이란 단어를넣지 않아도 된다. 구덩이 안쪽을 느끼려고 책상 아래 모로 누워있지 않아도 된다. 매일 지나치는 도로변 동산의 나무들 사이로햇빛이 떨어지고 녹음 아래 그늘이 유난히 캄캄할 때, 거기 시체들이 썩어가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 P343

울지 않아도 된다.


더이상 눈물로 세수하지 않아도 된다.


바람 부는 자정에 천변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


산사람들보다 죽은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지 않아도 된다. - P343

이 노래를 처음 들은 날, 달력 종이 뒷면에 1부터 1000까지 숫자를 적어 벽에 붙였었다. 하루에 하나씩 지우자고 생각했다. 하루씩 살고 쓰자고, 그걸 천 번만 반복하자고. 너무 오래 잠을 못자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남은 삶에는 평화도 희망도 없고 나빠질 일만 남았다는 결론에 다다라 있어서 이상한 일은 소설을 써갈수록 점점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드는 시간이 조금씩 늘었고, 차츰 악몽을 덜 꾸게 되었다. 피와 시체와 유골로 가득한 소설을 쓰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2020년 가을에 초고를 완성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경하가 성냥 불꽃을 켰을 때 알았다. 이것이사랑에 대한 소설이라는 걸. 깨어진 유리를 녹여 다시 온전한 덩어리로 만드는 불길인 걸.
- P347

「작별하지 않는다」의 첫 페이지를 쓴 날로부터 완성하기까지거의 칠 년이 걸렸으니, 그사이 퍽 많은 양의 메모를 했다. 얇은노트로 열 권이 넘는, 스스로 묻고 답하고 길을 찾으려 더듬어간 기록들이다. 각기 다른 인물, 다른 내러티브로 원고지 오십 매, 백매, 길게는 이백 매까지 써본 버전들도 남아 있다(최초의 제목은
‘새가 돌아온 밤‘이었다). 2018년 겨울에 들고 다녔던 얇은 노트를 열어보니 이런 메모가 적혀 있다. - P348

기도
치고 들어오는 세계.
이것이 세계인가?
아이들이 죽어가고 여자들이 강간당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인가?

그러나 살아 있으므로 아름다운 것들.
지독하게
무정하게 아름다운 것들.

유령,
종려나무,
팔을 흔드는 검은 나무. - P348

악몽 같은 현실에서 구원을 원하는 인간의 이야기.
공포와 폭력.
기도의 이야기.

바람.
해류.
전 세계가 이어지는
바다의 순환.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부디.

눈이 내렸다.
작별하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의 인간
우주 속에서의 인간

내 몸의 감각.
육체. 연약한. 필멸하는. - P349

‘나‘는 그 집에 가게 된다.
모두 ‘나‘를 떠난 뒤에
거의 폐인이 되어.

어디까지 차가울 것인가.
따뜻할 것인가.
뜨거울 것인가의 문제.

학살에 대하여 쓴 ‘나‘가,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모를 둔 친구의 집에서, 죽음ㅡ 명부 ㅡ에서 돌아온 새와 하루를 보낸다. - P350

어떤 임계에서, 산자가 마치 혼처럼 되어서, 극심한 고통의 마지막 가장자리에서, 몸을 빠져나와 마침내, 너머의 것을 보게 되는 순간.

삶의 유한성,
존재의 시간성.
극한의 무의미
시간의 불꽃.

눈의 침묵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 P350

눈이 소리를 빨아들이며
내 목소리, 새의 소리도 빨아들일지 모른다는 생각

바람이 그치고 마침내 오직 눈만이.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며 모든 음향을 흡음하는 눈만이.

이곳은 그녀의 집.
톱을 깔고 자는 어머니와
밤이면 섬망에 시달리며 산으로 올라가는 아버지의 집.

행렬.
그 모든 행렬들.
아메리칸인디언들. 아우슈비츠

모든 학살들.
얼굴이 없는 사람들,
뭉개어진 사람들,

내가 그 밤 서울에서 본.
머리가 길고 걸음이 느린,
총을 든 사람들의 행렬. - P351

눈은 얼마나 많은 공기의 틈을 가지고 있는가?


결정들.


죽은 사람의 얼굴에서 녹지 않는 눈.
죽는다는 건 차가워진다는 것.


대사: 숲속을 걷다가 갑자기 깨달았어. 내가 귀신들과 평생을 살아왔다는 걸.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정말 그럴 필요가 없었어. 네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어. 하지만 거절하기 싫었어. 생각했어.아흔아홉 개의, 무한의 혼들을 깎자고. 그리고 맹세로서 작별하자고. 아니, 반대로 하자고 결코 작별하지 말자고 맹세로서. - P352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쓴다…… 쓴다.
울면서 쓴다.


흐름을 끊기 싫어 부엌에 선 채로 요기를 했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돌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온 힘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P353

그보다 앞서 소년이 온다』를 썼던 일 년 육 개월을 기억하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압도적인 고통이다. 그걸 일종의 ‘들림‘이었다고 말한다면 손쉬운 일일 거다. 내가 작가로서 영매의시간을 건너갔다고 근사하게 말한다면.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때 나는 ‘들리지 않았다. 어떤 트랜스 상태에도 들어가지않았다. 매 순간 분명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고통이 나를 부수고 또 부수는 걸 견디면서 작업실에서, 지하철에서, 횡단보도에서, 부엌에서, 이불 속에서 이를 물고 울고 있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사실은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 - P354

그 고통이 대체 무엇이었던가를, 
소년이 온다』를 쓰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도 함께 느꼈다고 말하는 바로 그 고통을. 그 생생한 고통은 대체 무엇을 증거하는 걸까? 설마, 그건 사랑인가? 지극한 사랑에서 고통이 나오고, 그 고통은 사랑을 증거하는 걸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대한 다음 소설을 쓰고 싶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환상성과 현실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것과 별개로 매 순간 분명하게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행여 그런 식의 오해를 받을까봐 입 - P354

밖에 꺼내본 적 없는 어떤 생각을, 얼마 전 격월간 문예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인터뷰어였던 동료 소설가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거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이 되기 이전에 노트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나요? - P355

죽음에서 삶으로 가는 소설. 절반 죽어 있던 사람들이 생명을얻는 소설. 바다 아래에서 촛불을 켜는 소설.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는데∙∙∙∙∙∙ 항공기 조종사가 우울증을 앓다가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추락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살아 있던 사람들을 아주 많이 살해하며 죽었어요. 그런데 절반 죽은 또다른 사람이, 그 항공기 사건과는 정반대로, 삶으로 건너오면서 죽어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날 수도있지 않을까요? 물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을 수 있지만, 죽은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건 현실에서 불가능한 방향이죠. 하지만 어떤 한 순간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반쯤 죽어 있던 사람이 혼들과 함께, 단 한 순간 삶으로 함께 건너올 수 있지 않을까요? - P355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던 과정에서 내가 구해졌다면, 그건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결과였을 뿐이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다.


날마다 정심의 마음으로 눈을 뜨던 아침들이.
고통과 사랑이 같은 밀도로 끓던 그의 하루하루가.


날개처럼, 불꽃처럼 펼쳐지던 순간들의 맥박이.
촛불을 넘겨주고 다시 넘겨받기를 반복하던 인선과 경하의 손들이. - P356

그렇게 덤으로 내가 생명을 넘겨받았다면, 이제 그 생명의 힘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생명을 말하는 것들을, 생명을 가진 동안 써야 하는 것 아닐까?


허락된다면 다음 소설은 이 마음에서 출발하고 싶다. - P356

아직 추웠을 때 첫 교정지를 받았던 책이 여름의 문턱에서 나오게 되었다.


장편소설 한 편.
단편소설 두 편.
시 다섯 편.
산문 여덟 편.


이렇게 골라 모으기까지 여러 차례 목차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하게 된 결심들 중 몇 개를 약속처럼 여기 적어본다. 어머니에 대해 제대로 된 한 권의 책을 따로 쓰겠다. 십 년 전에 앞머리를 써두었던, 「파란 돌」의 꿈에 대한 독립적인 책도 더 늦기 전에 - P358

쓸거다.


예전의 나는 나와 같은 사람이기보다 닮은 사람(들)이다. 교정지를 읽는 동안 그 사람(들)과 묵묵히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사주에 역마가 들어서인지 무던히도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아왔는데, 오직 쓰기만을 떠나지 않았고 어쩌면 그게 내 유일한 집이었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강윤정 편집자님과 도움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책을 만나주실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2년 늦은 봄
한 강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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