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상처의 시절은 단단히 기억하지,
밀려온 진눈깨비조차
참 따뜻한 나라라고
ㅡ김명인의 시 「여수」 - P9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灣)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것이다.
얼마만큼 왔을까.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간간이 벼락이 빛났다. 무엇인가를 연달아 부수고 무너뜨리는 듯한 기차 바퀴소리,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 P9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무수한 보릿잎 같은 빗자국들이 차창과 내 충혈된 눈을 할퀴었다.
손목시계는 얼추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차가 종착역인 여수에 닿으려면 앞으로도 두 시간 가까이 철로를 달려야 했다.
나는 깍지 끼고 있던 손매듭을 풀어 허리 아래로 늘어뜨렸다. 캐시밀론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좌석 등받이에 상체를 밀착했다. 며칠 잠을 설쳤던 탓에 저절로 눈꺼풀이 감겼으나, 심장은 여전히 초조하게 두근거리며 의식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감은 눈앞에 물고기들이 맴돌기 시작했다. 반경 이십 센티미터가 채 안 되는 둥그런 어항, 그 속에 감질나게 몇 가닥 흔들리고 있는 청록색 수초들, 수초를 투명한 지느러미로 건드리며 빙글빙글 맴을 그리는 금붕어,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불현듯 나는 두 개의 층계를 한꺼번에 헛디딘 것처럼 소스라치며 가수면에서 깨어났다. - P10

그 물고기들은 죽었다.
어제 아침 나는 여섯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죽은 금붕어를 비닐봉지에 싸서 대문 밖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동안 그녀의 물고기들은 아침마다 한 마리씩 두 마리씩 허연 배를뒤집으며 수면으로 떠올랐다. 자흔이 하던 것과 똑같이 정성껏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었지만 나는 그것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쓸모없어진 어항의 물을 쿨링쿨렁 소리를 내며 수챗구 - P10

멍에 비웠다. 미끈거리는 어항 유리 안쪽을 물비누로 씻고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아낸 뒤 높다란 선반 위에 엎어놓았다. 갑작스러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욱, 하는 신음과 함께 타액과 물이 싱크대 홈통에 토해졌다. 뱃속에 남은 것들을 마저 게우기 위해 나는 목젖 깊이 검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용해되지 않은 파랗고 노란 알약과 캡슐들이 흐물흐물한 위액을 뒤집어쓴채 토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다시 욕지기가 치밀었다. 수챗구멍으로 알약들을 밀어 넣었다.
구토한 다음이면 으레 입속에 고여 드는 낯익은 체념과 회한 따위를 곱씹으며 나는 거칠게 수도꼭지를 틀었다. 맵싸한 소독 약품냄새가 풍기는 수돗물에 입을 헹구었다. 세면장의 계단 턱을 무릎으로 짚고 방문을 열었다. 고무 슬리퍼를 벗어 던졌다. 장판 바닥에 쓰러지듯 상체를 엎디었다. 이런 순간에 자흔의 목소리를 떠올리고싶지 않았으므로 이마를 방바닥에 찧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나직한 목소리의 환청은 이미 귓전까지 다가와 내 먹먹한 고막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 P11

뭐가요? 뭐가 더럽다는 거예요?
자흔이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어깨를 붙들고 있는 자혼의 몸을 밀어냈다. 다시 홈통에 머리를 처박고 토하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씻어낸 쓰라린 뺨을 타고 생리적인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이, 목줄기가 따끔따끔하게 젖었다. 눈물로흐릿하게 가려진 시야 옆으로 자흔의 맨발은 차가운 세면장 바닥을 안타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 그만해요.
자흔은 내 등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그녀의 서늘한 손가락이 내뜨겁게 젖은 이마와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내가 그 손짓을 뿌리치자 자흔은 둘 데 없어진 열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허공에 펼치며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었다.
이젠 괜찮아요...... 그만해요. - P12

해질녘에 밀려 나가는 썰물처럼 환청은 
천천히 귓가에서 잦아들었다. 자취방 유리창 가득 늦가을 오전의 다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장판 바닥에 엎디었던 몸을 굼벵이처럼 모로 누이며나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명치 끝이 찢기듯이 아파왔다. 적요한 햇빛 속으로 무수한 먼지 입자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아름답구나, 하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먼지는 진눈깨비 같았다. 먼 하늘로부터 춤추며 내려와 따뜻한 바닷물결 위로 흐느끼듯 스미는 진눈깨비……, 여수의 진눈깨비였다.
열차는 여전히 비바람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습기 먹은 스피커를 통해 차장은 불분명한 목소리로 남원(南原)역이 가까웠음을 알려왔다. 추레한 차림의 아낙들이 둘씩 셋씩 일어나 선반에서 짐을 내리고 우산을 챙기느라고 부산스럽게 움직이기시작했다. 여수까지 열차는 아직도 많은 역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 P13

그때 나는 얼핏 그 어둠이 자흔의 지성의 그늘일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지 외로운 표정일뿐이었다.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서 손쉽게 발견되는 표정이기도 했다. 열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에 서 있는 얼굴들, 늦은 밤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차창 밖의 휘황한 네온사인을 바라다보는 눈빛들, 출근 무렵 살갗이 터질 듯한 지하철에 올라 말없이 몸 부대끼는 사람들의 메마른 광대뼈 같은 데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기쁠 흔(欣) 자예요‘라고 뇌까리는 자혼의 목소리는 마치 그 모든 사람들의 외로움을 쌓아다가 반죽해놓은 흰떡살같이 고즈넉했다. - P14

심지어 자흔은 자신의 몸조차 함부로 
다루었다. 옷을 갈아입을때 보면 얻어맞은 사람처럼 몸 여기저기에 푸릇푸릇한 멍이 들어있기 일쑤였고, 공장에서도 바늘에 곧잘 손이 찔리는지 검지나 엄지손가락에서 소형 밴드가 떠나는 날이 없었다. 주말 같은 때에 시장에 같이 다니다 보면 자흔은 유난히 사람들과 어깨를 잘 부딪쳤다. 유리문이 없는 줄 알고 심상하게 지나쳐 가려다가 이마와 무릎을 찧곤 했고, 뒤에서 다가오는 승용차나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곤 해서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자흔과 함께 걸을 때면 나는 어린아이를 동반한 사람처럼 그녀가 행여 차에 치이지나 않는지, 무엇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지를 살피느라고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자흔은 마치 알지 못하는 무슨 거대한 뒷힘에 보호라도 받고 있는 양 태평하고도 무심하게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 P25

결국 기찻간에서 발견된 그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평생토록 떠돌아다니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하며, 자흔은 짐짓 일그러뜨린 입술로 웃어 보였다.
......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자흔은 갑작스럽게 정색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잔뜩 웅크려서 모로 누웠던 몸을 반듯이 누이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괴롭지도 않아요. - P40

여름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인과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만 같은 울컥울컥한 무더위가 한 달도 넘게계속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처럼 잘 지내고 있는 룸메이트를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 탓에 차츰 사그러들고 있었던 내 결벽증이발작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온갖 눈병과 귓병이 지하철과 버스 손잡이를 통해 옮겨다녔다. 나는 내 살갗에 다른 사람의 살이 닿는 게 싫어서 기를 쓰고 세 정거장 네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다녔다. 복사열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위에서의 체감 온도는 오십 도에 가깝다고 했다. 땀은 이마에서.
목에서, 겨드랑이에서, 사타구니와 종아리와 발가락 하나하나에서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렸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퇴근하여 자취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온몸의 피부가 발갛게부어오르도록 비누칠을 하고 수건으로 문질러대곤 했다. 몸에 땀이 차는 끈적끈적한 느낌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땀샘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 P41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부두 시멘트 바닥이 급경사로 기울었다. 미선이를 집어던진 아버지는 이번에는 반항하는 나를 목에 감아 안은 것이다. 짙푸른 물살 속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눈과입과 코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짠물, 짠물.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젖은 시멘트 바닥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 위에서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흰 적란운 덩어리들이었다.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사람들의 입에서 ‘살았다‘ ‘살았다‘ 하는 낮은 탄성들이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갔다. 방금 짠물과 음식을 토해 엉망이 된 윗옷자락에 손바닥을 비비며, 누운 채로 나는 빠개질 듯한 고개를 쳐들었다.
죽을라면 혼자 죽을 것이지 어쩐다고 죄 없는 어린 것들을.... - P53

자흔이 떠난 뒤의 나흘 동안 나는 한 번도 책장과 창틀의 먼지를 닦지 않았다.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집요한 걸레질도, 때묻을 겨를도 없는 흰 걸레를 몇 번이고 두들겨 빨아야만 했던 강박 증상도 사라지고 없었다. 퇴근하여 돌아와 누우면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평화가 피로한 육신을 어루만지며 밀려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 틈으로 적요한 햇빛이 춤을 추었다. 자흔의 말간 얼굴이 그 햇빛과 먼지 속에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예리한 칼날이 겨드랑이로부터 젖가슴까지의 살갗을 한 꺼풀 한 꺼풀 저미어오는 것같은 슬픔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그러나 토악질만은 멈출수 없었다. 이제는 ‘왜 그런 짓을 해요?‘라고 물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흔이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 놓고 구역질을 했다. 그녀의 부재를 확인할 때마다, 내 더러운 손바닥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욕지기를 느꼈다. 내가 뿌리친 자흔의 손, 그녀가 가지런히 허공에 펼쳐보이곤 했던 열 손가락들이 내 수많은 혈관들을 비집고 살갗 속으로, 숭숭 구멍 뚫린 뼛속으로 파고들었다. - P57

저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승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역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듯이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쳤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 키득키득, 한옥식 역사의 검푸른 기와 지붕 위로 자혼의 아련한 옷음소리가 폭우와 함께 넘쳐흐르고 있었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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