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규는 언제부턴가 비정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가 마신 독이 그의 얼굴에 냉정한 껍질을 응고시켜오고 있었다. 때로 인규는 자신의 비정함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껍질을 부술 수는 없었다.
그는 늦은 밤에 숲을 헤매다가 덫에 걸린 짐승과 같았다. 인생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는 덫에 걸렸다. 그는 새벽을 기다렸다. 누구도 그를 도울 수 없었으므로, 울부짖고 신음하는 것에마저 지쳐버렸으므로 이제 그는 날카로운 덫에 찢겨 피가 흐르는 다리를 핥으며 기다렸다.
새벽은 고통을 멎게 해줄 것이었다. 박명 속에서 신(神)의 얼굴올 한 사냥꾼이 걸어올 것이었다. 자신의 노획물을 확인하고 기뻐하며, 솜씨 좋은 사냥꾼은 일격에 그를 사살해줄 것이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면, 하고 인규는 생각할 때가 있었다. 진규가 자신의 인생의 덫이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가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한다 해도 새벽을 기다리는 일 외에 그가 할일은 없었다. 덫에 걸리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그 새벽을 만날 것이 아닌가? 인규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뿐이었다. - P76

인규는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유흥가를 걷고 있었다. 아직 집으로돌아가지 못한 수십 명의 취객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차도로 내려서 있었다. 인규는 그들의 어깨를 헤치며 앞을 향해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대학병원의 담길이었다. 외등을 에워싼 가로수 잎들이 서늘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음습한 길을 따라 걸어온 연인 한 쌍이 인규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것이 인규에게는 꿈과 같이 느껴졌다. 물 먹은 솜 같은 다리가 내딛는 보도블록, 칼칼하게 목구멍으로 감기는 밤공기, 이 모든것들이 어느 하나 인규에게는 살아 있지 않았다.
달리고 싶다. 라고 인규는 생각했다. - P77

그가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달릴 때뿐이었다. 그때만은 별들의 운행이 그의 귀에만 거대한 음향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가 바깥 공기와 섞여 춤추는 기분이었다. 오로지 그때에만 인규의 영혼은 자신의 가련한 몸뚱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몸뚱이는 인규의 어린 시절 동구 밖 공터에 버려져 있었던 진규의 몸뚱이와 같았다.
그러나 인규는 더 이상 달리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숫제다리를 끌며 걷고 있었다. 한기를 느꼈다.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어깨를 움츠린 채 그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 어떤 덫에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야근을 마치고 몸살을 앓으며 혼자서 아파트로 돌아가던 길들을 인규는 기억했다. 양손에는 일거리를 싼 짐이 들려 있었고 오한 때문에 이가 부딪쳤다. 가등이 꺼진 도로변을 걸으며 인규는 "걷다 보면 끝난다. 걷다 보면 이 길은 끝난다"라고 소리 내어 중얼거려보곤했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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