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사육제
모두 그것을 미친 여름이라고 불렀다. 사월이 다 가도록 우박 같은 진눈깨비가 흩뿌려대더니 오월이 되자 봄도 없이 수은주가 삼십 도를 오르내렸으며, 유월로 접어들면서는 유황 가스 같은 아열대 기류가 창백한 행인들의 숨통을 틀어막았다. 태양은 제 혈관의 뜨거움에 지레 숨이 막힌 미친 여인처럼습기 찬 옷자락을 섶섶이 열어젖힌 채 비지땀을 흘렸다. 행인들은무더위에 단련되지 못한 허약한 몸을 이끌고 높다란 빌딩의 그늘이나 가로수 그림자를 찾아 어기적거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지친 호흡기와 사타구니를 식혀줄 선선한 밤바람이었으나, 하지가 가까웠으므로 땅거미가 깔리기까지의 긴 오후 동안 끈적거리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묵묵히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마른 화선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이 거리는 황급히 어둠에 뒤덮였다. 러닝셔츠 바람의 남자들이 둘씩 셋씩 무리를 지어 소줏집으로 들어갔다. 찻집과 상점들이 불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거리 여기 - P82
저기에서 숨구멍을 틔우는 것 같은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때 묻은 적갈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두 손으로 내민 거지들이 지하보도에포진하고 앉았다. 그들 앞을 무심하게 지나쳐 가는 행인들 저마다의 얼굴에는 지나간 한낮의 무더위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구두 소리에는 차츰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마침 밤이 왔으므로이제는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는 것처럼, 더 이상 죄지을 필요도 뉘우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등과 어깨를 겹겹이 포갠 그들은 옆과뒤를 살피지 않고 앞만을 향해 피로한 미소를 지으며 지하보도를흘러가고 있었다. 그 행인들의 물결에 떠밀려 나는 후텁지근한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 P83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방금 빠져나온 지하철역 출입구를 뒤돌아보았다. 사각의 출구는 마치 수많은 새끼들을 줄지어 해산하는 짐승의 피 묻은 자궁 같았으나, 나는 오히려 그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출입구의 더러운 계단 턱으로 되돌아가주저앉고 싶은 충동도 함께 느꼈다. 지하철 안에서부터 간신히 지탱해온 두 무릎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 후들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베어 먹다 말고 뱉어놓은 살덩어리 같은 달이 떠 있었다. 이지러진 달의 둥근 면은 핏기 없이 누리끼리했고, 베어져 나간 단면에는 검푸른 이빨 자국이 박혀 있었다. 그 깊숙한 혈흔(血)을타고 번져 나온 어둠의 타액이 주변의 천체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몸을 먹빛 피멍으로 물들인 채 낮은 소리로 신음하며뒤척이고 있었다. 이따금씩 머리를 들어 그 하늘을 치어다보면서, 고꾸라지려는 무 - P83
릎을 힘주어 가면서 나는 꼿꼿이 앞을 향해 걸었다. 어둠은 수천수만의 현란한 색채를 띠고 눈앞에서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어둠들이 창(槍) 날을 세우고 덤벼드는 족족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파리한 가로등 불빛의 입자들. 차량들의 꽁무니마다 매달려 몸부림치는 붉고 노란 후미등의 불빛들을 나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마침내 아파트 정문에 이르러서야 나는 사방을 탐색하던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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