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
모든 창에 불이 꺼질 때 야간열차는 떠난다. 머리를 푼 혼령 같은 어둠이 검은 산을 적시고 검은 강물에 섞이다가 아득한 지반(地盤)아래로 가라앉을 때, 야간열차는 오래 참아왔던 고함을 내지르며달려간다. 수많은 눈(眼) 같은 차창들이 번쩍인다. 식어가던 선로이 불꽃이 튄다. 제 정수리로 어둠을 짓부수며 야간열차는 무서운속력으로 새벽을 향해 미끄러져간다. 나는 그 야간열차에 대한 이야기를 동걸에게서 들었다. 동걸은 덩치가 좋은 녀석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만큼큰 키에 가슴이 벌어졌다. 녀석의 목소리는 그 우람한 공명(共鳴)통에서 울려 나오는 것이니만큼 남달리 굵고 우렁찼다. 한번 웃어젖히면 주위에 있던 모르는 사람들까지 놀란 얼굴로 돌아보곤 했다. - P149
내가 보기에는 몸이 세 조각이라도 모자랄 것 같은 것이 동걸의 생활이었다. 다른 사람이 염려하거나 관심을 둘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그는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했다. 완벽해 보이는 녀석의 모습을 나는 속으로 선망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모든 것에 실망하고 있었고 그 실망을 견디기 위해모든 것을 빈정거리고 있었다. 나에게 정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도 그것을 부려둘 데가 없었다. 정열이 달구어질수록 나는 그것을 짐스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내보일 수 있는 행동은 술을 마시는 일과 친구들이 놀랄 만한 냉소적인 농담을 적시에 내뱉는 일뿐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겉늙었다고 말했다. 동걸은 나와 달랐다. 일분일초를 맹렬하게 싸워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볼 때면 서커스에서 불을 토하는 사나이를 떠올리곤 했다. 얼굴은 검댕투성이이고 벗은 상체에 번들번들 땀이 흐르는 동걸의 입에서 뜨거운 바람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 상상은 나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 P153
동걸은 자신의 인생 전부를 오래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녀석이 무서워졌다. 녀석은 누구보다 당당했고 누구보다 강했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리분별이 정확했으며 모두에게 열정 어린 선의를 베풀었다. 떠나리라는 것 때문에 동걸은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강할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탈출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줄 야간열차가 있으므로 그는 어떤 완성된 인생도 선망할 필요가 없었다. 살아가며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오욕들에게도 그는 무신경할 수 있었다. 나는 지난밤 동결이 어둠 속에서 지어보였던 뜻 모를 미소를 기억해냈다. 내 머리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멍해졌다. 그렇다면 그웃음은 무엇인가. 그때 녀석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실낱 같은 탈출의 희망을 체념하고 있었던 것일까. 체념해버린 채 웃고 있었던 것일까. - P176
나는 음험하게 엎드린 여러 겹의 선로들을 보았다. 검은 화물차들이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광활한 역의 동쪽에는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있는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서편 하늘에는 우는 눈썹을 걸쳐놓은 것 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껍데기였다. 모든 것은 꿈이었다. 이 새벽, 출근하기 위해 머리를 감는 선주, 아침 밥상, 주름살투성이의 어머니, 석유곤로에 데워진 세숫물, 아랫목에서 뒤척이는 동걸의 분신, 그것이 현실이었다. 삼 년 전 야간열차를 탔을 때 그러했듯이 그 서울의신새벽을 내가 헤매고 있었다. 객실의 환한 차창이 비추지 않는 곳으로 걸어가면 마음은 어두웠고, 객실의 창이 비추는 곳으로 가면 다시 마음이 밝았다. 발차를 알리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를 나누던 차장과 승객들이 객실로 올라왔다. 호루라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간열차의 마지막 객차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휑뎅그렁한 승강장에 혼자 남아 있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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