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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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어디로

     여행하는 나무-호시노 미치오지음, 김욱 옮김, 갈라파고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이규원 옮김

                                           청어람미디어

  다큐 지구의눈물 시리즈3탄인 [아프리카의 눈물]을 보다가 [여행하는 나무]가 생각났다. 생각난 부분의 기억이 맞는 건지 안달이 났다. 결국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펴든 책에는 툰드라에서 야영을 하던 중에 잔뜩 찌푸린 하늘을 보며 비가 올까 걱정하는 미치오에게 인디언 알이 웃으면서 했다는 한 마디.
  “미치오, 그런 걱정하지 마. 비가 올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 오는 거야. 그칠 때가 되면 자연히 그쳐.” 자연의 일부인 알은 자연이 만들어주는 세계에서 안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잊어버리는 우리만 작은 변화에도 기다리지 못하고 안달할 뿐. 작은 일에도 전전긍긍하고 조바심 내는 내 자신이 가여워져서 책을 다시 읽는다. 처음인 듯 새롭다. 거친 숨결 또한 어느덧 고요해진다. 
  지금의 세계 곳곳 모든 환경변화들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논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이 땅에서 파헤쳐지고 있는 강들은, 흐르고 싶은 곳으로 흐르지 못 할 물들은, 그 강과함께 사는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생각하면 우울하지만 우리는 머잖아서 우리 강 때문에 흘려야할 눈물을 다큐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로 호시노 미치오라는 일본의 야생사진작가를 처음 만났다. 책속에는 역시 처음 만나는 알래스카의 경이로운 사진들과 영화 같은 모험과 놀라운 경험들로 가득했다. 그는 알래스카의 장대함과 그 장대함을 구성하는 연약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 생명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사진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를 알래스카로 이끈 것도 헌책방에서 만난 한 장의 사진, 조지 모블리가 찍은 쉬스마레프마을의 전경이 담긴 사진을 보고 알래스카를 향한 동경어린 편지를 띄우게 된다. 운명처럼 6개월이 지나서 촌장이 보낸 답장을 받고 그는 알래스카와 마침내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하는 나무 본문 중에 ‘알래스카에서 온 편지’ (p170)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돌이켜보면 한 줄의 문장이, 한 권의 책이, 한 장의 사진이, 한 소절의 노래가, 한 사람의 영향력이, 찰나에 가까운 어떤 한 순간이, 우리를 얼마나 다른 삶으로 이끌어주는지 놀랍게도 자주 만나게 된다. 
  [여행하는 나무]는 사진이 거의 없다. 먼저 읽은 책이 준 감동을 생각해서 주문했던 기분은 살짝 당황되면서 실망스럽다. 그러나 담담하면서도 생생한 그의 글들이 또 다른 매력의 경이로운 알래스카를 만나게 해준다. 아끼면서, 아끼면서 읽어도 책은 결국 마지막 페이지를 향하고 이제 어떤 책이 더 나았다는 비교는 스스로에게도 무색하다. 책은 시작을 여는 작가의 말부터 멋지게 읽는 이를 알래스카로 초대한다. 관광지 알래스카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알래스카, 사진 속의 알래스카가 아니라 삶으로서의 알래스카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이야기를 조근, 조근한 속삭임으로 듣게 된다. 

 

  [알래스카의 강변을 거닐다 보면 이 땅의 상징적인 풍경들과 마주칩니다. 강가 제방에서 수평으로 길게 누운 채 자라 있는 등피나무, 기나긴 세월 동안 조금씩 대지를 침식한 물줄기가 어느새 그 흐름을 바꿔 숲으로 향합니다. 나무들은 하나둘씩 강물에 휩싸이고, 저마다의 생을 마감합니다. 유속이 빠르고 경사가 심한 강일수록 더 많은 대지를 침식하고, 더 많은 나무들을 휩쓸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물에 휩쓸린 나무들은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 거칠 것 없는 혼돈된 풍경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모든 존재가 늘 같은 장소에 멈춰 있지 않다는 진리를 내게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벌써 꽤 오래전 일인데, 처음 북극해 해안에 당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나는 그때 커다란 유목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 티티새를 사진에 담고자 풀숲에 숨어 있었습니다. 나무가 자랄 수 없는 북극권의 툰드라에서 어떻게 이토록 근 유목이 해안까지 떠내려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 나무는 강물의 침식 작용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나갔고, 그 후 다시 긴긴 여행 끝에 머나먼 북쪽의 해안에 당도한 등피나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곳이 여행의 종착지였던 것입니다. 가지는 모두 떨어지고, 껍질도 완전히 벗겨진 채였습니다.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옛 시절은 간 데 없고, 이제 뿌리가 흉물스럽게 드러난 벌거벗은 유목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티티새에겐 날개를 유지 할 수 있는 아주 요긴한 장소였겠지요. 또 이곳을 드나드는 북극여우에겐 영역표시를 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었을 겁니다. 근처에 있는 대지는 천천히 부패하는 유목을 흡수해 꽃들에게 전해줄 것이고, 그래서 완전히 썩어버린 다음에는 이곳에 꽃들이 만발할지도 모릅니다. 먼 바다에서 떠내려 온 유목이 아름다운 유목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생과 사의 관계가 마치 여행처럼 느껴졌습니다. 
  알래스카에 도착한 후로 어느덧 17년이 흘렀습니다. 한때는 뿌리 없는 풀처럼 여행자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곳에 집과 가정이 있습니다. 관광객의 입장이었던 내가 이곳 주민이 된 것입니다. 그 후로는 알래스카의 풍경이 모두 새롭게 보입니다. 이 책은 그런 심정을 담아 오랫동안 기록해온 결과물입니다. 저 등피나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어쩌면 등피나무를 툰드라벌판까지 인도해준 강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버들난초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이 꽃이 만발하면 알래스카의 여름도 끝이 날 것입니다. 앞으로 한 달쯤 지나면 오로라가 밤하늘을 가득 메우겠지요. 그리고 또다시 극북의 아름다운 가을이 시작될 것입니다.] 작가의 말.

  [무한한 세께 저편으로 흘러가는 시간들은 계절을 통해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이란 얼마나 멋진 생명인지 매일같이 감탄할 뿐입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오늘의 풍광은 내년에나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약 때문에 더 많은 그리움을 남깁니다. 오늘과 같은 그리움들이 우리들의 인생에서 과연 몇 번이나 찾아오는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생명을 품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알래스카의 대지처럼 인간의 삶을 작고 나약하게 만드는 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알래스카의 가을이야말로 나에겐 그런 힘을 절감케 하는 계절입니다. ] p38, 39 
  

  이 페이지들은 내가 꼭 알래스카에서 보내 온 편지를 한 통 받은 것 같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지인이 보내 온, 아름답고도 짧은 알래스카의 가을이 담담하게 담긴 편지를 설레면서 읽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카리부의 새끼가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원에서 태어나는 것도, 한 마리의 검은방울새가 영하 60도의 추위 속에서 즐겁게 지저귀는 것도 단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모든 생명에게는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는 강인함이 있습니다. 또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연학함도 있습니다. 나는 생명이 가진 그 연약함 때문에 알래스카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그저 당연한 일상이 아니라 기적입니다. 오늘 나의 심장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p46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사람의 정성이 묻어났지만, 사람의 정성이 진정한 자연의 생명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생명의 약동이야말로 자연의 위대한 힘입니다. ]p74

  [북극성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이 별에는 사람의 기억을 되돌리는 외로운 상념이 깃들여 있다. 그러나 수천 년, 혹은 수만 년이 흐른 뒤에는 북극성의 위치가 바뀐다고 한다. 그때쯤이면 지금 내가 바라보는 저 자리에 다른 별의 추억이 깃들 것이다. 모든 생명은 바로 이 순간에도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별도 예외일 수는 없다. 
  손만 뻗으면 곧 닿을 것 같은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까게 느껴진다. 저 하늘을 가득 메운 별빛은 몇 만 년 내지는 몇 억 년 전의 빛이다. 길고 긴 여행 끝에 바로 오늘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저 작은 별빛에 몇 광년의 세월이 숨어 있다니, 매일 밤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별빛은 우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진 페이지인 셈이다. 그러나 말로는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p148

  [인생의 기로라고 느껴지는 순간, 먼 옛날의 풍경들이 아른거리면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마다 알 수 없는 힘이 솟고 위안을 받기도 한다. 이 아이들에게 오로라가 바로 그런 풍경이 되길 바란다.] p154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도 또 하나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또 하나의 시간을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마치 하늘과 땅이 서로의 차이를 좁힐 수 없는 것처럼.] p161

    [오늘 하루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지 못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근원적인 슬픔은 바로 이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분명 내 곁에 존재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고 또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 인생에 감춰진 고독의 베일이 벗겨진다는 것을 나는 조지와의 만남을 통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p177

  [인간의 삶은 타인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타인은 내 이웃이 될 수도 있고 자연이 될 수도 있다. 한 생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명이 사라져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숙명이다. 인간도 이 같은 숙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모습이 다를 뿐이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힘 역시 약자의 희생에서 나온다. 어떤 면에서는 알래스카 대지보다 더 춥고, 살벌한 곳이 현대사회인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이 알래스카 대지를 피로 물들인다는 이유만으로 에스키모와 인디언의 생활을 야만적이라고 말한다는 이는 자기 자신의 범죄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냥에 성공한 에스키모들은 짐승의 영혼을 달래고, 그 희생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알래스카의 율법이다. 에스키모들은 자신들 또한 늑대와 고래와 곰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곰의 피를 마셨지만, 내일은 곰이 나의 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한 생명을 희생시켰듯이 자연은 나를 희생시켜 다른 생명을 살릴 권리가 있다.] p244, 245 
   

  밑줄 그어 인용한 다른 페이지도 그랬지만 특히 이 문단은 감동적이면서 가슴 서늘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내용을 쓴 것은 훨씬 오래 전이었을 텐데, 그는 1996년 8월 8일 러시아 캄차카 반도 쿠릴 호반에서 취침 중 불곰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오늘은 곰의 피를 마셨지만, 내일은 곰이 나의 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한 생명을 희생시켰듯이 자연은 나를 희생시켜 다른 생명을 살릴 권리가 있다.”  향년 43세. 그는 그렇게 떠나갔고 그가 생전에 쓴 책들[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가 2005년 7월, [여행하는 나무]는 2006년 5월 우리에게로 왔다. 여행하는 등피나무처럼 그렇게. 

 

  [결과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는 단어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경과에 상관없이 지나온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진정 의미를 갖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쌓인 시간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인생일 것이다. 
  볼을 스치는 북극 바람의 감촉, 여름철 툰드라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 백야의 엷은 빛,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작은 물망초…….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 풍경에 마음을 조금 얹어서 오감의 기억 속에 남겨놓고 싶다. 아무 것도 낳지 않은 채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소중하게 누리고 싶다. 경황없는 세상의 삶과 평행을 이루며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디에선가 항상 느끼면서 살고 싶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언젠가 내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p299

    마지막 장에는 노을을 배경으로 불빛을 응시하고 있는 저자의 사진이 담겨있다. 장엄한 알래스카의 작고 연약한 생명처럼 그는 그렇게 서있는데 여운을 남기는 한 줄로 [여행하는 나무]를 덮는다. 
  더 이상 강이 파헤쳐지지 않길, 그럴 일 없을지 뻔히 알면서도 단지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 무력한 기원을 간절하게 얹어서. 
   [오늘 우리들의 삶은 내일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를 준비하는 여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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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 시인선 97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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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출처; [게 눈 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0)]
황지우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


  한라산, 영실에서 윗세오름 대피소까지 길은 오롯이 눈길이었다. 
  바람 없이 차고 맑은 기운만 가득한데 구름은 산을 희롱했다. 쏴아아~ 몰려서 산의 모습을 감추는가 싶으면 어느새 드러내놓곤 하였다. 눈으로도 구름으로도 다 감춰지지 않은 기암절벽은 장.엄.했다. 본디 장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러고저러고 아무런 말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좋을 장엄함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그저 오래보아도 혹하는 풍경으로 장.엄. 했다. 
 

  눈으로 폭신폭신한 구상나무 숲길은 너무 짧았다. 
  아, 짧아서 짧은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이 아쉬워서 짧은 매혹적인 길이었다. 바쁘지 않다. 정상은 아니어도 좋았다. 
  올레에서 배운 것이다. 놀멍놀멍 아름다운 숲길을 왔다갔다 고요를 즐겼다. 늘 달리면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은 잊어도 좋다. 와랑와랑한 햇볕속의 열무 밭도, 종아리를 성치않게 만들던 모기도, 빨리 달라고 소리치던 성난 손님들도, 반쪼가리가 되어버린 펀드도, 놀면 야금야금 줄어들 통장의 잔고도, 아무런 대책 없는 멀지않은 노후도 잊었다. 나, 여기에 이르기 위해 먼 길 걸어왔으리. 산은 언제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을.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주어도 은빛, 은빛은 황홀했다. 윗세오름에서 만난 눈보라마저도 황홀했다. 차운 의자에 앉아있는 나를 무심한 듯 쳐다보던 까마귀는 눈보라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까만색이었다. 우리는 백로더러 까마귀 곁에는 가지도 말라고 배웠다는 것을 녀석은 알까? 제 삶을 불편 없이 충실히 살아가는 까마귀를 검다고, 흉조라고 몰아가는 것은 편견이라고 녀석은 내게 따지러 온 모양이다. 알았다, 까마귀야. 고맙고 고맙구나!

   돌아와서 문장에서 배달된 '눈보라'를 듣는데 윗세오름에서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아니, 더 거친 눈보라에 뺨이 얼얼하게 서있는 느낌이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몇 번을 다시 들어도 같은 말을 한다. 시를 듣는 내내 손이 시리다. 발이 시리다.

  다시 처음부터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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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고급장정본) - 정진규 시선집
정진규 지음 / 도서출판 시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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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성찬

                        

                                    신달자

                   

 그제는 속초 바다와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 바닷속 사정 많이도 올라와 있었다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싱싱할수록 쫄깃한 물결이 오래 입안에 메아리쳤다 얼마나 파도쳤는지 한입 가득 들어오는 날것들 쫀득쫀득하게 찰지다 바다는 외곬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하느라 다른 말을 다 잊어버렸나 상 위에서도 이빨 사이에서도 철썩 그 한 마디만 되풀이했다 나는 바다의 속만 파먹었다 파도의 아픈 발자국이 우둘우둘 씹혔다 바다가 무거워 허리가 반으로 접힌 붉은 새우는 내 시선이 포개져 더 오므라진다 냅다 입으로 넣어버렸다

 어제는 설악산과 저녁 겸상을 했다 밥상에는 구구절절한 산속 사연들이 올라와 있었다
 명산의 갈비뼈를 거쳐 여기까지 온 풋것들 저마다 접시 위에서 차분히 고개 숙이고 있다 비닐하우스에서 고속으로 몸을 키우지 않고 서서히 자연의 속도로 하늘의 질서를 잘 견디어온 귀빈들 그 몸속에 폭풍도 천둥도 뙤약볕도 폭설의 수난도 곰삭은 속도로 서서히 안으로 껴안아 온 것 본다 두 번 생을 살더라도 따라갈 수 없는 필요한 잠언들 잎으로 열매로 뿌리로 낱낱이 접시에 싱싱하게 누워 있다 다 견딘 자의 묵묵한 겸손이 산나물 잎 잎에 배어 있다 입에 넣지 않고 바라만 봐도 산 하나 먹은 것 같다

  오늘은 백담사와 저녁 겸상을 했다 상이 비어 있었다


                           신달자 시선집 [바람 멈추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시집 한 권에 오만 원, 오만 원, 허걱~ 하루 일당에 근접한 돈이다.
 하여 정진규 선생님의 활판시집이 출간되었을 때도 망설이다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시 신달자 시인의 ‘사막의 성찬’에서 결국 수저 들고 만 것이다.
 그동안 거의 모르고 있었던 시인의 언어가 잘 차려진 밥상이다.
 하루쯤 굶어도 좋게 하는 고봉밥이다.
 오만 원, 하면 비싸다 여겨지지만 시 백편인데 한 편에 오백 원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뜨끔하다.
 절제하고 절제하면서, 다듬고 다시 다듬어서 내게로 온 시 '사막의 성찬'이 오백 원이라니.......
 비만 오면 찾아 들어야 하는 삽이 '삽'이 되어 오백 원이라니.......
 이틀 치의 일당이 날아갔지만 석 달은 배부를 것 같은 뜨거운 고봉밥이 내게로 왔다.
 글자들이 살아서 가슴에, 머리에 콕 콕 먹힌다. 꼭꼭 씹어 먹어야겠다.



  

놋수저

             정진규

 어머니가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 올리는 삽시 (揷匙)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 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정진규 시선집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 (도서출판 시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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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 제1회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민음의 시 98
이기철 지음 / 민음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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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길과 동행하다

  전쟁의 예고로 흉흉한 날이었다. 노루귀 군락지를 아시는 분의 안내로 노루귀를 보러 가자는 지인의 전화에 집을 나섰더니 전철역엔 반전시위가 한참 중이였다. 역설적이게도 반전시위는 다가온 전쟁을 더욱 예감케 하는 것이어서 공연히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 확실한 소신으로 반대하는 용기 있는 자세가 부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아닌걸 아니라고 얘기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는 건강 해질 것이다. 명분 없는 반대나 딴지 걸기가 아니라 명명백백한 이론을 앞세울 때는 더욱 그러하다. 역으로 들어서니 화물차에 수 십대의 탱크가 실려서 이동 중이다. 그렇게 가까이, 그렇게 여러 대의 탱크를 한꺼번에 대하고 나니 전쟁이 더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 어마어마한 탱크에 죽어간, 어린 소녀, 미선이와 효순이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바퀴를 보고 있는 착각에 사로잡혀, 어두워지려는 마음이 들지만 세상은 너무도 찬란한 봄이다. 어둠에 맘을 뺏기기에는 너무도 화사한 날씨인 것이다. 찬 기운이 가셔버린 바람에선 더운 기운이 묻어나고 이 햇살에 모든 꽃들은 피어날 것 같기만 하다. 전쟁의 예감도, 이 햇살의 찬란함 앞에서는 맥을 놓고 마는 것이다.

봄길과 동행하다

                       이기철

움 돋는 풀잎 외에도
오늘 저 들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꽃 피는 일 외에도
오늘 저 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일 풀잎들은 초록의 생각에 빠져있다
젊은 들길이 아침마다 파란 수저를 들 때
그때는 우리도 한번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볼 일이다

마을 밖으로 달려 나온 어린 길 위에
네 이름도 한번 쓸 일이다
길을 데리고 그리움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 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 오는
이유를 안다
이런 나절엔 바람의 발길에 끝없이
짓밟혀라도 보았으면

꽃들과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 꽃의 언어로 편지를 쓰고
나도 너를 찾아
봄길과 동행하고 싶다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다

 

  습관적으로 펴든 얇은 월간지에서 이 시가 튀어나와 찾아가는 그 길의 아름다운 동행을 미리 축하라도 해주지 싶은데,,, 그랬다.
  낯설지만 이미 알고 있는 분의 안내로 찾아간 그곳에는 '봄 속에서 길 잃고 봄 속에서 깨어나고 싶은'소망을 품고 싶은 봄 길이 있었다.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것도 아니고 그리 깊은 산 속도 아니건만 조금 걸었어도 깊숙이 파묻히는 안온한 느낌을 그 산은 충분히 갖고 있었다. 한 때 민둥산이었을 거란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나무들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노루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산을 설렘 속에 만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름을 모르고 볼 때의 모든 것들은, 익명성 속에서 단순하지만, 이름을 알고 난 후의 사물은, 얼마나 달라지는지 번번이 느끼곤 한다. 오늘 만날'노루귀'는 어디에도 노루를 닮은 모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꽃이 지고 잎이 나오는 모습이 도르르 말린 게 노루귀와 같다니...겨울을 이기고 봄을 부른 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사진이 아닌 실제의 꽃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이다.

  '길을 데리고 세상을 마중하다 보면 세상이 한번은 저물고 한 번은 밝아오는 이유를 안다'고 시인은 그랬던가!
  손으로 가르켜 준 곳에 눈을 따라가니 앙징맞은 모습으로 낙엽 속에서 수줍게 고개 내민 노루귀는, 살랑살랑 우리를 반기며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10Cm도 안 되는 솜털 보송송한 여린 꽃대를 세우고 하늘거리는 모습이라니...
  담박에 여리지만 완벽한 자세로 태초부터 거기 있었던 듯, 세상을 밝히고 마음에도 활짝 등불이 되어 걸린다. 세상 어떤 등대보다도 환하게.
  내가 그동안 철철이 산을 오르락 거리면서 무심히 밟기도 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지나다녔을 그 길 위에도 노루귀는 그렇게 피어 있었으리. 어디 노루귀뿐이랴! 여전히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많은 꽃들은 그렇게 무심히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고 쓸쓸히 꽃을 피웠다 지리라. 원망 없이 분노 없이 제 몫의 꽃피우기를 멈추지 않을 노루귀를 여기저기 누군가 캐간 흔적이 보인다. 어쩌면 결국은 사람들의 관심이 꽃을, 동, 식물들을 사라지게 만드는지도 모른다고 얘기를 나누면서 이건 무언지? 저건 무언지? 묻기를 반복한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양지꽃, 봄맞이꽃, 개암나무, 싸리나무... 거침없이 대답하는 두 분의 자연 사랑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이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 있기에 희망은 남아 있을 것이다.

 

  지치지도 않게 그 작은 꽃들을 바라본다. 하늘거리는 여린 꽃잎의 떨림 만큼이나 삶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그 작고 여린 몸으로도 세상을 맞서 꽃을 피우고 서있는데, 수 천 수 만 배는 될 몸뚱아리를 갖고도 핑계만 가득하니 꽃 피울 일이 아득해져서 더욱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간절한 의지만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행동하지 않고, 춥다고 웅크려 있으면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꽃을 피우지 못하리라. 노루귀와 함께 한 봄길 동행에는 '일어서라' '일어서라'속삭임이 귀를 후비고 가슴을 때린다.
  작년보다는 올해, 올해보다는 내년, 그렇게 나빠질 것이 당연한 노루귀가 살아갈 환경, 하지만 내년에도 여기 이 자리에서 다시 감탄 할 그날이었음 좋겠다.
  봄 야생화, 작고 여린 풀꽃들이 주는 수백 수천의 언어들. 그저 주어진 봄이 아니라 몸 전부를 걸고 피어난 꽃송이 있기에 봄 있으니, 깨어나 저 봄 속으로 당당히 일어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그렇게 계절은 오고 삶은 계속되고 있는 거라고 속삭인다.
  그래.
  눈을 번쩍 뜨고 봄 길과 동행하자.
  이 봄이 지나기 전에 전쟁도 멈춰있기를 바라면서.

 

 2003. 3. 25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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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9
최명희 지음 / 매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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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요로 내리는 풍경 -백양사   

 

 

 “그렇지요. 벽암과 사천왕과 승병과 의병과 벚나무.”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고맙고 장한 불교에 대한 포상이기도 하고, 그 복원된 절터들이 입지 좋은 산속에 있는지라 군사의 요충지로 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세에 충신 나고, 부모가 병들어야 효자가 나듯이, 호되고도 모질게 양대 전란을 겪은 후에야 호국 호법의 염원이 간절해져서, 어느 때보다도 뜨겁고 강렬한 소원으로, 나라와 백성들은 사천왕같이 힘세고 큰 존재가 자기들을 지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못된 외적은 단칼에 호령하여 물리치고, 나라와 불법은 소중하게 보호하여 주기를 염원하는 마음은 사찰마다 산더미처럼 물밀듯이 밀려들어, 사천왕들은 날마다 태산이 좌정을 한 모양으로 우람하고 용맹스럽게 우뚝우뚝 높아졌다.
 그리고 눈부시게 찬연한 오색단청을 입었다.
 “아까도 잠시 말씀을 드리다가 말았습니다만 임진왜란 이후에 사천왕이 세워진 사찰은 대개 반드시 승군 승병이 일어났던 의병집결소였어요. 그러니 호국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요.
 임진왜란 때 승군 대장으로 활약하신 부휴선사와 그의 제자 벽암대사를 두고 사람들은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답니다. 이분들이 사천왕과 반드시 관계가 있을 법한 것은 묘하게도 제가 다녀 본 절들에 사천왕이 중건된 해가 기록되어 있는 걸 살펴보니. 우연의 일치인가, 벽암대사가 조실로 계실 때 꼭 사천왕을 다시 세우셨더란 말입니다. 간 곳마다.”
 승군과 호국과 사천왕과 식민지의 승려.
 그리고 동경 유학생.
 사천왕 이라면 우선 막연히나마 얼핏 스치며 힐끗 본 인상만으로도 그 어떤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잉걸처럼 이글거리는 눈망울이 툭 불거져 부릅뜬데다 붉은 입에 주먹코. 도무지 우리 마을 주변의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아 기이 기괴한 얼굴. 거기다가 괴력을 발휘할 만큼 거대한 몸체. 후려칠 듯 위압적으로 쳐들어 올린 팔과 악귀를 짓밟고 있는 발들이, 꿈에라도 정다울리 없어 보이지만.
 강호는 만감이 착잡하게 뒤엉키는 눈으로 새삼스럽게 사천왕을 올려다본다. 저 힘을 빌려서 지키고 싶었던 것들.
 나라. 불법.  

 웬일인가.
 눈에 눈물이 돈다.
 지나치게 험상궂어 애기 같아 보일 만큼 순진해져 버린 사천왕의 동, 남, 서, 북 얼굴과, 저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몸에 절하여 바친 낱낱의 염원들은, 얼마나 간절한 눈물이었을까.
 더 무섭게. 더 크게. 더 강하게.
 한 점 한 점 붙이고 새긴 그 눈물이 저렇게 엄청난 과장을 넘어서서 그만 무구에 이르러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무서워서 귀엽구나.
 강호는 저도 모르게 스며드는 마음에 스스로 놀라 의아했다.
 “아이고. 나, 저 얼룩덜룩 칠해 논 것만 없어도 덜 무섭겄등만, 왜 사천왕은 저렇게 꼭 뿔겅 푸렁, 벨라도 요상시럽게 왼 몸뗑이에다 무당맹이로 칠갑을 허고 있당가잉? 어매에. 나는 그리로 안 들어갈라네이. 자네 혼자가소. 나는 부처님 전으다 절 허고 불전 바치는 불제자라도, 그 사천왕 앞에는 안 가고 자프네. 뒷모갱이 잡우땡길 것맹이고 잉. 팍 뚜드러 갖꼬 나를 거시랑(지렁이) 맹이로 대롱대롱 들어올려 불면 어쩌 꺼이여? 저 손아구는 솥뚜껑 저리 가라고 큼지막허게도 생겼그만. 아아따아, 심란시러라. 멋 헐라고 저러고 눈은 기양.”
 “어어이구 참. 알았응게 저리 가드라고잉? 넘의 뒷꼭지 딸옴서 무단히 애민 년끄장 부정타게 허지 말고.”
 입이 싸고 말 못 참는 것도 타고난 업인가.] 

 “벚나무라고요? 일본 국화. 벚꽃?”
 “그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국화를 무엇 때문에 번뇌초 다 깎은 중들의 절집에다 저토록 몇 백 년생 무성하게 진작부터 심어오겠습니까?”
 .......
 “ 절에다 벚나무를 심은 것은 벽암대사였습니다. 이유는 이 벚나무가 곧고도 단단해서 유사시에 병장기로 만들어 쓸 수 있기 때문이었어요. 왜병이 쳐들어오면 가차 없이 저 나무를 베어 깎아서. 구국의 무기로 만들려고.”
 “그렇습니까?”
 ........
 “이제 절간의 벚나무 보는 눈이 좀 달라지시겠습니까?”
 하며 불이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범련사 입구 일주문 언저리에 용틀임하는 아름드리 벚나무들 잎사귀, 푸르게 겹겹으로 짙어지는 무리무리가 녹음의 구름머리를 아득히 이루고 있다.

 

   ‘혼불’ 9권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사천왕을 묘사했다. ‘혼불’을 읽고난 다음, 내가 보는 사천왕의 모습에는 혼을 담아 철필로 글을 써내려간 작가의 시선이 얹힌다. 탄성을 내지르며 꽃으로만 즐기는 ‘사쿠라’ 그 나무를 보는 생각을 다르게 해준 것도 역시 ‘혼불’이었다. 한 편의 서사시로 읽히던 문장들....... 드문드문 그려진다. 책 속에 담긴 역사와 사상과 철학을 통해서 비로소 배우는 것들, 작가의 마음으로, 눈으로, 바라보는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북방다문천왕’.......
 그러나 이제는 뿔겅 푸렁 단청도 퇴색해 무서움 보다는 안쓰런 스산함이다. 세월이 가면 간절한 기원들도 변하는가. 죄여서 사무치는 아름다움으로 그려지던 가릉빈가의 날개도 무거워 보인다. 젖지 않은 마음하나 속세를 지나 승의 문을 넘는다. 

 텅 빈 절집 마당.

 초파일이 지난 지 이틀, 절 마당 가득 염원의 연등을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설선당, 대웅전, 조사전, 명부전에 둘러싸인 마당은 비에 젖는 학바위 홀로 내려앉아 있다.

 고요한 정경. 아늑하게 멈춰있다.
 풍경이 문득 댕강댕강 맑은 소리로 흔들린다. 쏴아~ 마음도 흔들린다.

 대웅전의 본존도, 설선당 좌탈입망의 서옹선사도, 그를 둘러싼 나무들도 저마다 흔들리며 젖고 있다.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은 곳에서 젖으며 흔들리는 것들, 저마다의 초발심으로 흔들리며 저마다 부처가 되어가고 있을까? 비는 내린다.

 화엄.(華嚴)

 젖어드는 세상도, 나무들도 화엄. 
 비는 세상에 내리고 당간지주에 몸을 기대고 서있는 나는 비에 젖는다. 아무리 비를 막아도 막무가내로 젖는다.  .......젖고 또 젖고, 젖고 또 젖는다.

 발길에 쟁쟁 깨지는 슬픔의 돌맹이 몇 개, 마당에 슬그머니 내려두고 나를 부르는 길을 따라 절집을 벗어난다. 길은 구불구불 산으로, 내 안으로 향한 외길이다. 젖은 발자국을 젖은 길에 남기며 간다.

 2004. 9. 7.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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