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오윤의 민중미술에는 민중의 고통이 그냥 고통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 그것을 날 선 투쟁으로 형상화한 적도 없다. 울음도 없고 슬픔도 없이 때로는 익살로 때로는 신명으로 민중적 삶이한껏 고양되어 있다.
오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며 인간적으로도 진짜 좋아한 선배는 시인 김지하였다. 김지하가 『사상계』 1969년 5월호에 발표한「오적」의 삽화는 기실 오윤이 그린 것이었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은퇴했을 때 한 스포츠평론가가 ‘알리(권투선수)보다는 잘했고 펠레(축구선수)만은 못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김지하가 ‘오윤의 그림이 내 시보다 한 수 위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김지하는 오윤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한(恨)과 그늘과 귀곡성(鬼哭聲)에서마저도 흥과 신바람이 터져나오는 오윤 예술의 정점은 어디일까. ‘봄‘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 P198

김지하(1941~2022)를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외면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그의 아우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원이 아니라 해도 김지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자영웅적인 민주투사였다. 70년대에 그가 7년간 감옥살이를 한것은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넬슨 만델라의 옥살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지하는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로 오윤(미술), 김민기(노래), 이애주(춤), 채희완(탈춤), 임진택(창작판소리) 등 민족예술제1세대들을 길러냈다. 80년대에는 생명사상과 동학을 다시 일으킨 - P201

사상가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정확히 1991년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발표한 이후 민주화운동의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처신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사람들조차 그의 곁을 떠났다.
김지하의 변절이란 오랜 세월 가혹한 감옥생활에서 얻은 골병이 낳은 후유증이었다. 7년의 감옥생활 끝에 출소한 그는 말하자면 ‘상이군인‘이었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생명사상의 기치를 내걸고 쉼 없이 나아갔다. 거기까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지하는 가고자하는 길을 너무 빨리 앞질러 갔다. 눈앞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민중은 6월민주항쟁으로 숨 가쁘게 나아가고 있는데, 생명운동을 시대의 과제 - P202

로 삼은 것이었다. 여기서 세상이 김지하에게 기대하는 것과 김지하가 세상에 바라는 것이 어긋나고 그 사이에 큰 간극이 생겼다.
급기야는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정치 노선마저 달리하며, 진보적 지성과 문인을 매도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김지하는 더욱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병적 징후였다. 그때 김지하는 심신이많이 아팠다. 정신과 치료도 여러 번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991년 이전까지 김지하의 삶과 예술은 한국문학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었다. 김지하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원주의 한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내가 이제까지 본 장례식 중 가장 초라하고 쓸쓸하였다.  - P23

2024년 7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 ‘백운서경(白雲書境)‘은 잊혀가는 우리나라 근대의 위대한 역사 인물을 오늘에 되살리는 아주 뜻깊은 전시였다. 근대서예가의 개인전으로 이처럼 대규모 전시가 열린 것은 위창 오세창이후 처음이다. 위창이 전서(篆書)에서 당대 일인자였다면 동농은 행초서(行草書)의 대가였다.
동농이 서예의 대가였음은 당대의 명성이 그러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말해준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비롯한 정자 19곳의 현판과 주련, 안동 봉정사 등 전국 주요 사찰과관아 현판이 그의 글씨로 되어 있다. - P212

동농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암각서도 여러 곳에 있다. 그중 대표작은 서울성곽 창의문 아래 백운동 골짜기에 있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별서 뒤편 큰 바위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대자를 새겨놓은 것이다. 동농은 한때 여기에 백운장을 짓고 살았다.
이 암각 글씨는 단정함 속에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희대의명작이다.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을 ‘백운서경(白雲書境)‘이라 한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을 보면서 나는 동농이 왜 정법의 행서만을 고수했는가 생각해보았다. 동농 이전만 하더라도 추사 김정희 - P223

가 일으킨 ‘완당바람‘이 풍미하여 글자 구성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동농은 철저히 정법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동농의 인품 자체가 그러하였고 또 왕조 말기 어지러운 상황과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는 불우한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에 글씨에멋을 부린다는 것은 세상을 가볍게 사는 태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올곧게 일생을 살아온 동농 김가진은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지조가 있었다. 그래서 동농은 정법의 행서로 일관하였던 것이고 그렇게 낳은 그의 서예는 우리 근대서예사를대표하고 있다. - P224

부모님의 허락을 얻은 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주례 선생으로 장준하 선생을 모실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면목동 장준하선생댁에 자주 드나들어 장남인 장호권 형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그해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로 돌아가셨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주례 선생님만은 인생의 사표(師)로 삼을 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오른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을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선생님과는 한번 찾아뵈었다는 인연밖에 없으며,
또 선생님은 나이가 젊어서 거절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용기 내어 제기동으로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뜻밖에 흔쾌히 승낙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을 불렀다.

"여보, 유군이 결혼을 한다는구려. 술상 좀 내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항상 술상을 내올 명분을 그렇게 강조하시곤 한 것이었다. 사모님은 그놈의 술 좀 작작 마시길바랐고, 선생님은 항시 구실을 찾곤 했던 것이다. - P232

선생님의 주례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것이었다. 당시는 비디오라는 것이 없어 남은 흔적이 없고 내 기억 속에만 있는데 내게는 잊히지 않는 두 마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히 들려온다.

"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 보면 의사 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 P235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 차가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나는 이 충고를 항시 잊지 않았다. 내 인생에 두어 번 큰 갈림길같은 것이 있었을 때, 나는 내 아내에게 판단해줄 것을 물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판단에 따랐다.  - P236

그리고 선생님은 당신의 주례 제자들이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교수도 되고, 문화재청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흐뭇해하셨다. 내가 문화재청장이 되어 경복궁 경회루에 이어 창덕궁 후원과 희정당, 대조전을 개방할 때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시범답사를 했고 그 시간을 그렇게 즐거워하셨다.
사모님인 윤영자 여사님도 우리 주례 제자단을 기특해하셨다. 사모님은 주례 제자 중에서 특히 나를 귀여워하셔서 우리들이 찾아가면 나를 ‘반장‘이라고 하시며 우리 어머니 안부를 따로 묻곤하셨다. 민주화운동 가족모임으로 ‘한결모임‘이 있는데 공덕귀 여사,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 이철 의원의 어머니 모두 돌아가시고지금은 이해동 목사님 부부와 우리 어머니만 아직 생존해 계셔서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함께 버텨온 정이 각별하게 든 것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나는 사모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 P239

백기완(1932~2021) 선생은 평생을 민족통일, 반독재, 노동해방운동에 앞장선 민주투사로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투쟁의 횃불을 내려놓지 않았다. 데모대의 맨 앞장에 서서 바람결에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호랑이 눈매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불호령을 치는영원한 거리의 투사가 백기완 선생의 본모습이다.
그러나 투쟁의 현장에서 돌아오면 백기완 선생은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중적 삶의 싱싱한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이 『장산곶매 이야기』 (우등불 1993)에서 『버선발 이야기』(오마이북 2019)까지 민중설화를 토속어로 이야기한 백기완 선생의 구비문학이다. - P241

외래어는 물론 한자어도 하나 없는 순우리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름(정서)과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든메(사상)와 하제 (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해엔 더 달구름(세월)이 가기 앞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글로 엮으려다가그만 덜컹, 가슴탈(심장병)이 나빠져 아홉 때결(시간)도 더 칼을 댄끝에 겨우 살아났다. 이어서 나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글로 써서 매듭을 지은 것이 이 ‘버선발 이야기‘라.(백기완 버선발 이야기』, 오마이북 2019) - P242

2016년 1월 15일, 우리 시대의 ‘참스승‘ 신영복(1941~2016) 선생님이 기어이 가셨다. 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제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부음이 전해진 그날 밤부터 인터넷에는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글이 쉼 없이 올라왔다. 장례식장에선 선생님 가시는 길에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어하는 조문객들이 열 명씩 조를 이루며 문상하였다. 각계의 인사들이 다녀감이야 마땅한 일이지만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음을 보셨다면 아무리 하늘의 명을받아 가시는 길이지만 잠시 발길을 돌려 생전의 그 밝은 미소로 손이라도 한번 들어주실 만하지 않은가. - P252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합니다.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2018)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그 ‘더불어 숲‘이라 쓴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이는 어쩌면 신영복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 - P256

주고 싶었던 절명구였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스스로 호를 지어 우이(牛)라 하고, ‘쇠귀‘라고 쓰면서 소처럼 우직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만 우리에게 비친 당신의 삶은 그 반대였다. 고단한 삶이 이어지는 힘들고 강퍅한 세상을 살면서도 선생님 같은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위안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과거형으로 돌리자니 너무도 허전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과 글씨들은저 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발할것이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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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유책(有)‘, 즉 ‘사람마다 책임 있다‘는 표어는 차라리 감동적이다.


‘거리 청결 인인유책‘
‘문화재 보호 인인 유책‘
‘문명 창달 인인유책‘


이에 나도 하나 덧붙여본다.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책임 있다.


‘민족 장래 인인유책‘
‘문화 창달 인인유책‘ - P148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 하에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소화하여 이룩한 문화의 내용은 일본의 특질이다. ‘죄다 우리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리 문화를 성숙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독일과 네덜란드로 퍼져 유럽의 르네상스 문화로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는 중국, 한국, 일본이 주요 구성원이 되어 유럽의 문명과 맞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답사기에서 나는 한국과 일본, 두 문화를 계속 비교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정원과 우리나라 정원은 너무도 다르다. 일본은 나무를 일일이 가위질하며 인공미를 극대화하고 한국은 자연미를 더 존중한다.
대구 삼격동에 사는 한 사업가는 일본과의 거래가 많아 아래 윗집에 한국식 정원과 일본식 정원을 꾸며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 - P158

다기에 한번 이 댁을 답사해보았다. 주인에게 정원 만들 때 얘기를 들어보니 두 나라 정원사는 돌 다루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더라는 것이다. 정원에 돌 10개를 깔아놓는다면 일본 정원사는 9개를 반듯이 놓고 나서 1개를 약간 비스듬히 틀어놓으려고 궁리하는데, 한국 정원사는 9개는 아무렇게 놓고 나서 1개를 반듯하게놓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다. 일본은 인공미, 한국은 자연미를 그렇게 구현하는 것이다.
일본과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 있으면서 이렇게 다르다. 한일 두나라가 이룩한 각자의 문화적 결실은 중국의 그것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의 내용을 이룬다. 그 다양한 문화적 성취는 동아시아의 세계적 위상을 그만큼 더 높여주는 것이다.
- P159

일본에는 있고 우리에겐 없는 것, 또는 일본에선 강한데 우리나라에서 약한 것도 많이 보인다. 문화유산의 입장에서 내가 본 일본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장인정신과 직업윤리 의식이다. 이전통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랜 것이다. 1,200년 전, 헤이안 시대에천태종을 일으킨 승려 사이초(最澄)가 세운 절 엔랴쿠지(延曆寺)에는 그가 말한 경구가 큰 비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조천일우 차즉국보(照千一隅 此則國寶)."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나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말해주는 표어다. 그런 정신에서 일본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했고 직업윤리 의식이 형성되었다. - P159

내가 일본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문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모든 제품에서 디테일이 아주 강하다는 미덕을 날았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일본 제품의 가장 큰장점이자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IT시대에 일본이 발전하는 것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는 일본 장인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아날로그에 익숙하여 신용카드보다 현금 사용을 선호하고 인터넷소통이 우리처럼 원활하고 신속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한일 두 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운명적으로 함께 세상을 살아갈수밖에 없다. 이미 두 나라의 경제적 협력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어 있다. 문화적 교류도 한류가 말해주듯 아주 깊이 흘러갔다. 이제 우리는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겠고, 일본은 혐한론을 멈추고 갈등의 원인인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여 두 나라가 공존과 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일본 답사기를 썼다. - P162

신학철은 작품을 팔아가며 근근이 생활을 하였다. 화상들은 좀 예쁜 그림을 그려 와야 하는데 무서운 그림만 가져와 팔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였다.
한번은 그 미술애호가를 모시고 난곡동 달동네 신학철 집까지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신학철은 <신기루>라는 작품을 그리고있었다. 화폭 아래쪽에는 들판에서 농사꾼들이 새참을 먹고 있는데 멀리 한 처녀가 서울로 떠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미술애호가는 아련하게 펼쳐지는 목가적 풍경에 반하여 이 그림을 사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신학철은 이 그림은 아직 미완성으로, 화면 위쪽에 도시 풍경이 신기루처럼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미술애호가가 지금 이 상태에서 하늘만 칠하고 달라고 하니까 신학철은 안된다며 큰소리로 "시골이 이렇게 평화로운 줄 아세요!" 하고 화를냈다. 이런 분이 신학철이라는 화가다. 그래서 신학철이다. 이것이 신학철에 대한 나의 비평적 증언 중 한 대목이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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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이면 국제교류재단에서는 외국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참여하는 한국미술사 워크숍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에 줄곧 참여해온 서양의 한 여성 큐레이터에게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단숨에 정자(亭子)를 꼽았다.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쪽에 정자가 하나있음으로 해서 자연풍광의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며 이처럼 자연과 친숙하게 어울리는 문화적 경관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한국의 표정이라고 했다.
정자는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된 건축문화인데 이 또한 3국의 특질이 다르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 P88

다실로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한 데에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생활속의 공간으로 자연풍광의 문화적 액센트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정자는 생김새보다 자리앉음새가 중요하다. 특히 강변에 세운 정자에 명작이 많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이층이면 누각, 단층이면정자라 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흔히는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 사찰, 서원, 저택, 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생기기도 잘생겼다.
남한의 3대 정자로는 진주 남강변의 촉석루, 밀양 낙동강변의영남루, 제천 청풍 남한강변의 한벽루를 꼽고 있다. 북한에선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 의주 압록강의 통군정 등이 예부터 이름 높다. - P89

정자를 세우는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뜻만이 아니다.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어려움을생각해보게 하고, 민가를 바라보면서는 민생의 고통을 알게 하고, 나루터와 다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를 잘 건너갈 수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두 가지가아님을 여기서 보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운 자를 따스하게 해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이는 멀리 있는 사물에서 얻어낸 것을정자에 모으고, 정자에서 모은 바를 다시 마음에 모아서, 내 마음이항상 주인이 되게 한다면 이 정자를 취원루라고 이름 지은 참뜻에 가까울 것이다. - P91

정자는 고을 사람들의 만남과 휴식의 공간이면서 나그네의 쉼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자는 여기에 오른 문인묵객들이 읊은 좋은 시들을 현판으로 새겨 걸어놓고 그 연륜과 명성을 자랑한다. 이를 국문학에서는 ‘누정문학‘이라고 부른다.
특히 청풍 한벽루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남긴 시가 많다. 퇴계이황, 서애 유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모두 한벽루를다녀가며 시를 남겼다. 이는 옛날에 서울에서 경상좌도로 갈 때죽령을 넘어가자면 남한강 뱃길을 타고 올라와 청풍에서 하루를묵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중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서애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을 때 고향 안동으 - P91

로 가는 길에 지은 시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밤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과연 『징비록(懲毖錄)』의 저자다운 시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서애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국토의 어디로 떠나든 차창 밖으로는 문득 저 멀리 정자가 나타날지니 그러면 고려시대 박윤문(朴允文)이 단양을 지나다가 취운루(翠雲樓)라는 정자를 바라보면서 읊은 시에 공감을 보내게 될 것이다. - P92

관동으로 가는 길목, 저 멀리 보이는 정자 하나
십리 소나무 그늘은 참으로 그윽하구나


정자는 너무도 흔하고 친숙한 것이기에 지나쳐 왔던 것이지만바로 그 점 때문에 ‘한국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내세워도 한 점 모자람이 없다.
이 누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면서 2023년 12월, 삼척죽서루와 밀양 영남루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마침 그즈음 밀양에 문상 갈 일이 있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영남루에 들러 - P92

보니, 밀양강이 맴돌아 가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그 늠름한 자태는 과연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국보답다는 감동이 일어났다. 이제 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려면 유적의 보존실태에 대해 심사받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 주변 환경을 재정비하여야 하고 건축, 문학, 역사 등의 학술대회를 열어 인문적 가치를쌓아야 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하면 아마도 10년 후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 P93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 무료 서비스로 누구든 자유롭게 원문과 번역문을 검색할 수 있다.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조선의 생활사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역사의 대중화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는 수난과 보존, 그리고 활용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록유산의 나라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유산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동학농민혁명기록물』 등 18건이나 된다. 그중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물이다. 유교문화를 가진 중국, 일본, 베트남 등도 왕조의 실록 - P94

이 있지만 그 양과 내용의 다양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Universal Value, OUV)‘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다음 네 가지가 적시되었다.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편찬된 실록은 후손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3. 위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실제 지면 글자 수는 1,600만 정도로, 4,965만자인 『조선왕조실록』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부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 P95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말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종래의 엄격한 방식이 아니라 소략하게 의례적으로 편찬하였고, 또 일제가 정략적 - P95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별도로 취급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일찍이 1973년에 정족산사고본(1,187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된 바 있고, 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봉모당본, 낙질 및 산엽본 등이 국보 제151-6호까지 추가로 지정되었다. 이는 그간의 험난했던 이동과 망실의 역사와 피눈물 나는 보존의 의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다. - P96

『조선왕조실록』은 국초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세종대왕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만일을 위해 4부씩 만들게 하여 경복궁 춘추관(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분산, 보관시켰다. 이것이 4대 사고의 시작이다. 태조·정종. 태종까지는 필사본으로 제작하였으나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1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다.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중종 33년(1538)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었으나 다른 사고본을 필사해서 복원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서울,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불타버리고 6월에는 하나 남은 전주사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 - P96

다. 전쟁에 정신없는 관리들은 땅에 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를 모신 사당인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내장산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는데 888책을 모두 담으려면 60여궤짝에 말 20여 필이 필요하였다.
이에 오 참봉은 태인에 살고 있는 선비인 안의(義)와 손홍록(孫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집안사람과 하인등 3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실록을 내장산 산속 암자로 피란시켰다. 조정에서 실록을 행재소가 있는 해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온것은 이듬해(1593) 7월이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물경 1년 하고도 닷새 동안 내장산에 기거하며 실록을 지켰던 것이다. 그때 안의는 65세, 손홍록은 57세였다. 벼슬도 없는 무명의 선비가 사재를 털어가며 끝내 실록을 지켜낸 것이다. 훗날 이들에게는 별제 - P97

(6품) 벼슬이 내려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의병(義兵) 못지않은 의인)이자 애국자이고 문화유산지킴이의 상징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은 새로 4부를 복간하여 춘추관에 1부,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으로 옮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옮김)에 4대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들 사고의 관리는 사고가 소재한 산의 사찰에 있는 승려들이 맡았다. 정족산의 전등사, 오대산의 월정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안국사가 이러한 역할을 맡아 유사시 승군으로서 동원되는 승려들이 사고 관리 및 보존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묘향산 사고본을 무주 적상산으로 옮긴 것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하게 남쪽으로 옮긴 것이었다. 왕조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과 4대 사고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 P98

반세기 전, 1인당 국민소득 몇 백 달러밖에 안 되던 시절에 제정된 호화주택·별장 • 농가주택에 대한 규제를, 3만 달러가 넘는 지금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마치 인구는 줄어드는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부동산 파동의 근본 요인 중 하나는 아파트가 현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택에는 그런 환금성이 없다. 그렇다면규제를 풀어 주택건설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아파트값 파동을 막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진정 국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인지 원점에서 생각하고 과감하게 바꿀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집의 본원적 기능을 회복하는 길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105

한자를 알면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의 의미와 유래를 명확히 알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치 베트남처럼 자신들 언어의 뜻은다 잊어먹고 발음만 남는 상태로 된다. 베트남의 명소 할롱베이는하룡만(下), 즉 용이 내려온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베트남사람 중에는 그 뜻을 모르는 이가 많다. 남의 소리가 아니다. 한 학생이 "삼국시대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세 나라가 있었던 시대군요"라고 했다는 것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한문을 가르치고, 대학에서도 한문을 교양필수 과목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외워서 익힐 것은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 26세가 넘으면 외우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으면 나처럼 ‘그놈의‘ 한문 공부 때문에 평생을 학생으로 살게 된다. 한자교육은 요즘 말하는 인문학의 기초 체력을 기르는 필수과목인 것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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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가의 필적은 물론이고 책을 조사하다 그림 화(畵)자만 나오면 내게 편지를 보내곤 하셨다. 당신은 노년에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기 때문에 전화는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영남대 교수시절 선생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핑크빛 딱지가 아롱거리는 예쁜꽃편지지에 옛사람의 글투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주일이면 한 번, 못 돼도 한 달에 한 번은 뵙던 얼굴인데, 이 봄이 다 가도록 만날 수 없었으니, 저술에 전념함이 깊으신 것인지 영남의 꽃이 좋아 아니 올라오심인지. 다름 아니오라 책을 정리하다가 우리 회화사 연구에 도움이 될 듯한 자료가 나와 한부 복사하여동봉하오니 잘 엮어서 좋은 작품을 만드심이 어떠하실지. 부처님 얼굴 살찌고 아니고는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고 합니다.
하하하, 이만 총총.


당신이 80세일 때 내 나이 40세로 나이를 반으로 꺾어야만 동갑이 되는 젊은이에게 그런 애정을 베푸셨다. 선생은 또 대단히 정확한 분이셨다.  - P53

미소를 머금은 동안(童顔)과 걸음걸이가 이겸로 선생을 빼닮은 백발 어른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내가 통문관 셋째요"라는 것이었다. 고려대 중문학과의 이동향 명예교수이셨다. 이 교수는 요즘 선친 유품을 정리하다 이게 나왔다며얇은 서첩 두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표지를 보니 한 권은 이광직이라는 문인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대하여 쓴 『단원화평」이고, 또 하나는 그림과 글씨의 기원에 관해 쓴 『서화연원』이라는 필사본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표지 안쪽에는 안국동우체국 수령증이 붙어 있는데 놀랍게도 ‘수취인 유홍 - P56

준‘으로 쓰여 있었다. 깜박 잊고 부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책갈피에는 이동향 교수가 소동파(蘇東坡)의 「전 적벽부(前赤壁賦)」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내게 쓴 한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이제 이 소책자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선친의 뜻입니다. 청컨대 웃으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物各有主今此小冊子歸於主此亦先考之意也請笑納之


얼결에 건네받은 소책자를 펴 보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산기이겸로 선생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책에서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만 같았다. - P57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 용기 중 백자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4세기 중국에서 처음 카오링 (고령토)이라는 백토 광석을 재료로 만든 경질백자는 이후 15세기엔 조선왕조 분원백자와 베트남의 안남백자, 17세기엔 일본의 아리타야키(有田焼), 18세기엔 독일 드레스덴의 마이센 자기로 이어지며 전 세계가 사용하는 생활용기로 되었다.
도자기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자기를 보면서 잘생겼다. 멋지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귀엽다, 앙증맞다, 호방하다, 당당하다, 수수하다 소박하다 등등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곤 한다. 그런 미적 향수와 미적 태도를 통해 우리의 정서는 순화되고 치유된다. - P81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색,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백자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적 취향을 절로 드러낸다. - P82

똑같은 항아리, 병이지만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왕실문화를 반영하는 귀(貴)티가 역력하고, 조선 중기의백자는 선비 취향의 문기가 가득하며, 조선 후기의 백자는푸르름을 머금은 유백색에 기형이 넉넉하여 부(富)티가 흐른다.
세계 도자사의 시각에서 조선백자의 특질을 보면 순백에의 사랑이 역력하다. 중국, 일본, 유럽의 모든 나라가 말이 백자이지 청화 안료로 문양을 가득 배치하며 화려함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백자위에 에나멜 안료로 채색을 가한 유상채(彩)와 금속기까지결합한 기발함을 추구하고 있을 때, 조선은 변함없이 품위 있고,
단아하고, 넉넉한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고고한 백자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것이 한국미의 특질이다.
조선백자 중에서도 18세기 전반기, 영조 시대에 금사리 가마 - P83

에서 만들어진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세기에 높이 한자반(45센티미터) 이상 되는 백자 대호는 조선이외에 어느 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예가 없다. 아직 기계식 동력이발명되지 않은 때여서 수동식 물레로는 이처럼 둥근 원형의 항아리를 만든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동시대 항아리들은 고구마처럼 길거나 작은 몸체에 목을 길게 붙이곤 했다. - P84

그러나 달덩이 같은 항아리를 만들고 싶었던 조선 도공의 예술의지는 마침내 커다란 왕사발 두 개를 아래위로 이어 붙여 달항아리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달항아리는 기하학적인 동그라미가 아니라 둥그스름한 볼륨감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기교가주는 꽉 짜인 차가운 맛이 아니라 부정형이 주는 여백의 미가 있다.
최순우는 이를 어진 선맛이라고 표현하면서 달항아리를 보면 잘생긴 종갓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했다. 이동주는 선비문화와 서민문화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하였고, 김원용은 잘 만들겠다는 욕심조차 없던 도공의 무심한 경지라고 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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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희성 시인은 「동년일행(同年一行)」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남주(南柱)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金明秀)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P16

또 누구는 말한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술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던 저 캄캄한 시절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그 간고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겠냐고. 유신 시절 감옥에서 출소한 어느 민주인사는 바깥세상이 감옥과 다른 것이라곤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담배는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가 귀하던 시절 남의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한다. 『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1945)에 실린 이용악의 「시골 - P16

사람의 노래」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 안에서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라며 침묵 속에 오가는 온정을 그렸다.
사실 나는 1994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것은 1997년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같았다. - P17

사람들은 어려서 자랄 때는 모두들 꽃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생진 시인은 「폴 되리라」에서 이렇게 읊었다.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되리라 - P22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잡초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곡식, 농작물, 원예작물 등인간에 의해 재배된 것이 아닌데 저절로 번식하는 잡다한 풀을 말한다. 잡초라면 흔히 개망초, 까마중, 쇠비름, 강아지풀, 피, 토끼풀, 엉겅퀴, 질경이 따위를 떠올리지만 맛있는 나물의 재료인 달래, 냉이, 씀바귀, 고사리, 고들빼기, 쑥, 머위도 밭에서 농사를 방해하면 잡초다. - P23

야생초라 불리는 제비꽃, 초롱꽃, 달개비, 민들레, 쑥부쟁이, 부들꽃창포 등이 잡초로 분류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가내린 꽃을 피우는 풀에 애기똥풀, 며느리밑씻개, 개불알풀이라 이를 짓고 업신여긴다.
늦여름 따가운 햇볕에서 농부들은 논밭에 무성히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여름철 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이다. 인류는 농업을 시작한 이래 곡식과 농작물의 영양소를 씨앗이나 열매에 축적하도록 개량해왔다. 이에 비해 잡초는 생태 그대로 영양소를 성장과 번식에 사용한다. 그래서 곡식과 농작물은 잡초를 이길 수 없다. 그 억센 생명력은 이리저리 시달리며 사는 민초의 삶을 연상케 한다. 김수영 시인은 「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P23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잡초는 무죄다. 잡초의 해악이란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라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일 뿐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잡초는 땅의 표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화된다.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잡초의 씨를 말려버렸더니 극심한 토양침식과 모래바람으로 몇년치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과수와 잡초를 공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 P24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김정헌과 나는 청옥산 육백마지기의 잡초공적비를 떠나면서이생진 시인의 「풀 되리라」를 큰 소리로 낭송하였다.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되리라 - P28

봄이 왔다. 새봄을 맞으며 추사 김정희는 "봄이 짙어가니 이슬이 많아지고 땅이 풀리니 풀이 돋아난다(春濃露地暖草)"라며 향기 은은한 난초를 그렸지만 나는 봄꽃이 만발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서울의 5대 궁궐⋯⋯ 전 국토를 거대한 정원으로 삼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봄의 전령, 화신(花信)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온다. 지구 온난화로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봄꽃의 개화에는 꽃차례가 있다. 2월말이면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올라오기 시작하여 3월 하순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만 바 - P29

쁘던 텔레비전 뉴스도 연일 꽃소식을 전한다.
화신은 언제나 동백꽃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면 동백은 봄꽃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겨울 꽃이다. 제주도에는 눈 속에서 꽃피우는 설동백도 있다. 그래도 동백은 봄꽃의 상징이다. 동백나무는 집단을 이루는 속성이 있어 거제도, 오동도를 비롯하여 한려수도와 다도해의 섬들엔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 있다. 동백은윤기 나는 진초록 잎새마다 탐스러운 빨간 꽃송이가 얼굴을 내밀듯 피어나 복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동백꽃은 반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동백꽃은 송이째 떨어진다. 그리하여 동백나무 아래로는 떨어진 꽃송이들이 붉은 카펫처럼 깔려 있다. - P30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원림인 세연정에 떨어진 동백꽃이 둥둥떠 있을 때,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즐겨 찾았던 강진 백련사의동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인데 그 숲속 자그마한 승탑 주위로 떨어진 동백꽃이 가득 널려 있을 때는 가히 환상의 나라로 여행은 것 같다.
봄꽃은 생강나무, 산수유, 매화가 거의 동시에 피면서 시작된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홀로 자라고, 산수유는 마을 속에서 동네사람들과 함께하지만, 매화는 정성스레 가꾸어지기도 하고 밭을이루며 재배되기도 한다. 돌담길이 정겨운 구례 산동마을에 노목으로 자란 산수유가 실로 장하게 피어나고, 광양 매화마을은 일찍부터 매화 축제를 열고 있어 꽃소식은 섬진강에서 올라온다.
어디에 핀들 마다하리오마는 매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노매(老 - P30

梅)에 있다. 노매는 아름다운 늙음의 상징과도 같다. 수령이 300년에서 500년 이상 되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무우전매, 구례 화엄사의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매는 몇 해 전부터 앓고 있는데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안타까운 진단이 내려졌다. 특히 오래된 사찰의 노매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양산통도사의 자장매를 그려본다. 그래서 절집의 진정한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한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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