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성 시인은 「동년일행(同年一行)」에서 이렇게 읊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밖에 없던
남주(南柱)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
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金明秀)는
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
훌쩍 떠나
어디가 절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
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 P16

또 누구는 말한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었고, 술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던 저 캄캄한 시절에 담배마저 없었다면 그 간고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겠냐고. 유신 시절 감옥에서 출소한 어느 민주인사는 바깥세상이 감옥과 다른 것이라곤 담배 피울 수 있는 자유가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담배는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준다. 라이터가 귀하던 시절 남의담뱃불을 빌려 불을 댕기는 모습은 인생살이의 살내음을 느끼게한다. 『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1945)에 실린 이용악의 「시골 - P16

사람의 노래」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밤기차 안에서 "어디루 가는 사람들이 서로 담뱃불 빌고 빌리며/나의 가슴을 건너는 것일까"라며 침묵 속에 오가는 온정을 그렸다.
사실 나는 1994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둘째 권을 펴내고 나서 담배를 끊었다. 그러던 내가 4년 만에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것은 1997년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를 위해 방북하면서였다. 북측 인사들은 만나면 담배부터 권했다. 그때마다 나는 손을저으며 사양했다. 모처럼 친선적 관계를 맺고자 찾아가서 손사래부터 치는 것이 멋쩍었고 그들은 나를 무슨 골샌님처럼 보는 것같았다. - P17

사람들은 어려서 자랄 때는 모두들 꽃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생진 시인은 「폴 되리라」에서 이렇게 읊었다.


풀 되리라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되리라 - P22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잡초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곡식, 농작물, 원예작물 등인간에 의해 재배된 것이 아닌데 저절로 번식하는 잡다한 풀을 말한다. 잡초라면 흔히 개망초, 까마중, 쇠비름, 강아지풀, 피, 토끼풀, 엉겅퀴, 질경이 따위를 떠올리지만 맛있는 나물의 재료인 달래, 냉이, 씀바귀, 고사리, 고들빼기, 쑥, 머위도 밭에서 농사를 방해하면 잡초다. - P23

야생초라 불리는 제비꽃, 초롱꽃, 달개비, 민들레, 쑥부쟁이, 부들꽃창포 등이 잡초로 분류되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그런데 가내린 꽃을 피우는 풀에 애기똥풀, 며느리밑씻개, 개불알풀이라 이를 짓고 업신여긴다.
늦여름 따가운 햇볕에서 농부들은 논밭에 무성히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여름철 농사는 잡초와의 전쟁이다. 인류는 농업을 시작한 이래 곡식과 농작물의 영양소를 씨앗이나 열매에 축적하도록 개량해왔다. 이에 비해 잡초는 생태 그대로 영양소를 성장과 번식에 사용한다. 그래서 곡식과 농작물은 잡초를 이길 수 없다. 그 억센 생명력은 이리저리 시달리며 사는 민초의 삶을 연상케 한다. 김수영 시인은 「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P23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잡초는 무죄다. 잡초의 해악이란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라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일 뿐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잡초는 땅의 표토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화된다.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잡초의 씨를 말려버렸더니 극심한 토양침식과 모래바람으로 몇년치 농사를 망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과수와 잡초를 공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 P24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김정헌과 나는 청옥산 육백마지기의 잡초공적비를 떠나면서이생진 시인의 「풀 되리라」를 큰 소리로 낭송하였다.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되리라 - P28

봄이 왔다. 새봄을 맞으며 추사 김정희는 "봄이 짙어가니 이슬이 많아지고 땅이 풀리니 풀이 돋아난다(春濃露地暖草)"라며 향기 은은한 난초를 그렸지만 나는 봄꽃이 만발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서울의 5대 궁궐⋯⋯ 전 국토를 거대한 정원으로 삼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봄의 전령, 화신(花信)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온다. 지구 온난화로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봄꽃의 개화에는 꽃차례가 있다. 2월말이면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올라오기 시작하여 3월 하순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만 바 - P29

쁘던 텔레비전 뉴스도 연일 꽃소식을 전한다.
화신은 언제나 동백꽃부터 시작된다. 엄밀히 말하면 동백은 봄꽃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겨울 꽃이다. 제주도에는 눈 속에서 꽃피우는 설동백도 있다. 그래도 동백은 봄꽃의 상징이다. 동백나무는 집단을 이루는 속성이 있어 거제도, 오동도를 비롯하여 한려수도와 다도해의 섬들엔 어디를 가나 지천으로 널려 있다. 동백은윤기 나는 진초록 잎새마다 탐스러운 빨간 꽃송이가 얼굴을 내밀듯 피어나 복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동백꽃은 반쯤 질 때가 더 아•름답다. 동백꽃은 송이째 떨어진다. 그리하여 동백나무 아래로는 떨어진 꽃송이들이 붉은 카펫처럼 깔려 있다. - P30

보길도 고산 윤선도의 원림인 세연정에 떨어진 동백꽃이 둥둥떠 있을 때, 다산 정약용이 유배 시절 즐겨 찾았던 강진 백련사의동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인데 그 숲속 자그마한 승탑 주위로 떨어진 동백꽃이 가득 널려 있을 때는 가히 환상의 나라로 여행은 것 같다.
봄꽃은 생강나무, 산수유, 매화가 거의 동시에 피면서 시작된다. 생강나무는 산에서 홀로 자라고, 산수유는 마을 속에서 동네사람들과 함께하지만, 매화는 정성스레 가꾸어지기도 하고 밭을이루며 재배되기도 한다. 돌담길이 정겨운 구례 산동마을에 노목으로 자란 산수유가 실로 장하게 피어나고, 광양 매화마을은 일찍부터 매화 축제를 열고 있어 꽃소식은 섬진강에서 올라온다.
어디에 핀들 마다하리오마는 매화의 진짜 아름다움은 노매(老 - P30

梅)에 있다. 노매는 아름다운 늙음의 상징과도 같다. 수령이 300년에서 500년 이상 되는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순천 선암사의 무우전매, 구례 화엄사의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율곡매는 몇 해 전부터 앓고 있는데 이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안타까운 진단이 내려졌다. 특히 오래된 사찰의 노매는 격조 높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양산통도사의 자장매를 그려본다. 그래서 절집의 진정한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한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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