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여름이면 국제교류재단에서는 외국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이 참여하는 한국미술사 워크숍이 열린다. 이 프로그램에 줄곧 참여해온 서양의 한 여성 큐레이터에게 한국의 이미지에 대해 물으니 그녀는 단숨에 정자(亭子)를 꼽았다.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쪽에 정자가 하나있음으로 해서 자연풍광의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며 이처럼 자연과 친숙하게 어울리는 문화적 경관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한국의 표정이라고 했다.
정자는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된 건축문화인데 이 또한 3국의 특질이 다르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 P88

다실로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한 데에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생활속의 공간으로 자연풍광의 문화적 액센트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정자는 생김새보다 자리앉음새가 중요하다. 특히 강변에 세운 정자에 명작이 많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이층이면 누각, 단층이면정자라 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흔히는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 사찰, 서원, 저택, 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생기기도 잘생겼다.
남한의 3대 정자로는 진주 남강변의 촉석루, 밀양 낙동강변의영남루, 제천 청풍 남한강변의 한벽루를 꼽고 있다. 북한에선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연광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 의주 압록강의 통군정 등이 예부터 이름 높다. - P89

정자를 세우는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뜻만이 아니다.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어려움을생각해보게 하고, 민가를 바라보면서는 민생의 고통을 알게 하고, 나루터와 다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를 잘 건너갈 수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두 가지가아님을 여기서 보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추운 자를 따스하게 해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이는 멀리 있는 사물에서 얻어낸 것을정자에 모으고, 정자에서 모은 바를 다시 마음에 모아서, 내 마음이항상 주인이 되게 한다면 이 정자를 취원루라고 이름 지은 참뜻에 가까울 것이다. - P91

정자는 고을 사람들의 만남과 휴식의 공간이면서 나그네의 쉼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자는 여기에 오른 문인묵객들이 읊은 좋은 시들을 현판으로 새겨 걸어놓고 그 연륜과 명성을 자랑한다. 이를 국문학에서는 ‘누정문학‘이라고 부른다.
특히 청풍 한벽루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남긴 시가 많다. 퇴계이황, 서애 유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모두 한벽루를다녀가며 시를 남겼다. 이는 옛날에 서울에서 경상좌도로 갈 때죽령을 넘어가자면 남한강 뱃길을 타고 올라와 청풍에서 하루를묵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중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서애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을 때 고향 안동으 - P91

로 가는 길에 지은 시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밤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과연 『징비록(懲毖錄)』의 저자다운 시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서애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국토의 어디로 떠나든 차창 밖으로는 문득 저 멀리 정자가 나타날지니 그러면 고려시대 박윤문(朴允文)이 단양을 지나다가 취운루(翠雲樓)라는 정자를 바라보면서 읊은 시에 공감을 보내게 될 것이다. - P92

관동으로 가는 길목, 저 멀리 보이는 정자 하나
십리 소나무 그늘은 참으로 그윽하구나


정자는 너무도 흔하고 친숙한 것이기에 지나쳐 왔던 것이지만바로 그 점 때문에 ‘한국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내세워도 한 점 모자람이 없다.
이 누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면서 2023년 12월, 삼척죽서루와 밀양 영남루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 마침 그즈음 밀양에 문상 갈 일이 있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영남루에 들러 - P92

보니, 밀양강이 맴돌아 가는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그 늠름한 자태는 과연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국보답다는 감동이 일어났다. 이제 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려면 유적의 보존실태에 대해 심사받을 준비를 하여야 한다. 주변 환경을 재정비하여야 하고 건축, 문학, 역사 등의 학술대회를 열어 인문적 가치를쌓아야 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하면 아마도 10년 후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 P93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은 인터넷 무료 서비스로 누구든 자유롭게 원문과 번역문을 검색할 수 있다. 역사학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조선의 생활사를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역사의 대중화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는 수난과 보존, 그리고 활용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기록유산의 나라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 기록유산은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동학농민혁명기록물』 등 18건이나 된다. 그중 『조선왕조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물이다. 유교문화를 가진 중국, 일본, 베트남 등도 왕조의 실록 - P94

이 있지만 그 양과 내용의 다양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 위해서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Universal Value, OUV)‘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조선왕조실록』은 다음 네 가지가 적시되었다.


1.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2.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실록이 있는 나라 중 편찬된 실록은 후손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3. 위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 면에서 충실하다. 책 권수로 치면 중국 명나라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실제 지면 글자 수는 1,600만 정도로, 4,965만자인 『조선왕조실록』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4.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다른 나라 실록들은 대부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 P95

국보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태조실록』부터 『철종실록』까지의 25대 472년의 기록만을 말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종래의 엄격한 방식이 아니라 소략하게 의례적으로 편찬하였고, 또 일제가 정략적 - P95

의도로 왜곡한 부분이 있어 별도로 취급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여러 판본이 있는데 일찍이 1973년에 정족산사고본(1,187책)이 국보 제151-1호로 지정된 바 있고, 오대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봉모당본, 낙질 및 산엽본 등이 국보 제151-6호까지 추가로 지정되었다. 이는 그간의 험난했던 이동과 망실의 역사와 피눈물 나는 보존의 의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것이다. - P96

『조선왕조실록』은 국초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는데 세종대왕은 역시 선견지명이 있어 만일을 위해 4부씩 만들게 하여 경복궁 춘추관(오늘날 국사편찬위원회),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분산, 보관시켰다. 이것이 4대 사고의 시작이다. 태조·정종. 태종까지는 필사본으로 제작하였으나 『세종실록』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1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다. 3년에 한 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중종 33년(1538)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실록』부터 『연산군일기』까지 전소되었으나 다른 사고본을 필사해서 복원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서울, 충주, 성주의 실록이 모두불타버리고 6월에는 하나 남은 전주사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었 - P96

다. 전쟁에 정신없는 관리들은 땅에 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때 태조 이성계를 모신 사당인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吳希吉)은 내장산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는데 888책을 모두 담으려면 60여궤짝에 말 20여 필이 필요하였다.
이에 오 참봉은 태인에 살고 있는 선비인 안의(義)와 손홍록(孫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집안사람과 하인등 30여 명을 인솔하고 와서 실록을 내장산 산속 암자로 피란시켰다. 조정에서 실록을 행재소가 있는 해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온것은 이듬해(1593) 7월이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물경 1년 하고도 닷새 동안 내장산에 기거하며 실록을 지켰던 것이다. 그때 안의는 65세, 손홍록은 57세였다. 벼슬도 없는 무명의 선비가 사재를 털어가며 끝내 실록을 지켜낸 것이다. 훗날 이들에게는 별제 - P97

(6품) 벼슬이 내려졌다. 안의와 손홍록은 의병(義兵) 못지않은 의인)이자 애국자이고 문화유산지킴이의 상징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은 새로 4부를 복간하여 춘추관에 1부, 강화 마니산(후에 정족산으로 옮김),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옮김)에 4대 사고를 지어 보관하였다. 그리고 이들 사고의 관리는 사고가 소재한 산의 사찰에 있는 승려들이 맡았다. 정족산의 전등사, 오대산의 월정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안국사가 이러한 역할을 맡아 유사시 승군으로서 동원되는 승려들이 사고 관리 및 보존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묘향산 사고본을 무주 적상산으로 옮긴 것은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하게 남쪽으로 옮긴 것이었다. 왕조 말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은 춘추관과 4대 사고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 P98

반세기 전, 1인당 국민소득 몇 백 달러밖에 안 되던 시절에 제정된 호화주택·별장 • 농가주택에 대한 규제를, 3만 달러가 넘는 지금이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마치 인구는 줄어드는데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던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부동산 파동의 근본 요인 중 하나는 아파트가 현찰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택에는 그런 환금성이 없다. 그렇다면규제를 풀어 주택건설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아파트값 파동을 막는 첩경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진정 국토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인지 원점에서 생각하고 과감하게 바꿀 때가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집의 본원적 기능을 회복하는 길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네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P105

한자를 알면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의 의미와 유래를 명확히 알수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치 베트남처럼 자신들 언어의 뜻은다 잊어먹고 발음만 남는 상태로 된다. 베트남의 명소 할롱베이는하룡만(下), 즉 용이 내려온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베트남사람 중에는 그 뜻을 모르는 이가 많다. 남의 소리가 아니다. 한 학생이 "삼국시대가 무슨 뜻인가 했더니 세 나라가 있었던 시대군요"라고 했다는 것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한문을 가르치고, 대학에서도 한문을 교양필수 과목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외워서 익힐 것은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 26세가 넘으면 외우고 싶어도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으면 나처럼 ‘그놈의‘ 한문 공부 때문에 평생을 학생으로 살게 된다. 한자교육은 요즘 말하는 인문학의 기초 체력을 기르는 필수과목인 것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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