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오윤의 민중미술에는 민중의 고통이 그냥 고통으로 표현된 적이 없다. 그것을 날 선 투쟁으로 형상화한 적도 없다. 울음도 없고 슬픔도 없이 때로는 익살로 때로는 신명으로 민중적 삶이한껏 고양되어 있다.
오윤의 예술을 높이 평가하며 인간적으로도 진짜 좋아한 선배는 시인 김지하였다. 김지하가 『사상계』 1969년 5월호에 발표한「오적」의 삽화는 기실 오윤이 그린 것이었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 은퇴했을 때 한 스포츠평론가가 ‘알리(권투선수)보다는 잘했고 펠레(축구선수)만은 못했다‘라고 했을 때, 나는 김지하가 ‘오윤의 그림이 내 시보다 한 수 위다‘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김지하는 오윤의 예술세계를 이렇게 말했다.


한(恨)과 그늘과 귀곡성(鬼哭聲)에서마저도 흥과 신바람이 터져나오는 오윤 예술의 정점은 어디일까. ‘봄‘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 P198

김지하(1941~2022)를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외면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그의 아우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원이 아니라 해도 김지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자영웅적인 민주투사였다. 70년대에 그가 7년간 감옥살이를 한것은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넬슨 만델라의 옥살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김지하는 민족문화 운동의 선구로 오윤(미술), 김민기(노래), 이애주(춤), 채희완(탈춤), 임진택(창작판소리) 등 민족예술제1세대들을 길러냈다. 80년대에는 생명사상과 동학을 다시 일으킨 - P201

사상가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정확히 1991년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를 발표한 이후 민주화운동의 변절자로 낙인찍히고 이후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처신으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사람들조차 그의 곁을 떠났다.
김지하의 변절이란 오랜 세월 가혹한 감옥생활에서 얻은 골병이 낳은 후유증이었다. 7년의 감옥생활 끝에 출소한 그는 말하자면 ‘상이군인‘이었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생명사상의 기치를 내걸고 쉼 없이 나아갔다. 거기까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지하는 가고자하는 길을 너무 빨리 앞질러 갔다. 눈앞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민중은 6월민주항쟁으로 숨 가쁘게 나아가고 있는데, 생명운동을 시대의 과제 - P202

로 삼은 것이었다. 여기서 세상이 김지하에게 기대하는 것과 김지하가 세상에 바라는 것이 어긋나고 그 사이에 큰 간극이 생겼다.
급기야는 민주화운동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고, 정치 노선마저 달리하며, 진보적 지성과 문인을 매도하는 일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서 김지하는 더욱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사실 병적 징후였다. 그때 김지하는 심신이많이 아팠다. 정신과 치료도 여러 번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991년 이전까지 김지하의 삶과 예술은 한국문학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이었다. 김지하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원주의 한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내가 이제까지 본 장례식 중 가장 초라하고 쓸쓸하였다.  - P23

2024년 7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 ‘백운서경(白雲書境)‘은 잊혀가는 우리나라 근대의 위대한 역사 인물을 오늘에 되살리는 아주 뜻깊은 전시였다. 근대서예가의 개인전으로 이처럼 대규모 전시가 열린 것은 위창 오세창이후 처음이다. 위창이 전서(篆書)에서 당대 일인자였다면 동농은 행초서(行草書)의 대가였다.
동농이 서예의 대가였음은 당대의 명성이 그러하였고 무엇보다도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말해준다.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을 비롯한 정자 19곳의 현판과 주련, 안동 봉정사 등 전국 주요 사찰과관아 현판이 그의 글씨로 되어 있다. - P212

동농의 글씨를 바위에 새긴 암각서도 여러 곳에 있다. 그중 대표작은 서울성곽 창의문 아래 백운동 골짜기에 있다.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별서 뒤편 큰 바위에 ‘백운동천(白雲洞天)‘이란 대자를 새겨놓은 것이다. 동농은 한때 여기에 백운장을 짓고 살았다.
이 암각 글씨는 단정함 속에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희대의명작이다.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을 ‘백운서경(白雲書境)‘이라 한것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동농 김가진의 서예전을 보면서 나는 동농이 왜 정법의 행서만을 고수했는가 생각해보았다. 동농 이전만 하더라도 추사 김정희 - P223

가 일으킨 ‘완당바람‘이 풍미하여 글자 구성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동농은 철저히 정법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동농의 인품 자체가 그러하였고 또 왕조 말기 어지러운 상황과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는 불우한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기에 글씨에멋을 부린다는 것은 세상을 가볍게 사는 태도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올곧게 일생을 살아온 동농 김가진은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지조가 있었다. 그래서 동농은 정법의 행서로 일관하였던 것이고 그렇게 낳은 그의 서예는 우리 근대서예사를대표하고 있다. - P224

부모님의 허락을 얻은 나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주례 선생으로 장준하 선생을 모실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면목동 장준하선생댁에 자주 드나들어 장남인 장호권 형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그해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은 의문사로 돌아가셨다.
결혼 날짜가 다가오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그래도 나는 주례 선생님만은 인생의 사표(師)로 삼을 분을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오른 분이 리영희 선생이었다. 그러나 나라는 인간은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을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선생님과는 한번 찾아뵈었다는 인연밖에 없으며,
또 선생님은 나이가 젊어서 거절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용기 내어 제기동으로 찾아뵙고 주례를 부탁드렸더니 뜻밖에 흔쾌히 승낙하시며 안방을 향해 사모님을 불렀다.

"여보, 유군이 결혼을 한다는구려. 술상 좀 내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항상 술상을 내올 명분을 그렇게 강조하시곤 한 것이었다. 사모님은 그놈의 술 좀 작작 마시길바랐고, 선생님은 항시 구실을 찾곤 했던 것이다. - P232

선생님의 주례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것이었다. 당시는 비디오라는 것이 없어 남은 흔적이 없고 내 기억 속에만 있는데 내게는 잊히지 않는 두 마디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히 들려온다.

"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바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 보면 의사 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 P235

여자 쪽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 차가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나는 이 충고를 항시 잊지 않았다. 내 인생에 두어 번 큰 갈림길같은 것이 있었을 때, 나는 내 아내에게 판단해줄 것을 물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판단에 따랐다.  - P236

그리고 선생님은 당신의 주례 제자들이 국회의원도 되고, 대학교수도 되고, 문화재청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흐뭇해하셨다. 내가 문화재청장이 되어 경복궁 경회루에 이어 창덕궁 후원과 희정당, 대조전을 개방할 때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시범답사를 했고 그 시간을 그렇게 즐거워하셨다.
사모님인 윤영자 여사님도 우리 주례 제자단을 기특해하셨다. 사모님은 주례 제자 중에서 특히 나를 귀여워하셔서 우리들이 찾아가면 나를 ‘반장‘이라고 하시며 우리 어머니 안부를 따로 묻곤하셨다. 민주화운동 가족모임으로 ‘한결모임‘이 있는데 공덕귀 여사,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 이철 의원의 어머니 모두 돌아가시고지금은 이해동 목사님 부부와 우리 어머니만 아직 생존해 계셔서 험난했던 지난 세월을 함께 버텨온 정이 각별하게 든 것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도 나는 사모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 P239

백기완(1932~2021) 선생은 평생을 민족통일, 반독재, 노동해방운동에 앞장선 민주투사로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투쟁의 횃불을 내려놓지 않았다. 데모대의 맨 앞장에 서서 바람결에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호랑이 눈매보다 더 매서운 눈으로 불호령을 치는영원한 거리의 투사가 백기완 선생의 본모습이다.
그러나 투쟁의 현장에서 돌아오면 백기완 선생은 사라져가는 민족혼과 민중적 삶의 싱싱한 정서를 고양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것이 『장산곶매 이야기』 (우등불 1993)에서 『버선발 이야기』(오마이북 2019)까지 민중설화를 토속어로 이야기한 백기완 선생의 구비문학이다. - P241

외래어는 물론 한자어도 하나 없는 순우리말로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그마치 여든 해가 넘도록 내 속에서 홀로 눈물 젖어온것임을 털어놓고 싶다. 나는 이 버선발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니나(민중)를 알았다. 이어서 니나의 새름(정서)과 갈마(역사), 그리고 그것을 이끈 싸움과든메(사상)와 하제 (희망)를 깨우치면서 내 잔뼈가굵어왔음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난해엔 더 달구름(세월)이 가기 앞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글로 엮으려다가그만 덜컹, 가슴탈(심장병)이 나빠져 아홉 때결(시간)도 더 칼을 댄끝에 겨우 살아났다. 이어서 나는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글로 써서 매듭을 지은 것이 이 ‘버선발 이야기‘라.(백기완 버선발 이야기』, 오마이북 2019) - P242

2016년 1월 15일, 우리 시대의 ‘참스승‘ 신영복(1941~2016) 선생님이 기어이 가셨다. 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제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허전할 수가 없다. 부음이 전해진 그날 밤부터 인터넷에는 선생님의 서거를 애도하는 글이 쉼 없이 올라왔다. 장례식장에선 선생님 가시는 길에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어하는 조문객들이 열 명씩 조를 이루며 문상하였다. 각계의 인사들이 다녀감이야 마땅한 일이지만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음을 보셨다면 아무리 하늘의 명을받아 가시는 길이지만 잠시 발길을 돌려 생전의 그 밝은 미소로 손이라도 한번 들어주실 만하지 않은가. - P252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합니다.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2018)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그 ‘더불어 숲‘이라 쓴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이는 어쩌면 신영복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 - P256

주고 싶었던 절명구였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스스로 호를 지어 우이(牛)라 하고, ‘쇠귀‘라고 쓰면서 소처럼 우직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지만 우리에게 비친 당신의 삶은 그 반대였다. 고단한 삶이 이어지는 힘들고 강퍅한 세상을 살면서도 선생님 같은 분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위안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이 모든 것을 과거형으로 돌리자니 너무도 허전하다. 그러나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과 글씨들은저 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을 발할것이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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