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가의 필적은 물론이고 책을 조사하다 그림 화(畵)자만 나오면 내게 편지를 보내곤 하셨다. 당신은 노년에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끼셨기 때문에 전화는 하지 않으셨다. 한번은 영남대 교수시절 선생에게 편지를 받았는데 핑크빛 딱지가 아롱거리는 예쁜꽃편지지에 옛사람의 글투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일주일이면 한 번, 못 돼도 한 달에 한 번은 뵙던 얼굴인데, 이 봄이 다 가도록 만날 수 없었으니, 저술에 전념함이 깊으신 것인지 영남의 꽃이 좋아 아니 올라오심인지. 다름 아니오라 책을 정리하다가 우리 회화사 연구에 도움이 될 듯한 자료가 나와 한부 복사하여동봉하오니 잘 엮어서 좋은 작품을 만드심이 어떠하실지. 부처님 얼굴 살찌고 아니고는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고 합니다.
하하하, 이만 총총.


당신이 80세일 때 내 나이 40세로 나이를 반으로 꺾어야만 동갑이 되는 젊은이에게 그런 애정을 베푸셨다. 선생은 또 대단히 정확한 분이셨다.  - P53

미소를 머금은 동안(童顔)과 걸음걸이가 이겸로 선생을 빼닮은 백발 어른이 내게로 다가와서는 "내가 통문관 셋째요"라는 것이었다. 고려대 중문학과의 이동향 명예교수이셨다. 이 교수는 요즘 선친 유품을 정리하다 이게 나왔다며얇은 서첩 두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표지를 보니 한 권은 이광직이라는 문인이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 대하여 쓴 『단원화평」이고, 또 하나는 그림과 글씨의 기원에 관해 쓴 『서화연원』이라는 필사본이었다. 책장을 넘기자 표지 안쪽에는 안국동우체국 수령증이 붙어 있는데 놀랍게도 ‘수취인 유홍 - P56

준‘으로 쓰여 있었다. 깜박 잊고 부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그 책갈피에는 이동향 교수가 소동파(蘇東坡)의 「전 적벽부(前赤壁賦)」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여 내게 쓴 한문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번역하면 이렇다.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는 법인데, 이제 이 소책자가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또한 선친의 뜻입니다. 청컨대 웃으면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物各有主今此小冊子歸於主此亦先考之意也請笑納之


얼결에 건네받은 소책자를 펴 보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산기이겸로 선생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책에서 삶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만 같았다. - P57

인간이 만들어낸 생활 용기 중 백자를 능가하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14세기 중국에서 처음 카오링 (고령토)이라는 백토 광석을 재료로 만든 경질백자는 이후 15세기엔 조선왕조 분원백자와 베트남의 안남백자, 17세기엔 일본의 아리타야키(有田焼), 18세기엔 독일 드레스덴의 마이센 자기로 이어지며 전 세계가 사용하는 생활용기로 되었다.
도자기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자기를 보면서 잘생겼다. 멋지다, 아름답다, 우아하다, 귀엽다, 앙증맞다, 호방하다, 당당하다, 수수하다 소박하다 등등 본 대로 느낀 대로 말하곤 한다. 그런 미적 향수와 미적 태도를 통해 우리의 정서는 순화되고 치유된다. - P81

각 나라의 백자에는 자연스럽게 그 민족의 미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일찍이 일본의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도자기를 조형의 3요소인 선, 색, 형태와 비교하면서 중국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은 색채가 밝고, 한국은 선이아름답다고 했다. 때문에 중국 도자기는 완벽한 형태미를 강조하고, 일본 도자기는 화려한 색채미를 보여주는 데 반하여 한국 도자기는 부드러운 선맛을 자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도자기 애호가들은 중국 도자기는 멀리 높은 선반에 올려놓고 보고 싶어하고,
일본 도자기는 옆에 가까이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어루만지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그 따뜻한 친숙감과 사랑스러운 정겨움이 조선백자의 특질이다.
백자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시대적 취향을 절로 드러낸다. - P82

똑같은 항아리, 병이지만 조선 전기 백자는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왕실문화를 반영하는 귀(貴)티가 역력하고, 조선 중기의백자는 선비 취향의 문기가 가득하며, 조선 후기의 백자는푸르름을 머금은 유백색에 기형이 넉넉하여 부(富)티가 흐른다.
세계 도자사의 시각에서 조선백자의 특질을 보면 순백에의 사랑이 역력하다. 중국, 일본, 유럽의 모든 나라가 말이 백자이지 청화 안료로 문양을 가득 배치하며 화려함을 지향하며 나아가서 백자위에 에나멜 안료로 채색을 가한 유상채(彩)와 금속기까지결합한 기발함을 추구하고 있을 때, 조선은 변함없이 품위 있고,
단아하고, 넉넉한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고고한 백자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것이 한국미의 특질이다.
조선백자 중에서도 18세기 전반기, 영조 시대에 금사리 가마 - P83

에서 만들어진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세기에 높이 한자반(45센티미터) 이상 되는 백자 대호는 조선이외에 어느 나라에서도 만들어진 예가 없다. 아직 기계식 동력이발명되지 않은 때여서 수동식 물레로는 이처럼 둥근 원형의 항아리를 만든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동시대 항아리들은 고구마처럼 길거나 작은 몸체에 목을 길게 붙이곤 했다. - P84

그러나 달덩이 같은 항아리를 만들고 싶었던 조선 도공의 예술의지는 마침내 커다란 왕사발 두 개를 아래위로 이어 붙여 달항아리를 만들어냈다. 때문에 달항아리는 기하학적인 동그라미가 아니라 둥그스름한 볼륨감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 완벽한 기교가주는 꽉 짜인 차가운 맛이 아니라 부정형이 주는 여백의 미가 있다.
최순우는 이를 어진 선맛이라고 표현하면서 달항아리를 보면 잘생긴 종갓집 맏며느리를 보는 듯한 흐뭇함이 있다고 했다. 이동주는 선비문화와 서민문화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하였고, 김원용은 잘 만들겠다는 욕심조차 없던 도공의 무심한 경지라고 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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