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gito(생각하다)의 어원이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모으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의 어떤 페이지에서 읽었습니다. ‘모으다‘라는 뜻의 cogo 에 어떤 행동의빈번함을 나타내는 접미사 - ito가 붙어 cogito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cogito의 원래 뜻은 ‘자주 모으다‘인데,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한데 모으는 마음의 행위에만 이단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고정되었다는겁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내부에는 그가 ‘감추어진동굴‘이라고 부르는 어떤 장소가 있는데, 거기에 많은 것이 파편으로 흩어진 채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떤 자극을 받지 않으면 동굴 밖으로 이끌려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 P5

「주간 문학동네에 산문 연재를 시작하면서 "문장을 통해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에 대해 말했는데, 그때 나는 저 『고백록』의 저자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없습니다. 이끌려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작품이란 "그 책이 없다면 스스로 보지 못했을 것을 볼 수 있도록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라고 했던 것을기억합니다. 이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밀란 쿤데라는 친절하게도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커튼)라고 덧붙였습니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책6 - P6

(속 문장)은 ‘나‘를 잘 읽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이 위대한 작가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나‘
를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에 책은 중요합니다. ‘나‘를 읽게 하지 않는다면 책을 읽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니, 이렇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나‘를 읽게 하지 않는 책을 도대체 왜 읽는단 말입니까?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람을, 세상을 정말 잘 읽어야 합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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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해변으로 내려가니 조류가 바닷가를 다시 차지했다. 바다는 까맣다. 밤바람이 수면에 하얀 프릴을 만든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부두를 향해 계속 걸어간다. 돛을 접어 밧줄로 묶어둔 요트들이 떨면서 물에 둥둥 떠 있다.
부모님이 이혼 절차를 밟는 동안 그를 데리고 살았던 할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않은 적이하루도 없다. 할머니는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절대 그 차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거기 남아서 거리의 여자가 되겠다고. 할머니는 남편에게 자식을 아홉명낳아주었다. 청년이 차에 다시 탄 이유를 묻자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땐 다 그랬어. 난 그렇게 생각했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줄 알았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스물한 살이고, 이 지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하버드에서 A학점을 받았고, - P156

달빛 속에서 아무런 시간제한도 없이 해변을 걷고 있다.
그가 신발을 벗고 맨발로 해변을 따라 걷는다. 어둠 속에서모래톱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뚜렷이 보이지만 낮에 그랬던것처럼 성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옷에서 시가 연기 냄새가난다. 그는 커프스단추를 바지 주머니에 안전하게 넣은 뒤 옷을 다 벗어 바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둔다. 하얗게 부서지는 커다란 파도 속으로 들어가니 물이 차갑다. 그는 다시 깨끗해진 기분으로 헤엄쳐 간다. 여기 더 머물 필요는 없다. 항공사에 전화해서 비행 편을 바꾸고 케임브리지로 돌아가면 된다. - P157

모래톱에 다다르니 슬슬 지친다. 밤이라서 물이 더 차갑고 파도는 더 화가 났지만 그는 늘 그러듯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쉴 수 있다. 바닥의 모래를 느끼려고 발을내려본다. 머리 위로 두꺼운 파도가 덮쳐 그를 깊은 물속으로 빠뜨린다. 그가 물을 먹고 얕은 곳을 찾아서 더 멀리 가보지만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다. 샴페인을 그렇게 마실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영하러 올 생각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단지 행복한 생일날이었다. 그는 한참 발버둥을 치다가 더 깊이잠수한다. 오직 숨을 쉬러 위로 올라가면 더 쉬울 것 같다. 공황이 덮치지만 시간이 지나자 평화로운 무언가로 바뀐다. 왜 정반대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 있을까?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 P157

고음, 듣기 싫게 찢어지는 소리가 되기 직전의 그 음 같다. 그는단념하고 수면으로 떠오른다. 헤엄쳐 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들 때까지 둥둥 떠 있다가 서서히 해변을 향해 애쓰며 나아간다. 거리가 무척 멀지만 밤하늘을 등진 리조트 불빛이 선명하고 점점 가까워진다.
얕은 물가에 이르자 해변으로 기어 올라가 모래 위에 쓰러진다. 그가 힘들게 숨을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지만 조류가 그의 옷을 가져가 버렸다. 그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최초의종을, 그들에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상상한다. 호흡이 돌아올 때까지 누워서 기다리다가 배가 모여 있는 부두로돌아간다. 저 멀리서 어느 커플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다. 그는 늘어선 요트를 차례차례 지나치며 갑판을 들여다보다가 밧줄에 걸린 노란색 티셔츠를 찾아낸다. 티셔츠를 입어보지만 너무 짧아서 은밀한 부분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팔을 넣는 구멍에 한쪽 다리를 넣고 천을 서툴게 묶어서 몸을 가린다. - P158

잠시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서 있다.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목소리가 다시 묻는다. - P160

중사는 편지를 제복 안주머니에 닷새 동안 넣어두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들어 있지만 열어보고 싶은 마음과 뭐가 들어있을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딱 절반씩이었다. 늘 비슷비슷하던 그녀의 편지였지만 최근에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는 또 다른 남자가, 교사가, 그녀 아버지의 땅에서 조랑말을 먹인다는소식을 들었다. 그녀 아버지의 들판은 산에 있었다. 쓸모없는골풀투성이라서 말을 먹일 풀도 별로 없었다. 중사가 계획을실행하려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삶이 그를 궁지로 내모는 기분이 들었다. - P163

그날 종일 그는 직무를 수행했다. 휴게실 보초병 도허티가그를 무뚝뚝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쉽게 욱하는 성질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때문이다. 12월의 비 오는 날이었고 꼭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도허티는 고개를 숙이고 허가서를 상세한 부분까지 다시 검토했다. 그런 다음 한 장 넘기면서 차가운 종이를 피부로 느꼈다.
그가 고개를 들고 약간 간절한 눈빛으로 난롯불을 물끄러미보았다. 불이 너무 약해서 꺼진 것과 다름없었다. 중사는 늘 불을 피우라면서도 따뜻해질 정도로 피우지는 못하게 했다. 보초병이 책상 앞에서 일어나 빗속으로 천천히 나갔다. - P164

중사가 일어나서 모자를 썼다. 빳빳하고 챙이 반짝거리는새 모자였다. 그가 뒷문에 걸린 커다란 검정 망토로 손을 뻗더니 어깨에 극적으로 휙 걸쳤다. 보초병은 그가 서두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의도적이었으며잘생긴 외모 때문에 더욱 돋보였다. 쳐다보지 않기 힘들지만 어떤 경우에도 등을 돌리면 안 될 남자였다. 그는 기분이 자주 바뀌었지만 눈에 비친 표정은 항상 똑같았다. 늘 서슬이 퍼랬다.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남자들은 그가 어디로 튈지 절대 예측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항상 제일 늦게 알게 되는 것이 그의 움직임이라고도 했다. 그는 위험하게 움직였지만 적을 읽는 묘한 재능을 드러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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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에 여자들이 꽃을 가지고 왔다. 각각 더 짙은 빨간색꽃이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성당 안에 꽃향기가 짙었다. 오르간 연주자가 바흐의 토카타를 한 번 더 천천히 연주했지만의심의 전율이 신자석에 퍼져 나갔다. 이미 비스듬한 아침 햇살이 화강암 세례대 가장자리를 지나 성수대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제가 고개를 들고 초록색 실크 드레스 차림의 신부들러리들이 말없이 늘어선 열린 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너머 4월의 하늘에서 창백한 구름이 갈라지고 있었다. 구름이 쪼개져서 흘러가기 시작하더니 존 롤러가 외동딸을 데리고 계단 - P31

을 올라와 그녀를 넘겨주었다.
사제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두를 환영하며 예식을 진행했다. 말을 한 번 더듬긴 했지만 곧 서약이 거행되었고 잭슨이 그녀의 손에 수수한 금반지를 끼워주었다.
제의실로 자리를 옮긴 사제는 묵직한 만년필을 드는 신부의 손이 떨리는 것을, 혼인 문서에 이름을 쓸 때 검은 잉크가 얼마나 희미한지 알아차렸지만 잭슨의 과감한 필체는 그의 이름을 확실히 나타냈다. - P32

이제 사제는 바깥에 서서 성당 마당을 바라본다. 산뜻한 날이고 맑은 바람이 분다. 색종이 조각이 비석과 포장로를 지나묘지 길 쪽으로 날렸다. 주목에 걸린 베일 조각이 떨린다. 그가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서 베일을 떼어낸다. 손으로 만져보니 뻣뻣하고 성직복 천과는 다르다. 이제 그는 옷을 갈아입고시골길로 나가서 목책을 넘어 강으로 걸어 내려가고 싶다. 거기로, 들판 사이의 습지로 내려가면 야생 오리들이 흩어지리라. 더 아래 강가까지 내려가면 마음이 차분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열쇠로 성당 문을 잠그자마자 그가 책임져야 하는 마을을 마주한다. - P32

화동을 맡았던 여자아이가 빠르게 달려가고 아이들이 그 뒤를 쫓는다. 핫위스키를 마시니 마음이 안정되고 젊은 시절의겨울 밤들이 떠오른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어머니, 어머니가푸딩에 흑맥주를 붓고 그에게 저으라고, 소원을 말하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그에게 사제가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부추겼다. 그는 복사였을 때 제의실에 서서 손으로 수단과 중백의를 쓸어본 적이 있었다. 겨울 햇살이 높은 창에 얼룩을 만들었고 성당에서는 합창단이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지만지금 여기서는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신부의아버지 롤러가 바짝 다가와서 그의 손을 꽉 잡는다. 그의 손바닥에 쥐어진 돈이 느껴진다. - P38

진주가 산산이 흩어지고 사제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다. 그는 반들반들하게 닦은 플로어에 튀어 오르는 진주알을 바라본다. 진주 한 알이 굽도리에 부딪친 다음 반대로 다시 굴러와 던 양이 내민 손을 지나친다. 진주가 사제의 의자쪽으로 다시 굴러가자 던 양이 한숨을 쉰다. 그가 손을 아래로 뻗어 진주를 집어 든다. 손에 닿는 진주가 따뜻하다. 그녀의 온기다. 이날 그는 무엇보다도 이 온기에 깜짝 놀란다.
사제가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른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가장 힘든 부분이다. - P52

롤러의 딸과 보낸 파편 같은 시간들이 마음을 스친다. 그녀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녀는 자기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 P61

이제 중국인이 사제의 손을 주무르면서 뒤로 최대한 꺾자사제는 손목이 틀림없이 부러질 것만 같다. 그런 다음 그의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린다. 중국인이 사제의 머리 양옆에 무릎을 대고 그의 척추 맨 아래, 꼬리뼈에서부터 몸통을 지나 무언가를 끌어온다. 뭔가 딱딱한것이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중국인의 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제는 미처 마음의 준비도 되기 전에 안에서 무언가가접히는 것을 느낀다. 해안에서 바닷물이 접히면서 또 다른 파도를 만들 때 같다. 그의 입에서 파도가 부서진다. 그녀의 이름이 끔찍한 비명처럼 터져 나오고, 다 끝난다.
- P62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뚜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그는 뉴리 외곽에서 롤러의 딸과 알몸으로 누워있던 것을기억한다. 홀씨가 된 그 모든 민들레 꽃을,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녀를 사랑하겠다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그 모든 일들을 온전히 기억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지, 곧 부활절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성지주일 강론을 준비해야 한다. 그는 길을 향해 들판을 다시 오르며 사제로서 나무들의 라틴어를 최선을 다해 판독하는 내일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 P64

밤이면 브래디는 여자가 그의 삶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그녀는 커다란 사냥용 말과 함께 마당에 있다. 웃으면서 검은말을 칭찬한다. 그녀가 손을 뻗어 뱃대끈을 풀고 안장을 벗긴다. 말이 몸을 푸르르 털고 콧바람을 분다. 그녀가 말을 물통으로 끌고 가서 펌프로 물을 푼다. 펌프 손잡이를 누르자 끼익소리가 나지만 말은 피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실컷 마실뿐이다. 저 멀리 들판에서 사냥개들의 소리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꿈속에서는 브래디의 개들이다. 저 사냥개들을 불러 모아서 집으로 들여보내려면 한참 걸린다. - P67

마사의 본능은 거절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서른 살이었고, 지금 싫다고 대답하면 두 번 다시 이런 질문을 못 받을지도 몰랐다. 디건에게 확신이 없었지만 그 말고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가 없었으므로 마사는 나름의 논리에 따라 빅터 디건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의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디건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그녀를 사랑했고, 역시 생각 못 했지만 그 사랑을 보여주었다.
다음 해 봄, 새들이 딱 맞는 가지를 찾아다니고 크로커스 싹이 풀을 헤치며 열심히 올라올 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마사는 디건이 장황하게 이야기했던 집으로 이사했지만 아하울은 어둑하고 쓰지 않는 방들과 삐걱거리는 가구로 가득했다. 더러운 나일론 커튼이 창유리에 들러붙었다. 나무 바닥에 양탄자도 없고 천장에는 나무좀이 가득했지만, 살림에 관심이없는 마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P86

마사는 부츠를 신고 나가서 양파를 심을 고랑을 만들거나길가의 쐐기풀 베는 것을 더 좋아했다. 디건은 숲에서 발견한묘목과 당단풍, 마로니에를 그녀에게 가져다주었고 마사는 관목 사이사이에 그것들을 심었다. 그녀는 로드아일랜드레드 암탉 스물네 마리와 수탉 한 마리를 동무 삼아 데리고 다녔다. 가끔 헛간에 서서 씨앗을 쪼는 닭들을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이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결혼 생활의 공허함을 쓰라리게 느꼈다. 침대를 정리하는 공허함, 커튼을 치고 여는 공허함. 이제 마사는 결혼하기 전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아하울주변에는 그녀가 재미를 느낄 만한 것이 거의, 아니 하나도 없었다. 마사는 매주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나갔지만 파크브리지는 우체국 하나와 술집 겸 가게 하나가 전부였고, 가게 주인은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 - P87

그러나 어느 집에나 그렇듯이 이 집에도 월요일이 왔다. 새벽이 피처럼 붉은빛이든, 축축한 비가 오든, 재와 같은 회색빛이든 디건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차가운 바닥에 맨발을 딛고옷을 입었다. 종종 팔다리가 뻣뻣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우유를 짜고, 아침 식사를 하고, 일하러 갔다. 그는 종일 일했고 하루가 무척 길 때도 있었다. 저녁이 되어다시 암소를 보살피는 동안 눈이 제멋대로 감기면, 그는 차를몰고 언덕으로 올라가서 불 켜진 창문과 굴뚝에서 엄니처럼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자기 일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확인하며 위안을 얻었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은행이 토지 문서를 돌려주면 마침내 아하울은 그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 P92

디건은 이제 중년이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은 인생의 많은부분이 끝났다고, 한정된 선택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내리막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다르다. 디건에게 은되는 그가 감수한 모든 위험에 대한 보상이다. 연금이 나올 때쯤이면 자식들은 다 컸으리라. 그는 집에서 쓸 쇼트혼소한마리만 데리고 아하울에서 사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는 내킬때 일어나서 돌을 정리하고 과수원 담벼락을 손볼 것이다. 삽을 꺼내서 오크 나무도 더 심을 테다. 돌담이, 오크 나무의 파란 그림자가 벌써부터 느껴진다. 첫째는 결혼해서 아이들을낳아 성을 물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일찌감치 은퇴해서 그토록 갈망하는 편안한 삶으로 물러날 때까지 디건은 자식들을 키우고 생활비를 내고 한참 일해야 한다. - P93

이제 아하울에 등을 돌려야 한다. 몇 명에게는 길이 이렇게짧게 느껴진 적이 없고, 또 몇 명에게는 그 반대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밝은 적은 없었다. 불똥과 재가 날아다닌다. 오크나무까지 불이 붙을 것만 같다. 소들이 구경을 하려고, 몸을 따뜻하게 덥히려고 울타리까지 내려온다. 그 형체가 섬뜩하지만불빛을 받아 반쯤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마사가 딸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모아둔 돈을, 외판원과 못쓰게 된 붉은 장미들을 생각한다. 여자애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저지가 돌아왔다. 아이가 지금 당장 신경 쓰는 것은 그사실밖에 없다. 자기가 오빠에게 불붙이는 법을 가르쳐줬다는생각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그 죄책감은 나중에나 생길 것이다. 디건은 무감각하지만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다. 과거의 - P140

고역은 사라졌고 새로운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길 웅덩이에 불길이 비쳐 은처럼 밝게 빛난다. 디건이 생각을 붙잡는다. 그에게는 일이 있고, 이건 그저 집일 뿐이고, 그들은 살아있다.
자기가 만든 농장을 잃은 아들이 제일 힘들어한다. 아이가했던 모든 노고가 자기 잘못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생긴다. 아이는 자기가 만든 것을 바라본다. 그 누가 피웠던 것보다 더 큰 불이다. 길 끝으로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이제 더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 잠자리를 내주겠다고 말한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아이가 따라가면서 계속 속삭인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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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을 읽을 때도 그랬는데 [푸른 들판을 걷다]의 첫 단편부터 쉽지 않다. 토 나올 것 같고 한편으론 먹먹하다. 부모는 대체 뭔가! 부모가 권력인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다니! 욕정을 배출하다니!
아이들의 생애 전체를 망쳐버렸다. 오래 전의 글들이지만 지금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 생각때문에 메슥거린다.

햇살이 화장대 발치에 닿을 때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행 가방을 다시 들여다본다. 뉴욕은 날씨가 덥지만 겨울이 되면 추워질지도 모른다. 오전 내내 밴텀 닭들이 울었다. 그 소리가 그립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옷을 입고, 씻고, 구두를 닦아야 한다. 바깥은 들판에 이슬이 내려서 종이처럼 하얗고 텅비어 있다. 곧 태양이 이슬을 태워버릴 것이다. 건초를 말리기좋은 날이다.
당신 어머니는 자기 방에서 물건을 이리저리 옮기고 문을열었다 닫았다 한다. 당신이 떠나면 어머니는 어떨까. 상관없다는 마음도 든다. - P11

당신은 아침 식사에 쓴 접시들을 건조대로 치운다. 어머니에게 할 말이 없다. 입을 열면 엉뚱한 말이 나올 텐데, 그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다. 당신은 위층으로 올라가지만 방으로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당신은 층계참에 서 있다. 부엌에서 두사람이 뭐라 말하지만 무슨 소리인지 들리지 않는다. 참새가창틀에 휙 내려와 앉더니 유리에 비친 자신을 쫀다. 부리가 유리에 부딪친다. 당신은 참새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새는 곧 날아간다. - P15

큰언니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교사가 되었다. 유진은 공부를 잘했지만 열네 살이 되자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농사일을 시켰다. 사진을 보면 장남과 장녀는 옷을 잘 차려입었다. 새틴 리본, 짧은 바지, 두 눈속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태양, 자연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이줄줄이 태어나는 대로 먹이고 입히고 기숙학교에 보냈다. 가끔 공휴일과 주말이 이어지면 집으로 돌아왔다. 선물과 낙관주의를 안고 오지만 낙관주의는 금방 시들었다. 언니와 오빠들은 모든 것을, 여기서 살던 추억을 떠올리다가도 아버지의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지르면 뻣뻣하게 굳었다. 언니 오빠들은집을 다시 떠나면 치유받는 것 같았고, 빨리 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 P16

당신이 기숙학교에 들어갈 차례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때쯤 되자 아버지는 딸을 가르쳐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신은 어차피 떠날 사람이므로 가르쳐봐야 다른 남자가득을 볼 뿐이다. 하지만 집에서 통학하는 학교에 보내면 집안일과 농사일을 거들게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방을 옮겼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일날 섹스를 해주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 P16

방에 들어가서 거기서 했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않았지만 당신은 알았다. 그러다가 그 역시 멈추었고 대신 당신이 아버지의 방에 들여보내졌다. 한 달에 한 번 정도였고, 늘유진이 집을 비운 사이였다.
당신도 맨 처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갔다. 잠옷을 입고 층계참을 가로질러 가서 아버지의 팔을 베고 누웠다. 아버지는당신과 장난을 치고, 칭찬하고, 머리가 좋다고, 제일 똑똑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끔찍한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잠옷을 끌어 올렸고, 우유를 짜면서 튼튼해진 손가락이 당신을 찾았다. - P17

미친 손은 신음이 나올 때까지 그 자신을 만졌고 그런 다음 그는 당신에게 옆에 놓인 천을 달라고, 이제 가고 싶으면 가봐도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키스를 해야 했는데, 수염 그루터기가 까끌까끌하고 숨결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가끔 그는 당신에게도 담배를 한 개비 주었고 당신은 그의 옆에 누워서 담배를 피우며 다른 사람인 척할 수 있었다. 끝나고 나면 당신은 욕실로 가서 아무 일도 아니라고 혼자 되뇌고 물이 뜨거우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씻었다.
이제 당신은 층계참에 서서 행복을, 좋은 날을, 즐거운 저녁을, 친절한 말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작별을 어렵게 만들 행복한 기억을 찾아야 할 것 같지만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 - P17

대신 키우던 세터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을 때가 기억난다.
어머니가 당신을 그의 방에 들여보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헛간에서 어머니가 반으로 자른 나무통 위로 몸을 숙이고 자루를 물속에 넣었고, 결국 낑낑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자루가 고요해졌다. 강아지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 날,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P18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하니 거의 아무도 없지만 당신은 여기가 맞다는 걸 안다. 당신은 또 다른 문을 찾다가 여자의 신체 일부를 알아본다. 문을 밀자 열린다. 당신은 환한 개수대와 거울을 지나친다. 누군가가 괜찮냐고 묻지만 ㅡ정말 바보같은 질문이다―당신은 또 다른 문을 열었다가 닫을 때까지,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 문을 잠글 때까지 울지 않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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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아침, 내가 산책하러 나갔을 때 언덕 아래 근처 진입로 가장자리로 연노란색 민들레가 자라고 있는 것이보였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리를 숙여 그 부드러운 머리 윗부분을 만져보았다. 그리고생각했다. 오 세상에! 그뒤로 산책길에 민들레가 점점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들레는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긴 흙길의 가장자리에도 자랐는데, 어느 날, 내가 정말로 어렸을때, 나는 어머니에게 주려고 민들레를 꺾어 작은 꽃다발을만들었다. 어머니는 새로 만들어준 원피스의 위쪽에 얼룩이생겼다며 내게 몹시 화를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민들레-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내 가슴을 경이로움으로 열어주었다. - P100

나는 조수의 변화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물이 언제 들고 언제 나는지 이해했고, 그것에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밀물이들 때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지켜보았는데, 파도는 하얗게 소용돌이치며 우리 아래로 검어진 바위에 철썩철썩 부딪혔다. 또한 우리 앞에 있는 두 개의 섬에도 부딪혔다. 나는 그 장면을 바다가 거의 잠시 평평해 보이는 날에 지켜보았고, 물이 젖은 바위와 구릿빛으로 노르스름한 해초만 남기고 빠져나가는 것도 지켜보았다. 앞을 바라보면, 그 작은 두 개의 섬 - P108

너머로는 수평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바다는 그만큼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다. 나는 하늘과 바다의 색이 서로짝을 이루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늘이 회색이면 종종 그렇듯이-바다도 회색인 것 같았고, 하늘이 연푸른색이면 바다는 푸른색으로, 혹은 구름과해가 있으면 이따금 진녹색으로 보였다. 바다는 내게 어쨌거나 큰 위로가 되었고, 그 두 섬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내 안에서 오르내리는 슬픔이 그 조수 같았다. - P109

마거릿은 걸음이 빨랐고 윌리엄도 그랬다. 그래서 그 두사람이 우리보다 앞에서 걸어갔는데, 솔직히 그건 좋았다.
기분좋은 아침이었다. 산책로는 강을 따라 이어지는 포장된좁은 길이었고, 강은 그날 햇빛 속에서 반짝거렸다. 마침내새잎이 돋기 시작했고, 녹색과 밝은 빛의 느낌이 있었다. 나는 나무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움에 확신이 없는 소녀들 같아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풀이 자란 땅에는 여기저기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마거릿은 종종걸음을 멈추고 우리가 지나갈 때 마주치는많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녀가 그들의 안부를. 그들의 어머니들과 자식들의 안부를,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것을 보았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어쨌거나 목사였다-그리고 그 역할을 잘해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정말로 좋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다는 것,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 P119

그날 밤이 지나고 나서야, 잠자리에 누운 채 나는 윌리엄이 줄곧 외로웠음을 깨달았다. 내가 있었는데도, 우리 딸들이 있었는데도, 그리고 브리짓과 다른 두 아내가 있었는데도, 윌리엄은 세상에서 외롭다고 느꼈다. 그런데 이제 그에게 누이가 있었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행복해서, 그리고 또한 슬퍼서.


그리고 잠들기 직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윌리엄이 팬데믹 동안 메인에 오기로 한 것이 여기 누이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그는 분명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그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를 몬토크에 있는 집으로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메인에 왔다.
정말로 그 때문이었을까? 잠이 들면서,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 P203

나는 내 머리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 문장을 시작하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밥은 말했다. "나도 그래요.
나는 그게 그냥 코비드 머리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더 나빠질지도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내 머릿속에 혼란스러운 감각이 있었다. 예컨대 침실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로 온 거지? 그러면 마이클이, 바이러스와함께 나타났다는 마이클의 ‘브레인 포그‘ 증상이 생각났다. 그의 브레인 포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그 바이러스에감염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가 그방에 온 이유를 기억해낼 수 없었던 때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예컨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려고 커피머신에 필터를 넣다가 내 동작이 느려졌다고 생각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늙어버린 것 같았다 - P204

우리는 포치에서 플렉시글라스를 떼어내고, 안쪽 벽에 기대어 있던 방충망을 달았다. 우리는 거기서 식사했다포치는 덧붙인 보조 식탁만 아래로 내리면 둥근 식탁을 놓을 수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고, 식탁에는 방울이 달린 꽃무늬 보가깔려 있었다. 그리고 바다는 굉장했다. 지금은 창문이 열려있어 밤에 바다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다의 소리에 대해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엔 두 개의 층이 있었다. 조용하고 거대한 깊고 지속적인 소리가 있었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늘 내게 전율을 일으켰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빛은 경이로웠는데, 희미한 흰색이다가거의 번지듯 노란색으로 변해갔고, 이어 하루가 지나면서 노란색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비가 내릴 때 사실 비는 차갑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밤에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 P210

"내 인생에 대해 애도하는 중이야."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을 먹은 뒤 카우치에 같이 앉아 여름비가 내리는 것을보고 있을 때 윌리엄이 말했다.
"그거 체호프 희곡에 나오는 말인데." 내가 말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그걸 알다니 놀라워. 『갈매기에 나오는 거야."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에스텔이 끊임없이 오디션을 봤잖아." 그리고 윌리엄이 다시 그 대사를 반복했다. "내 인생에대해 애도하는 중이야." - P249

12월에 나는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오빠의 죽음과 연관이 있었다. 비키가 나를 이기적이라고 했기 때문은 더이상 아니었고, 피트의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무서운사실 때문이었다. 그 일로 내 어린 시절 전체가 죽은 것처럼느껴졌다. 내가 어린 시절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기를 바란다고, 당신은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 어린 시절의 모든 부분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오빠가 살아 있기를 바라지만, 그는 그 작은 집에서 혼자 죽었다. 나는 그가 바이러스에 감염됐어도 병원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을 - P300

생각했고, 어렸을 때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는 것을 얼마나무서워했는지 떠올렸다. 나는 슬프다는 느낌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깊숙이 파고드는 슬픔이었고, 육신의 질병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날이 아주 일찍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심하게 불고날씨도 추워서, 우리가 처음 메인에 도착했을 때만큼 자주산책하러 나갈 수 없었다. 너무 추운 날씨라 더이상 사교적인 만남도 없었다. 게다가 코비드가 메인까지 침투했고, 온 주에 퍼져서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나는 거의 매일 작은서점 너머의 내 작업실로 갔다. 그게 없었다면 나는 정말로미쳤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거의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아주 어렵게 느껴졌다. 심지어 집안의 욕실 두 개를 청소하는 것도 내 역량 밖의 일 같았지만, 마침내 청소를 끝냈을때는 기분이 훨씬 좋아진 것을 알아차렸다. 잠시 동안은 그랬다. 자신을 형편없게 느끼는 많은 사람이 그렇듯 이 기분에는 수치심이 뒤따랐다. 윌리엄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쨌거나 그에게 말할 것이 뭐가 있는가? 나는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 P301

며칠 뒤 나는 한밤중에 잠에서 깼고, 기억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너무 불쾌해서 내 머리에서 밀어낸 기억. 나는 그 기억을 나쁜 기억들이 화장지 부스러기처럼 조각나는 주머니맨 아래에 밀어넣어두었었다. 그 기억은 이런 것이었다.
이 모든 일ㅡ팬데믹 말이다ㅡ이 일어나기 전 가을에 떠난북투어에서, 나는 시카고 외곽에 있는 내가 다닌 그 대학에서 강연을 하러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북투어 때 시카고에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강연을 하러 가기 바로 전날 밤에 갑자기 아주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날 밤 공포가 계속 자랐고,
그래서 거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강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우려가 사실이 
된 것을 느꼈다. 학생들이 들어왔지만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나는 당황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를 하기로되어 있었고, 그것은 가난하게 자란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 P306

하지만 학생들은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학생들이 나를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나라고 생각한다고생각되는 내가 되었다. 나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것에 대한 글을 쓰는 늙은 여자였다. 그래서 내가 감정적으로—춥다고 느꼈다는 것,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그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학생들하나하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지를 중얼중얼 말했는데, 내가 알기로 전부 부자 타운이었다. 메인에서 온 젊은 여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나를 흘끗 쳐다보기라도 한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여기는 사십 년 전에 내가 다닌 학교가 아니라고. 나는 여기가 그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내가 그 강의실에 앉아서 보기로는 지금 이 폐쇄적인 젊은이들에게서 보이는 부유한 분위기는 없었다. 학생들은 모두 열다섯 명이었는데, 회의용 테이블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둘러앉아 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 P307

나는 조용히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계속 이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 생각은 이랬다. 그날 시카고 외곽에서 보낸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어린 시절에 느낀 수치심을다시금 아주 깊이 느꼈다는 것. 그런데 내 인생 전체에서 계속 그렇게 느꼈다면 어땠을까. 평생 가진 모든 직업이 내가제대로 먹고살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내가 내종교와 내 총을 조롱한 이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늘 멸시를 당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종교도 없고 총도 없었지만, 이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문득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내 언니 비키와 같았고,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난하다고 느껴왔고, 멸시받았으며, 더이상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 P310

나는 밖으로 나갔고, 내가 지내고 있는 건물의 현관 입구계단에 앉았다. 거기 앉아 딸들과 윌리엄과 데이비드에 대해-그가 떠나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떠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슬펐다는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쳤다.
우리는 모두 늘 록다운 상태에 있다는 생각. 단지 우리는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 그저 그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우리 대부분은 그저 헤쳐나가려고 애쓸 뿐이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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