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 전에 여자들이 꽃을 가지고 왔다. 각각 더 짙은 빨간색꽃이었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성당 안에 꽃향기가 짙었다. 오르간 연주자가 바흐의 토카타를 한 번 더 천천히 연주했지만의심의 전율이 신자석에 퍼져 나갔다. 이미 비스듬한 아침 햇살이 화강암 세례대 가장자리를 지나 성수대까지 미끄러져 들어왔다. 사제가 고개를 들고 초록색 실크 드레스 차림의 신부들러리들이 말없이 늘어선 열린 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 너머 4월의 하늘에서 창백한 구름이 갈라지고 있었다. 구름이 쪼개져서 흘러가기 시작하더니 존 롤러가 외동딸을 데리고 계단 - P31
을 올라와 그녀를 넘겨주었다. 사제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두를 환영하며 예식을 진행했다. 말을 한 번 더듬긴 했지만 곧 서약이 거행되었고 잭슨이 그녀의 손에 수수한 금반지를 끼워주었다. 제의실로 자리를 옮긴 사제는 묵직한 만년필을 드는 신부의 손이 떨리는 것을, 혼인 문서에 이름을 쓸 때 검은 잉크가 얼마나 희미한지 알아차렸지만 잭슨의 과감한 필체는 그의 이름을 확실히 나타냈다. - P32
이제 사제는 바깥에 서서 성당 마당을 바라본다. 산뜻한 날이고 맑은 바람이 분다. 색종이 조각이 비석과 포장로를 지나묘지 길 쪽으로 날렸다. 주목에 걸린 베일 조각이 떨린다. 그가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서 베일을 떼어낸다. 손으로 만져보니 뻣뻣하고 성직복 천과는 다르다. 이제 그는 옷을 갈아입고시골길로 나가서 목책을 넘어 강으로 걸어 내려가고 싶다. 거기로, 들판 사이의 습지로 내려가면 야생 오리들이 흩어지리라. 더 아래 강가까지 내려가면 마음이 차분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열쇠로 성당 문을 잠그자마자 그가 책임져야 하는 마을을 마주한다. - P32
화동을 맡았던 여자아이가 빠르게 달려가고 아이들이 그 뒤를 쫓는다. 핫위스키를 마시니 마음이 안정되고 젊은 시절의겨울 밤들이 떠오른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어머니, 어머니가푸딩에 흑맥주를 붓고 그에게 저으라고, 소원을 말하라고 했던 것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그에게 사제가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부추겼다. 그는 복사였을 때 제의실에 서서 손으로 수단과 중백의를 쓸어본 적이 있었다. 겨울 햇살이 높은 창에 얼룩을 만들었고 성당에서는 합창단이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길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지만지금 여기서는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다. 신부의아버지 롤러가 바짝 다가와서 그의 손을 꽉 잡는다. 그의 손바닥에 쥐어진 돈이 느껴진다. - P38
진주가 산산이 흩어지고 사제는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한다. 그는 반들반들하게 닦은 플로어에 튀어 오르는 진주알을 바라본다. 진주 한 알이 굽도리에 부딪친 다음 반대로 다시 굴러와 던 양이 내민 손을 지나친다. 진주가 사제의 의자쪽으로 다시 굴러가자 던 양이 한숨을 쉰다. 그가 손을 아래로 뻗어 진주를 집어 든다. 손에 닿는 진주가 따뜻하다. 그녀의 온기다. 이날 그는 무엇보다도 이 온기에 깜짝 놀란다. 사제가 댄스플로어를 가로지른다. 신부가 양손을 내밀고 서있다. 그가 신부의 손에 진주를 내려놓자 그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녀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만 하면 사제는 그녀의 손을 잡고 여기서 달아나리라. 적어도 사제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로 그것이 그녀가 한때 바라던 일이었지만 세상에서 두 사람이 같은 순간에 같은것을 바라는 일은 거의 없다. 때로는 바로 그 점이 인간으로서가장 힘든 부분이다. - P52
롤러의 딸과 보낸 파편 같은 시간들이 마음을 스친다. 그녀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녀는 자기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자서는 스스로를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 P61
이제 중국인이 사제의 손을 주무르면서 뒤로 최대한 꺾자사제는 손목이 틀림없이 부러질 것만 같다. 그런 다음 그의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린다. 중국인이 사제의 머리 양옆에 무릎을 대고 그의 척추 맨 아래, 꼬리뼈에서부터 몸통을 지나 무언가를 끌어온다. 뭔가 딱딱한것이 꼼짝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중국인의 손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제는 미처 마음의 준비도 되기 전에 안에서 무언가가접히는 것을 느낀다. 해안에서 바닷물이 접히면서 또 다른 파도를 만들 때 같다. 그의 입에서 파도가 부서진다. 그녀의 이름이 끔찍한 비명처럼 터져 나오고, 다 끝난다. - P62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뚜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그는 뉴리 외곽에서 롤러의 딸과 알몸으로 누워있던 것을기억한다. 홀씨가 된 그 모든 민들레 꽃을,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녀를 사랑하겠다던 말을 기억한다. 그는 그 모든 일들을 온전히 기억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지, 곧 부활절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성지주일 강론을 준비해야 한다. 그는 길을 향해 들판을 다시 오르며 사제로서 나무들의 라틴어를 최선을 다해 판독하는 내일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 P64
밤이면 브래디는 여자가 그의 삶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다. 그녀는 커다란 사냥용 말과 함께 마당에 있다. 웃으면서 검은말을 칭찬한다. 그녀가 손을 뻗어 뱃대끈을 풀고 안장을 벗긴다. 말이 몸을 푸르르 털고 콧바람을 분다. 그녀가 말을 물통으로 끌고 가서 펌프로 물을 푼다. 펌프 손잡이를 누르자 끼익소리가 나지만 말은 피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실컷 마실뿐이다. 저 멀리 들판에서 사냥개들의 소리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꿈속에서는 브래디의 개들이다. 저 사냥개들을 불러 모아서 집으로 들여보내려면 한참 걸린다. - P67
마사의 본능은 거절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서른 살이었고, 지금 싫다고 대답하면 두 번 다시 이런 질문을 못 받을지도 몰랐다. 디건에게 확신이 없었지만 그 말고는 결혼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가 없었으므로 마사는 나름의 논리에 따라 빅터 디건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의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디건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실은 그녀를 사랑했고, 역시 생각 못 했지만 그 사랑을 보여주었다. 다음 해 봄, 새들이 딱 맞는 가지를 찾아다니고 크로커스 싹이 풀을 헤치며 열심히 올라올 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마사는 디건이 장황하게 이야기했던 집으로 이사했지만 아하울은 어둑하고 쓰지 않는 방들과 삐걱거리는 가구로 가득했다. 더러운 나일론 커튼이 창유리에 들러붙었다. 나무 바닥에 양탄자도 없고 천장에는 나무좀이 가득했지만, 살림에 관심이없는 마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P86
마사는 부츠를 신고 나가서 양파를 심을 고랑을 만들거나길가의 쐐기풀 베는 것을 더 좋아했다. 디건은 숲에서 발견한묘목과 당단풍, 마로니에를 그녀에게 가져다주었고 마사는 관목 사이사이에 그것들을 심었다. 그녀는 로드아일랜드레드 암탉 스물네 마리와 수탉 한 마리를 동무 삼아 데리고 다녔다. 가끔 헛간에 서서 씨앗을 쪼는 닭들을 바라보며 행복감을 느끼다가도 이내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녀는 결혼 생활의 공허함을 쓰라리게 느꼈다. 침대를 정리하는 공허함, 커튼을 치고 여는 공허함. 이제 마사는 결혼하기 전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아하울주변에는 그녀가 재미를 느낄 만한 것이 거의, 아니 하나도 없었다. 마사는 매주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나갔지만 파크브리지는 우체국 하나와 술집 겸 가게 하나가 전부였고, 가게 주인은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 - P87
그러나 어느 집에나 그렇듯이 이 집에도 월요일이 왔다. 새벽이 피처럼 붉은빛이든, 축축한 비가 오든, 재와 같은 회색빛이든 디건은 침대에서 일어나서 차가운 바닥에 맨발을 딛고옷을 입었다. 종종 팔다리가 뻣뻣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불평 없이 우유를 짜고, 아침 식사를 하고, 일하러 갔다. 그는 종일 일했고 하루가 무척 길 때도 있었다. 저녁이 되어다시 암소를 보살피는 동안 눈이 제멋대로 감기면, 그는 차를몰고 언덕으로 올라가서 불 켜진 창문과 굴뚝에서 엄니처럼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자기 일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확인하며 위안을 얻었다. 그가 은퇴하기 전에 은행이 토지 문서를 돌려주면 마침내 아하울은 그의 소유가 될 것이었다. - P92
디건은 이제 중년이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은 인생의 많은부분이 끝났다고, 한정된 선택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내리막길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다르다. 디건에게 은되는 그가 감수한 모든 위험에 대한 보상이다. 연금이 나올 때쯤이면 자식들은 다 컸으리라. 그는 집에서 쓸 쇼트혼소한마리만 데리고 아하울에서 사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는 내킬때 일어나서 돌을 정리하고 과수원 담벼락을 손볼 것이다. 삽을 꺼내서 오크 나무도 더 심을 테다. 돌담이, 오크 나무의 파란 그림자가 벌써부터 느껴진다. 첫째는 결혼해서 아이들을낳아 성을 물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일찌감치 은퇴해서 그토록 갈망하는 편안한 삶으로 물러날 때까지 디건은 자식들을 키우고 생활비를 내고 한참 일해야 한다. - P93
이제 아하울에 등을 돌려야 한다. 몇 명에게는 길이 이렇게짧게 느껴진 적이 없고, 또 몇 명에게는 그 반대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밝은 적은 없었다. 불똥과 재가 날아다닌다. 오크나무까지 불이 붙을 것만 같다. 소들이 구경을 하려고, 몸을 따뜻하게 덥히려고 울타리까지 내려온다. 그 형체가 섬뜩하지만불빛을 받아 반쯤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마사가 딸의 손을 잡는다. 그녀는 모아둔 돈을, 외판원과 못쓰게 된 붉은 장미들을 생각한다. 여자애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저지가 돌아왔다. 아이가 지금 당장 신경 쓰는 것은 그사실밖에 없다. 자기가 오빠에게 불붙이는 법을 가르쳐줬다는생각은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그 죄책감은 나중에나 생길 것이다. 디건은 무감각하지만 전보다 가벼워진 느낌이다. 과거의 - P140
고역은 사라졌고 새로운 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길 웅덩이에 불길이 비쳐 은처럼 밝게 빛난다. 디건이 생각을 붙잡는다. 그에게는 일이 있고, 이건 그저 집일 뿐이고, 그들은 살아있다. 자기가 만든 농장을 잃은 아들이 제일 힘들어한다. 아이가했던 모든 노고가 자기 잘못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가 생긴다. 아이는 자기가 만든 것을 바라본다. 그 누가 피웠던 것보다 더 큰 불이다. 길 끝으로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천천히 다가온다. 이제 더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이 잠자리를 내주겠다고 말한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아이가 따라가면서 계속 속삭인다. "누가 신경이나 쓴대?" - P1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