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해변으로 내려가니 조류가 바닷가를 다시 차지했다. 바다는 까맣다. 밤바람이 수면에 하얀 프릴을 만든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부두를 향해 계속 걸어간다. 돛을 접어 밧줄로 묶어둔 요트들이 떨면서 물에 둥둥 떠 있다.
부모님이 이혼 절차를 밟는 동안 그를 데리고 살았던 할머니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않은 적이하루도 없다. 할머니는 인생을 다시 산다면 절대 그 차에 올라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느니 거기 남아서 거리의 여자가 되겠다고. 할머니는 남편에게 자식을 아홉명낳아주었다. 청년이 차에 다시 탄 이유를 묻자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땐 다 그랬어. 난 그렇게 생각했지, 선택의 여지가 없는줄 알았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스물한 살이고, 이 지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하버드에서 A학점을 받았고, - P156

달빛 속에서 아무런 시간제한도 없이 해변을 걷고 있다.
그가 신발을 벗고 맨발로 해변을 따라 걷는다. 어둠 속에서모래톱에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뚜렷이 보이지만 낮에 그랬던것처럼 성나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옷에서 시가 연기 냄새가난다. 그는 커프스단추를 바지 주머니에 안전하게 넣은 뒤 옷을 다 벗어 바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둔다. 하얗게 부서지는 커다란 파도 속으로 들어가니 물이 차갑다. 그는 다시 깨끗해진 기분으로 헤엄쳐 간다. 여기 더 머물 필요는 없다. 항공사에 전화해서 비행 편을 바꾸고 케임브리지로 돌아가면 된다. - P157

모래톱에 다다르니 슬슬 지친다. 밤이라서 물이 더 차갑고 파도는 더 화가 났지만 그는 늘 그러듯 해안으로 헤엄쳐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쉴 수 있다. 바닥의 모래를 느끼려고 발을내려본다. 머리 위로 두꺼운 파도가 덮쳐 그를 깊은 물속으로 빠뜨린다. 그가 물을 먹고 얕은 곳을 찾아서 더 멀리 가보지만 바닥이 느껴지지 않는다. 샴페인을 그렇게 마실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수영하러 올 생각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단지 행복한 생일날이었다. 그는 한참 발버둥을 치다가 더 깊이잠수한다. 오직 숨을 쉬러 위로 올라가면 더 쉬울 것 같다. 공황이 덮치지만 시간이 지나자 평화로운 무언가로 바뀐다. 왜 정반대는 항상 이렇게 가까이 있을까?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 P157

고음, 듣기 싫게 찢어지는 소리가 되기 직전의 그 음 같다. 그는단념하고 수면으로 떠오른다. 헤엄쳐 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들 때까지 둥둥 떠 있다가 서서히 해변을 향해 애쓰며 나아간다. 거리가 무척 멀지만 밤하늘을 등진 리조트 불빛이 선명하고 점점 가까워진다.
얕은 물가에 이르자 해변으로 기어 올라가 모래 위에 쓰러진다. 그가 힘들게 숨을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지만 조류가 그의 옷을 가져가 버렸다. 그는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최초의종을, 그들에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를 상상한다. 호흡이 돌아올 때까지 누워서 기다리다가 배가 모여 있는 부두로돌아간다. 저 멀리서 어느 커플이 개를 산책시키고 있다. 그는 늘어선 요트를 차례차례 지나치며 갑판을 들여다보다가 밧줄에 걸린 노란색 티셔츠를 찾아낸다. 티셔츠를 입어보지만 너무 짧아서 은밀한 부분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팔을 넣는 구멍에 한쪽 다리를 넣고 천을 서툴게 묶어서 몸을 가린다. - P158

잠시 그는 대답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서 있다. 그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렇게 먼 길을 가서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도 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를 생각한다. 강에서는 수영을 그렇게 잘했는데 말이다. 그가 왜 그랬냐고 묻자 할머니는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몰라서 그랬다고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목소리가 다시 묻는다. - P160

중사는 편지를 제복 안주머니에 닷새 동안 넣어두었다. 딱딱한 무언가가 들어 있지만 열어보고 싶은 마음과 뭐가 들어있을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딱 절반씩이었다. 늘 비슷비슷하던 그녀의 편지였지만 최근에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는 또 다른 남자가, 교사가, 그녀 아버지의 땅에서 조랑말을 먹인다는소식을 들었다. 그녀 아버지의 들판은 산에 있었다. 쓸모없는골풀투성이라서 말을 먹일 풀도 별로 없었다. 중사가 계획을실행하려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삶이 그를 궁지로 내모는 기분이 들었다. - P163

그날 종일 그는 직무를 수행했다. 휴게실 보초병 도허티가그를 무뚝뚝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쉽게 욱하는 성질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기때문이다. 12월의 비 오는 날이었고 꼭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도허티는 고개를 숙이고 허가서를 상세한 부분까지 다시 검토했다. 그런 다음 한 장 넘기면서 차가운 종이를 피부로 느꼈다.
그가 고개를 들고 약간 간절한 눈빛으로 난롯불을 물끄러미보았다. 불이 너무 약해서 꺼진 것과 다름없었다. 중사는 늘 불을 피우라면서도 따뜻해질 정도로 피우지는 못하게 했다. 보초병이 책상 앞에서 일어나 빗속으로 천천히 나갔다. - P164

중사가 일어나서 모자를 썼다. 빳빳하고 챙이 반짝거리는새 모자였다. 그가 뒷문에 걸린 커다란 검정 망토로 손을 뻗더니 어깨에 극적으로 휙 걸쳤다. 보초병은 그가 서두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의도적이었으며잘생긴 외모 때문에 더욱 돋보였다. 쳐다보지 않기 힘들지만 어떤 경우에도 등을 돌리면 안 될 남자였다. 그는 기분이 자주 바뀌었지만 눈에 비친 표정은 항상 똑같았다. 늘 서슬이 퍼랬다. 그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던 남자들은 그가 어디로 튈지 절대 예측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항상 제일 늦게 알게 되는 것이 그의 움직임이라고도 했다. 그는 위험하게 움직였지만 적을 읽는 묘한 재능을 드러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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