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내 꿈은 내가 꾸어야 한다. 내 꿈을누군가에게 대신 꾸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자기 주권을 내주는 것과 같다. 꿈을 맡기는 순간, 꿈이 아니라 삶이 지배당한다. 내 꿈을 대신 꾼 자가 내 꿈만 아니라 내인생도 통제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꿈을 맡기지 말아야한다. 꿈이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한다. - P146

꿈은 텍스트이다.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텍스트의 운명이다. 모든 텍스트는 그 처지가 꿈과 같다. 해석가의 입장이나 시각, 심지어 이해관계에 따라 텍스트가 요동친다.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해몽가의 입이다. 해몽이 있기전까지 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기보다, 무엇을 말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해석이 나올 때까지 텍스트는 그저 기다린다. 해몽가가 좋게 말하면 좋은 꿈이되고, 그가 나쁘게 말하면 나쁜 꿈이 된다.  - P151

그러니 꿈에 붙들리지 말 것. 꿈으로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것. 꿈의 해석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 것. 꿈이 창의적으로, 자의적으로, 그러니까 우연에 의해 해석된다는 사실을 인지할것. 꿈은 내가 꾸어도 그 꿈의 실현이 나의 뜻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삶의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할 것.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죽는 사람도 나온다. 꿈을 꾸어 다른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지만, 꿈을 꾸었기 때문에 죽기도 한다. 내 의지가 작동했다고 할 수없는 꿈을 꾼 것도 내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52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나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꿈 때문에 죽기도 하다니.
우리는 꿈에 대해 속수무책이고, 속수무책인 채 그 꿈에 지배당한다. 인생이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라고 했던 파스칼의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생은 더 변덕스러운 꿈이다.


다른 사람의 꿈이 나를 취조하는 근거로 작용할 때, 누가 꾼것인지 모르는 꿈에 대한 해석이 나의 삶을 휘저으려고 할 때, 외부의 꿈들과 바깥의 해석들이 내부를 흔들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귀를 닫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해석자의 입‘이 내 삶의 영역으로 파동하며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무용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몸부림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P153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아토포스atopos라는단어를 사용했다. 장소를 뜻하는 topos에 부정을 뜻하는 a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자리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여줄 땅‘은 아토포스이다. ‘보여줄‘ 땅에는 지금 아브람의 가족이 살고 있는 땅, 고향, 하란, 장소로서의 땅이 확보하고 있는 물리적 확실성이 없다. 하란은 어디인지 분명하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아브람이 가야 하는 땅은 어디라고 단정해서 말할수 없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보여줄‘ 땅은 보여주는 순간 ‘보일‘ 것이다. 보여주는 순간까지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보여줄‘ 땅은 현재는 보이지 않는 땅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보여줄‘, ‘보이지 않는‘의 특징이다. - P176

카페에 마주앉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인을 본다. 간혹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지지만 그 웃음은 마주앉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향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접속해 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 마주앉아 있지만 다른 사이트에 접속하여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채팅을 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옆에 있는 연인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에, 혹은 누구 옆에 가 있는지 말할 수 없다. 물리적 접촉이 만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물리적 공간의 점유가 친밀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두사람이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181

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한 나는 신에게 갈 수 없다. 나의 일부가 되어 있는 신은 나를 찾아올 수 없다. 신에게 가기 위해서는 내가 신의 일부가 아니어야 한다. 타자여야 한다. 신이나에게 오기 위해서도 신은 타자여야 한다. 흡수와 예속은 인간을 대하는 신의 방법이 아니고 신을 대하는 인간의 방법도아니다. 인간이 신에게 흡수되어버릴 때 인간의 행동은 신의행동과 같은 것이 된다. 인간의 어떤 과오도 인간의 책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이용하거나 신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혹은 모든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자신에게 이용당한다. - P183

모든 개혁은 근본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강요는 항상 외부에서 온다. 코로나19 상황은 사람의 모든 삶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주문받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집합 금지와 비대면 예배는, 어떤 점에서 강요된 종교개혁이다. 개혁은 흔히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의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통해 완수된다. 익숙해진 것은 낯설어져야 한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 보이는, 장소로서의 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대체할 수없는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서,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신비인 신과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의 대체재가 되어 있는 신을 구해야하고, 전체의 부분으로 예속, 흡수시키는 맹신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야 한다. - P185

물론 그 선택이 순수하게 독자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그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것이다. 그 선택에 관여한 요소들을 언급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내적, 외적 조건들을 공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선택은 때로 의식적이지만 더 자주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고 고립되어있지 않으며 감정의 진공 상태에 있지도 않다. 개인의 욕망이투사되거나 시대의 공기가 스며드는 걸 피할 수 없다. 실은 사람과 시대의 욕망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누가 썼는지 모르거나 수없이많은 사람이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에 관여한, 관여했을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소득 없는일이기도 하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현명할지 모르겠다. - P189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 Fakten‘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사실‘이 한번도,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신념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는 이른바 ‘확신‘
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확신/신념은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을 직격한다.
인간은 사실보다 확신을 선호한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고인간 사회를 물들인 수없이 많은 이런저런 확신/신념들 가운데 사실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니!
벤야민은 확신 Uberzeugung의 복수형 Überzeugungen을 썼다. 신념은 신념들이다. 여러 개다. 여러 개인 신념들은 다양성이 아니라 대결, 갈등, 혼란을 예정한다. 복수의 신념들은 사실과 무관하고 진리와 멀다. - P199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를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높은데 (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 P200

십여 년 전에 영국에서 일 년을 지냈는데, 우리나라와 주행방향과 운전석의 위치가 다른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따로 주행 연수를 받았는데도 운전대를 잡으면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앞에 차가 있으면 뒤따라가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 앞에 차가 없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했다. 나는 내 운전에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실수를 한 적이있다. 사거리에 멈춰 있다가 신호등이 바뀌어 출발할 때 반대차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곧 실수한 걸 깨닫고 후진해서 나왔지만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보다 다행인 것은 진입하자마자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역주행을 계속했을지, 그러다 무슨 사고를 냈을지 누가 알겠는가. - P202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 P203

확신이 사람을 당당하게 만든다. 확신에 찬 사람은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눈치보지 않는다. 자신감은 주체적 자아의 표상이라고 선전된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거침없고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사람은 절대군주 루이 14세였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다. 자신감이 권장되면서 자만심을 흡수했다. 미국 힙합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플렉스 Flex 현상이 과도한 자기 과시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현대인이 동경하는 존재 방식이 되었다. 타인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자신감의 결여, 비굴함으로 치부되므로 해롭다. 해로운 것,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옳지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확신은 일종의 처세의 갑옷 같은 것이 되었다. 확신의 갑옷 없이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누구나 어떤 갑옷인가를 착용하려고 한다. - P204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 (의심해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5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본회퍼는 예수의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 (『나를 따르라』) 어떤 선한 뜻도, 그것이 설령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광신자가 된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은 사실을 묻지 않고 성찰도 의심도 하 - P205

지 않는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신념이다.


종교는 자기 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종교는 자기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 P206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진리가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광신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P207

"설득aberzeugen은 비생산적인 것이다"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신념과 신념이 부딪칠 때의 곤란함에 대한 말이다. 신념이나 설득으로는 안 된다. 확신 앞에 사실이 놓여야 한다.
물론 입장과 의견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특히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입장과 의견 없는 단순한사실의 나열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니까. 그러나 그 의견이 사실에 바탕하지 않았거나 진실과 거리가 있을 때, 확신이 제공한 허구일 뿐일 때 그 의견은 단지 확증편향의 다른 이름이므로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확신은홍기와 같아서 사람을 해친다. 벤야민은 현재가 확신보다는 ‘사실‘에 기반한 사유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는 문장을 한 세기 전에 (일방통행로」는 1928년에 출판되었다) 썼지만, 우리의현재는 여전히 확신이 사실을 삼키고 있는 시대이다. 사실이 어떤 곳에서도 한 번도 확신을 뒷받침한 적 없다는 그의 두번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이다.
현재가 어느 시대보다 더 확신에 지배되는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시대 못지않은 확신의 시대라는 건 확실하다.
‘사실을 말하는 자는 죽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경고가 탄식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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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는, 이 입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다고대답한다. ‘당신만을 위한 삶‘은 없다. 오직 ‘당신만을 위한 죽음‘이 있을 뿐이다.


5일마다 되풀이되는 마중의 어느 순간에, 그녀 역시, 법의문 앞의 그 사람이 그런 것처럼, 문득 "꺼지지 않고 비쳐나오는 사라지지 않는 한줄기 찬란한 빛을 볼 것이다. 아마 그럴것이다. 요새를 떠나 허름한 시골 여관에 누운 드로고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생각이, 분명하고 무서운 생각이 " 불쑥 떠오르는 경험을 할 것이다, 라고 우리는 예언할 수 있다. 삶의 모든 경험을 통해 그녀가 기다린 것이 죽음이었음을 모를 수 없을 거라고. - P132

그런데 그 빛 가운데 드러난 분명한 얼굴인 죽음은 커다란•질문, 삶의 온 경험이 뭉쳐 이루어진 하나의 큰 의문부호여서, ‘환한 어둠‘ 가운데 자리한다. 죽음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 질문은 환한 어둠에 의해 드러난다. 환한 어둠이라니! 눈앞이 캄캄해도 볼 수 없지만, 눈앞이 하얘도 볼 수 없다. 불가지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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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라


지난 겨울밤, 나는 물었고 딸애는 대답했다

규연이는 무슨 색깔이 좋아? 응, 청보라
청보라는 새벽에 별이 깔려 있는 색깔이라 좋아

도라지꽃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밤이 떠올라
나는 칠월 도라지꽃밭으로 딸애를 데리고 
갔다

봐, 도라지꽃에도 청보라가 있지?
도라지꽃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래
와, 예쁘다 정말 청보라네
아빠 근데, 사랑은 원래부터 영원한 거 
아니야?

나는 청보랏빛 도라지꽃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너는 청보랏빛 별에 닿기도 하고
청보랏빛 별 전구를 켜기도 하겠지
그러다가는 또 새벽하늘에
청보라 도라지꽃을 끝없이 피워두기도 
하겠지

그래, 사랑이란 원래부터 끝이 없어야 할 테니까
잠이 아주 멀어진 늦여름 새벽,
청보랏빛 별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새벽에 별이 깔려 있는 색깔‘을 올려다본다

청보라 도라지꽃, 같은 말을 떠올려보다가
청보라 도라지꽃 꽃말 같은 사랑을 깜빡거려본다

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


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은 칠보면과 산외면과 산내면의 우편물을 담당한다


김현기
박새가 우리 집 편지함에 알을 낳았다 우체부 김현기는 알을 까고 나온 새끼 박새가 온전히 커서 날아갈 때까지 매번 우편물을 창틈에 끼워 넣고 가거나 직접 전해주고 갔다


김천수
택배가 왔지만 나는 외부에 있었다 혹시라도 내릴지 모를 비를 수화기 너머로 걱정하던 우체부 김천수는 택배 상자를 방수지에 꼼꼼하게도 싸서 처마 밑에 모셔두고 갔다


최길영
어제는 폭설이 쳤고 나는 김개남 장군의 생가터를 찾고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우체부가 있어 길을 물었다 우체부 최길영은 오토바이로 눈길을 열어가며 앞장서 갔다

여름휴가


어제 비를 맞아서 그런가?
몸이 무겁고 머리가 띵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로나 간이 검사를 해보니 양성이다

출근하자마자 퇴근이라니,
나는 사무실 책상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챙겨 조용히 집으로 간다

집에 들러 한숨 돌리고는
가까운 병원에 가보니
역시나 코로나에 걸린 게 맞다
좀 아프다 말겠지,
약국에서 받아온 약봉지를 던져두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무슨 전화가 이렇게나 걸려 오지?
무슨 머리가 이렇게나 지끈거리지?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을 텐데

이불을 두르고 있어도 오한이 온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몰랐다

목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고
침이라도 삼킬라치면
목이 찢어지는 듯 아플 줄은

오늘은 그새 육일차,
방 구석구석을 몇번이나 쓸고
싱크대를 닦고 빨래를 돌리고
변기며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르고
베란다 물청소까지 마치고는

이 뜻밖의 여름휴가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궁리한다

두 김정자씨


언젠가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어머니도 ‘김정자‘고 내장모님도 ‘김정자‘다


정읍 골짝에 살던 어머니 김정자는 여전히 정읍 골짝에 살고 있고, 봉화 골짝에 살던 장모 김정자는 근래 들어 도회지아파트에 살고 있다 요새 이 두 김정자는 뭐 하면서 지내나?

정읍 김정자 집에 갔을 때였다 노모는 택배 상자에 지푸라기를 넣어 포장하고 있었다 아, 무신 지푸락을 다 택배로보낸다요? 야, 아파트 산디 지푸락을 어서 구하냐! 시골김정자는 도회지 김정자가 메주를 쑨다고 하니 메주 띄울지푸라기를 챙겨 보내고 있었던 것인데,

도회지 김정자가 시골김정자한테 보내는 택배도 별반 다를 건 없다 무신 봉다리가 요로코롬 많다요? 도회지 김정자는 마트에 다녀올 때 생기는 비닐봉지까지도 살뜰하게 모았다가 시골 김정자한테 보낸다 핫따매, 두 김정자 땜시 내가못 산당께요

둘 중 누가 보내든 ‘보내는 사람‘도 김정자고 ‘받는 사람‘ 도 김정자인 택배, 올해도 어김없이 참기름이며 옥수수감자, 마늘 같은 것이 보내질 것이고 염색약이며 샴푸세트며 간고등어, 꽃무늬 남방 같은 게 보내질 것인데, 올봄에도 일없이 두 김정자나 감나무 마당 집에서 만나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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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다‘는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는 것이 출현할 때 쓴다. ‘돌아오다‘는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새롭다‘와 ‘돌아오다‘는 같이 쓸 수없다. 새로운 것은 돌아올 수 없다. 다만 나타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이 돌아왔다. 라고 하고, 봄이 돌아왔다. 라고쓴다. 더 직접적으로, 새아침이 돌아왔다, 새봄이 돌아왔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순이다. 오늘 맞이하는 아침은 어제 아침과 같은 아침이 아니다. 올해 봄은 지난해 봄의 복사본이 아니다.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던 것이 다시 올 수 없다. 이전에 있었던 어떤 것만 다시 올 수 있다. 돌아올 수 있다. - P112

그렇지만 우리의 시간 인식은 이 문장에서 모순을 느끼지못한다. 있어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시간이 다시 돌아온다. 오늘 아침은 지금까지 있어본 적 없는 새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번달 5일은 우리 인생에서 처음 맞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주의 시간은 직선으로 곧장 흐르지만, 그래서 같은 물에 두 번 발을담그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시간은 끝없이 반복하고되풀이하며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시간에 수없이 자주발을 담근다. 추억이 영원하고, 놓친, 잃어버린 기회를 다시잡는 것이 가능한 것이 그 때문이다. - P112

그렇지만 그 모든 일은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면서 하는 일이다. 기다리기 위해 하는 일이다. 기다림의수단으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이 그들의 일이다. 그 모든 것이기다리는 일의 일부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 그들이 정말로 하는 일은 없다.
류옌스가 오지 않을 거라면 기다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올 것이다. 온다고 했으니 올 것이다. 그는 5일에 올 것이고, 그러니 펑위는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한다. 남편은 이미 왔다. 저이가 류옌스다. 그러나 그녀는 말한다. 남편은 5일에 온다. 5일에 오는 이가 그이다. 류옌스가 5일에 온다는 것 말고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 역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하는 모든 일은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기다리면서 하는 일이다. 기다리기 위해 하는 일이다. 기다림의 수단으로 하는 일이다. 기다림이 그녀의 일이다.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기다리는 일의 일부이다. 기다리는 것 말고 그녀가 정말로 하는 일은없다. - P115

그의 기다림은 죽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죽음을 앞둔 시점이 되어서야 그는 힘들게 묻는다. "나 말고는 이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으니 어쩐 일이지요?" 그 사람이 곧 임종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문지기는 대답한다.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곧 문이 닫힌다. 그의 기다림은 죽음에 이르러 끝난다. 삶이 곧 기다림이라는 사실을이보다 더 잘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 사람은 자기에게 허락된 기다림을 산다. - P118

이 세상에 대한 절망이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꾸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마지막을 먼저 선언해야 한다. 그 광야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이미 마지막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마지막을 기다렸다. 마지막을 살면서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와야 할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지막을 기다리며 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성경 필사였다. 그들은 양피지에 성경을 필사했다.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표현이었고, 기다림의 방법이었다.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헤매던 한 베두인 목동에 의해 1947년 처음 모습을드러낸 이들의 거주지에서 원본 그대로 보존된 성경 사본 두루마리가 다수 발견되었다. 물론 다른 것도 있었다. 여러 개의물 저장소와 수로, 창고, 작업장, 그리고 무덤 등이 나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았다‘. 삶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살았다. 물을끌어들이고, 농사를 짓고, 성경을 필사하고, 무엇보다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살았다. 기다림에는 ‘제때‘가 따로 없으니까, 언제든 지연되고 연기될 수 있으니까, 그것이 기다림의 속성 - P125

이니까. 여분의 충분한 기름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은 알았다.
그들은 그것으로 그들이 ‘이미‘ 온 마지막을 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을 기다리는 사람들임을 증명했다. 기다림은삶이었고, 삶은 기다림이었다. 기다림과 삶은 구분되지 않았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기다릴 필요를 느끼지 않는사람들이 있다.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이다.
내일에 미리 도착한 사람들이다. 내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의시간이다. 일어나면 현재가 되는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시간에 붙여진 이름이 내일이다. 기다림이 완성되면 내일은현재가 된다. 내일을 현재로 만든 사람들, 내일을 현재로 만들어 내일을 없앤 사람들, 내일을 기다리지 않고 현재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아가 필요하지 않다. 기다림을제거한 이들,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못하고 만끽한다. - P126

누구에게나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죽음은 온다. 죽음은 게으르고, 동시에 즉흥적이다. 요컨대 종잡을 수 없다. 죽음은 올 때까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늦어져도 언젠가는 온다. 늦어질 뿐 철회되지는 않는다. 죽음은 신실해서 온다는 약속을 파기하지 않는다. 다만 오는 시간을 우리가 모를 뿐이다. 신랑은 올 것이다. 늦더라도 오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언제 올지 모를 뿐이다. 고도는 올 것이다. 그러나 오기 전까지는 오지 않는다. - P129

고도는 신랑은, 메시아는, 류옌스는, 죽음은, 아마 내일 올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릴 수 없다. 내일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일 올 고도, 신랑, 메시아, 류옌스, 죽음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이들이 오편 내일은 현재가 될 것이다. 내일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확정되어 있지도 않다. 내일은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다. 한없이 늘어나기도 하고 느닷없이 닥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멀기와 가깝기를 가늠할 수 없다. 우리는 내일의 주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기다린 것이 실은 - P129

죽음이었음을. 죽음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고도를 기다리는 이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모른다. 고도가누구인지 모른 채로 고도를 기다린다. 요새의 군인들은 그들이 기다리는 타타르인들에 대해 모른다. 모른 채 타타르인들을 기다린다. 고도가, 타타르인들이 언제 올지 모르는 것처럼,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모른 채로, 기다린다. 모른 채로 그들을 기다린 줄 안다. 그들이 기다린 고도가, 타타르인이 실은 죽음이라는 걸 모른다. 몰랐다는 걸족음 앞에서야 깨닫는다. - P130

법의 문 앞에서, 법으로 들어가려고 평생을 기다린 사람이정말로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늙고 쇠약해져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 이 사람의 마지막에 대한 카프카의 서술은 이러하다.


그런데 이제 어둠 속에서 그는 분명하게 알아본다. 법의 문들로부터 꺼지지 않고 비쳐나오는 사라지지 않는 한줄기 찬란한 빛을.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그때까지의 모든 경험이, 그가 지금껏 문지기에게 던져보지 못한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된다. - P130

시력이 약해져 잘 볼 수 없게 된 그의 눈에, ‘어둠 속에서이제야 비로소 법의 문들로부터 비쳐나오는 한줄기 찬란한 빛이 보인다. 그 빛은 직전까지 보이지 않았다. 없던 빛이 갑자기 나타났는지 전부터 있었는데 보지 못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볼 수 없었던 빛을 보게 되는 어떤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그가 마침내 맞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구리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완전하게알게 되는 순간이 온다고 바울은 말했다. 깨달음이 그렇게 갑자기, 비로소 온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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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간이 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 피할수 없는 시간. 부딪쳐야 하는 시간.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쳐다보아야 하는 시간.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오." 이 말은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눈이 멀기 전의 오이디푸스에게 한 말이다. 눈먼 예언자는, 왕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디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대는 눈이있어도 보지 못하오." 오이디푸스만 들을 말이겠는가.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탄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듣지 않으려 한다. 보게 될 것, 듣게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 P21

그는 내부의 ‘나‘를 만나기가 두려워서 외부에서만 산다. 외부에서 타인과 일과 열심히 산다. 누구보다 바쁘게 최선을 다해서 산다. 『캉탕」의 한 인물처럼, 전쟁하듯 산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싸운다. 한순간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늘 마음을 들고 살아야 해서 힘들다. ‘자기 착취‘가 그렇게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사람 눈에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그 결과 일정한 성취를 이뤄내기 때문에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자기와의 만남을피해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오이디푸스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가! 신탁과 운명을 피하기 위해 그는 망명객이 되고 나그네가 된다. 밖으로, 외부로, 되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것은 그 자신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또있을까?" - P23

그는 개종한 사람과 같다. 개종한 사람은 개종 전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중력과 관성에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이니, 개종은 되풀이해서 일어나야 한다. 거듭 시간/신의 눈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거듭 도착해야 하고 늘출발해야 한다. 출발하기 위해 도착해야 하고 도착하기 위해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므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다른 사람일 때만, 다른 사람으로서만 새로 출발할 수 있다. - P31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작가 이전을 향하지 않는다. 작가 이전에 그는 누구였는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되었는가. 이런 질문은 호사가들의 흥밋거리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려고하는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물어야 하는 질문은 어디 있는가, 이다. 어디서 왔는가, 가 아니라 어디에 머무는가, 이다.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온 것이 아니다. - P34

이 꿈꾸는 자가 원한 것은 한 ‘사람‘을 꿈꿔 꿈 밖의 세상에내보내는 것이다. 그의 꿈꾸기는 공상의 작업이 아니라 생명을 출산하는 과정이다. 그는 꿈꾸는 것 말고는 하는 것이 없지만 그 유일한 일을 통해 위대해진다. 그는 꿈꾸는 일 말고는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꿈꾸지만, 꿈을 꿈으로써 숭고해진다.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숭고하다. 큰일을 한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숭고한 일을 한 사람이 위대하다. 창조야말로 위대한 일이고, 그러니까이 사람은 숭고하다. 창조야말로 숭고한 일이고, 그러니까 이사람은 위대하다. 그의 꿈꾸기의 결실인 생명이 그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증언한다. - P43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은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을있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인물, 한 세계가 태어난다.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 잠자와 요제프K를탄생시켰다. 「변신」과 「소송의 세계를 세상에 내보냈다.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와 이방인,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와 『죄와 벌』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들과 그들이 제시하는사상과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얼마나 생생하고 사실적이고압도적인가. 어떤 인물이 그들보다 실제적이고, 어떤 세계가그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만큼 사실적이고 압도적일 수 있는가. 그들과 그들의 세계를 허구라고, 실체가 없다고, 그저 책속에 있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낮춰볼 수 있는가. 이 인물들과이 사상들과 이 세계들이 그냥 태어났겠는가. 그럴 리 없다.
보르헤스의 소설 속 꿈꾸는 사람이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는훌륭한 작가들은 생명을 가진 참 인간과 사상, 의미 있는 세계 - P44

를 창조해서 이 세상에 내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직 그것만이 그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것이다. 꿈꾸는 것은 그가 필사적으로 해야 할 그의일, 과업, 소명 Beruf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과 수차례 반복된 실패와 거듭된 시도 끝에 마침내 이 꿈꾸는 남자는 자기가 그렇게 원하던 그일, 한 사람을 꿈꿔서 세상에 내보내는 일에 성공한다. 이성공은 그의 성공이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오랜 시간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고했다. 그러나이 성공은 그의 성공이 아니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했음에도 성공하지못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마지막순간에 번번이 실패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람을 ‘꿈 밖으로‘ 태어나게 할 수 없었다. - P45

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기다리면서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행여라도 영감이 자신의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 P49

누군가를 꿈꾸는 자는 누군가가 꿈꾼 자이다. 누군가가 꿈꾼 자가 누군가를 꿈꾼다. 작가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은 이렇다. 위대한 다른 작가의 작품속에서 작가가 태어난다. 작가가 작가를 태어나게 한다. 책은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들의 자궁이다. 책은 책에서 나온다. 작가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읽은 놀라운책들의,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환영이다. 위대한 작가와 그 작품의 품(즉, 꿈)속에서 창조된 정신적 존재이다.  - P51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바울의 문장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고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모르는 부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 모르는부분이 없이 다 아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모른다.
대상이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그리움이 사라진다. 교만은 그리움이 사라진 사람의 상태이다. 고향이든 사람이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향수에 시달리지 않는다. 고향에돌아온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향수가 해소된다. - P63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는 고요하고 스산하고 말끔했다. 공기는 낯선데 하늘은 멀쩡해서 수상했다. 파도에 휩쓸린모래들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형태의 무늬를 만들어 해안의지형과 색조를 바꿨다. 가지가지 해초들과 나무판자, 플라스틱 쪼가리, 신발, 그릇, 처음 보는 문자가 적힌 비닐 포장지들이 가득한 해안은 어지럽고 산만했다. 어디에 쓰는지, 어디서왔는지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창조 전 세상의 ‘혼돈과 공허‘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눈앞에 펼쳐졌다. 갑자기 다른 세상이 나타난 것 같았다.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 가운데 박처럼 생긴 크고 단단한열매도 있었다. 그 신기한 것을 주워서 가지고 놀았다. 발로차면 발이 아파서 손으로 굴리며 놀았다. 나중에 그것이 바다를 건너온 코코넛 열매라는 걸 알았다. 코코넛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의 남쪽 바닷가까지 왔다고? 사람들은 그 일이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목도한 증인이 된 사실에 자주 설렜다. - P67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바다에 머문다. 바다에서 바다가 아니라 다른 것, 바다가 보여주지 않은/못한 것을 보는사람은 바다를 떠난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바다에 오래 머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물과 놀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그래서 땅위에서 걷는 것보다 물위에 떠 있는 것에 더 능숙해진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집앞이 바다여도 물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 헤엄치지 않는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배를 탄다. 바다에 머물기 위해, 되도록 오래 머물기 위해 배를 탄다. 바다가 삶의 터전이 된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 사람은 배를 타지 않는다. 바다에 머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의 터전은, 그곳에 없다. 그를 홀리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 너머, 이상하게 생긴 처음 보는 물건들이 떠밀려온, 어딘지 모르는 저곳이기 때문이다. - P68

향수가 보았던 바다를 다시 보려는 마음이라면, 추구는 본적 없는 바다 너머를 새로 보려는 마음이다. 향수가 가졌다가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그리움이라면, 추구는 가져본 적없는 것을 얻으려는 그리움이다. 향수가 현실이 불완전하거나낯설기 때문에 완전한,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익숙한 세계로귀환하려는 열망을 갖게 한다면, 추구는 이 익숙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부일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모르는, 낯선 세계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분명한 세계 너머 구체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세계를 지향하게 하는 열망이 인간을 다른 존재가되게 한다. 그리움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 속으로 다른차원을 초대하는 것과 같다. 초대된 다른 차원이 우리를 끌어올린다. 바깥으로, 위로, 말하자면 초월 레비나스는 초월을횡단하는 trans 운동이자 상승하는scando 운동이라고 했다.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 P71

때죽나무는 소나무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상대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한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가두기/잠그기는 갇히기/잠기기가 된다. 연인을 가두고 잠그는사람은 동시에 연인에게 갇히고 잠긴다. 다른 방식의 사랑의 포옹은 없다. - P78

그러니까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의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말을 알아듣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듣는 것이다. 특정언어 구사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 말은 사람을 통해 나오고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말은 그 사람이다. 지금한 그 말은 지금 그 사람이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그 사람이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때때로 생존의 문제가 여기에 걸쳐 있다. 가령 이청준의 「소문의 벽」의소설가 박준이 어릴 때 경험한 것처럼.
6.25전쟁중 남해안의 한 시골 마을에는 남쪽의 경찰과 북쪽의 빨치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무기와 이념으로무장하고 있어서 무섭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무기와 이념으로 무장하고, 무장한 무기와 이념이 이들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든다. 이들이 가장 무서울 때는 정체를 알 수없을 때이다. 사람은 누구인지 모를 때가 가장 무섭다.  - P99

어떤 사람인지 알면 대처할 수 있지만, 모를 때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에 전짓불을 비추며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물을 때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짓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어느 쪽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절망적 상황이고, 지독한 시험이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봉변을당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마디 말에 달려 있다. 실제로 이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소설가 박준은 전한다.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의 정체를 점치려다 실패한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서, 누구인지 모른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인간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00

말에는 정신(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신(생각)이 지나치면 찻잎이 너무 많은 차가 쓴맛을 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진다. 반대로 충분하지 못하면 색이 나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차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뜻이겠다. 말 속에 생각이 잘 풀어져야 하지만 아예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아도 곤란하다. 균형 있게 잘 어울리지 않으면 문장은 알아듣기 어렵거나 하나 마나 한 것이 된다. 두 경우 모두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찻잎을 너무 많이 넣거나 너무 적게넣거나 차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잘 말한다는 것은 알아듣게 말한다는 것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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