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내 꿈은 내가 꾸어야 한다. 내 꿈을누군가에게 대신 꾸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자기 주권을 내주는 것과 같다. 꿈을 맡기는 순간, 꿈이 아니라 삶이 지배당한다. 내 꿈을 대신 꾼 자가 내 꿈만 아니라 내인생도 통제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꿈을 맡기지 말아야한다. 꿈이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한다. - P146

꿈은 텍스트이다.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텍스트의 운명이다. 모든 텍스트는 그 처지가 꿈과 같다. 해석가의 입장이나 시각, 심지어 이해관계에 따라 텍스트가 요동친다.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해몽가의 입이다. 해몽이 있기전까지 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기보다, 무엇을 말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해석이 나올 때까지 텍스트는 그저 기다린다. 해몽가가 좋게 말하면 좋은 꿈이되고, 그가 나쁘게 말하면 나쁜 꿈이 된다.  - P151

그러니 꿈에 붙들리지 말 것. 꿈으로 삶을 재단하려 하지 말것. 꿈의 해석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 것. 꿈이 창의적으로, 자의적으로, 그러니까 우연에 의해 해석된다는 사실을 인지할것. 꿈은 내가 꾸어도 그 꿈의 실현이 나의 뜻과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것. 삶의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인정할 것.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에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죽는 사람도 나온다. 꿈을 꾸어 다른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하지만, 꿈을 꾸었기 때문에 죽기도 한다. 내 의지가 작동했다고 할 수없는 꿈을 꾼 것도 내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52

것이 아니라 꾸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나에게 들이닥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꿈 때문에 죽기도 하다니.
우리는 꿈에 대해 속수무책이고, 속수무책인 채 그 꿈에 지배당한다. 인생이 약간 덜 변덕스러운 꿈이라고 했던 파스칼의문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인생은 더 변덕스러운 꿈이다.


다른 사람의 꿈이 나를 취조하는 근거로 작용할 때, 누가 꾼것인지 모르는 꿈에 대한 해석이 나의 삶을 휘저으려고 할 때, 외부의 꿈들과 바깥의 해석들이 내부를 흔들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은 귀를 닫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해석자의 입‘이 내 삶의 영역으로 파동하며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무용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몸부림 때문에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P153

롤랑 바르트는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아토포스atopos라는단어를 사용했다. 장소를 뜻하는 topos에 부정을 뜻하는 a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구체적이고 특정한 자리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여줄 땅‘은 아토포스이다. ‘보여줄‘ 땅에는 지금 아브람의 가족이 살고 있는 땅, 고향, 하란, 장소로서의 땅이 확보하고 있는 물리적 확실성이 없다. 하란은 어디인지 분명하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아브람이 가야 하는 땅은 어디라고 단정해서 말할수 없다.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다. ‘보여줄‘ 땅은 보여주는 순간 ‘보일‘ 것이다. 보여주는 순간까지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보여줄‘ 땅은 현재는 보이지 않는 땅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보여줄‘, ‘보이지 않는‘의 특징이다. - P176

카페에 마주앉아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연인을 본다. 간혹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지지만 그 웃음은 마주앉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향하는 것도 아니다.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곳에 접속해 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 마주앉아 있지만 다른 사이트에 접속하여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채팅을 하고 있다. 신체적으로 옆에 있는 연인의 마음이 실제로 어디에, 혹은 누구 옆에 가 있는지 말할 수 없다. 물리적 접촉이 만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물리적 공간의 점유가 친밀의 척도가 되지 못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이 두사람이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P181

신의 일부가 되어 있는 한 나는 신에게 갈 수 없다. 나의 일부가 되어 있는 신은 나를 찾아올 수 없다. 신에게 가기 위해서는 내가 신의 일부가 아니어야 한다. 타자여야 한다. 신이나에게 오기 위해서도 신은 타자여야 한다. 흡수와 예속은 인간을 대하는 신의 방법이 아니고 신을 대하는 인간의 방법도아니다. 인간이 신에게 흡수되어버릴 때 인간의 행동은 신의행동과 같은 것이 된다. 인간의 어떤 과오도 인간의 책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 인간은 신을 이용하거나 신을 이용하는 이들에게, 혹은 모든 책임을 신에게 떠넘기는 자신에게 이용당한다. - P183

모든 개혁은 근본적으로 강요된 것이다. 강요는 항상 외부에서 온다. 코로나19 상황은 사람의 모든 삶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우리는 이제까지와 다른 삶을 주문받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와 집합 금지와 비대면 예배는, 어떤 점에서 강요된 종교개혁이다. 개혁은 흔히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의 발명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의 회복을 통해 완수된다. 익숙해진 것은 낯설어져야 한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 보이는, 장소로서의 땅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이 대체할 수없는 ‘한 명‘의 고유한 존재로서, 규정되지 않고 규정될 수 없는 신비인 신과 마주해야 한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의 대체재가 되어 있는 신을 구해야하고, 전체의 부분으로 예속, 흡수시키는 맹신으로부터 인간을 구해야 한다. - P185

물론 그 선택이 순수하게 독자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니까. 그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것이다. 그 선택에 관여한 요소들을 언급하는 것은 작가를 둘러싼 내적, 외적 조건들을 공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선택은 때로 의식적이지만 더 자주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완전무결한 신이 아니고 고립되어있지 않으며 감정의 진공 상태에 있지도 않다. 개인의 욕망이투사되거나 시대의 공기가 스며드는 걸 피할 수 없다. 실은 사람과 시대의 욕망이 가장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 이야기이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누가 썼는지 모르거나 수없이많은 사람이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야기에 관여한, 관여했을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소득 없는일이기도 하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넘어가는 편이 차라리 현명할지 모르겠다. - P189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 Fakten‘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사실‘이 한번도,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신념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는 이른바 ‘확신‘
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확신/신념은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 이 말은 인간의 본성을 직격한다.
인간은 사실보다 확신을 선호한다. 인류 역사를 이끌어오고인간 사회를 물들인 수없이 많은 이런저런 확신/신념들 가운데 사실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니!
벤야민은 확신 Uberzeugung의 복수형 Überzeugungen을 썼다. 신념은 신념들이다. 여러 개다. 여러 개인 신념들은 다양성이 아니라 대결, 갈등, 혼란을 예정한다. 복수의 신념들은 사실과 무관하고 진리와 멀다. - P199

사실의 토대 없이 신념이 만들어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를 묻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를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면 죽는다. 사실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화나게 한다. 그래서 사실을 부정한다. 사실을 공격한다. 사실을 직시하면 자신들의 신념을 반성하고 교정하게 할 가능성이높은데 (왜냐하면 그들의 확신은 사실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확신에 따라 살아온 이제까지의 그들의 삶을 부정해야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 P200

십여 년 전에 영국에서 일 년을 지냈는데, 우리나라와 주행방향과 운전석의 위치가 다른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따로 주행 연수를 받았는데도 운전대를 잡으면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앞에 차가 있으면 뒤따라가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 앞에 차가 없을 때는 특히 조심해야 했다. 나는 내 운전에자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실수를 한 적이있다. 사거리에 멈춰 있다가 신호등이 바뀌어 출발할 때 반대차선으로 들어간 것이다. 곧 실수한 걸 깨닫고 후진해서 나왔지만 진땀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그보다 다행인 것은 진입하자마자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역주행을 계속했을지, 그러다 무슨 사고를 냈을지 누가 알겠는가. - P202

확신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다. 확신이 만들어제공한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사실‘을 찾을 이유가 없고, 그러니 의심할 리 없다. 확신하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다. 잘못 가는 사람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혹은자기가 잘못 가고 있지 않은지 의심하는 사람이 반성한다. 잘못 갈 가능성을 염두에 둔 사람에게만 반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자기를 의심하는 사람만이 반성한다. 자기를 의심하지않는 사람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반성이라는 옵션이 없다. 그들은 반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 자기와 다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비난한다. 바로 가는 많은 사람을 잘못 가고 있다고 비난한다. 투철할수록 더 심하게 비난한다. - P203

확신이 사람을 당당하게 만든다. 확신에 찬 사람은 우물쭈물하지 않는다. 눈치보지 않는다. 자신감은 주체적 자아의 표상이라고 선전된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거침없고 어디에도 막히지 않는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한 사람은 절대군주 루이 14세였다고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내가 세계의 중심이다. 자신감이 권장되면서 자만심을 흡수했다. 미국 힙합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플렉스 Flex 현상이 과도한 자기 과시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현대인이 동경하는 존재 방식이 되었다. 타인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는 것은 권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의심하는 것이므로 타당하지 않다. 자신감의 결여, 비굴함으로 치부되므로 해롭다. 해로운 것,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옳지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옳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확신은 일종의 처세의 갑옷 같은 것이 되었다. 확신의 갑옷 없이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그러니 누구나 어떤 갑옷인가를 착용하려고 한다. - P204

너무 지나치게 사람을, ‘자아‘를 부추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주행 운전자의 그처럼 투철한 확신이 면허 취소 수준의음주에서 비롯했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그는 만취했고, 분별력을 잃었고, 혹시 자기가 잘못 가고 있는지 돌아볼 (의심해볼) 여유를 빼앗겼고, 오직 맹목의 확신에 사로잡혔다. 자기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다. 만취한 사람과 같다. 제어 불능의 이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이 아닌데 다반사가 되었다. - P205

"이념은 저항에 굴복하지 않는 광신자, 저항을 염두에 두지않는 광신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문장으로 본회퍼는 예수의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대해 말하면서 지나친 자기 확신의 위험을 경고했다. (『나를 따르라』) 어떤 선한 뜻도, 그것이 설령진리라고 하더라도 강요의 방법으로 이루어선 안 된다고 그는가르친다. 그럴 때 그 진리는 이념이 되고 만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념은 이념들이고, 결국 진리에서 떨어져나간다. 광신자가 된다. 그에 의하면 광신은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이념, 즉신념의 행동이다. 광신은 사실을 묻지 않고 성찰도 의심도 하 - P205

지 않는다. 광신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이념이다. 광신이라는 종교적 열정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이념이다. 종교는 아니다. 그것은 신이 광신적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때문이다. 광신적 믿음을 필요로 하고 요구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만든 신념이다.


종교는 자기 확신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종교는 자기확신의 부재, 자기를 의심하고 자기를 믿지 못하는 자의 믿음이다. "신앙은 의심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복하는 용기다."(폴 틸리히) 이념은 반대다. 이념은 의심하지 않는, 의심을용납하지 않는,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투철한, 무분별한 믿음의 체계이다. 이념은 투철한 확신을가진 광신자들을 만들어내고, 그런 광신자들에 의해 막강해진다. - P206

많은 경우 종교는 이념에 이용당한다. 이념이 제 일을 하기위해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거나 종교로 위장하는 일은 드물지않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진리가아니라 이념이 하는 일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의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을 강요하려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이념으로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종교가 그렇게 할 때 종교는 이념이 되고 만다. 자기가 바르게가는지 반성하지 않고 자기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비난하는 데만 열정을 쏟게 된다. 술 취한 사람과 다름없게 된다. 종교의 탈을 쓴 광신자들의 집단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그런 집단의 우두머리를 선동꾼이라면 모를까,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광신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지나치게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전혀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 P207

"설득aberzeugen은 비생산적인 것이다"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신념과 신념이 부딪칠 때의 곤란함에 대한 말이다. 신념이나 설득으로는 안 된다. 확신 앞에 사실이 놓여야 한다.
물론 입장과 의견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특히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입장과 의견 없는 단순한사실의 나열은 지루하고 무의미하니까. 그러나 그 의견이 사실에 바탕하지 않았거나 진실과 거리가 있을 때, 확신이 제공한 허구일 뿐일 때 그 의견은 단지 확증편향의 다른 이름이므로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확신은홍기와 같아서 사람을 해친다. 벤야민은 현재가 확신보다는 ‘사실‘에 기반한 사유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는 문장을 한 세기 전에 (일방통행로」는 1928년에 출판되었다) 썼지만, 우리의현재는 여전히 확신이 사실을 삼키고 있는 시대이다. 사실이 어떤 곳에서도 한 번도 확신을 뒷받침한 적 없다는 그의 두번째 문장이 여전히 유효한 ‘현재‘이다.
현재가 어느 시대보다 더 확신에 지배되는 시대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시대 못지않은 확신의 시대라는 건 확실하다.
‘사실을 말하는 자는 죽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경고가 탄식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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