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라


지난 겨울밤, 나는 물었고 딸애는 대답했다

규연이는 무슨 색깔이 좋아? 응, 청보라
청보라는 새벽에 별이 깔려 있는 색깔이라 좋아

도라지꽃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밤이 떠올라
나는 칠월 도라지꽃밭으로 딸애를 데리고 
갔다

봐, 도라지꽃에도 청보라가 있지?
도라지꽃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래
와, 예쁘다 정말 청보라네
아빠 근데, 사랑은 원래부터 영원한 거 
아니야?

나는 청보랏빛 도라지꽃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너는 청보랏빛 별에 닿기도 하고
청보랏빛 별 전구를 켜기도 하겠지
그러다가는 또 새벽하늘에
청보라 도라지꽃을 끝없이 피워두기도 
하겠지

그래, 사랑이란 원래부터 끝이 없어야 할 테니까
잠이 아주 멀어진 늦여름 새벽,
청보랏빛 별 마당에 돗자리 깔고 누워
‘새벽에 별이 깔려 있는 색깔‘을 올려다본다

청보라 도라지꽃, 같은 말을 떠올려보다가
청보라 도라지꽃 꽃말 같은 사랑을 깜빡거려본다

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


정읍 칠보우체국 우체부 셋은 칠보면과 산외면과 산내면의 우편물을 담당한다


김현기
박새가 우리 집 편지함에 알을 낳았다 우체부 김현기는 알을 까고 나온 새끼 박새가 온전히 커서 날아갈 때까지 매번 우편물을 창틈에 끼워 넣고 가거나 직접 전해주고 갔다


김천수
택배가 왔지만 나는 외부에 있었다 혹시라도 내릴지 모를 비를 수화기 너머로 걱정하던 우체부 김천수는 택배 상자를 방수지에 꼼꼼하게도 싸서 처마 밑에 모셔두고 갔다


최길영
어제는 폭설이 쳤고 나는 김개남 장군의 생가터를 찾고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우체부가 있어 길을 물었다 우체부 최길영은 오토바이로 눈길을 열어가며 앞장서 갔다

여름휴가


어제 비를 맞아서 그런가?
몸이 무겁고 머리가 띵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코로나 간이 검사를 해보니 양성이다

출근하자마자 퇴근이라니,
나는 사무실 책상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챙겨 조용히 집으로 간다

집에 들러 한숨 돌리고는
가까운 병원에 가보니
역시나 코로나에 걸린 게 맞다
좀 아프다 말겠지,
약국에서 받아온 약봉지를 던져두고
그대로 잠이 들었던가

무슨 전화가 이렇게나 걸려 오지?
무슨 머리가 이렇게나 지끈거리지?
뭐라도 먹어야 약을 먹을 텐데

이불을 두르고 있어도 오한이 온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몰랐다

목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고
침이라도 삼킬라치면
목이 찢어지는 듯 아플 줄은

오늘은 그새 육일차,
방 구석구석을 몇번이나 쓸고
싱크대를 닦고 빨래를 돌리고
변기며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르고
베란다 물청소까지 마치고는

이 뜻밖의 여름휴가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궁리한다

두 김정자씨


언젠가도 말한 적이 있지만 내 어머니도 ‘김정자‘고 내장모님도 ‘김정자‘다


정읍 골짝에 살던 어머니 김정자는 여전히 정읍 골짝에 살고 있고, 봉화 골짝에 살던 장모 김정자는 근래 들어 도회지아파트에 살고 있다 요새 이 두 김정자는 뭐 하면서 지내나?

정읍 김정자 집에 갔을 때였다 노모는 택배 상자에 지푸라기를 넣어 포장하고 있었다 아, 무신 지푸락을 다 택배로보낸다요? 야, 아파트 산디 지푸락을 어서 구하냐! 시골김정자는 도회지 김정자가 메주를 쑨다고 하니 메주 띄울지푸라기를 챙겨 보내고 있었던 것인데,

도회지 김정자가 시골김정자한테 보내는 택배도 별반 다를 건 없다 무신 봉다리가 요로코롬 많다요? 도회지 김정자는 마트에 다녀올 때 생기는 비닐봉지까지도 살뜰하게 모았다가 시골 김정자한테 보낸다 핫따매, 두 김정자 땜시 내가못 산당께요

둘 중 누가 보내든 ‘보내는 사람‘도 김정자고 ‘받는 사람‘ 도 김정자인 택배, 올해도 어김없이 참기름이며 옥수수감자, 마늘 같은 것이 보내질 것이고 염색약이며 샴푸세트며 간고등어, 꽃무늬 남방 같은 게 보내질 것인데, 올봄에도 일없이 두 김정자나 감나무 마당 집에서 만나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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