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간이 있다.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 피할수 없는 시간. 부딪쳐야 하는 시간.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쳐다보아야 하는 시간.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오." 이 말은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눈이 멀기 전의 오이디푸스에게 한 말이다. 눈먼 예언자는, 왕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어디 사는지.
누구와 사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대는 눈이있어도 보지 못하오." 오이디푸스만 들을 말이겠는가.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탄했다. 이스라엘 백성만 그렇겠는가.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듣지 않으려 한다. 보게 될 것, 듣게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 P21

그는 내부의 ‘나‘를 만나기가 두려워서 외부에서만 산다. 외부에서 타인과 일과 열심히 산다. 누구보다 바쁘게 최선을 다해서 산다. 『캉탕」의 한 인물처럼, 전쟁하듯 산다.
살아남기 위해 매일 싸운다. 한순간도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늘 마음을 들고 살아야 해서 힘들다. ‘자기 착취‘가 그렇게이루어진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사람 눈에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그 결과 일정한 성취를 이뤄내기 때문에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자기와의 만남을피해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 오이디푸스는 얼마나 필사적이었는가! 신탁과 운명을 피하기 위해 그는 망명객이 되고 나그네가 된다. 밖으로, 외부로, 되도록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것은 그 자신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두려워하는 것이 또있을까?" - P23

그는 개종한 사람과 같다. 개종한 사람은 개종 전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중력과 관성에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이니, 개종은 되풀이해서 일어나야 한다. 거듭 시간/신의 눈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거듭 도착해야 하고 늘출발해야 한다. 출발하기 위해 도착해야 하고 도착하기 위해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므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우리는다른 사람일 때만, 다른 사람으로서만 새로 출발할 수 있다. - P31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작가 이전을 향하지 않는다. 작가 이전에 그는 누구였는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 작가가 되었는가. 이런 질문은 호사가들의 흥밋거리를 위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은 작가가 누구인지를 알려고하는 사람의 질문이 아니다. 물어야 하는 질문은 어디 있는가, 이다. 어디서 왔는가, 가 아니라 어디에 머무는가, 이다.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온 것이 아니다. - P34

이 꿈꾸는 자가 원한 것은 한 ‘사람‘을 꿈꿔 꿈 밖의 세상에내보내는 것이다. 그의 꿈꾸기는 공상의 작업이 아니라 생명을 출산하는 과정이다. 그는 꿈꾸는 것 말고는 하는 것이 없지만 그 유일한 일을 통해 위대해진다. 그는 꿈꾸는 일 말고는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꿈꾸지만, 꿈을 꿈으로써 숭고해진다. 많은 일을 한 사람이 숭고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숭고하다. 큰일을 한 사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숭고한 일을 한 사람이 위대하다. 창조야말로 위대한 일이고, 그러니까이 사람은 숭고하다. 창조야말로 숭고한 일이고, 그러니까 이사람은 위대하다. 그의 꿈꾸기의 결실인 생명이 그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증언한다. - P43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것은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을있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 인물, 한 세계가 태어난다. 이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카프카는 그레고르 잠자와 요제프K를탄생시켰다. 「변신」과 「소송의 세계를 세상에 내보냈다. 알베르 카뮈는 뫼르소와 이방인,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와 『죄와 벌』을 세상에 내보냈다. 그들과 그들이 제시하는사상과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는 얼마나 생생하고 사실적이고압도적인가. 어떤 인물이 그들보다 실제적이고, 어떤 세계가그들에 의해 구성된 세계만큼 사실적이고 압도적일 수 있는가. 그들과 그들의 세계를 허구라고, 실체가 없다고, 그저 책속에 있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낮춰볼 수 있는가. 이 인물들과이 사상들과 이 세계들이 그냥 태어났겠는가. 그럴 리 없다.
보르헤스의 소설 속 꿈꾸는 사람이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는훌륭한 작가들은 생명을 가진 참 인간과 사상, 의미 있는 세계 - P44

를 창조해서 이 세상에 내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오직 그것만이 그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것이다. 꿈꾸는 것은 그가 필사적으로 해야 할 그의일, 과업, 소명 Beruf이다.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과 수차례 반복된 실패와 거듭된 시도 끝에 마침내 이 꿈꾸는 남자는 자기가 그렇게 원하던 그일, 한 사람을 꿈꿔서 세상에 내보내는 일에 성공한다. 이성공은 그의 성공이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오랜 시간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수고했다. 그러나이 성공은 그의 성공이 아니다. 그는 간절히 원했고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지만, 했음에도 성공하지못했다.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마지막순간에 번번이 실패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람을 ‘꿈 밖으로‘ 태어나게 할 수 없었다. - P45

영감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날 것. 영감을 부정하지도 말고숭배하지도 말 것. 왜곡이나 악용은 더욱 삼갈 것. 모독하지말 것. 다만 필사적으로 ‘꿈꿀‘ 것. 영감 같은 것은 있지 않다는 듯, 그러니 바라지 않는다는 듯 필사적으로 애쓰고 애쓰면서 기다릴 것. 기다리면서 초대할 것. 애씀이 초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 것. 그조차 알지 말 것. 행여라도 영감이 자신의노력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말 것. 은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 - P49

누군가를 꿈꾸는 자는 누군가가 꿈꾼 자이다. 누군가가 꿈꾼 자가 누군가를 꿈꾼다. 작가는 어디서 태어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보르헤스의 답은 이렇다. 위대한 다른 작가의 작품속에서 작가가 태어난다. 작가가 작가를 태어나게 한다. 책은아직 태어나지 않은 책들의 자궁이다. 책은 책에서 나온다. 작가는 독자적이고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가 읽은 놀라운책들의, 우리가 형언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환영이다. 위대한 작가와 그 작품의 품(즉, 꿈)속에서 창조된 정신적 존재이다.  - P51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는 바울의 문장 다음에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이어진다. 아는 사람,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것,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고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모르는 부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르는 부분을 남겨두어야 한다. 모르는부분이 없이 다 아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것을, 마땅히 알아야 함에도 모른다.
대상이 누구든, 혹은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어지는 순간그리움이 사라진다. 교만은 그리움이 사라진 사람의 상태이다. 고향이든 사람이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더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향수에 시달리지 않는다. 고향에돌아온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려는 열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향수가 해소된다. - P63

태풍이 지나간 후의 바다는 고요하고 스산하고 말끔했다. 공기는 낯선데 하늘은 멀쩡해서 수상했다. 파도에 휩쓸린모래들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형태의 무늬를 만들어 해안의지형과 색조를 바꿨다. 가지가지 해초들과 나무판자, 플라스틱 쪼가리, 신발, 그릇, 처음 보는 문자가 적힌 비닐 포장지들이 가득한 해안은 어지럽고 산만했다. 어디에 쓰는지, 어디서왔는지 추측할 수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창조 전 세상의 ‘혼돈과 공허‘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이눈앞에 펼쳐졌다. 갑자기 다른 세상이 나타난 것 같았다. 갑자기 다른 세상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 가운데 박처럼 생긴 크고 단단한열매도 있었다. 그 신기한 것을 주워서 가지고 놀았다. 발로차면 발이 아파서 손으로 굴리며 놀았다. 나중에 그것이 바다를 건너온 코코넛 열매라는 걸 알았다. 코코넛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 한반도의 남쪽 바닷가까지 왔다고? 사람들은 그 일이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목도한 증인이 된 사실에 자주 설렜다. - P67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바다에 머문다. 바다에서 바다가 아니라 다른 것, 바다가 보여주지 않은/못한 것을 보는사람은 바다를 떠난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바다에 오래 머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물과 놀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그래서 땅위에서 걷는 것보다 물위에 떠 있는 것에 더 능숙해진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 사람은 물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집앞이 바다여도 물에 발을 담그지 않는다. 헤엄치지 않는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배를 탄다. 바다에 머물기 위해, 되도록 오래 머물기 위해 배를 탄다. 바다가 삶의 터전이 된다. 바다에서 바다를 보지 않는 사람은 배를 타지 않는다. 바다에 머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의 터전은, 그곳에 없다. 그를 홀리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바다 너머, 이상하게 생긴 처음 보는 물건들이 떠밀려온, 어딘지 모르는 저곳이기 때문이다. - P68

향수가 보았던 바다를 다시 보려는 마음이라면, 추구는 본적 없는 바다 너머를 새로 보려는 마음이다. 향수가 가졌다가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그리움이라면, 추구는 가져본 적없는 것을 얻으려는 그리움이다. 향수가 현실이 불완전하거나낯설기 때문에 완전한, 완전하다고 간주되는 익숙한 세계로귀환하려는 열망을 갖게 한다면, 추구는 이 익숙한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부일 리 없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모르는, 낯선 세계에 도달하려는 시도를 하게 한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이고 분명한 세계 너머 구체적이지도 감각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세계를 지향하게 하는 열망이 인간을 다른 존재가되게 한다. 그리움이 하는 일이다. 그것은 현실 속으로 다른차원을 초대하는 것과 같다. 초대된 다른 차원이 우리를 끌어올린다. 바깥으로, 위로, 말하자면 초월 레비나스는 초월을횡단하는 trans 운동이자 상승하는scando 운동이라고 했다.


가로질러 올라가는 가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 P71

때죽나무는 소나무의 몸속으로 파고든다.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상대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한몸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가두기/잠그기는 갇히기/잠기기가 된다. 연인을 가두고 잠그는사람은 동시에 연인에게 갇히고 잠긴다. 다른 방식의 사랑의 포옹은 없다. - P78

그러니까 알아듣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말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적어도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의 사람인지 아는 것이다. 말을 알아듣는 것은 그 사람을 알아듣는 것이다. 특정언어 구사 능력과는 상관이 없다. 말은 사람을 통해 나오고 사람은 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낸다. 말은 그 사람이다. 지금한 그 말은 지금 그 사람이다. 살기 위해서는 지금 그 사람이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때때로 생존의 문제가 여기에 걸쳐 있다. 가령 이청준의 「소문의 벽」의소설가 박준이 어릴 때 경험한 것처럼.
6.25전쟁중 남해안의 한 시골 마을에는 남쪽의 경찰과 북쪽의 빨치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들은 무기와 이념으로무장하고 있어서 무섭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무서움 때문에무기와 이념으로 무장하고, 무장한 무기와 이념이 이들을 무서운 사람으로 만든다. 이들이 가장 무서울 때는 정체를 알 수없을 때이다. 사람은 누구인지 모를 때가 가장 무섭다.  - P99

어떤 사람인지 알면 대처할 수 있지만, 모를 때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의 얼굴에 전짓불을 비추며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물을 때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전짓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어느 쪽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절망적 상황이고, 지독한 시험이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봉변을당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한마디 말에 달려 있다. 실제로 이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소설가 박준은 전한다.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의 정체를 점치려다 실패한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서, 누구인지 모른채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인간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 P100

말에는 정신(생각)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신(생각)이 지나치면 찻잎이 너무 많은 차가 쓴맛을 내는 것처럼 부담스러워진다. 반대로 충분하지 못하면 색이 나지 않고 향도 나지 않는차처럼 무미건조해진다. 내용과 형식이 잘 어울려야 한다는뜻이겠다. 말 속에 생각이 잘 풀어져야 하지만 아예 생각이 담겨 있지 않아도 곤란하다. 균형 있게 잘 어울리지 않으면 문장은 알아듣기 어렵거나 하나 마나 한 것이 된다. 두 경우 모두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찻잎을 너무 많이 넣거나 너무 적게넣거나 차가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잘 말한다는 것은 알아듣게 말한다는 것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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