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정희씨는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했다. 교사·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한 그는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1975년 「현대시학』의 추천을 받은그는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활동하면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 (1983),
「눈물꽃』(1986),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하나』(1991) 등의 시집을 냈다.
비극적인 오월의 봄에서 절망과 더불어 그 절망을 타넘을 열망을 뿜어올리는그는 銀이로되 그리움의 분노에 젖었지만 희망으로 진전할, 힘차고 당당한 서정으로 자신의 시적 언어를 고양시키고있다. 그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첨예한 대결로 그 자신을 밀고 나아가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가려는 그의 실천적 의지와 전망을 그가보여주고 있음을 뜻한다. 오염되고 타락하는 우리에게 있어 언어를 통한 이 의지와 전망의 형상화는 그가 우리 시단에기여하는 귀중한 문학적 자산이다. - P-1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고고여전히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한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 길에 등등을 돌려서도 안 되며 우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꼭 울게 됩니다. 내게는 눈물이 절망이거나 패배가 아니라 이 세계와 손잡는 순결한 표징이며 용기의 샘입니다. 뜨겁고 굵은 눈물속으로 무심하게 걸어 들어오는 안산의저 황량한 들판과 나지막한 야산들이 내게는 소우주이고 세계 정신의 일부분이듯이, 그리운 이여, 내게는 당신이 인류를 만나는 통로이고 내일을 예비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함께 떠받치는 하늘에서 지금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무섭게 창틀 밑을 흔드는 계절일지라도 빗방울에 어리는 경건한 나날들이 詩의 강물 되어 나를 끌고 갑니다. - P-1

自序

흘릴 눈물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두 눈을 타고 내려와 내
완악한 마음을 다숩게 저미는 눈물, 세상에
남아 있는 것들과 세상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하는 눈물, 언제부턴가 눈물은 내시편들의 밥이 되어버렸고, 나는 그 눈물과
마주하여 지금 아득한 시간 앞에 서 있다.
불혹의 나이라는 마흔의 고개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 소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여의었다. 돌연한 어머님의 타계가 그렇고 스승의 죽음이 그렇고
문단 선배의 죽음이 그렇다. 또 어느 때보다도 많은 젊은이들이 가혹하게 민주주의 제단에 바쳐졌다. 나른한 어둠이 나를 덮치려 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가는 것이 살아 남은자들의 미래인데도......

1987년 가을 高靜熙 - P-1

땅의 사람들 1
ㅡ서시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도시에서 지금 돌아온 사람들은
폭설주의보가 매달린 겨울 숲에서
모닥불을 지펴놓고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가움을 녹이며
조금씩 뼛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며
자기 몫의 봄소식에 못질을 하고 있다
물푸레나무 숲을 흔드는
이 지상의 추위에 못질을 하고 있다
가까이 오라, 죽음이여
동구 밖에 당도하는 새벽 기차를 위하여
힘이 끝난 폐차처럼 누워 있는 아득한 철길 위에
새로운 각목으로 누워야 하리
거친 바람 속에서 밤이 깊었고
겨울 숲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모닥불이 어둠을 둥글게 자른 뒤
원으로 깍지낀 사람들의 등뒤에서
무수한 설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서걱거린다 - P11

지리산의 봄 1
-뱀사골에서 쓴 편지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 P37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 P-1

강물
ㅡ편지 1


푸른 악기처럼 내 마음 울어도
너는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암울한 침묵이 반짝이는 강변에서
바리새인들은 하루종일
정결법 논쟁으로 술잔을 비우고

너에게로 가는 막배를 놓쳐버린 나는
푸른 풀밭,
마지막 낙조에 눈부시게 빛나는
너의 이름과 비구상의 시간 위에
쓰라린 마음 각을 떠 널다가
두 눈 가득 고이는 눈물
떠나가는 강물에 섞어 보냈다 - P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항일독립운동이 조직적으로 가열되고 일본군국주의의 식민지 지배1930년부터 1938년까지골화되던4부는 서울 동경 만주를 행동 무대로 하는지식인들의 행적 그리고 하동 진주 지리산만주를 연결하며 형평사 운동과 항일 운동에투신하는 크고 작은 인물들의 활약을 웅장한파노라마로 그린다. 4부에 이르러 작가는민족적 정조와 덕성(性)의 오랜원형을 탐구하고, 이를 탁월한 혜안과 풍부한지식, 생동하는 인물들의 뜨거운 형상을통해서 이야기한다. 작가의 저 오랜 주제인한(恨)과 생명의 사상, 휴머니즘과 도덕적민족주의 철학은 이로써 깊이 심화되고 마침내민족 모두의 것으로 공동화(共同化)된다. - P-1

朴景利씨에 있어 「土地는 단순한 농토를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인의 삶의 터전 전체를 의미하는 대지적 이미지다.
土地는 다양한 인물, 숱한 형태의 삶, 그 삶들의 관계 · 가치관 · 인생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土地는 삶의 종합적인 풍경이 되는 동시에 이념적 사상적 갈등과 사회·정치적,
경제·문화적 격변과 진통의 압축장이 된다. 다시말해 여느 마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전통적인 농업 촌락인 평사리가 『土地」에서는 당대의 한국과 한국인의 삶 전체를 보여주는, 한국사회의 생생한 현장으로 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土地를 읽으면서 경악에 가까운 감동을 갖게 되는 것은 이소설이 우리 문학사에서 희귀한 대하소설의 장르를 가진다는 외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사와 전체사의 거대한 문학적 대종합을, 즉 총체소설의 성과를 얻고 있다는 데에서 빚어진다.

-金炳翼 문학평론가 - P-1

어디로 가든지, 특히 소도시나 소읍 같은 곳은 거의가 다 그러한데, 양과점을 위시하여 담배 가게, 이발소, 목욕탕, 대개 그런 비슷한 업종은 일본인 경영이다. 다른 업체라고 그렇지 않다는 얘기는물론 아니다. 비교적 일인과의 접촉이 잦은 업종인 데다가 눈에 띄어야 장사가 되고 사업이 되기 때문인데, 눈에 띄어야 한다는 것은결국 대중적이라는 내용이며 눈에 띈다는 그 자체가 벌써 식민지백성들의 하층 구조에까지 스며들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을뜻한다. 그러나 일상화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조선의 산천과 사물과 사람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보급이 된 지가 오래지 않아 그렇기도 하겠으나 다만 생소하다 하여 오는 거부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새로운 업종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들여왔고 누구의 손에서 경영이 되는가. 일본에서 건너왔고 일본인 그들에 의해 주로 경영이 된다는 사실, 그 사실에 대한 적개심이나 거부의 감정을 쉽사리 지적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한편 유교 사상에 길들여진 조선 백성들의 잠재된 의식 속에는 예절과 검소 그 격조 높은 선비 정신의 잔영 (殘影)이 있었을 것이요, 생략할 수 있는 데까지 생략하는 세련된 미의식, 수천 년 몸에 배고 마음 깊이 배어 있는 안목에서 본다면 서양 것은 요란해 뵈었을 것이고 일본 것은 저 - P11

속하고 치졸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양 것, 일본 것이 혼합된그같은 새로운 업종을 이용하고 거래하면서도 못마땅했을 것이며보수파들은 더더구나 모멸하고 혐오하기도 했을 것이다.
곡물과 면포와 시탄(柴炭)이면 족하였던 종전까지의 서민들, 하기는 어떤 세월, 태평성세라던 치하에서도 그런 것들은 충분했을리 없고 늘 흡족하지 못했을 것인데 하물며 일제에게 강토를 빼앗겼고 인성이 유린당하는 민족적 수난 속에서 없어도 생존이 가능한 과외의 것들, 서두에서 말한 바 있는 그런 것들이 서민들 생활에 기어들어가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엔 수수께끼요 이상한 일이다. 이씨 왕조가 무너질 그 무렵만 해도 바다를 건너온 문물은 싫든 좋든 지배층에 속하는 것, 언감생심 눈깔사탕 비누 한 조각을어디서 구경했겠는가. 한다면 일본 그네들이 염불 외듯 하는 말인데 미개국을 개명시킨 시혜국이란 것도 그럴싸하긴 하다.  - P12

어떤 경박지사가 아이스크림의 맛을 어찌 나폴레옹이 알소냐! 하며 현대문명을 구가했다던가, 그런 가락으로 말한달 것 같으면 연산군도전차는 못 타보았을 것이다! 조선의 서민들이라고 뽐내지 말라는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뻔한 이치는 동쪽에서 바라보는 산과 서쪽에서 바라보는 산의 모습이 다른데 어쩌랴. 금관에 용포도 왕이 쓰고 입으면 왕을 나타내는 것이요, 종이 쓰고 입으면종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니, 연이나 지금은 배부른 종의 얘기를할 때는 아니다. 이 대명천지 굶어죽고 얼어죽을 자유는 있을지언정 섬겨야 할 강산도 상전도 모두 괴멸되어 없는 터에 종의 뿌린들남아 있을라구. 각설하고 편리하다는 것, 소위 그 위생적이라는 것,
혀끝에 감칠맛이 남는다는 것,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금종이 은종이에 싼 유리통 속의 꿈과 같은 고급 과자 무슨 옥(屋)이니 헌(軒)이니 하는 명(銘)이 찍힌 생과자를 아무나가 먹는가. 사십 전 하는 ‘GGC‘, 십오 전의 ‘가이다‘, 그런 고급 담배를 아무나가 피우는가. 재주껏 발돋움을 해보아야 ‘메이지 캐러멜‘ ‘모리나가 밀크‘가 고작이며 담배는 십 전짜리 ‘피전‘이 상한선, 조선인은그 정도로 상류에 속한다고 착각들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은 엽초를 - P12

피웠고 젊은 층은 ‘마코‘라는 오 전짜리 담배를 피운다. 아이들 역시 동전 한 닢으로 향료도 없는 흑설탕의 눈깔사탕 한두 개, ‘센베이‘가 두세 개, 그걸 입에 물면 행복해지는데 단순한 그 행복도 위협을 받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야 얻어진다. 과자점의 하얀 앞치마입은 오카미상(여주인)은 동전을 내미는 아이를 노려보기 일쑤였고과자 집게가 아이 손에 닿지 않게 사탕을 떨어뜨려주곤 했었다. 식민지의 서민들과 일본인 업주와의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고 거래라는 것도 대강 그런 정도였지만 ‘마코‘를 피우고 눈깔사탕을 먹는편이 절대 다수인 만큼 영업 성패에 무관하다 할 수 없건만 일인업주는 소비자를 거지 보듯 오만불손하였고 식민지의 가난한 백성은 내 돈 내고도 빌어서 먹는 시늉을 해야만 했다. 하기는 농토에서 잡초같이 뽑혀나간 농민들과 뭐 다를 것이 별로 없다. 소도시나 소읍에서 우왕좌왕하는 가난뱅이 소비자도 어차피, 조만간에 뽑혀서 버려질 잡초인 것은 매일반이며 결국 거지로 전락할밖에 길이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같은 부동(浮動)인구는 본래 가농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P13

남부여대(男負女戴) 땅을 찾아 간도로만주로 떠났고 모집에 휩쓸리어 광산 등, 노동력을 팔러 일본으로건너갔고 혹은 하와이에 농장 노예나 진배없는 그런 조건으로 이민간 사람들, 나머지가 이곳의 부동 인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상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산 설고 물 설은 남의 고장에서 그들의처지가 나올 것도 없겠으나 소도시로 소읍으로 밀려나와 방황하는무리의 참상 또한 목불인견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 무리를 살펴보건대 거리마다 밥 빌러 다니는 걸인들이 태반이요, 부두, 정거장, 여관, 저잣거리에는 팔짱 낀 지게꾼이 그리운 님 기다리듯 짐을 기다리는 광경이 그들의 형편이었다. 일본인 왈, 조선인은 게으르다,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그 실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민란도 수없이 있었지만 조선조 오백년, 나라에서는 공전(公田)이라 하며농민으로부터 땅을 걷어들인 일은 거의 없었고 설사 걷어들였다한들 결국 조선 백성이 경작하게 마련, 사유지의 경우도 땅문서라 - P13

는 것이 애매모호했으나 땅문서 이상으로 윤리 도덕이 견고하여남의 땅을 도적질하는 일은 없었다. 항상 족하지 못했지만 마을마다 대개 객사라는 것이 있었고 여염집에서도 한두 끼의 끼니, 잠자리를 거절하는 풍속이 아니었기에 나그네는 있었으나 거지는 흔치아니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삼천리 강산, 남의 땅으로 쫓겨간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 불운한 강산 거리거리에 거지들이 떼지어 방황하고 있는 것인가. 일인들 왈 조선에는 웬 거지가 이리 많으냐, 총독부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땅을 약탈하여 배가 불러 터지게 된 동척(東拓)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선인은 게으르다, 어째 게으른가 그것 역시 총독부, 동척에 가서 물어볼 일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내쫓긴 수많은 사람들, 날품팔이 행상, 남의집 고공살이, 그런 일자리나마 과연 충분하며 입에 풀칠할 만한 수입인가. 그러나 어쨌든 거지가 아닌 그런 부동 인구가 우선은, 앞서 말한 새로운 업종의 구매자요 이용자인 것만은 사실이다.  - P14

일자리를 얻기위하여, 얻은 일자리를 부치하기 위하여, 장사를 하기 위하여, 상투가 잘렸으니 이발소라는 곳에 가서 머리를 깎아야 하고 등물할 내집, 마을의 시내도 잃었으니 목욕탕에 가서 몸도 씻어야 한다. 이발관에서는 머리에 바르는 지쿠 냄새가 났다. 활동사진관 주변에서올백한 건달들이 사이다, 라무네 등을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에게시비를 걸곤 하는데 그들에게서도 지쿠 냄새가 났고 손가락 사이에 면도날을 숨긴 새로운 직종, 일본서 기술을 배운 수리꾼 그들도지쿠 냄새를 풍겼고 이다바(요리사), 일인 상점의 점원 등, 쥐꼬리만한 급료를 받는 부류의 청년들도 월급날에는 이발하고 목욕하고지쿠 바르고 유곽을 찾는다. 일인들이 들어오면서부터 곳곳에 세운성곽과도 같은 거대한 청루(靑樓), 그러고 보니 수리꾼, 유곽도 과연 새로운 직종이요 업체다. 칼날과 섹스,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일본의 수천 년 역사의 진수가 아니었던가. 목욕탕에선 ‘가오세켄‘이라는 비누 냄새와 ‘우데나‘ 크림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등바닥까지 회칠을 하는 일본 기생을 연상하게 한다. 목욕탕에서는 언제나 그들 일본 기생을 볼 수 있었다 - P14

늙은 할미는 손녀를 보고 물었다.
"머 묵노?"
"사탕."
"어디서 났노?"
"아부지가 한푼 주데요."
"댓끼놈의 가시나! 양식도 못 팔아묵는데 배부릴 기라꼬 그거를묵나! 회만 생기고 이빨은 안 썩을 기든가? 애비도 애비다. 죽물도안 들어간 창자에 사탕이 웬 말고."
내일이 없는 아비 어미의 자포자기한 생활, 자포자기한 사랑 때문에 아이는 배도 안 부 르고 이빨만 썩을 사탕을 먹게 된다. 떡할쌀, 엿을 고을 엿기름 한줌이 없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없는 것이 어디 그것뿐일까. 코딱지만한 남의 곁방살이, 처마밑이 부엌이며 아궁이에 지필 나무 한 가치 없고 간장 된장도 사먹어야 하는뜨내기 살림, 아이 입에 사탕만 물리던가? 돈 생기면 허기부터 달래려고 우동을 사먹게 된다. 우동만 사먹는가? 환장한 가장은 야바위판에 주질러앉아 돈 털리고 호주머니 바닥 털어 술 사먹고 돌아와서 계집 자식 친다.  - P15

내일이 없는 뜨내기, 그들은 모두 허무주의자다. 허무주의는 소비를 촉진한다. 바닥을 털어가며 사는 사람들, 끝없는 노동력을 제공해도 바닥은 메워지지 않는다. 노동을 팔고 싶어도 팔 자리가 없어 빈털터리요 어쩌다 얻어걸리는 품팔이, 급한김에 아이 입에 사탕 물리고 허기 달래려고 우동이며 국수며 혹은떡이며, 해서 이들은 왕도 손님도 아닌 거지의 시늉을 내는 소비자인 것이다. 머지않아 거지로 전락할 사람들인 것이다. 이청루에 몸을 판 여자는 순결할 때 쓰던 녹두가루, 팥가루 같은것 대신 비누를 쓰고 화장품을 소비한다. 혀가 꼬부라지게 과자를먹고 창자가 썩을 만큼 술을 마시고 어차피 성병 따위로 천당 갈날이 머지않았으니 말이다. 아편보다 못할 것이 없다. 저속한 그 모든 것들은 서서히 서서히 노동력을 소모하고 가진 것을 소모하고하나씩 사라지면서 그네들에게 압제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것이다. 그러면 도시말고 농촌은 형편이 다를까. 아니, 가까스로 발붙인 - P15

농민들은 살아갈 한하지. 그게 그렇지가 않다. 잿빛 돌담에 비치는햇빛은 비정하고 생활은 가열하다. 강가에서 주운 돌을 하나씩 쌓아올려 돌담을 만들던 시절, 삼태기를 만들고 물통을 만들던 가난했던 시절, 가난은 여전한데 아니, 더한데 돌담을 쌓고 삼태기를 만들던 생활을 농민들은 잃었다. 부평초 신세는 도시 유랑민뿐만은아니었다. 개척민 성격을 띤 일인들이 많은 농토를 차지했다. 처음삼강오륜을 헤아리는 조선의 농부들 눈에 본토에서 버림받은 비천한 일인들이 짐승으로 보였다. 그들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야만인이었다. 탈망한 사내가 온다고 숨던 부녀자들이 샅바 하나 찬벌거숭이 왜인들을 만났을 때 기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일본 농부들의 무례보다, 넓어진 경작지에 과중한 노동을 하는데 수익은 전과 다름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경작지가 넓어지고 보다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면 수익이 느는 것이 이치다. 하기는 인심이 그렇게 했다면 애당초 잡초처럼 농민들을 솎아냈을 리가 없다. 보다 많은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것은 짜낼 수 있을 만큼 시간을 짜낸다는 것을 의미하고 여가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 P16

기계가 짜내는 광목, 옥양목에 밀리어 농가의 수직 면포가 상품으로서 쇠퇴해가는 추세도 추세려니와 아녀자들은 이제 베틀에 앉을 체력을 잃었고 남정네는 나무 한짐 해서 장에 내다파는 시간을 얻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생활에 보태는 방도가 끊긴 것이며 뿐인가 흉작, 풍작에 관계없이 소정된 소작료는 세금보다 무섭다. 액수가 부족하면 등바닥에 불난 것처럼 장리변, 일수 가릴 것 없이 아구를맞추어내야 하는 것이다. 빛이 눈사람 모양으로 불어나는 것은 전에 없던 복리의 요술이겠으나 그 요술 때문에 식구들이나마 등 덮어주기 위해 베를 짜던 딸은 청루로 가거나 도방에 더부살이로 가거나, 나루터에서 울며 이별할밖에 없다.
"아부지, 점심때가 된 것 같소."
"아직 멀었다."
돌아보지도 않고 김을 매는 아비와 나뭇가지에 매달아놓은 보리밥 한 덩어리를 보고 또 원망스럽게 해를 보던 아들, 한숨을 쉬며 - P16

다시 김을 매던 아들은 선금에 흘리어 모구리질(잠수부)을 하러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말린다.
"이눔아아야, 물속에서 시비리(마비)가 한분 오픈 그냥 죽어부린단다. 차라리 일본에나 가지 그랬나."
아들은 등을 돌리며
"부모 형제가 있는데 멀리는 가고 접잖소."
어미는 돈이 원수라 하며 울었고 아비는 뒷짐지고 먼산만 보고, 뿌리가 뽑히기론 매한가지다. 농촌에서 딸 팔아먹고 아들 떠나보내는 것은 이제 다반사가 되었다.
훌륭한 개명파 지식인들, 일본물 마시고 서양서 온 기독교에 목욕한 사람들, 미신 타파를 외치고 민족 개조를 외치고 조선인을 계몽하려고 목이 터지는 사람들, 미신 타파하면 땅을 찾고 수천 년내려온 조선의 문화를 길바닥에 내다버려야 땅을 찾고 나물 먹고물마시고 이만하면 대장부 살림살이, 대신 사탕 빨고 우동 사먹어야 땅을 찾을 것이던가. 사실은 긴구치(金]나 하마키피를우는 족속, 금종이 은종이에 싼 과자 먹는 족속, 우리 것을 길바닥에 내다버리는 족속 때문에, 그들 때문에 조선 민족은 말살될지 모른다. 남부여대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 바가지 들고 거리를 헤매는사람들, 지게 지고 그리운 님 기다리듯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신세는 마을 큰나무에 돌 얹고 절한 때문인가 성황당에 제물 바친 때문인가 용왕을 모시고 터줏대감을 모신 때문인가, 그것을 총독부, 동척 아닌 어느 곳에 가서 물어볼꼬. - P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운무(雲) 속에 부유하듯 아이의 형체는 있는데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 어쩌면 뚜렷하지 않은 아이의 형체, 그것은 기화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였는지 모른다.
"유섭이는 지금 북경에 있지요. 내가 데리고 있다가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아이가 좀 유약한 편이지만머리가 좋고 학자형이라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상현은 그 말을 귓가에 흘려듣는다.
"내게는 그 애 하나 건져낼 힘밖에 없었지요."
무거운 바퀴가 가슴 위를 지나가는 것 같다. 다리가 뻣뻣하게 저려오는 것 같다. 뜨거운 것이 상현의 눈앞을 가린다. 죄의식이 괴물같이 달려든다. 어머니를 버리고 아내를 버리고 아들을 버리고, 그러나 상현은 버렸다기보다 그들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들은 뿌리를 가진 식물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집이 있고 그들은 존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은 늘 아픔보다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그들 생각을 안 하려는 것이었다. 기화에게도 그랬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화, 그가 낳았다는 계집아이에 대한 기분이 그러했었다. 타인같이 연관이 없고 모르는 존재로 치부하려고 했었다. 한데 사태처럼 무너져서 덮쳐씌우는 아픔과 연민을 상현은 이 순간 감당을 못한다. 상현은 자기 자신 속에 부성애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을해본 일이 없다. 부성애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찌르는 이 감정은 부성애하고는 다른 성질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짙다. - P269

방학을 며칠 앞두고 동경서 서울로 간 환국이는 어머니와 합류하여 서대문 형무소의 아버지 길상과 면회를 했다. 동대(東大)는 아니었지만 어머니의 소원대로 법과를 지망하여 조도전(早稻田)예과에 입학한 환국이는 동경으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와 첫 면회를 했었고 여름 방학 귀국길에, 그러니까 두번째 면회를 한 셈이다. 삭막한 그 거리, 붉은 담벽에 여름 태양이 튀고 걸레처럼 후줄근해진사람들이 오가던 그곳, 옥중에 있는 사람도 물론 그러했겠지만 어머니와는 또 다르게 환국은 형무소의 철문을 나서면서 심한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절대적인 존재, 환국의 마음속에서는 아버지는 절대적인 존재다. 독립투사로서의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 그 자체가 환국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은 핏줄의 부름이며 어릴 적에 뇌리에 박혀버린 그 모습, 그 음성이 절대적인것이다. 그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한층 강하게, 굳게 각인된 것처럼마음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 아버지의 체취 같은것을 환국은 느낀다. 경련처럼 이는 그리움, 바람 부는 음지에서 환국이는 오돌오돌 떨듯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쪽과 저쪽손 한번 마주잡아볼 수 없던 그 짧은 시간, 갈증이 난다. 혀끝이 굳어진 듯 할말을 못하고 오열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던 그 짧은시간, 아버지의 눈동자만이 심장을 태우는 것 같았던 짧은 시간이었다. - P285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전에 머문흰새 한 마리.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는, 그때마다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할까. 환국이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어머니의 두 손 위에 눈을 떨어뜨린다. 창백한 손이다. 창백한 손에, 푸른정맥이 내비치는 투명한 손가락에 끼어져 있는 샛파란 비취 반지에 눈이 머문다. 물방울 같은 짙은 녹색의 보석이 흰 모시 치마 위에서 어머니의 성품같이 고귀하게 보인다고 환국은 생각한다. 푸른수전과 흰새 한 마리, 눈물의 응결 같은 푸른 보석과 어머니의 하얀 모시옷. 환국은 눈길을 들어 차창 밖을 내다본다. 손 안에 물이흘러버리듯 만남의 그 격렬한 시간은 가고 없다. 차창 밖의 시시각각 날아가버리는 연변 풍경 같은 것인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다시 맞이하는 풍경, 철로 양켠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듯 석축이계속된다. 청회색의 그 돌 빛깔에서 어찌 갑자기 아버지의 가슴팍을 느끼는 걸까. 레일을 구르는 기차 바퀴 소리는 간단없이 정확하게 울린다. 그 바퀴 소리를 한꺼번에 잡아젖힐 수는 없는 것일까.
세월이 그냥 주렁주렁 끌려와서 당장에라도 옥문이 활짝 열려질수는 없을까. - P286

유창한 일본말, 거칠 것 없이 내어뿜던독침과도 같은 말이며 호탕한 웃음, 그는 완전히 강자였었다. 붙잡히면 놓여날 것 같지 않았던 질기고 거센 분위기, 숨도 쉬지 않고나락으로 몰아붙일 것 같은 집요함.
‘잘했다! 천안서 내리기를, 아암 잘한 일이고말고‘
김두수는 세상 참 우습구먼, 했었다. 아닌게아니라 세상 참 우습다. 악당과 악당이, 묵은 인연이 얽힌 악당과 악당이 하필이면 기차속 마주보는 좌석에서 해후를 했다는 것은 신기하기보다 우스운일이다. 조준구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실상 두 사내는 서로 미치지 못하는 곳, 미칠 필요도 없는 범위에 있는 인간들이다. 다만그들은 스치고 갔을 뿐이며 부산까지 동행했다 하더라도 스치는관계에서 끝날 인간들인 것이다. 유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무슨 증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위에 긴 여행이요, 여행의 목적도 좋았던 것이 아니어서 김두수는 짜증을 달래보았을 뿐이며언동의 잔인함은 그의 일상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서로 알길 없는 이들은 아마 다시 만나는 일은 없으리라. - P326

사람들은 밤을 보내기 위하여 이런저런, 깊은 생각 없이 말들을 지껄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나이를 봐서는 더 살아야겠지만 호상이라 할 수 있는 상가의 대체적인 분위기였다. 오랜 병고 때문에 용이 머지않아 죽을 것이란 사실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병고말고는 용이 만년이 비교적 풍파 없이 조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마음 아파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구 가슴에 못질을 한 일도 없었으며 깊이 관여하지도 않았고 어딘지 도인(道人)같이 표표했던 그의 일상은 사람들에게 병고로 빚은 음산함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 P398

민족의식 없이, 거의 동족같이 상종해온 오가다 지로, 그의 결점까지 인간적인 매력으로 보아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동생같이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했던 오가다가 갑자기 흉물같이 압도해온다. 송충이같이 징그러운 존재로 의식을 점령해온다. 이민족, 정복자, 거대한 발바닥으로 강산을 깡그리 밟아 뭉개는 괴물. 인성은 머리를 흔든다. 그런 악몽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듯이. 누이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또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맺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도 결혼을 아니 하겠다는 인실의 감정 그 자체 때문에 오가다는 돌연 괴물로 변신한 것이다. 판단이나이해나 사려가 끼여들 여지 없이,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가조차 떠오르지 않는 본능적인 거부 반응만이 아우성이다. 남자들은 더러일본 여자와 관계를 맺었고 인성도 그런 사내들을 몇 보아왔다. 물론 바람직한 일로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격렬한 치욕과 혐오감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저 북만주 땅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병(兵)에게 능욕당한 조선의 여인들이 자결로써 생을 결산한 사건들은 가슴에 응어리져 남아 있는데.
한동안 오누이는 대좌한 채 침묵을 지킨다. - P4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부분의 소설들은 작가의 뜻에 따라서 인물이며 사건이며 정황이 설정되고 존중되다가 그 운명까지도 규정된다. 그런데 『土地는 이와다르니 사람만이 아니라 나는 새와 기는 짐승이며 이름없는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가지고있는 ‘생명의 길‘을 그 생명의 이치에 좇아 조심스럽게 따라가주고 있을 뿐이다. 지극한 생명존중의 사상이다. 이 극진한 생명사상에 의하여 바위를 만나면 밑으로 스며드는 개울이 되고 산을 만나면 품에 안고 감아도는 강물이 되다가 이윽고는 대해(海)로 나아가는 朴景利 선생의「土地』를 가리켜, 진정한 대하소설(小說)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이 진실로 여기에 있음인저.

金聖東 作家 - P-1

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냉담하고 무관심한 간수의 눈을 뒤통수에 느끼며 서희는 형무소를 나왔다. ‘일순간만 같은 길상과의 대면, 창살을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바라본 짧은 시간, 목이타던 시간, 만남은 빗방울이었던가. 언제나 그랬었지만 사막을 걷듯 서희는 언덕길을 내려온다. 일체를 차단하고 만 높은 담벽, 붉은 벽돌의 담벽과 서대문 종점의 우중충한 풍경은 인생의 종말같이 서회 마음을 눌러지른다. 이곳의 풍경은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늘 잿빛이었다. 형무소 문을 드나드는 죄인과 죄인들 가족의 마음과 같이 황량한 바람의 잿빛이다. 한 가지 희망이, 빛이 있다면 그것은 재소자의 건강이 그런대로 괜찮다는 것뿐이다. 흰 무명 두루마기에옥색 명주 수건을 아무렇게나 목에 감은 서희는 잠시 멈추어서며
‘겨울을 어찌 날꼬?‘ - P11

남편에 대하여 원망과 존경도 없었다. 그리움도 없었다. 다만 절대적인 관계가 있었을 뿐이다. 절대적인 관계, 현재의 상황만이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온다. 서희는 걸음을 옮겨놓으면서 남편의 눈빛을 생각한다. 눈에 담긴 빛의 함량(含量)은 어느 만큼이든가. 그것은 생명력을 측량해보는 것이기도 했다. 잘 견디고 있는가. 잘 견디어낼 것인가. 길상의 눈빛은 서희 자신의 눈빛이었다. 그쪽에서 빛나면 이쪽도 빛이 난다. 그쪽에서 못 견디면 이쪽에서도 못 견딘다.
종점에 종을 땡땡 울리며 전차가 온다. 전차는 멎고 그곳에서 을씨년스런 조선의 백성들이 쏟아져내린다. 암석으로 깎아지른 산둥성이의 가난한 주민들도 있겠지만 형무소를 찾는 어두운 얼굴들이더욱 많으리라. 잿빛 산과 언덕 위를 흐르는 흰 구름, 서희 입에서깊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 P12

존경할 만한 값어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석이도 안다. 그러나 석이 마음속에는 반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질투하고는 다른 감정이다. 기화를 깊이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연은 그쪽에서 잘랐다. 그것은 사내의 의지였는지 모른다. 기생의 처지에서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발길을 끊었을 때도 그러려니 무심하던 그때의 기화도 상기된다. 만일 서의돈이 조국의 독립이라는 큰뜻을 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시 마찬가지로 기화는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석이는 생각한다. 명문의 후예들, 선비의후예들, 그들에게 애정이란 이른바 풍류에 불과한 것이었을 테니까. 또 기화는 기생이었으니까. 풍류와 기생의 당연한 결과였는지모른다. 다른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의돈은 기화에게 미쳤다.
바로 그 미친 상태에서도 발길을 끊었던 서의돈의 냉정함에 석이는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통틀어 양반들의 냉정함이요 기생이나 서민들에 대한 근본적 모멸이기 때문에 석이는 서의돈에 대하여 순수한 존경을 바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서의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석이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기화를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학교 교사와 기생, 일가의 가장과 기생, 어떤 시기가 닥치면 자신도 결별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실을 위해 진실을 희생해야 하는것은 모순이다. 하물며 평정을 위해 진실을 희생하는 것은 모순 이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람의 도리는 무엇이며.... 약자를 희생시켜온 것이 대부분의 도리가아니었더란 말인가? 사내답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약자를 보호하기보다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두고 사내답다 해오지 않았던가?‘ - P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못난 백성들인데 그런 말은 좀체로 입 밖에 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경찰관 아니면은 그것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소이다."
혜관은 효자동 어귀에 있다는 선일여관에 대해서 다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는 떠났다.
삼월말의 철도 연변은 봄이 완연했다. 바람이 차기 때문에 봄은더 신선한 것 같았다. 차창에 기댄 서희 가슴에는 위험을 동반한환희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낯선 역을 맞이하고 낯선 거리를 기차가 지나칠 때마다 서희는 그 거리에서, 정거장에서 길상을 만났다. 홈에 우뚝 서 있는가 하면 거리를 지나가는 뒷모습이 있었고, 서울에 닿을 때까지 줄곧 차창 밖만 내다보는 조용한 자세였으나 서희는 봄에 눈뜬 유충같이 세상이 경이에 가득 찬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실증(實證)은 없다. 그러나 실증 이상으로 길상이 서울에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서희는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 P179

정윤이나 숙희는 삼호실 환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환자 쪽에서 불만이 많아 광태를 부리기 때문인데, 박의사 역시 이색적인 환자라는 것은 느끼고 있다. 대개의 환자는 의사에게 목숨을 위탁하는 복종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매달리는 눈빛, 심약한 미소, 혹은 겁먹은 반항, 그러나 삼호실의 환자만은 의사의 권위 같은 것은 서푼짜리도 못되었고 당당하게 자기 생명의 소중함을 주장했다. 수틀리면 행패부리겠다는 늘 그런 자세인데 꼼짝 못하고 누워 있을적에도 입에서는 계속 돌팔매질하듯 말이 튀어나왔고 눈물을 흘릴적에도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시위요 저주요 협박이었다. 신에게조차 날 살려내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그렇게 철저하고 완벽한 아집을, 그러나 박의사는 그 앞에서 서글프게 웃고 만다. 죽음은 절대적인 승리자요, 거대한 암벽에 모래알을 던지는 환자는 눈물나게측은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윤과 숙희는 번번이 끔찍스럽다고들했다.
"삼호실 환자 말인데요,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하기도 해요. 더러 문병 오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한결같이 구경온 사람 같지 뭐예요? 미치광이처럼 막 지껄여대는데 대꾸조차 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떤 할머니 한 사람만 불쌍하다 하며 울데요."
"그것 다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 게야. 죽음을 맞이할 때야말로어떤 형태로든 숨김없는 한 인간의 결산이 나온다고들 하지."
숙희에게 무심히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박의사는 회전의자를빙그르르 돌리며
"내일이라도 퇴원하는 것은 무방하니까 가족이 잘 설득해보슈."
"그렇게 하겠습니다." - P200

임이네는 일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비바리의 휘파람 같은 한숨을 내쉰다.
"오오냐!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동 땅에 그놈의 인사 살아 있는 동안은 내 저승차사 애목을 물고라도 안 죽을라 캤더마는, 쇠 한분 물어 끓으믄 고만이다! 하늘 밑에 낯짝 치키들고 댕길긴가 어디 두고보아라!"
"어머니!"
보연의 얼굴에 겁이 더럭 실린다. 홍이는 잠자코 입원실을 나간다.
"상의아버지! 상의아버지!"
보연이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홍이는 급히 나간다. 이삼 년 동안, 만 이 년인데, 그 동안 임이네는 병으로 굿을 쳤다. 며느리를 두고 안 들어올 사람이 들어왔기 때문에 병이 난 것이라 하여 굿을하고 보연이는 나타나지도 못하게 했다.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빈말이었다. 좋다는 약은 다 먹었고 좋다는 한의는 다 찾아다니며 법석을 피웠다. 심지어는 새끼 낳은 고양이의 안태까지 뺏어다가날것으로 먹었을 지경이었으니까.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도 지나놓고 보면 홍이가 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급성복막염도 아닌데 방금 죽어가듯 소동을 피웠던 것이다. 홍이는 걸으면서, 입원하던 그날 어미를 업고 병원으로 가던 길에서 어깨를 물어뜯던 이빨의 섬찟함이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어깻죽지의 남아 있는 아픔과 함께. - P203

그것은 연학이도 느낀 일이다. 철통 같은 비밀, 비밀의 조직, 그것이 아무리 철통 같은 비밀이라 하여도 움직여야 하고 움직이려면 그만한 결과를 계산해야 한다. 그만한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한번의 폭발마다 조직은 늙어가고 줄어드는데 보충이 없다는 것이다. 줄어들고 늙어가는 만큼 폭발력도 줄어들고 늙어갈밖에 없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요 환이 머리 하나의 정열로 이끌기엔 지리산은 이미 무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을 다 막연히 느끼고있다. 환이를 기다리는 마음도 마무리짓거나 아니면 큰 변동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옆으로 퍼져나가야지, 느리게 앞뒤 재는 것이 이제는 안묵힌다. 그거를 형평사운동을 함서 깨달은 긴데 서울서 온 젊은 사람들 얘기를 들을 것 겉으믄 지주와 소작인들이 변동된 때문에, 자작농이 줄고 지주도 줄고 대신 수가 적어진 지주는 땅이 자꾸 넓어지는데, 그 적어진 지주에 왜놈들이 또 끼여든다는 게야. 그뿐인가. 왜놈의 농민들이 합류하게 된께 간신히 소작 자리를 거머잡은 축이 움직이겠나? 쥐꼬리만한 소작지나마 빼앗기고 농촌에서 떨리나간 사람들의 갈 곳이 어딘가. 만주, 일본, 그리고 꾸역꾸역 몰려가는 곳이 도시 공장인데 움직일 수도 있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 그들이라 하더마. 일리가 있는 것 걷기도 하고 모릴 것 걷기도하고, 독립운동하고는 우떻게 되는 긴지. 우리 생각을 어떻게 고치야 하는 건지. 다만 이제 동학으론 안 된다. 자리도 없고 사람도 없다. 동학은 낡고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도 무너져가고 있는 기라." - P219

길상을 몹시 닮은 환국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하며 상현은 쓸쓸하게 웃는다. 양반? 뭐 말라죽은 게 양반이냐! 지금, 눈앞에는 그 옛날 하인이었던 사내의 자식이 어느 귀공자 못지않게 슬기를 가득 채운 눈망울을 빛내며 앉아 있는 것이다. 아비에 대한숭배감,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아비, 한치의 의혹도 없는 강하고 또강한 핏줄의 연결, 저 슬기로운 눈망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질 않는가.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세월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변한 것이 인사(人事)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길상의 얼굴과 안방에앉아 있을 명희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또 환국이 아비를 못 보는 형편과 하동서 아비를 못 보는 아들 형제의형편이 같지 않음을, 그것은 깊은 패배, 비애를 몰고 온다.
‘내가 아빈가? 내가 한 여자의 지아비란 말인가? 참으로 거미줄같은 인연이로고‘ - P260

한숨을 내쉰다. 용이의 밤 치는 손은 더욱 빨라진다. 그는 자리에서 뜨고 싶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속으로 고개를 저어댔지만 임이네 죽음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좋지 않은 추억들을 다 떠내려 보내기 위해선 임이네 생각을 말아야 하고, 그것이 그 고독하고 처참한 죽음에 대한, 불쌍한 망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다. 임이네의 죽음은 슬픔이나 애통보다 용이에게는 충격이었다.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 밑바닥을 헤아릴 수없는 절망,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그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 P279

석이는 독길 쪽으로는 가지 않고 강물을 따라 상류를 향해 곧장 걷는다. 걷다가 돌아본다. 유난스럽게 하얀 모래밭을 마치 거미처럼, 게처럼 봉기는 기어가고 있었다.
‘저 늙은이, 나한테 등짝 맞은 일은 입 밖에 내지 못할 거라‘
모래밭을 지나서 봉기는 둑을 기어올라간다. 웃음 때문에 배창자를 움켜쥐고 싶었던 충동이 일시에 가신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치민다. 산다는 것이 통곡인 것만 같다. 오뉴월, 커가는 새끼를 먹이려고 야위어진 까치 생각을 한다. 봉기 늙은이도 그 야위어지는 까치 한 마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강물이 휘번덕인다. 밤에도 쉬지않고 흐르는 강, 세월의 눈금도 없이 흘러가고 있다. 오만하고 냉정한 젊은 여자같이 강물은 혼자 흐르고 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석이는 야무네와 용이 기다릴 것을 생각했으나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옛날 아비 정한조가 낚시질하던 낚시터까지, 그곳에 가서 주질러앉는다. - P314

‘더 늙으면 추해진다.‘
눈을 뜨고 노을이 타는 철창문을 또 바라본다. 생애를 통하여 철창문에 비치는 저 노을만큼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조용히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
환이는 자신의 생애가 성인의 길이 아니었음을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투쟁과 방랑, 애증(愛憎)과 원한의 가파로운 고개를 넘은, 평지가 오히려 발끝에 설었던 오십 평생은 마음과 몸이 피로 물들었던 것처럼 격렬했었다. 환이는 무엇 때문에 살고 죽는 것인지 그것을 생각한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여장을 다 꾸려놓고 떠나기만을 기다리는 그 얼마 남지 않았을 시간에 열리지 않을 벽을 두드려본들 모.슨 소용인가. 눈을 감은 채 환이 싱긋이 웃는다. 여러 해 전부터 진달래꽃의 여인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저고리를벗어 시체를 싸고 묘향산 골짜기에 묻어버린 여자, 묻고 나서,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진 바람인 것이며,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여자를 다시 만날 수있는가고, 환이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푸른 은빛의 그 밤하늘.
‘그 꽃 따서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 P371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걷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 쓰러지면은 꿈속에서 오열하였고 꿈속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처음에는 번번이 꿈속에서 울었고, 몇 달 만에 한 번씩 몇 년 만에 한 번씩, 그리고 삼십여 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꿈속의 울음을 잊었고 여자도 잊었다. 지금은 꿈속도 아니요 진달래의 눈보라, 붉은 빗줄기, 구름 바다의 환각도아닌데 이는 눈을 감은 채 오열한다. 눈물도 아니 흘리고 몸짓도 아니 하면서 이는 통곡하는 것이다. 만주 벌판 마적단에 사로잡혀 두목의 두호를 받으며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였던 우스꽝스런 세월, 상해(上海)거리를 아편쟁이 거지처럼 헤매던 세월이며, 포부 - P371

는 있었으나 그 세월은 이미 가을이었다. 풀도 시들고 열매도 거두어들여버린 황막한 가을이었다. 연해주를 건너가 권필응을 만났을때 환이는 더욱더 짙게 가을을 느꼈다. 권필응의 주름진 얼굴에서지난날 보았던 이동진의 모습이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 수많은 독립투사 애국열사들의 마지막 운명의 그늘이 권필응만 피해가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없는데 발바닥 몇 치, 안좌할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뛰어야 하고 뛰지 못할 때 냉엄한 것은 인심 탓이 아니다. 망명의 풍상은 눈물을 마르게 하고 사정(私情)은 누구나가 죽이고왔으니 말이다. - P372

서참봉댁에서 나오는데 임명빈은 갑자기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절망감에 사로잡힌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머리통을 땅속으로 내리누르는 것만 같다. 두 손을 활짝 쳐들고 그 압력을 떠밀고 싶은 충동, 이민족(異民族)의 힘이 얼마나 비정한가를 가슴 저리게 실감한다. 은행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아가며 형무소로 달려가는 초라한영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내 땅내나라에서 어찌하여 숨도 한번 크게 못 쉬는 행랑아범의 신세가 되었더란 말인가. 헐벗고 굶주리는 것보다 시시각각 주변을 살펴야하는 마음의 무게는 질병치고도 가장 무서운 질병인 것만 같은생각이 든다.
‘이러다간 다 미치겠다‘
미쳐 있기보다 미칠 것을 예감하는 고통, 그런 뜻에서 차라리 옥에 갇힌 사람, 뛰는 사람, 목적이 멀더라도 목적을 향해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속 편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니까. - P4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