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불을 질러서 모두를 없애버리고도 싶었다. 서로 때문에 죽고 싶은 가족이라니. 어릴 때는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른이 되어서는 ‘엄마라고 꼭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가‘로질문을 바꿨다. 굳이 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질문 자체가 주는홀가분함이 있었다.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 엄마가 어린나를 키우던 나이와 내 나이가 같아지면서 깨달은 바가 몇가지 있다. 엄마는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다는 것. 사랑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는 것. 엄마는 엄마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다는 것. 엄마의 방식이란 무엇이냐. 내 자식은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에 내 손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식을무시하면서 엄마의 자리를 견고하게 다지는 방식.
아빠에게는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부여할 수 없다. 아빠의 세계에는 아빠만 있다. 그 세계에서 아빠 아닌 존재는 대부분 쓸모없고 멍청하다. 아빠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를 쓰겠다는 회사가 있어? 너랑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있어?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남들 하는 건 다 하려고 드네. 겨우 그렇게 살려고 돈을 들이부어 대학까지 다녔냐? 내가 열 살이되기 전까지는, 아빠가 시뻘건 얼굴로 술냄새를 풍기며 화풀 - P230

이를 할 때 엄마는 말리거나 저항했다. 어느 날부터는 징조가 느껴지면 오빠와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밤길을 오래걸었다. 기차역이나 불 꺼진 상가의 계단에 앉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충분히 기다린 뒤 집으로 돌아가면, 아빠는잠을 자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밥솥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 속옷이 어느 서랍에있는지도 몰랐다. 형광등 하나 갈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세탁기 사용법은 알까? 옷을 빨아서 말려야 한다는 것, 쌀을씻어서 밥솥에 넣어 취사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것, 식사 후그릇은 씻어야 한다는 것, 먼지는 쓸고 닦아야 하며 식재료는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사실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 가족의 생일은 모르지만 통장의 잔고는 십원 단위까지 외우는 사람. 우리 집에서 아빠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도 어린아이처럼 보호받는존재였다. 사고를 치고 행패를 부려도 가족의 보호와 관심이필요한 존재. 아빠는 자기가 누군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고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세계에 아빠는 없다. 오랜 상상의 힘으로 아빠를 없애버렸다. - P231

이모집에 머물렀던 며칠 동안 나는 감시하는 눈으로 이모가족을 지켜봤다. 그들의 다정함이 연기라는 증거를 찾아내려고 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그들의 말투를 닮아갔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엄마 또한 그랬다. 집에서라면 절대하지 않았을 행동-두 팔로 나를 안고, 손바닥으로 내 볼을쓰다듬고, 나의 밥에 계란말이를 얹어주고, 밥을 더 먹으라고 권하고, 잘 자라고 인사하고,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톡톡두드리며 자기 옆에 앉으라고 말하는 것 등등을 했다. 엄마와 나의 목소리는 높고 밝아졌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는아이처럼 아무 말이나 내키는 대로 했다. 별것 아닌 농담에도 웃었다. 따뜻한 물에 풀어진 휴지처럼 긴장감 없이 떠다니듯 움직였다.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연기가 아니었다. 정말 즐거워서 웃고 좋아서 박수를 쳤다. 엄마에게 안기고 싶어서 안겼다. - P238

이십대 초반에,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내게 좋아한다고말했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감정은 기쁨도 설렘도 아니었다. 죄책감이었다. 확실히 그랬다.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이어서 의심이 들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내게 뭔가 바라는 게 있나? 나는 상대를 고통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사랑을 확인하려고 했다. 상대가 맞춰주려고 애쓸수록 나는 단폭해졌다. 상대도 나처럼 표독스러워지길 바라면서. 그걸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나만 나쁜게 아니라는 것. 우리는 폭같이 엉망이고 구제 불능이라는 것. 상대가 참으면 역겨웠고참지 않아도 역겨웠다. 비교적 평화로운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는 않았고, 웃긴다고 생각했다. 뭘 모르는 존재들이라고 얕잡아봤다. 몇 번의 연애를 처참하게 끝내며 깨달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도 아빠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빠를 닮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살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 불러오는 불길한 평온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면 이모 가족을 떠올렸다. 내 안에도 다정함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그것을 꺼내고 싶었다. - P240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지. 네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나는 잘못될 생각부터 하기는 싫어. 나는 복직할 거고 태양이는 잘 클 거야. 물론 아프겠지. 다치겠지. 속상하겠지.
가끔 후회하겠지. 애 아빠하고 싸우기도 할 거고 태양이는울겠지. 그러면 서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화해할 거야. 중요한 일은 같이 고민하고 약속은 지킬 거야. 특별한 날에는 외식도 하고 여행도 갈 거야. 나는 그렇게 살 거야, 엄마,
내가 아이였을 때는 엄마에게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둘 다 어른이어서 적당한 거리를 지키지 않으면충돌하고 깨진다. 깨진 잔여물은 타인을 위협하고 상처는 영영 남는다. 엄마와 아빠의 충돌처럼. 엄마는 나를 자기 구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나는 엄마와 같은 궤도에 속하고싶지 않았다. - P248

이모부의 핸드폰에서 130미터 직진하라는 음성이 나왔다. 이모가 이모부의 팔짱을 끼며 나에게 그만 들어가보라고 했다. 어서 들어가 네, 조심히 가세요. 밥 잘 챙겨 먹고,
네, 걱정 마세요. 나중에 태양이랑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네, 놀러 갈게요. 우리는 웃으며 인사하고 또 인사했다.
나는 멀어져가는 이모 부부를 바라봤다. 정문을 지나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이모 부부는, 내가아직 돌아서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나를 돌아보며 동시에 손을 흔들었다.
내가 어떤 아이였든 무슨 상관인가.
걸음걸이마저 닮아버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할 테고 나는 이제 누구의 기억에도 엉겨 붙지 않을 것이다. 지금을 생각할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아빠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몰랐으며 관심도 없었다. 아빠를 추억하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고개를 들어 태양을 찾았다. 구름이 빠르게 태양을 가리며 지상에 잠시 그림자를 만들었다. 곧 눈이 부셨다. - P258

그래, 우물을 중앙에 둔 기역자 형태의 집이 여기 있었어. 하지만 네가 그걸 기억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나 역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억은 기억. 말이 안 되는 기억이적지 않은 데다 이제 나는 시간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므로 말이 안 되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 편이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육체의 눈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의 눈이 있어 미래를 보고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인생이한 방향으로만, 그러니까 책장을 넘기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현재에서 미래로만 흐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시간은인간의 언어. 측정 도구. 약속. 인간이 발명하고 이름 붙인것. 그러므로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처럼.
시간은 발산한다.
과거는 사라지고 현재는 여기 있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언가가 폭발하여 사방으로 무한히 퍼져나가는 것처럼 멀리 떨어진 채로 공존한다. 과거는사라지지 않는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뿐. 미래는 어딘가에 있다. 쉽사리 볼 수 없는 머나먼 곳에. 나는 종종 과거와 미래를 헷갈리는 것만 같다.  - P262

 일할때도 불안과 강박이 심해 같은 것을 수차례 확인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의 성과나 실력을 스스로 불신했고 매사 죄책감이 컸다. 만성적 통증과 적당한 피로, 자잘한 스트레스와 타고난 성격이랄 수 있는 예민함. 그러니까 나는 대체로 건강한 편이었다. 말기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라고, 생활 방식, 식습관, 성격을 하나하나 따져보며 문제점을 찾으려고 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즐겨 마시던 와인이 문제였나. 유산소운동을 했어야 했나. 인스턴트음식 때문인가. 잡곡밥을 먹었어야 했나. 남들처럼 영양제를 챙겨 먹었어야 했나. 일을 줄였어야 했나. 걱정 많은 성격이 문제였나. 병에 걸린 이유를 찾기 위해 생각을 거듭할수록...... 터무니없었다. 커피와 술을 마셔도 암에 걸리지 않는사람들이 많다. 걱정 많은 성격을 고치려다가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병을 겪으며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세상에는 건강 관련 정보가 넘치도록 많다는 것을. 당장 사먹지 않으면 큰일 날 것만 같은 식품과 보조제, 항암 작용과 면역력 증진과 노화 예방에 좋다는 각종 제품을 팔려는 콘텐츠 - P275

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책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몸을 고치려는 치료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이러는 계획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힐 만큼 지친 상태로병원 로비를 지나갈 때였다. 느닷없이 날아온 누군가의 말이나를 후려쳤다.
아직 젊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살았으면 그런 병에 걸리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년 남녀 네 명이 테이크아웃잔에 담긴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웬만한 암은 초기에 발견해서 금방 고칠 수 있다던데. 백세시대란 말이 괜히있나. 건강검진만 제때 받아도 아플 일이 없지. 요즘처럼 좋은 세상에 자기 관리만 제대로 했어도 그 지경까지 안 갔을텐데. 딱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그들끼리 주고받던 말, 아픈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네가 아픈 건 모두 네 탓이라는 그말들, 그들은 어쩐지 뿌듯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자신은 절대 아프지도 병들지도 않을 거라고. 나는 지쳐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울 힘도 없을 만큼고통에 파묻혀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아픈 사람들 천지인 이곳에서 제발 말조심하라고 발을 구르며 경고하고 싶었지 - P276

만, 사지가 고통에 묶여 꼼짝할 수도 없었다. 그때 나는 잠시지옥에 서 있었다. 인간들의 지옥. 그들의 말은 나의 자책과다르지 않았다. 내 잘못을 찾는 방법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던 거지? 아프다는 이유로 잘못 산 사람이 될 순 없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기계의 알림 또는 경고음 같았다. 그 멜로디의 가사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배운 기억도 없이 저절로 외우고 있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라." 어서 집으로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집은 아직 없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죽음을 죽음 자체로 두기 위해 오래 바라볼수록 두려움보다 슬픔이 커졌다. 두려움은 막연했으나 슬픔은 구체적이었다. 거기 나의 희망이 있었다. 슬픔을 위해서 움직일 힘이라면 아직 남아 있었다.
미래를 기억할 수 있을까? - P277

오래전 이곳에 살 때 잃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네잎클로버 모양의 열쇠고리인데요, 제가 지금에야 그것을 찾는 이유는…….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찾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상상하면 행복했다. 그들이 찾는 것을 기적처럼 꺼내어 건네주는 상상은 천국 같았다. 또한 나의 천국은 다음과 같은 것.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 P290

엄마는 여전히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죽음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니까. 미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 눈앞에 내가 기억하는 미래가 나타났으므로, 어느 여름날에는 툇마루해 청개구리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향해 손을믿고 청개구리는 사라지고,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울어버릴지도 나는 다시 아플 수 있다. 어쩌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탄생과 죽음은 누구나 겪는 일 누구나 겪는다는 결과만으로 그 과정까지 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이제 나는 다른 것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폭우의 빗방울 하나, 폭설의 눈송이 하나. 해변의 모래알 하나. 그 하나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신은 그런 것에 관심 없겠지만. - P291

롤랑 바르트는 <마지막 강의>에 이르러 ‘쓰다écrie‘라는 동사를 목적어를 갖는 타동사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쓰는 행위‘는 그 주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과 기억의 증언과 같다. 가령 바르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바르트는자신이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고, 그것은 견딜 수가없다고 여겼다. 따라서 쓰는 주체가 자신이 기억하는 이들이 이 세계에서 헛되어 살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그들이 역사의 허무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애쓰는 일이 그에게 있어서 쓰기였던 것이다. - P292

최진영의 소설에 대해 말하기 앞서 롤랑 바르트의 이야기를 먼처꺼낸 까닭은 최진영에게 쓰기의 목적과 의미 역시 바르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표제작 <쓰게 될 것>은 표면적으로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전쟁의 현장과 어른이 되어 다시 돌아본 자리에 남은 상흔에 대한 소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세 번의 전쟁을 겪고 죽은 할머니,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나‘를 지키고자 애썼던 엄마. "아끼는 스마일 스티커" (34쪽)를•붙여주었던 지하실 친구 우영, "나의 신"이었던 "전쟁 속에서도서로를 돕는 사람들"(39쪽)처럼 지금 이 세상에 없거나 생사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을 증언하고, 헛된 삶을 살지 않았음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바르트의 ‘쓰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뿐일까? 무언가에 대한 목적을 갖는쓰기로 쓰게 될 것>이 유효하다는 관점은 여러 면에서 그 안의합의를 짚어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최진영 소설의 깊이 있는독해와 무관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쓰게 될 것>은 그 제목처럼 소설집에 수록된 나머지 일곱 편 소설의 시원 역할을 하며 각 소설을 읽어내는데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사랑하는 마음과 혼자 만들어내는 이야기, 죽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 타인을 돕는 마음 등 다른소설의 조각들을 이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 P293

이 자리에서 우리는 최진영이 한 권의 책으로 이야기하고 싶었던 ‘쓰게 될 것‘을 모두 확인했다. 그것은 하나의 소설에 담아놓은 다짐이었고, 자신을 겨누는 연습이었으며 나누고 싶은 불안이자 실현하고 싶은 미래였다. 여덟 편의 소설이 모두 미래를 향하고 있어서,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조차 뒷걸음질이 아닌 한발 나아가는 모습이라 나는 내내 안심했다. 언제부터일까? 최진영의 소설은 나에게 뗄 수 없는 의지가 되었다. 이는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거라는 확신. 그러니 우리는 최진영의 소설을 통해 다른 미래를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을 쥐어보게 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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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뜨니까 언니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밤에 부모님이 싸우면 언니는 꼭 내 옆에 와서 잔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언니도 눈을 떴다. 엄마 아빠 싸웠어? 물어보니 언니는생일 축하한다고 대답했다. 방을 나가자 미역국 냄새가 났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냄새가 더 잘 맡아진다. 냄새를 잘맡을 수 있으므로 나는 더 안전하다. 아침을 먹고 언니가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잠이 덜 깬 아빠가 방에서 나왔다. 케이크에 초를 꽂아 노래를 부른 뒤 촛불을 껐다. 나는빨리 십대가 되게 해달라고 마음으로 소원을 빌었다. 우리집 규칙 중에 ‘열살 전까지는 혼자서 아파트 단지 바깥으로나갈 수 없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들 모르게 그 규칙을 세 번 어졌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던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열 살이 되면 그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있다. - P122

할머니는 내가 역사 수업에서 배운 것을 다 경험했다. 대한 독립과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과 민주화 운동과 IMF 사태와 금융 위기와 대통령 탄핵과 전염병까지. 할머니가 고조선시대에 단군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가 않다.
할머니가 백악기에 공룡을 본 적이 있다고 해도, 실은 한 번죽었다가 부활한 거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전부 다 겪어봤으니까. 가난 때문에 나무껍질을 씹어먹었고 풀죽을 만들어 먹었고 홍수로 집을 잃어본 적도 있었다. 할머니의 아빠는 전쟁 때 포탄에 맞아서, 첫째 딸은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언니는 교통사고로, 사촌은 불에 타 죽었으며 친구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할머니는학교에 다니지 못했지만 혼자서 한글을 터득했고 산수를 익 - P136

혔다.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해봤다. 그래서 콩나물이영어로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길가의 풀과 나무 이름은 다 안다. 천과 바늘만 있으면 옷을 만들 수 있다. 농사일과 집 짓는 방법을 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날씨의 흐름을, 진실과 거짓을 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이 지금의 재난에서 탈출할 방법을.
할머니의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겨울이 이렇게 포근하면 다가오는 농사가 흉작이다‘고 했을 때도, ‘그 동네 집들은 홍수 때 물에 잠길 수밖에 없다‘고 했을 때도 모두 그렇게 되었다. 할머니는 꿀벌이 집단으로 실종되었다는 뉴스가나오기도 전에 이미 꿀벌이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다. 일기예보보다 앞서 날씨를 예측했다. 올해는 감자가 흉년일 거라고 말하면, 배춧값이 금값이 될 거라고 말하면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겁이 난다. 할머니에게 우리 집 상황을 말하고 ‘무슨 대책이 없을까?‘ 물어봤다가 ‘그런 것에는대책이 없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 P137

아빠가 차라리, 앞으로 20년 동안 매달 얼마씩 갚아야 해결될 거라고 말했으면 나도 그러려니 했을 거야. 그래도 핌가 대책이 있구나 생각했을 거고, 우리 집에 빚이 많으니까나도 일찍 돈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거라고. 그런데 아빼는 지금 손에 쥔 걸 하나도 놓지 않고 빚도 갚지 않고 오히려 더 빚을 지면서 살겠다는 거 아니야? 사기당한 걸 투자였다고 완전 정신승리 하면서, 그러면서 또 자기를 피해자라고말하는데, 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빠만 피해자야? 우리가 더 큰 피해자라고. 아빠 욕심으로 벌인 일에 왜 우리 핑계를 대냐고 나야 당장 알바라도 할 수 있다 쳐. 얘는 아직 열 살도 안 됐다고!
아빠 얼굴이 밟힌 홍시에서 자동차 바퀴에 여러 번 깔린 홍시로 변해갔다. 엄마가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리며 갈라진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봄. 그만, 이제 그만해.
아빠는 컵을 꽉 쥔 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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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시작했다. 장편소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도》, 《구의 증명>>《해가 지는 곳으로》, 《이제야 언니에게》, 《내가 되는 꿈》, 《단 한 사람》, 소설집 《팽이》, 《겨울방학》,
《일주일>, 단편소설 《비상문》, 《오로라》가 있다. 이상문학상, 만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 P-1

모두 지난 일이다. 그리고 반복될 일이다.
나는 이제 그것을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세상을 받아들이듯.
그러므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의 할머니는 전쟁을 세 번 겪었다. 첫 전쟁은 할머니가 어린아이였을 때 일어났다. 역사는 그것을 진압이라고 기록했다. 진압당하는 사람에게는 전쟁과 다를 바 없었다. 할머니의 엄마가 할머니를 살렸다고 한다. 감추고, 경고하고, 부둥켜안으며 이 고난에는 끝이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리고 정말 끝이 났기 때문에 할머니는 희망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 - P10

할머니가 어른이 되었을 때 모두가 틀림없이 전쟁이라고부르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 할머니에게는 지켜야 할 자식이 다섯 있었다. 할머니는 어릴 때 배운 것처럼 감추고, 경고하고, 부둥켜안으며 희망을 나누었다. 섭이, 필이 은이는 죽고 곤이와 홍이는 살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할머니는 신을믿는 사람이 되었다. 귀하고 소중한 우리 섭이, 필이, 은이를잘 보살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더는 나이 들지 않기에영영 보살핌이 필요한 세 자식을 신에게 잠시 맡긴 거라고믿었다.
세 번째 전쟁이 일어났을 때 할머니는 숨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전쟁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 물건을 팔고 음식을 구하면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다가 신에게 맡겨둔 자식들을되찾으러 떠났다. 그토록 저주하던 인간을 벗어던진 것이다. 기다리던 버스에 마침내 오르는 사람처럼 미련도 후회도 없는 표정으로 죽었다고, 나의 엄마 홍이는 회상했다. 당시 엄마는 서른세 살이었고 나는 일곱 살이었다. 그때 나에게 죽음이란 숨바꼭질처럼 언젠가 끝날 놀이였다. 다시 만날 수없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디에 숨었든 내가 찾아낼 거 - P11

야. 찾지 못해도 어딘가에는 있겠지. 못 찾겠다고 외치면 슬쩍 나타나 나를 놀려대겠지. 아무리 기다려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너무 멀리 숨으면 반칙인 걸 알면서.
젊은 사람들, 아이가 있는 사람들, 현금이나 보석을 가진사람들, 다른 지역에 가족이나 지인이 있어 거처를 부탁수 있는 사람들부터 동네를 떠났다. 평생을 한곳에서 살아온 노인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남았다. 처음에는 엄마도 떠나고 싶어 했다. 곤이 삼촌이 살고 있는 수도에 가려고 했다. 할머니는 남겠다고 했다. 앞서 두 번전쟁을 겪을 때도 할머니는 집을 버린 적이 없었다. 엄마는할머니를 두고 떠나기를 망설였다. 할머니가 죽은 뒤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엄마는 집을 지켰다. 할머니의 집. 엄마가 오랫동안 살다가 떠났던 집. 나를 안고 돌아간 집. 이제는 기억에만 존재하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 - P12

작은 마당이 있었다. 낮은 담벼락 아래에 채송화와 봉숭아가 피었다. 할머니는 봉숭아 꽃잎을 짓이겨 내 손톱에 물을 들였다. 나는 손에서 피가 나는 것 같다고 울었다. 할머니는 나를 놀리며 웃었다. 수돗가 옆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 - P12

빨간 열매를 배가 부르도록 따 먹고 배앓이를 했다. 집은 주방과 큰방, 창고로 나뉘었다. 방은 아침에 가장 밝았고 태양이 기울수록 어두워졌다. 방의 벽을 따라 옷장과 수납장, 좌식 책상과 선반이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인용 의자 하나.
못질 없이 만든 의자였다. 그곳에 앉아 편히 쉬길 바라는,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의자라고 했다. 누구의 사랑인지는 잊었다. 할머니와 엄마를 향한 누군가의 사랑이었겠지.
당시에는 나 아닌 사람이 할머니나 엄마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의자에 올라서서 창밖을 구경했다. 등받이에 엄마의 셔츠를, 다리에 할머니의 치마를 입힌 다음 의자를 사람처럼 대하며 각종 놀이를 했다. 의자 위에 사진기를 올려두고 할머니와 나와 엄마가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찍은 사진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서로 닮은 우리. 유일한 가족사진. 내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것. - P13

큰 소리가 들리면 공포에 사로잡혀 움직일 수 없다. 죽을것 같다는 불안이 밀려오면 약을 먹는다. 그리고 죄책감. 인간이므로 벗어던질 수 없는 감정. 나는 아직도 우영의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한다.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데도 생생하다. 스마일 스티커를 잃지 않으려고 죽어가는 사람이 내가방을 부여잡을 때 나는 그를 뿌리쳤다. 그러나 결국 잃어버렸다. 선악은 나의 생존 가능성을 기준으로 달라졌다. 나는빛도 소금도 아니다. 저주하며 희망하는 사람이다. 아주 작아지기 전에, 엄마를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인식표 대신 그것을 목에 걸고 다닌다. 엄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다. 내심장 가까운 곳에 나는 지금 방석을 생각한다. 집은 무너져도 방석은 파괴되지 않는다. 더러운 방석은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가 그것을 치웠을 것이다. 어째서그런 곳에 방석이 있어 낡고 더러워졌는지 궁금해하지 않으며, 전쟁에서 살아남아 어른으로 자란 나의 마음도 그렇게되었다.

그리고 의자. 의젓하게 우리를 배웅하던 사랑하는 마음. - P38

이제 내게도 총이 있다. 엄마는 그것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살렸다. 엄마가 일기에 썼던 문장을 기억한다. ‘죽어야 한다면 죽는 게 낫다.‘ 나의 일기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살아야한다면 사는 게 낫다.‘ 무의미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 밤 삶을 선택한다. 할머니에게도총이 있었을까? 전쟁을 세 번이나 겪는 동안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있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신이었다. 그리고 나의 신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던 사람들. 자주 상상한다. 누군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을 내가 죽어야만 누군가가 살 수있는 상황을 새벽마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겨눈다.

모두 지난 일이다. 그리고 반복될 일이다.
나는 이제 그것을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세상을 받아들이듯.
그러므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 P39

어릴 때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애쓴 적이 있다.
그땐 어렸으니까 어른스러운 척을 할 수도 있었다. 어른이된 지금에도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애쓸 때가 있다. 나는 여전히 어른스러운 게 뭔지 잘 모르고, 모르니까 긴장했다. 긴장할 때 나는 좀더 이나를 신경 쓸 수 있었다. 이나 입장에서생각할 수 있었다. 어른스럽다는 건 아이 입장에서 생각할수 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어린 시절 어른스러운 척했던건 그 반대라고 볼 수도 있을까. 20년 전 나는 이유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유진은 나를 이해했을까? 그때 우리를 야단치지 않고 지켜만 보던 이유진의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은데……. 마흔 살의 이유진과 마흔 살의 내가 대화할수 있다면 좋을 텐데, 공미가 이유진과 연락하며 지냈다는사실은 여전히 놀랍다. 공미는 하고 나는 하지 않는 차이를 생각하면 까마득해진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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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ㅡ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정신은 아홉 개 혹은 열 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그것들은 장난이다. 우선 근본 문제에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만약 니체가바라고 있는 것처럼, 한 철학자가 알아 줄 만한 존재가 되기위해서는 몸소 시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사실이라면 사람들은 이 대답의 중요성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대답이 결정적인 동작에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감성에는 쉽게 느껴지는 명료한 것들이지만정신에게 이것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 - P-1

어떤 질문이 어떤 다른 질문보다 더 절실한 것이다 하는 판단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하고 자문해 본다면, 그것은 그 질문이 야기하는 모든 행동에 있다고 나는 대답할 것이다. 나는 결코 존재론(ontologique)의 토론을 위해 죽었다는 사람은아무도 본 일이 없다.
과학적 진리를 중요시하던 갈릴레오는 그 진리가 자기의목숨을 위태롭게 하자마자 더 비길 데 없이 쉽사리 그것을포기해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잘했다. 이 진리는 화형을 당할 만한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지 또는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도는지 이러한 것은실로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그것은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 반면에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살아가는 이유를 부여해주거나 관념 또는 환상을 위해 역설적으로 스스로 죽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살아가는 이유라고 불리는 것은 동시에 죽어가는 훌륭한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인생의 의미가 여러 질문 가운데서 가장 절실한 질문이라고 판단한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사람을 죽게 할 위험이 있는 문제, 혹은 살아가는 정열(情熱)을 열 배로 키우는 문제라고 알고 있는 모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두 개의 사고방식, 즉 빨리스의사고방식과 동키호테의 사고방식밖에는 없을 것이다. 명증(明證, évidence)과 서정의 균형만이 우리들을 감동과 명철(明哲)에 동시에 도달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극히 겸손하 - P-1

며 아울러 비장함으로 가득 찬 주제에 있어서 현학적이며 고전적인 변증법은 양식(良)과 공감에서 동시에 비롯되는 보다 더 신중한 정신의 태도에 자리를 넘겨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살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밖에는 취급해 오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우선 여기서는 개인의 사고와 자살과의 관계가 문제이다. 자살과 같은 행위는 위대한 작품과마찬가지로 마음의 침묵 속에서 준비된다. 본인 자신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저녁, 그는 권총을 쏘거나 물에 빠져 버린다. 어느 날 누가 나에게 자살한 어떤 부동산 관리인에 대해, 그는 5년 전에 딸을 잃어 버리고 그 이후로 많이 변했으며, 그리고 이러한 사정이 그를 침식해 들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이상 더 정확한 말을 바랄 수는 없다.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침식당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이러한 첫 발단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벌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벌레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바로 그곳이다. 실존을 마주한 명석함(lucidité)에서 빛 밖으로의 탈출에 이르는 이 죽음의 유희, 이것을 추적하고 이것을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살에는 많은 이유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표면상드러나 있는 이유가 가장 강력한 것은 아니다. 의식적으로자살하는 것은 (그렇다고 이러한 가설이 전연 제외되는 것은아니지만) 드물다. 발작을 일으키게 한 것은 거의 언제나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신문은 때때로 「남모르는 고민이라든가, 「불치의 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러한 설명은 받아 - P-1

들일 만하다. 그러나 절망한 사람의 어떤 친구가 자살한 바로그날 그에게 냉담한 어조로 말하지 않았는지 어졌는지 알 필요가 있으리라. 그 친구야말로 죄가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냉담한 어조로 말한 것이 아직 유예 상태에 있는 모든 원한과온갖 피로를 떨어뜨리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이 죽음 쪽에 내기를 걸었던 그 정확한 순간, 그 기묘한 과정(la démarche)을 정지시키는 것은 곤란할지라도, 자살 행위 그 자체로부터 그 행위의 전체가 되는 결과들을 끄집어 내는 것은 보다 쉬운 일이다. 자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마치 멜로 드라마에 있어서처럼,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혹은 인생을 이해하지못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유추(類推) 속으로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일상적인 말로 다시 돌아오자. 자살한다는 것은 다만 인생이「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은 많은 이유에 의해 존재가 명령하는 모든 행위를 계속해 나가는 것인데 그첫째 이유는 습관이라는 것 때문이다. 자의로 죽는다는 것은이 습관의 가소로운 성격, 산다는 것 일체에 대한 깊은 이유의 부재(不在), 이 일상적인 흔들림의 무모한 성격, 그리고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무익함을 본능적으로나마 인정했다는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 P-1

위대한 작품들이 그렇듯이, 깊은 감정은 언제나 그것이 이야기하고자 의식하고 있는 이상의 것을 뜻한다. 영혼 속에서의 움직임과 반발력의 항구성은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습관 속에 있으며, 영혼 자체도 알지 못하는 여러 결과 속에 지속된다. 커다란 감정은 찬란한 또는 비참한 그들의 우주를 데리고 다닌다. 그것들은 정열로써 배타적인 세계를 밝히며 거기에서 자기에게 알맞은 풍토를 되찾는다. 질투와 야망의 우주가 있고, 이기주의 또는 너그러움의 우주가 있다. 우주란 하나의 형이상학이며 정신의 자세이다. 질투나 야망처럼 이미 특수화된 감정에 대해 진실인 것은 그러한 감정의 밑바닥에깔려 있는 감동, 또는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주거나 부조리가일으키는 감동과 마찬가지로 부정확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확실한」,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멀리 있으면서도 「현존하고 있는」 그러한 감동에 대해서는 한층 더 진실 - P-1

부조리성(I‘absurdité)의 감정은 어느 길모퉁이에서나 어느사람에게라도 덮쳐올 수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은 딱한 별거숭이의 모습 속에서, 빛남이 없는 빛 속에서 그 자체로서는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어려움 그 자체에 숙고할 만한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영원히 우리들에게 알 수 없는 채로 있고 또한 그 사람 가운데는 우리들의 이해에서 벗어나는 요지부동의 그 무엇인가가 언제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나는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행실에 의해, 그들의 행동의 총체에 의해, 또한 그들이인생을 살아가는 데 일으키는 모든 결과에 의해 나는 그들을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는그러한 모든 비합리적인 감정도 그 감정의 모든 결과의 총화를 지성의 질서 안에 종합함으로써, 그리고 그 감정의 여러모습들을 포착하여 기술함으로써, 그 감정의 우주를 묘사함으로써 「실제적으로」 나는 그와 같은 감정을 밝혀 낼 수 있는것이며, 또한 「실제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같은 배우를 백 번 보았다고 해서 그에 대해 개인적으로 더 잘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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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사막이라곤 없다. 섬들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아쉽다는 느낌은 있다. 세계를 알려면 때로는 딴 데로 고개를 돌리기도 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려면 잠시 그들과떨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힘을 얻는 데 필요한 고독은 정신이 집중되고 용기가 가늠되는 긴 호흡은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남은 것은 대도시들뿐이다. 다만 거기에도 또한 조건들이 필요하다.
유럽이 우리에게 내놓는 도시들은 너무나 과거의 소음으로 차 있다. 훈련된 귀라면 거기서 날개소리를, 생명들의 고동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 거기서는 여러 세기의 혁명들의, 영광의 현기증이 느껴진다. 거기서는 서양이 아우성 속에서 단련되어 만들어졌다는 것을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래도 조용하지가 않다.
파리는 가슴에는 사막이기가 일쑤이지만, 어떤 때에는 페르 라셰즈 언덕 꼭대기에서 혁명의 바람이 불어 그 사막을 느닷없이 깃발들과 패배한 위대함들로 가득 채운다. 스페인의 어떤 도시들이나 - P-1

피렌체나 프라하도 마찬가지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만 없어도조용할 것이다. 한데 가끔 잘차흐 강 위에는 지옥에 빠지는 돈 후안의 오만스러운 아우성이 흐른다. 빈은 더 조용해 보여, 도시들 중에서는 아가씨다. 그곳의 돌들은 3세기를 넘지 않았고 그곳의 젊음은우울을 모른다. 그러나 빈은 역사의 교차로에 있다. 그 둘레에서는제국(帝國)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있다. 하늘이 피로 뒤덮이는 어떤 저녁이면, 링의 기념 건물들 위에 돌로 새긴 말들이 날아오를 듯이 보인다. 모든 것이 권세와 역사를 말하는 이 덧없는 한순간 속에서 기병대의 밀어닥치는 말발굽 아래 오스만 제국이 요란스레 무너지는 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다. 여기도 그래서 아무래도조용하지가 않다.
물론 사람들이 유럽의 도시로 찾으러 오는 것은 바로 이 속이 꽉들어찬 고독이다. 적어도 제가 할 바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그들은 거기서 제 동아리를 골라잡아 취하거나 버릴 수가 있다. 얼마나숱한 사람들이 자기 호텔 방과 생 루이 섬의 해묵은 돌들 사이를 오가는 일에 가담했던가!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고독으로 파멸한 것도 사실이다. 전자들로 말하자면 어쨌든 거기서 성장해나갈이유들을, 저를 내세울 이유들을 발견했었다. 그들은 외로우면서도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와 아름다움의 세기들이 지나간 숱한삶들의 극성맞은 증거가, 센 강을 끼고 그들을 따라오며 전통과정복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해주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젊음이 그들을 부추겨 이러한 동아리를 부르게 했던 것이다. 그 동아리가 성가실 때가 시대가 온다. "우리 둘이서!" 파리라는 도시의 거창한 공격 - P-1

이 앞에서 라스티냐크는 외친다. 둘, 그렇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 너무 많다.
사막 자체도 어떤 뜻을 갖게 되었으니 거기에 시(詩)라는 벅찬 짐이 지워진 것이다. 세상의 온갖 고뇌를 위해서라면 사막은 안성맞춤이라고 널리 인정된 곳이다. 어떤 순간에 마음이 구하는 것은 그와는 반대로 바로 시가 없는 곳들이다. 명상을 해야만 했던 데카르트는 자기 나름의 사막을 택한다. 당시 상업이 가장 번성하던 도시를 말이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고독과, 우리의 남성다운 시편들 중에서도 아마 가장 위대한 시편을 쓸 기회를 찾아낸다. "첫째는 내가명백히 그렇다고 인정한 것밖에는 결코 아무것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었다."라는 그 나름의 시편을 말이다. 이보다 야심은 덜해도 그에 못지않은 노스탤지어는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은 3세기 전부터 미술관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시를 피해돌의 평화를 다시 찾아내려면 딴 사막들, 영혼도 의지할 곳도 없는딴 곳들이 있어야 한다. 오랑은 그런 곳의 하나다. - P-1

오랑은 단단한 하늘로 뒤덮인 둥그렇고 누런 큰 담이다. 처음에는 미궁 속을 헤매며 아리아드네의 신호인 양 바다를 찾는다. 그러나 억압적인 황갈색 거리에서 뺑뺑 돌게 되며 끝내는 미노타우로스가 오랑 시민들을 먹어치운다. 그것은 권태다. 오래 전부터 오랑시민들은 헤매지 않게 되고 말았다. 잡아먹히기로 승낙한 것이다.
오랑에 와보지 않고서는 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유난히 먼지 많은 이 도시에서는 조약돌이 왕이다. 상인들이 종이를 눌러두기 위해서, 아니 그냥 장식만을 위해서도 진열창에 돌을 진열할 만큼 조약돌을 좋아들 한다. 길을 따라 조약돌 더미를 쌓는데, 1년이지나도 여전히 그냥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아마 눈요기를 위해서일 것이다. 딴 데서는 식물에서 시(詩)를 끌어내는 것이, 여기선 돌의 얼굴을 지니게 된다. 이 상업도시에서 마주칠 수 있는 백 그루남짓한 나무들을 이들은 정성들여 먼지로 뒤덮어놓았다. 가지에서매운 먼지 냄새를 떨어뜨리는 것이 바로 이 화석이 된 듯한 식물들이다. 알제에서는 아랍인들의 묘지가 누구나 다 아는 바의 정다움을 지니고 있다. 오랑에서의 그것은 라스-엘-아인 골짜기 위, 이번에는 바다를 앞에 두고 푸른 하늘에 잇대어진, 해가 눈부신 불을 질러대는 백악질이 푸석푸석한 자갈밭이다. 이 대지의 해골 한복판에는주홍빛 제라늄이 이따금 제 싱싱한 생명과 피를 풍경에 쏟아 붓는 - P-1

다. 도시 전체가 돌로 된 모암 속에 엉겨 있다. 플랑퇴르 지역에서보면 도시를 껴안고 있는 절벽들이 하도 두꺼워, 풍경이 광물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변해버릴 정도다. 인간은 거기서 추방된다. 그토록이나 육중한 아름다움은 딴 세계에서 오는 것 같아 보인다.
만일 사막이란 하늘만이 왕인 혼 없는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그때 오랑은 제 예언자들을 기다리게 된다. 도시 위와 그 온 둘레에서 아프리카의 사나운 자연은 아닌게 아니라 이 도시의 타오르는 마력들로 장식되어 있다. 도시는 사람들이 씌워놓은 거북한 장식을 깨어버리고, 하나하나의 집 사이며 온 지붕들 위에서 사나운고함을 지른다. 산타크뤼즈 산허리에서 길을 하나 잡아올라가면맨 먼저 나타나는 것은 오랑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갖가지 색깔의 입방체들이다.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면 고원을 둘러싼 울퉁불퉁한 절벽들이 벌써 붉은 짐승들처럼 바닷속에 웅크린다. 좀더 올라가면 해와 바람의 큰 회오리바람이 바위투성이 풍경의 네 구석에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무질서한 도시를 뒤덮고 휘몰아쳐 뒤섞어버린다. 여기서 서로 맞서는 것은 인간의 엄청난 무질서와 늘 변함없는 바다의 항구성(恒性)이다. 생명의 기막힌 향기가 산허리에 난길쪽으로 솟아오르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족하다. - P-1

알제의 부드러움은 오히려 이탈리아적이다. 오랑의 잔혹한알근 광채에는 스페인적인 그 무엇이 있다. 륌멜 협곡 저 위의암석 위에 올라앉은 콩스탕틴은 톨레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추억과 예술작품과 탁월한 유적들이 넘칠 만큼 가득하다. 그러나 톨레도를 위해서는 그레코도 있었고 바레스도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는 도시들은 그와는 반대로 과거가 없다. 따라서그것들에는 안도감도 흐뭇한 감동도 없다. 권태의 시간, 다시 말해서 낮잠의 시간이면, 그곳의 슬픔은 가차없으며 우수마저도 끼어들틈이 없다. 아침 나절의 햇빛이나 밤의 자연이 내려주는 호사함 속에서 기쁨은 반대로 감미로운 데가 없다. 이 도시들은 깊은 반성을위해서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으나 정열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제공한다. 그들은 예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섬세한 취향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바레스나 그를 닮은 사람들이그곳에 가면 가루가 되어 부서져버릴 것이다. - P-1

그 땅이 가장 많이 닮은 고장은 스페인이다. 그러나 전통이 없는스페인은 그저 아름다운 사막에 불과할 것이다. 어쩌다가 그곳에서태어나는 바람에 거기서 살게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영원히 사막속으로 들어가서 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의 부류란 어편한 가지 부류뿐이다. 그 사막에서 태어난 터이므로 어쨌건 나는방문객 같은 입장에서 그 고장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자신이 몹시 사랑하는 여자에 대하여 그녀의 여러 가지 매력들을 이것저것 다 손으로 꼽아서 열거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냥 송두리째 다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뾰루퉁해질 때면 흔히 짓는 표정이라든가 혹은 고개를 젓는 모습 같은 한두 가지 가슴 뭉클한 면을 지적할 수는 있을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식으로 알제리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다. 그관계는 아마도 끝날 날이 없을 터이고 그런 관계 때문에 나는 이고•장에 대하여 아주 명철하게 이야기할 입장이 못 된다. 그저 성의를다한 끝에, 이를테면 좀 추상적인 방식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속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면의 어떤 디테일을 분간해낼 수는 있을것이다. 내가 여기서 알제리에 대하여 한번 해보려는 것은 바로 학교다니는 학생과도 같은 그런 식의 연습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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