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들 내가 이기적이고 독선적이라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타협은 곧 패배다‘. 이것이 내 생의 한 모토이기도 하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비가 내리거나 폭풍이 치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난 호랑이처럼 달려왔다. 어려운 일 있어도 내색하지 않기, 돈이 없으면 밥을 굶고 낮이나 밤이나 일할 각오가돼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나와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말이다. 지금 나를 보고 우아한 독신녀의 생활을 즐긴다고부러워하는 후배들도 있지만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철없는 말이다. 방을 얻기 위해 친척에게 빌린 돈을 갚으려고 나는 몇1년 동안이나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했는지 모른다. 그 동안내 생활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전쟁이었다. 그런 전투를 헤치고 나왔으니 당연히 부상도 많이 입었다.  - P9

영화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소녀시절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요는 사람들이 처음에 가까워지기 위해서 가장 용이하게 사용하는 접근 수단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나 스스로도자신이 코뿔소나 멧돼지나 하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어울려 다니기에는 너무 덩치가 크고 고집이 세고 게다가 근시안이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머리가 좋았다기보다는 노력하는 편이었고 사회에 나왔을 때는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좀미련하게 일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이쯤 되면 열 명 중에세 명 정도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천재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니고 운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제로다. 그러니 무슨 행운이 따라오겠는가. 그리고 성격상 무임승차를 참지 못하는 결벽스러움이 문제다. - P21

실제로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한가한 시간이면 좋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동물원 산책이다. 아직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습기 찬 동물원의 공기 말이다. 그러나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한가한 시간이란 것이 있었나? 물론나에게도 운이 좋은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랜 별거 끝에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우리 집은 자식들이 혼기를 놓쳐서 결혼은 반드시 시켜야 한다는 뭐 그런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난 셈이 되었다. 집안이 어지러웠기 때문에 아이들은 제각각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일 년에 한 번정도나 얼굴을 보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대학 교육을 받았고 가족들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이제 내 앞에는 오직 내 힘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내 문제들이 다가올 뿐이다. 포르노 영화에 출연하든 백화점에서 옷을 훔치든 아니면 아프리카에 가든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 감옥에 간 적도 없고 빚지지 않고살아왔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인가? 그래, 분명 보랏빛 인생은 아닐 것이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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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관한 꿈. 빛이 있기 전에 한 여죄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제 나는 자유라고. 나는 어디라도 갈 수있다고. 그래서 나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여기에 항상 없지만, 나는 어디에나 있다. 나는 눈을 뜬다. 어느 역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이 플랫폼에 미끄러지듯 나타나는 것이 보이고, 그 철자들은 나에게 어떤 가까우면서도 아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같다.
나는 계속해서 그 생각 속에 머문다. 놋쇠처럼 번쩍이는 뜨거운한여름 햇빛이 선로 주변 짙은 녹색의 벌판을 말없이 달구었으며, 그래서 풍경은 대기 중에 우연히 고정된 누군가의 잊혀진 한 장면인 듯한데, 역사의 아치형 지붕도, 커피와 핫도그를 파는 비닐 천막의 가판대도 보이지 않는 작은 역이 차창 밖으로 드러나자, 비로소 나는 급행열차나 국경 간 고속열차는 서지 않는 그 역에 도착해버린 것이, 기차를 잘못 탄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 P199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수니는 유일하게소리를 내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다. 유일하게 너무 늙거나 너무어리지 않은 존재이며, 예방주사를 원하지도, 원하지 않을 수도있는 존재이다. 보호할 필요도, 보호받을 필요도 없다. 수니에게속한 모든 존재의 양식은 저마다 독특한 소음을 갖는다. 가죽 구두 밑창은 바닥을 무겁게 쓸며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고, 수니의두꺼운 모직 원피스 자락은 종아리에서 파닥거리며 정전기를 일으킨다. 수니의 속치마와 머리카락, 손톱 하나하나도 지속적으로소름 끼치는 바스락거림을 야기한다. 수니의 몸이 만들어내는 그런 소음은 수니를, 수니의 목소리를 방해한다. 수니는 소음의 육신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목소리만으로 존재할 수는 없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육신을 떠나 망명자가 되어야 하리라. 종종 수니는 기꺼이 벙어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망명자는 아니다. 단 한번, 수니는 남편의 나라로 가서 함께 낭송극을 관람했다. 놀라운일이다. 무대 위의 낭송극 여배우가 벙어리의 역할을 맡다니. 아니면 그녀는 혹시 실제로 벙어리가 아니었는지. 충격으로 수니는좌석에서 튕겨져 나갈 뻔했다. 바스락거리며 노려보는 눈동자들.
눈길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개의 솜씨가 없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타고난 눈거우 넘어서기 때문이다.  - P203

우리는 브레히트의 그런 시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는 대답이수니의 귀에 들려왔다. 당신이 그런 시만 읽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브레히트라는 시인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수니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시 대학의 강의실에 들어와 있는 것이란 착각에 빠진다. 20세기 현대 문학 강의. 하지만, 수니의 기억이 맞다면, 그 당시 브레히트의 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는 다른 여러 시인들의 시와 함께, 공식적인 금서에 속했다. 학생들 간의 조그만 소요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교수는 계속한다. 그의 마지막 구절에 주목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제목은 「사랑의 비밀」이군요. 그런데 도대체 ‘그는 베어내리라‘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는 상대편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상대편을 칼로 찌른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우리의 추정에 의하면, 어쩌면 상대편을 파괴하고 죽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생각하는 피비린내 나는 사랑의 정의이자 판타지, 혹은 사랑의 상호불가능성을 노래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이해의 영역 너머에 있는 사랑의 성격과 매혹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그것은이 세계가 두 가지로 양분된 가슴 아픈 현실을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해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고 슬픈 눈을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말했다.  - P217

지금 당장은 상대방이 원하는 표정을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이의 다른 생각은, 종종 현실의 생각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얼굴에 보류의 장막을 드리운다.
우리가 하나의 육신을 꼼꼼히 묘사하는 사이에도, 그 육신은시시각각 변해가며 표정을 바꾸어가고 있다. 입술의 모양은 웃음에서 울음으로, 울음에서 다시 미소로 바뀌며,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헛되이 웅얼거리다가 마침내는 체념으로 굳어진다. 잇몸이드러난 다음 굴욕을 눈치채고 이를 악문다. 죽은 자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 자의 육신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와 수니는마침내 몸을 떼고 서로의 육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그 안에서남다른 육신의 영혼을 발견한 듯이 눈을 잠시 감았고, 그리고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엘리베이터는 1970년대의 교외선 열차처럼 흔들리며 지상으로 상승한다. 그러면 일이 끝난 다음내가 당신을 만나러 진료소로 가겠어요. 도서관 1층 입구에서 수니는 남자에게 작별을 고한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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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누더기 시


가난과 시를 섞는다 진실을 소금에 절인다 정신에 침을 뱉는다 아이러니 속에 아이러니를 투척한다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겹친다 아무려나 시에서 가난을 추출한다 소금에서 진실을 구한다 침 묻은 정신을 닦는다 아이러니 속에 아이러니를 구조한다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찢는다 아무려나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겹쳐도 누더기 위에 누더기를 찢어도 누더기는 누더기다 가난을 피할 순 없지만 가난을 환대할 순 있다고? 이런 시는 사원보다도 춥고 그림자보다도 어둡다 죽기도 전에 죽은 목숨 눈물 속으로 가라앉은 신 아무래도 좋다 죽은 목숨에 죽은 목숨을 더해도 죽음의 누누더기일 뿐인 - P62

엄헬레나


1942916-2024211


부잣집 딸로 태어나 탄광으로 시집온... 딸 셋을 낳은...... 실향민의 딸 엄∙∙∙ 헬레나... 과부는 아니었지만 과부 같았던... 장성 제1광업소 급식사이자 세탁부였던... 엄...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닥치면... 엄... 헬레나..... 헬레나.. 닥치면 겪는다..... 탄광촌.. 판잣집... 공용 변소... 닥치면 겪는다... 엄...헬레나... 0명의 아들과 0명의 남편 그리고 자신도 모른채 엄헬레나로 죽은... 어쩌다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전화하면 자꾸 어디니이껴 묻던 엄헬레나...엄... 헬레나... 어디니이껴... 어디니이켜... 어디 계시니이껴...... - P64

횡성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며 가을이 다 갔지만 어떤 날은 박상륭의 열명길을 읽다 잠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가에 나가 앉아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가끔 아침부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 자작나무 잎들이 춤을 추면 읍내에 나가 술을 받아 와 대낮부터 대취했고 고라니 울음소리에 깬 밤이면 지난날 용서 빌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 오지 않는 엄마 오지 않는 아버지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러 횡성 갔다 지난날 빌지 못한 죄들과 오지 않는 것들이 매일 밤 별처럼 돋아나던 - P69

사월


고장난 심장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

가난을 피할 순 없지만 헛된 가난은 피할수 있다고?

죽기도 전에 죽은 목숨

내가 아직 사람인가?

아무래도 좋다

고장 난 심장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

가난을 피할 순 없지만 가난을 환대할 순 있다
고?

물속으로 던진 돌처럼

눈 속으로 가라앉는 신

어두운 미래 허튼 그림자 고장 난 신 - P78

비두리 옛집


무너지고 있었다

버림받고 있었다

버림받고도 집이었다

무너지면서도 집이었다

내 마음 내 마음 같았다

자신마저 버릴 거요?

묻고 있었다 시간이

무너진 집의 문이 열린다

비두리 옛집

자신으로 죽고 있었다

자신으로 살고 있었다 - P80

수학여행 가는 나무*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

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철탑 위에 올라간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모두 까닭이고 바보라고

나무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나무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해 나무는 간다 사월의 사월의 바다로 - P-1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수학여행 다녀올게요 기억하겠습니다 기록하겠습니다 살고 싶어요 엄마 사랑해요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그 사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이영광 시인의 「수학여행 다녀올게요 ㅡ유령6 (「끝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을 읽고 쓰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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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강제, 노동, 죽음이라는, 수용소와 전통적으로 어울리는 전치 단어들을 입에 올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이곳의 사물이 그것과 유사한 기색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유사함을 유발하는 유순하고 평화로운 눈빛을. 그들은 실제로 더 순하고 더 무심하며 더 느리다. 그중에서도 특히 순하고 무심하고 느린 사람은 여죄수였다. 아마도 반쯤 다른 생각에 잠긴 말투나 초조해하지 않는 행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죄수는 약속 시간에 늦게 나오지는 않는다. 여죄수는 어두운 녹색의 긴 원피스에 어깨에는 커다란 모직 숄을 두르고 앉아 있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잡지가 펼쳐져있다. 혼자 있을 때 여죄수는 이상할 만큼 느린 속도로 미소 지었다. 회색 스웨터 위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잿빛 중절모를 쓴 남자가 카페의 입구로 들어서며 눈길로 여죄수를 찾는다. 도서관 카페가 비록 아주 넓은 홀이기는 하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거의 - P129

비어 있다시피 하므로 그들은 서로를 쉽게 찾아낸다.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오고, 여죄수는 손가락을 잡지의 페이지 위에 둔 채 지속적으로 침착하다. 너무나 정적이고 침착해서, 마치 희고 커다란 여신상에 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이미 적어도반 시간 전부터 도서관 2층에서 빌려온 잡지의 똑같은 페이지를펼쳐놓고 있는 중이다. 물론 수용소 도서관에 신간잡지는 없으므로, 『무대」란 이름의 그 낡은 공연잡지는 1978년도에 나온 것으로 지금은 폐간된 지 오래인데,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강제, 노동. 죽음이라는 글자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온다. 그러나 수용소의용수철 또한 어쩌면 우리의 생각보다 더 순하고 더 느릴지도 모른다. 해변에서 발견한, 회오리바람 모양의 주인 없는 척추뼈처럼. 여죄수는 남자가 자신을 발견한 모습을 확인한 다음에야 그에게로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잡지의 페이지를 유심히 읽기 시작한다. - P130

여죄수는 자신의 안에서 줄곧 금이 가고 분열되고 있던 어떤요소가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그 충격으로 격렬하게 흔들리는 몸을 헛되이 지탱해보려는 것처럼 여죄수는 무의식중에 의자의 등받이를 손으로 꽉 잡는다. 만약 우리가 오직 죽기위해서 왔다고 한다면, 무엇이 우리의 신경을 긁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만약 어느 날 우리가 준비된 죽음의 자리에서 예상치못하게 다시 반대편 해안으로 떠밀려 나가야 한다면, 다시 말할수 있게 된 벙어리처럼 모든 것을 더듬거릴 뿐인데,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우리를 이곳으로 유혹한 파트너의 손을어떻게 다시 놓아야 한단 말인가! 다른 자연에 던져진 우리는 또다시 무엇이란 말인가! 여죄수는 무의미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입술을 일그러뜨린다. 남자에게는 그 입술의 왜곡된 움직임이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그 무엇인가를 향해서 치켜든 혓바닥처럼. 그렇다.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유혹이라고 부른다. 여죄수는 무의미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 같다. 그들은 서로의 일화를 모른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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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는 떠나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직장이나 일에는 마음을 붙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글을 쓰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열정도 희열도 없었다. 벽 너머의 벽, 그 너머의 또 다른 벽과 또 다른벽. 매 순간마다 혼자라는 생각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고독은 세상에서 가장 역한 비린내를 풍기며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수니 곁에 있고 싶었다. 수니의 따뜻한 몸 곁에 있고 싶었다. 수용소로 가버린 수니 곁에, 가방을 들고 어느 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던 수니 곁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던 수니 곁에,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수니 곁에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던 수니 곁에, 수니라고 불리는 수니 곁에, 수니의 옷을 입고 수니의 얼굴을 한 수니 곁에, 수니의 언어로 말하는 수니의 곁에, 오, 한때 쓸쓸했던 수니와 명랑했던 수니 곁에, 떠나지 말라고 소리 없이 애원하는 수니 곁에, 질문 없이 묻는 수니 곁에, 그누구보다 비통한 수니 곁에, 일그러진 조각상 같은 수니 곁에, 이 수니와 저 수니 곁에, 내 모든 수니의 곁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이런 나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니가 나를 떠났다는 사실이 비로소 선명하게 인식이 되었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는 다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누구보다 더욱 절실하게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혼자인 자들의 고독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욱 절실한, 절실함의 폭풍. - P74

여인은 바람의 겹 속으로 사라졌다가,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가린 채 흰 나뭇가지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가을이었으므로, 여인의 모든 것이 꿀빛으로 일렁였다. 나는 숲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숲은 여인의 한가운데였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 새의 외마디 울음소리. 그리고 정적. 먼 정적. 그 단어, 머나먼. 우리는 커피를 마셨고, 마침내 나는 여인을 위해서 한 조각의 빵을 주문할 수 있었다. 빵에 바를 치즈도 함께. 여인이 말했다. 수니와는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전부터 수니의 오디오북 「몬타우크Montauk」를 통해서 수니의 목소리는 잘 알고 있었다.
막스 프리쉬의 「몬타우크」는 수니의 오디오북 중에서 가장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품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어떤 목소리를 갖는다면 그건 수니의 음성이다. 라고 여인은 단언했다. 그 이외의 사실은 있을 수가 없다. 여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니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었다고 믿는다. 수니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장까지 받게 되자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메일을 통한 교류는 꾸준히 이어지기까지 했다. 여인은 오디오북 팬이다. 할머니들을 돌보느라 항상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살았거든요...... - P76

하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작 할머니들은 오디오북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여인은 곧 오디오북에, 정확히는 오디오북 속 수니의 목소리에 도취되어버린다. 마음의 떨림을 표현하는 고요한 목소리에 문자 텍스트의 알토 아리아. 여인은 아무 희망 없는 간병인으로 평생을 시골구석에서 썩어갈 거라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그녀의 강철 같은 신념이었다. 그런데 수니를 알게 되었다. 수니는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주었고 여인의 열정에 다정하게 응대를 했다. 심지어 서울로 올라오면 스튜디오에서 간단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언질까지도 준다. 물론 수입은 시골의 실버타운에서 일하는 것보다 덜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여인은 시골도 실버타운도 싫으며, 무엇보다도 노인들이 싫다. 오디오북을 위해서 일할 수만 있다면. 어느새 여인은 밤마다 책을소리 내어 읽어본다. 낭송 극본도 구해서 읽었다. 수니가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찾아서 듣고 CD를 구입했다. 실버타운에 정규직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운이 엄청나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부동산 사무실의 경리, 화장품 가게 점원, 길거리내레이터 모델, 편의점 점원, 음료수 공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오디오북 같은 것을 들을 시간도 없었고, 그런 게 있다는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이다. 그녀는 말했다. 세상에는 책 한 권도 읽지 않고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는데, 운 나쁘게도 내가 태어난 집안이 그런 사람들이었거든요. 게다가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서 10대 시절부터 집을 나와 살았으므로 스스로 방세를 벌어야 했던 것이다.  - P77

린의 메모, 의문부호가 없는 질문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일까.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문장의 어느 특정 모퉁이를 돌면서부터는 문득, 비밀스러우면서도 동시에도저히 숨길 수 없는 엄청난 분출력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러한 모퉁이와 막다른 골목과 강물과 다리, 갑자기 나타나는,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입구와 닫힌 문들, 낡은 벽들과 낯선 이들의 집, 강물에 비치며 흘러가는 발코니. 소박한 나무 창살, 화려한 무덤, 신비한 녹색의 포석(石)들, 잠든 정원들, 지붕과 그 아래 은밀한 방들로 이루어진 세계, 글.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어느 특정 시점부터는 자신의 이야기만을쓰게 되는 것일까. 마치 그 순간부터는 세계가 오직 글을 쓰는자의 이야기로만, 글로 씌어질 이야기들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사람들처럼.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이야 - P83

기 속에서 잠들고 꿈꾸고 취하고 깨어나고 읽고 사랑하고 환상에잠기고 긴 산책을 하고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쓰는 것일까. 왜자신의 이야기 속에서만 잠들고 꿈꾸고 취하고 깨어나고 읽고 사랑하고 환상에 잠기고 긴 산책을 하고 태어나고 죽고, 그리고 쓰는 것일까. 오직 그 속에서만.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입으로 말해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방인으로 나타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일까.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언제 ‘그‘이며, 언제 ‘나‘가 되는 것일까. 마침내, 글을 쓰는 사람들은왜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 밖으로 달아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일까. 달아날 수 없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리하여 세계가 글을쓰는 사람들이 쓴 글과 글을 쓰는 사람들이 쓰고자 꿈꾸는 글로만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각각을 현실과 꿈으로 이름 붙일 수 있도록.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희열 속에서 비통해하고 비통해하면서희열에 떠는 것일까. 그러고는 말한다. 놀라워라, 아름다운 것이추하고 추한 것이 아름답다니, 별빛과 낯선 이름 아래서는, 하고.
어느 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 사람에서 서서히 씌어지거나 씌어져야 할 글로 변해가는 것일까. 별빛과 낯선 이름 아래서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어느 시점부터는 스스로 글 자체가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왜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될수 있는 것일까.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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