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김애란을 사회학자라고 부르는 게 사회학자에게도 그럴 테지만 김애란에게도 최선의 평가일 순 없다. 사회학만이 아니라 문학이라면, 재현은 표현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도 ‘존재론적 단계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예리한 재현 역량이 ‘경제적 인간‘의 내면을 탐사하는 표현 역량의 빛나는 지원을 받는다. R. G. 콜링우드에 따르면 남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악의 진정한 근원이고,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김애란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 P-1

김애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를 졸업했다. 소설집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 장편소설「두근두근 내 인생」 「이중 하나는 거짓말』, 산문집 『잊기 좋은이름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신동엽 창작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대상, 한무숙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최인호청년문화상 등을 수상했고, 『달려라, 아비』 프랑스어판이
프랑스 비평가와 기자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Prix delinaperçu)‘을 받았다. - P-1

다섯번째 소설집을 냅니다.
그사이 여러 계절을 나며 사람과 풍경이 시절과 가치가 변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소설 속 인물처럼 "이별이라고는 전혀 겪어본 적 없는 사람"인 양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먼 곳의 수신인을 향해 그들이 결코 들을 수 없는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상실이 무언지 모른 채 상실을 쓰고 부재가 무언지 모른 채 부재를 써왔다고 생각하면서요.

앞으로도 저는 여전히 삶이 무언지 모른 채 삶을, 죽음이 무 - P-1

언지 모른 채 죽음을 그릴 테지만, 때로는 그 ‘모름‘의 렌즈로봐야만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음을 새로 배워나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뒤늦은 깨달음의형태로 다가오니까요.

이 책에 깊은 말과 색, 숨을 입혀주신 분들께 감사 인사를전합니다. 여러 번의 계절을 나며 많은 게 변하는 걸 보았지만, 독자분들과 더불어 이 모든 분의 안녕을 비는 제 마음은변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점점 말과 기억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마치 세상에 아는 말이 그것뿐인 양 가족의 이름만은 이따금 또렷이 발음하시는 아버지께, 딸이 새 책을 내고 신문에 날 때마다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아버지께, 이제는 그가 읽을 수 없는 책의 한면을 빌려 사랑의 마음을 전합니다.

2025년 초여름
김애란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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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들은 늘 소재를 찾아 떠도는 존재 같지만, 실은그 반대인 경우가 더 잦다. 말하자면 소재가 스스로 늦은밤 작가의 작업실 문을 두드리며 차랑차랑 열쇠 꾸러미 흔들리는 듯한 소리를 내는 일이 더 빈번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작가의 역량과 응대가 시험대에 오른다.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에 대한 성실하고 치열한 기록이다. 묘한 것은 그 기록들이 소재의 서사학적 구조 자체에천착하기보다는, 그 구조를 떠받치는 사람들의 누추한 상처를 투시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건축, 영화, 메탈, 조형예술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사람들만 남는다. 반짝이는 ‘스테인리스스틸‘ 때문에 더 밝게 빛나는 상처들. 

이기호 소설가 - P362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충무로는 성해나라는 걸출한 배우를 잃었다. 그야말로 의문의 1패.‘
성해나의 작품은 실제로 그 인물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구체적이면서도 명료하다. 실로 우습고 담백하기까지 하다. 뛰어난 연기력이다.
책을 읽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명의 인물과 한곳의 장소를 검색해봤다. 완전히 속아버렸다. 질투 나는 재능이다. 성해나의 앞에서 나는 그저 "존나 흉내만 내는 놈" 에 불과하다. 가끔 대본을 보다 풀리지 않는 인물이 있다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해독을 요청해볼까 싶기도 하다. 천재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거늘.

박정민 배우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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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은 암탉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어린이 책을 써볼까 한다며 말을 꺼낸다. 135 하지만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한 끼 설거지를하고 다음 끼니 준비를 시작할 때까지 겨우 25분밖에 시간이 없다면서 말이다. 게다가 아일린은 논문 작업을 끝낼 거라고 계속 리디아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마을에서 아이들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고, 가장 가까운 학교도 4.8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아일린은 집안일을 하고 ‘가게에도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좀처럼 나지않았다." 그리고 아일린은 여위고 창백해져 있다. 어느 시점부턴가자궁내막증으로 보이는 증상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빈혈까지 생겼다. 리디아의 눈에 아일린은 이미 "거리가 얼마나 되든, 자전거를 탈 체력이 안 돼 보였다".  - P131

리디아에게 이런 일들은 친구의 "의심할 바 없이 상당한 심리학적 재능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어쩌면 아일린은 리디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이미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다음번, 그리고 가장 야심 찬 계획이
위층에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아일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으며 타자로 치고 있다. 처음에는 오웰이 아일린의 의견을 경계했기 때문에 많은 의견을 내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아일린은 리디아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대신 노라에게 편지를 써서 런던에서 만날 시간을 정하자고 말한다.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구나. 아일린은 쓴다. 그는 리디아가 분노에 차서 불시에 찾아오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여행 일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은 결코 성사되지 못한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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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은 북쪽에 있는 가난한 광업도시 위건으로 간다. 광부들의 삶을 조사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는 놀라운 작품이 될 글을 쓰기 위해서다. 3월에 돌아온 그는 사회로부터 한층 더 멀리 떨어진 하트퍼드셔의 윌링턴으로 이사하기로 마음먹는다. 런던에서 북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은 인구가 100명 남짓 되는 조그만 마을이다. 오웰의 이모 넬리가 자신이 세 들어 살고 있던 이 마을의시골집을 곧 내줄 것이다. 집세가 싸고 몹시 외딴곳에 있는 집이다.
거실은 전에 식료품 가게였던 공간인데, 오웰은 그 가게를 다시 열어 돈을 벌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동네 사람들은 다들 다른 곳에서 물건을 사지만 말이다. 오웰은 채소와 닭들을 키우며 가난한사람들의 삶의 조건에 관한 책을 써낼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결혼할 계획도. - P107

이 무렵 케이는 오웰과의 섹스를 그만둔다. 케이는 아내가 되는일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 자신과 그 친구들은 "결혼을 경멸하는 쪽에 가까웠다"고, 훗날 케이는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웃으며 말한다. "오웰은 여자들을 제법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들을 삶에서 중요한 존재로 바라본 적은 사실 한 번도 없었죠. 여자들은 아주 부차적인 존재였어요. 케이는 오웰에게 줄곧 이렇게 말했었다. "자, 들어봐.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기면 주저 없이 말해줘. 난 그런 걸 질질끄는 게 싫거든." 그리고 실제로 오웰은 케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유일한 남자였다. "있지,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어." 결혼식 날이 상당히 가까워질 때까지 그 말을 미뤄두긴 했지만 말이다.
케이에게는 아일린이 그런 결정을 내림으로써 치러야 할 대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일린이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게 참비극적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학위와 커리어 이야기였다. "저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 P111

결혼식이 끝난 뒤 오웰은 교구 장부의 빈칸을 채워 넣는다.
"에릭 아서 블레어, 33세. 미혼." 그는 서명한다. "직업"이라고 쓰인 칸옆에는 "작가"라고 쓴다. 아일린의 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인다. "아일린 모드 오쇼네시, 30세. 미혼." 그리고 "직업"칸 옆에 아일린은 줄 하나를 긋는다.
소규모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술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나중에 아일린이 리디아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블레어 부인은 쉬지않고 이야기를 했던 반면,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에이브릴은 종일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떠나기 전, 블레어 부부는 신혼부부에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은제품 일부를 선물로 준다. 그런 다음 "점심을 먹고 나서 가족들은 차를 타고 돌아갔고, 신혼부부만 남았다. 조지는 글쓰기를 시작할 것이었고, 아일린은 주부로서 해야 할 일들을. 그리고 가게 일을 해야 했다." 리디아는 이렇게 썼다. 오웰은그동안 가게를 열고 싶어 했지만, 아일린이 와서 그 일을 대신할 수있게 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 P117

오웰에게 결혼 생활의 첫 몇 달은 목가적으로 다가온다. 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쓴다. "아일린이 얼마나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고 성격이 얼마나 남달랐든 간에, 당시 오웰의 친구들은 한 가지 점에서 폭넓은 의견 일치를 보였다. 아일린이 오웰을 격려해 주었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었다. "오웰의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오웰이 정말로행복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유일한 해가 있다면 그 친구가 아일린이랑 함께 보낸 결혼 첫해였어요. "1970년대 초반에 맨 먼저 오웰의 전기를 집필했던 스탠스키와 에이브럼스도 이에 동의한다. 문명이 닿지 않은 듯한 시골집에서 새신랑으로 사는 동안 오웰은 그때까지 살아온 어느 순간보다도 행복하다. 두 전기 작가는 이렇게쓴다. "오웰의 삶에 대한 어떤 연구를 봐도 1936년의 그 여름은 확실히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오웰은 건강했고, 사기도 하늘을 - P118

찔렀다. 일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었다. 시골에서 생활하는 즐거움을 누렸고, 그건 그가 오랫동안 바라 온 것이었다. 무엇보다 아일린과 결혼해 함께한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즐거움은 질병이나 부재로 흐트러지지 않은 채 한 주, 또한 주 계속되었다. 사실, 여러요소와 환경이 그런 식으로 결합해 오웰에게 행복이라는 이상을 실현해 준 시기는 1936년의 그 여름이 유일했을 것이다.‘
작가에게는 창작할 수 있는 조건이 곧 행복의 조건이다. 지독한가난과 불행 속에서 (혹은 오웰처럼 빈털터리에 기관지염까지 않으며 가축우리 같은 집에서) 글을 쓴다고 해도, 적어도 당신은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건 당신 자신과 망각 사이에 단어들을 쌓아올림으로써 삶에서 창작이라는 행복을 어렵사리 길어 올리는 것이다. 그건 엔트로피와는 구별되는 ‘작용‘이며, 정신적으로 죽은 상태와는 다른 ‘삶‘이다.  - P119

아일린은 여러 해 동안 경제적으로 자립한 여성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무급으로 일하며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다"는 게무슨 뜻인지 몸소 깨닫기 시작했다. 확실한 건 리디아가 예견한 대로 아일린이 집 안과 정원과 가게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아마도 아일린은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만의 커리어를 꾸릴생각 따위는 포기해야 하리라는 것을. 아일린은 자신이 줄을 그었던 결혼증명서의 빈칸 속에서 살기 시작한 참이다.
사우스올드의 시가에서 노라에게 쓴 첫 편지에, 아일린은 오웰의 의존적인 태도와 교묘한 술수를 재미있다는 듯 묘사한다. 하지만 바로 거기, 그 페이지 위에 진실이 있다. 오웰이 달리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을 완성하겠는가? 그것도 계속 빠른 속도로 말이다.
결혼식 사흘 뒤, 오웰은 <코끼리를 쏘다>라는 에세이를 송고한다.
다음 6개월 동안에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집필하고, 서른두권 - P121

의 책에 대한 열두 편의 서평을 쓴다. 그리고 기사도 두 편 쓰는데,
<서점에서의 기억들>과 길고 상세한 기사 <소설을 옹호하며>가 그것이다.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아일린은 (그곳에서 두 달이나 머무르며!)
‘끔찍한‘ 거주자가 된 이모님을, 넘쳐흐르는 물을, 오물 구덩이를가게 일을, 집안일을, 정원 일을, 오웰이 앓는 여러 가지 병을, 닭들을, 염소를, 그리고 손님들을 돌본다. 아일린은 의학 논문을 퇴고하는 데 동생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던 오빠와 함께 (일하는) 휴가를가져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하지만 좌절된다. 그때까지 아일린은 그모든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없었다. 심지어 절친한 친구에게 편지한 통을 쓸 시간도 없었다. - P122

노라에게 전하는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불행의 목록 아래에는점점 분명해지는 아일린의 깨달음이 숨어 있다. 자기의 커리어뿐아니라 자기의 삶 역시 남편의 작업보다 부차적인 것이 되리라는자각이다. 그럼에도 아일린은 리디아에게는 오빠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말한다. "지구 반대편에 있다가도 내가 ‘당장 와줘‘라고 전보를치면 오빠는 와줄 거야. "127 아일린은 말한다. "조지는 안 그러겠지.
그에겐 그 어떤 사람보다도 자기 작업이 먼저니까." 리디아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아일린은 마치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어내면 견딜 수 있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신혼 생활의 현실들을 노라에게 전한다. 하지만 우•리가 바란다 해도, 용에 이름을 붙인다고 그것이 길들인 용이 되지는 않는다. 그 용들은 여전히 저 바깥에서, 혹은 위층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 P122

나는 고백하듯 이 글을 쓴다. 마치 이 집을 늘 정돈된 상태로 유지하는 일이 내 몫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집은 마치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집 안의 천사"가 내 손에 살해당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천사는 여전히 여기 어딘가에 숨어서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쿠션을 바로잡고 아이들이 아무렇게나흩어놓은 부스러기들을 치우는 일을 내 의무로 만들어놓는다. 울프는 하녀들이나 아이 엄마들의 노동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기에, 그가 죽여야 했던 천사는 내 천사와는 달랐다. 그건 "매력을 발산해야 하고... 달래야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성공하기 위해거짓말을 해야 하는" 천사였다. ‘집 안의 천사‘라는 이 여성성 모델은 여성이 "인간관계와 도덕성, 그리고 성에 관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게 막는다. 울프는 이렇게 쓴다. "내가 죽이지 않았다면 그 여자가 나를 죽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내 글에서심장을 뽑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천사를 죽일 수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어떻게든 우리 아이들에게 세상의 광기와 부당함을해석해 주는 것, 그 애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 - P124

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래고‘,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때는 위로한다. 그런 행위에는 우리와 그 애들모두를 해치는 거짓말이 얼마나 섞여 있는 걸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이 책은 당신이 감당해야 할 하나의 위험이다. 세상의 부당함을보여주는 일이 당신을 괴롭히고 해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이 책은 그 부당함에 맞설 수 있도록 당신을 단단히 무장시켜 줄 지도 모른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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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의 갈등을 손쉽게 무대하지 않으려는정직한 태도, 인위적 도덕을 가차없이벗겨내는 담대함 온기에 속지 않으려는치열함 소재가 저절로 작가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성해나가 그 소재들을 불러낸 것이다. 그것을 작가의 ‘신명‘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ㅡ이기호 소설가 - P-1

이 소설집은 ‘몰입‘의 파티다.
영화로 만들고 싶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과 상황과 마음 들이다.
한 사람으로 한 세상을 품는 글들이다.
상황 속에 깊숙이 들어가 적확한 마음을
캐치해 나오는 그의 문장들이 선연하다.
책이 나오면 꼭 다음 문장을 적어 주변
감독님들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ㅡ박정민 배우 - P-1

성해나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시작했다.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장편소설 ‘두고온 여름」이 있다. 2024년 혼모노로 이효석문학상우수작품상과 젊은작가상을, 2025년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 P-1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처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미소까지 드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된듯.
장삼이 붉게 젖어든다. 무령을 흔든다. 잘랑거리는 무령 소리가 사방으로 퍼진다. 가볍고도 묵직하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작두에서 내려오지 않던 신애기가 아연실색하며 나가떨어진다. 그애는 바닥에 주저앉아 휘둥그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황보와 그의 가족도 기도를 멈추고 나를 올려본다. 할멈도 이 장관을 다 지켜보고 있겠지. - P153

여긴 도대체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모르겠어.
삼층에는 여덟개의 취조실을 배치해야 했다. 공간을 설계할 때는 요령과 경험도 필요하나 그것만을 불가결이라 할 수는 없었다. 불가결은 상상력이었다. 무형의 공간에 선을 더하고 면을 채우고 종국에는 인간까지 집어넣는일. 그곳에서 살아갈 인간을 위한 자문자답은 기본이거니와 미학과 독창성까지 살리는 일. 그것이 건축가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이었다. 한데 이 취조실은 채우면 채울수록 공허함만 커졌다. 건축의 본질이나 사명, 순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라앉고 이제는 세속이나 명욕 같은 불순물만 남았다고 여겼던 여재화였지만, 이 공간과 이곳에서 머무를 이들을 상상할 때면 잊었던 초심이 저변에서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건축 위에 사람이 있다고 믿었던 한 시기가 서서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 P180

그가 눈을 뜬다. 철문 옆에는 건물의 연혁과 발주처등을 음각으로 새긴 정초석이 놓여 있다. 경동수련원.
1980년 완공 1983년 증축. 그 말미에 내무부 장관의 이름과 함께 설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구보승. 남자는 정초석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린다.
어떤 이들은 이곳을 경동수련원이 아닌 구의 집으로부른다. 건축가에 얽힌 소문 역시 여전히 무성하다. 그의재능을 질투한 스승이 그를 독살했다는 설, 폐결핵으로서른이 되기 전 요절했다는 설, 한국 건축의 미래를 비관해 일찌감치 일본으로 떴다는 설, 건축가의 성을 따 그 건물을 ‘구‘의 집이라 부른다는 것도 속설 중 하나다. 이 건물이 어떻게 구의 집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남자는 알지못한다. 건물의 이름은 그의 스승인 여재화가 붙였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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