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칠
제주 중문에서 태어났으며 1998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수목한계선」이 있으며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의 말
바다 밑 끓던 용암이 섬오름 봉분을 만들었다 내 안의 불화들이 살갗 아래 물집을 만든다
누구는 맹물로 그림을 그린다는데 나는 굳이 먹으로 흔적을 남기고 만다
2009년 여름 정군칠
정군칠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제주도 모슬포 해안 모진찬바람 속에 피어나던 수선화를 보여주었다. 그때 내 눈엔 시인의 맑은 눈빛과 수선화의 눈빛이 자연스레 포개졌다. 그 포개짐이 그의 목마른 서정이고, 그 포개짐이 제주 바다와 숱한 오름들을 끌어안는 그의 따뜻한 시안(詩眼)이다. 포말져오는 바다에서 ‘바다의 물집‘을 읽고 ‘내 안의 물집‘을 읽어내는 그의 시안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깃든 역사의 내상(內傷)을 어루만지고, 그 내상을 어루만지는 언어들이 날을 세운 모슬포 바람‘ 처럼 절제된 시편들로 일어서고 있다. 오랜 절차탁마를 거친 그의 시가 ‘달이 만든 내 그림자를 보며 달의 뒤편‘ 까지 꿰뚫어보며 일어서기 때문일까. 그가 스스로 판독하는 시의 몸엔 ‘억겁의 시간을 이어온 푸른 피멍‘이 도드라지고, 그 사유가 ‘들꽃들의 메마른 사유‘ 만큼이나 쓸쓸하다. 하지만 그 쓸쓸함은 ‘일만 년 전 서쪽을 향해 걸어간 발자국 화석‘ 에서 그것에 겹쳐지는 ‘일만 년 전 노을‘ 의 지층을 탐사해 들어가는 깊이에 닿아 있다. 존재의 깊이를 탐색하는 시인을 일러 영혼의 고고학자라 할 수 있을까. 하여간 우리는 그의 여러 시편에서 그가 발굴해낸 영혼의 진귀한 보석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고진하(시인)
정군칠의 시집을 따라가는 것은 제주의 名詞를 읽는 일이다. 먼 바다 큰 섬에서일어나는 희노애락 중 어떤 것들은 물집에 가까운 제 이름이 있다. 희노애락에서 명사가 되려면 해원상생굿의 흐느낌을 거쳐야 하는데, 그 발원 속에서 건져올린 심금이 따로 정리되어 시집 『물집이 상재되었다. 따라서 정군칠의 명사들은 모두 우리와 지척지간, 간절한 생이기도 하다. 송재학(시인)
게와 아이들
게들은 어쩌자고 밀물을 따라와선 바지락바지락 서귀포를 끌고 가나
바다는 어쩌자고 게들을 몰고 와선 한 양푼이 푸우 거품을 쏟아놓나
어쩌자고 나는 또 자꾸만 헛딛는 어린 게의 집게발에 목이 메어 은종소리 쟁쟁거리는 그늘로 스며들고 있나 - P13
모슬포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몽돌들이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 P14
겨울 감자밭
겨울 감자밭에 싸락눈 내린다
마른 줄기들 탯줄 같다
어머니 북돋우던 저 이랑 안에는 둥근 몸들이 있을 것이다
감자밭 안의 산담 안의 작은 봉분
저승집의 어머니도 감자알 같은 햇몸일 것이다 - P20
분홍 넥타이
송악산 비탈, 한 뼘만 한 풀밭 나이 든 조랑말 한 마리 말뚝에 묶여 있다 발굽 아래가 바로 벼랑인데 캄캄한 낭떠러지인데 고삐에 매인 맴돌이가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라는 듯 제자리를 맴돈다 이따금 고개 들어 바다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 숙이는, 한 뼘 원주에 묶인 내 몸도 많은 날 해 저물고 목이 마르다 그러니 생은 팽팽한 심줄 끌어당기는 풀밭 그 한가운데를 바라보는 것
올봄, 내 아이가 처음 맨 - P22
붉은 꽃으로 가다
저것들, 헤픈 듯한 웃음을 흘리며 길모퉁이에 서 있다 꽃잎 안을 살며시 들여다 본다 반점 같은 씨방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벌거벗은 내가 잠들어 있는 자궁 속이 저리 푸르다 저렇게 푸르다
칸나에게로 가면 붉은 꽃잎으로 둘러싸인 생명을 볼 수 있다 까맣게 숨어 있는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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