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지문
늦은 밤 고향집 헐릴 때 모셔와 벽에 세워놓은 문 두짝 창구멍마다 나를 들여다보는 눈들이 있다 아파트 젖빛 유리문에 어리는 띠살문 창호지를 새로 바른 날이면 골목의 나뭇가지 이끌고 마실 나오던 달빛에 수틀 안 누이의 목련도 활짝 몸을 열곤 했다 좀이 슬기 시작한 창살에서 어린 날의 허기가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알게 모르게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낸다고 문고리에 새겨진 지문들이 지워질까 먼지처럼 후, 불어 날아갈 얼룩이라면 아버지 가끔 저 문짝을 걷어차지 않았으리 그럴 때마다 초가지붕의 처마처럼 어머니, 품을 옹송그리진 않았으리 간혹, 탯줄처럼 긴 골목을 휘둘러 온 바람이 이가 잘 맞지 않은 문틈으로 들어왔다 말없이 나가고 - P46
아버지 문턱을 건너신 후 다시 오지 않으시고 어머니 또한 문턱 넘어 새로 지은 버선을 신으신 지 오래 매운바람이 드나들던 창문의 구멍을 하나 하나 헤아릴 때 그 문을 들락거리는 바람의 지문이 내 얼굴의 굵은 주름살로 자리 잡는다 - P47
절벽
모래무덤을,
바람이 들고 나던 바위그늘을,
물 속 골짜기마다 무늬를 새겨 넣던 노을을,
그림자도 없이 혼자서 판독하며 걸어와
펑펑 우는 바다 - P58
西로 간다
새 날아간 허공이 휘청거리는 西알오름 몇줌 잔볕에도 휘청거린다 반백년 저린 오금을 펴 어둠 속 길을 헤쳐 나온 사내들 그 짐승의 시절을 같이 늙은 4월이 껍질 툭, 벗을 때 허공의 환부는 더욱 깊어진다 겹진 끈을 풀고 또 풀어도 아직 캄캄한 길 알을 품은 붉은 해 허공에 떠 만뱅디 지나 자귀남밭 지나 부풀어 무거운 몸이 西로 간다 - P61
수평선에 묻다
푸른 이끼 돋은 돌담 아래 水仙이 귀를 세운 날 솔동산 가파른 고갯길에 헉, 숨이 막힌다 서귀동 512번지 仲燮 없는데 절여진 온기를 어루만지며 서서히 늙어가는 집 툇마루에 소금기 짠하다
한평 남짓 셋방살이 서른여섯 중섭이가 우두커니 앉아있더라 찬찬히 바라보면 수평선은 바다의 죽음이어서 섬도, 바다도, 허공도, 삼백예순날 허기진 마디들도 적막하고 또 적막하더라
이 섬과 저 섬이 너무 가깝다 이 생과 저 생이 너무 가깝다 - P92
孤內
얼마나 외로웠으면 고내리 가는 길은 등뼈 다 드러나도록 검게 타들어간 채 안으로만 길을 내었을까
화를 낸다는 것은 자기 안의 화를 다른 이에게 넘기는 일
외로운 자들은 제 안의 화를 제 안에 태운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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