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살갗을 가진 얼굴도 있다
녹아 흐르면서 시작되는 삶도 있다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도망치듯 사라져야 하는 사람도 있다

나무탁자에 생긴
아주 작은 홈

이상한 기분을 가진 적 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가게는 멀리 있고

심부름을 다녀오면 사라져버릴 사람과
남아 있을 빈 의자

한 손에 달콤한 사탕이 들려 있다 해도

다음에 다시 만나,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왔다가 사라지고 왔다가 사라지는

창밖에
다 녹을 만큼만 눈이 내렸다

빛도 어둠도 없이
막아서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화를 냈다
우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걸 몰랐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은 계속해서 참았다

모두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모두에게

아주 무거운 상자
무릎이 아픈 사람이 자주 무릎을 만진다

빛은 찌르는 손을 가졌는데
참 따듯하다

여름 끝물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무중력 공간에 두 눈을 두고 온 사람처럼
무엇을 보려고 해도
마음만큼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두 손도 두 발도
전부 두고 온 사람으로 있다고 한다면

쓰지 않는 시간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될까

이제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한껏 울창해져서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절반쯤 남은 물통엔 새의 날개가 녹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여름 열매들이 발에 밟혔다
언제부터 열매라는 말에

이토록 촘촘한 가시가 들어 있었을까

다정한 얼굴
녹아버리는 것
밟히는 것

그해의 맨 나중에 나는 것

우는 사람에겐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조율


이 줄은 누구의 것일까

유리문을 열면
흰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의 처음이 늘 하얗다는 것이
말할 수 없는 참혹처럼

‘무너지게 될 거야‘ 누군가 한 말을
‘무뎌지게 될 거야‘라고 들었다

뭉치가 죽었어
화장 비용이 없어서 아직
방에 같이 있어

멈추려는 숨 때문에
개의 코는 마지막까지 길어졌을 텐데
그런 개를
따뜻한 방 한가운데 놓아두고

저녁을 먹고 있는 사람의 전화
목소리가 마른 웅덩이 같다

겨울이라 땅을 파고 묻을 수도 없어
방에 같이 있어

한겨울의 가장 따뜻한 방

이 줄은 무엇으로 엮은 것일까

체에 걸러도 남는 마음 때문에
구멍을 더 촘촘하게 짜는 사람이 있고

잿더미 속에서도
눈을 뜨고 옆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

개는 가장 작은 자세로
엎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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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삼층 석탑, 오리온 별자리, 새하얀 구름, 사이다 병뚜껑 따는 소리, 수평선, 개의 모든 것, 일곱 살 어린이와 하는 악수, 어린이이마에 맺힌 땀, 옥수수 삶는 냄새, 부처님 오신 날 무렵 거리의 연등, 반짝이는 모든 것, 작은 털장갑, 편의점 건너편나무 그늘, 가을이 왔다 싶은 아침, 옛날 동시, 「릴케의 로댕, 벚나무 낙엽이 깔린 길, 봄에 나뭇가지에 나는 새잎, 색종이, 코뿔소, 잡채, 오이지, 잠옷, 비누, 보온병, 양산, 국자, 전시회, 지도, 국어사전......
어린이 옆에서 어린이가 하는 걸 같이 하면 이상하게도어린이와 비슷해진다. 아름다움의 목록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더 자주 찾아내서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 아니, 내가 말을 잘못 했다. 아이들과 아름다운것의 목록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끝도 없이 이어지도록,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 P146

읽는 사람들은 읽는 세계 안에서 서로 알고 지낸다. 정치가 책을 미워하고 사회가 책을 소외시키고 경제가 책을의심해도, 독자는 계속 생겨난다. 브레히트는 "암울한 시대에도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래도 노래 부를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라고 했다. 우리는 계속 읽을 것이다. 우리 세계에 대한 책을. - P151

나는 시를 좋아한다.
이 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맹세코 부끄럽지 않다. 그걸 말하기가 쑥스러울 뿐이다. ‘시를 좋아한다‘고 하면 마치 내가 시에 대해 잘 알고, 어쩌면 쓰기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약간은 문학적 허영심을 가진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매우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거의 비밀인 것처럼 시를 좋아해왔다. 꽤 오랫동안.
청소년일 때부터 좋아하는 시들을 옮겨 적는 공책이 따로 있었다. 지금 이 문장을 쓰고 너무 부끄러워서 비명을질렀다.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적었다. 한용운 - P152

의 「복종」이나 조지훈의 「낙화」, 김수영의 「」, 김남조의[편지] 같은 시, 용돈이 생기면 이름을 아는 시인의 시집을 샀다. 아는 시인이 많아져서 언젠가부터 공책을 접었다.
대신에 외우기 시작했다. 한 연이라도, 한 행이라도. 조금 다른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정철의 「사미인곡」을 너무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외워버렸다. 지금도 마지막 부분은 외울 수 있다. - P153

대학에서는 이전 교육과정 내내 이름 한 번 들어본 적없는 여성 시인들을 알게 되었다. 시의 내용도 표현도 낯설어서 나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시 읽는 법을 아예 다시 배워야 했다. 이전의 시들로 아름다운 언어를 배웠다면, 새로 배운 시들로 날카롭게 찌르는 언어를 배웠다. 나는 둘 다 좋아했다.
한글 프로그램을 쓸 줄 알게 된 다음, 나는 시를 실컷 옮겨 적었다. - P153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밤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을 주우러
숲으로 가자

윤동주, 「반딧불」 전문 - P155

솔직히 요즘 나오는 시집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거기에 가장 신선한 언어가 담겨 있다는 건 알기에 알쏭달쏭한채로 계속 읽는다. 한편으로 나처럼 옛날 문법으로 시를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시인들이 옛날 시도 계속 써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부끄러워서 말 못 해온 독자들이있다면 털어놓듯이 말해버리자. 시를 좋아한다고.
이런저런 고민으로 잠을 설치던 밤에,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곧장 출근 가방에 마음 깊이 사랑하는 시인의 시집을 챙겨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지금 교실 칠판 한구석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

진은영 그러니까 시는」 중에서

우리는 우리를 안을 수 있다. - P156

아이들에게 학교는 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공공의 장소다. 공교육이 무너졌다느니, 교사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은 정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 만일그런 위험이 감지된다면 시민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 것이 옳다. 비난은 학교에도, 시민의 한 사람인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난 자체에서 기쁨을 느낄 만큼 내면이 허술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열일곱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 성인이 되기 전 가장 두렵고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안정된 곳에서 보냈다. 마음에 걸리는 건 그것이 정말 ‘행운‘이라는 점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학교마저 삭막하고 암울하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운에 맡길 일이 아니다. 학교가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도록 부단히 애쓰는 한편, 그늘에 있는 아이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제 나와도 된다고, 여기는 안전하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 P172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서 ‘규범‘에 대해 배운다. 규범은 우리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갈 때 지켜야 할 약속으로서, 이 안에 관습, 도덕, 법, 예절 등이 포함된다고 배운다. 즉 법도 인간이 만든 규범의 한 가지다. 이 말은 새로운 법이 필요할 때, 옛날 법이 절대적인 것인 양 거기 구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법이 우리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 이상, 삶이 언제나 먼저다. 법과 제도는 우리 삶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 신분제를 없애는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비록 삶의 환경이 다르더라도 우리 각자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똑같은 권리를 인정받는다. 그게 인권이고,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 그 위에 인간이 있고 삶이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의 연대는 규범보다 먼저다. - P214

이 글을 쓰는 오늘, 방금, 2024년 7월 18일, 기쁜 소식을 들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대법관 김선수)가 사실혼관계인 동성 배우자를 건강보험 피부양자로 등록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낸 것이다. "지난 40여 년간 건강보험의 피부양자제도가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소득 요건과 부양 요건 등이 동일한 상황에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가족 결합의 변화하는 모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 요구됩니다"라는 판사의 부연이 내 귀에 큰 목소리로 들렸다. 나는 이것이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가는 아주 큰 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이 판결이 있기까지 힘쓴 당사자들과 그들의 동료에게 축하를 전한다. 당연한 것을 위해 싸운 만큼, 마음껏 기뻐하고 그 권리를 누리시길 바란다. 또한 그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내가 사는 세상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어준 데에, 어린이가 살아갈 세상에 더 큰 자유를 준 데에. 오늘은 기쁜 날이다. 우리 세계가 더 넓어졌다. - P215

가슴을 찢어놓는 것은 언제나 행복의 낱말들이다. 사랑, 축하, 벚꽃, 여행 같은 말들. 소박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그렇게 나를 낭떠러지로 끌고 가곤 했다. 예를 들면 내가 빌리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하던 시절에 그랬다. 한 번 거래한 적도 없는 은행의 독촉 전화를 받느라 사무실을 뛰쳐나가던 시절에는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게 두려웠다. 가족이 두려웠다.
그 무렵 어느 날, 친구가 대여섯 살 된 아이의 손을 잡고걸어가는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 장면이 눈이 아플 만큼 부러웠다.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나의 좌절과 슬픔이 남의 희망과 기쁨을 해칠 것 같았다. 적어도 나 자신은 해쳤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럭 - P216

저럭 이겨냈으며 그보다 더한 일들을 겪기도 했다. 이제는확실한 행복을 느낄 때도 있지만, 저 아래에 그때의 서늘함이 남아 있다. 웃을 때 조심하게 된다.
봄은 왜 매번 갑자기 올까. 마음이 아직 겨울에 있는 사람에게 봄은 어려운 계절이다. 밝은 데가 너무 많다. 어디를 가든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지루한 일을 보러 시청 같은 데를 가는 길에도 아득한 꽃향기를 맡게 된다. 얼었던 땅을 기어이 뚫고 자란 봄나물을 씹으면 서글퍼진다. 자연은 내 마음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않는 것이다. 다 잘 돌아가는데 내 자리만 없다는 생각에 무서울 만큼 외로워진다. 슬픔의 핵심은 외로움이다. 누가 같이 있어주면 외로움은 덜어진다. 그렇게 슬픔을 이겨내는 한 걸음을 뗄 수 있다.
- P217

언젠가 한 어린이가 책을 읽다가 장례식은 왜 3일이나하는 거냐고 물었다. "시간을 두고 슬픔을 나누는 거야"라고 설명했더니 다시 물었다.
"그런데 슬픔을 왜 나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했어요.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많아지잖아요."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진짜로 나누어 갖는 게 아니라 그냥 마음을 표현하는 거라는 식으로 - P217

대답했던 것 같다. 다시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슬픔은 실제로 있어서 한번 생기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슬픔을 둘이 나누면 두 조각이 되고, 또 나누어서 네 조각이 되고, 그렇게 작아지다가 어느 만큼이 되면이제 가지고 있을만해지는 것이라고.
개인의 작은 고통을 다루어보기만 해도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기쁠 때 조금은 슬픔을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슬픔 속에서도 조금은 웃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우리에게 봄은 슬픔과 함께 온다. 함께 기억할 일이 너무 많다. 조금 더 힘이 있는 쪽이 조금 더 짊어지면서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 좋겠다. 봄에 슬픈 사람들을 내버려두지도, 어서 이겨내라고 다그치지도 않을것이다. 다만 그들을 꽃이 만든 그늘로 초대하고 싶다. 나도 그 밝은 그늘에 함께 있고 싶다. 웃으면서도 울겠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울고 싶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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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제가 실력이 점점 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거는 더 재미있을 거예요!"
‘앞으로 점점 더 잘하게 된다‘는 확신은 어린이가 자신을 성장시키는 큰 동력이다. 그런 확신의 근거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현재의 자기 모습이다. 재작년보다 작년, 작년보다 지금 더 그림을 잘 그리고, 축구를 잘하고, 아는 게 많다. 앞으로도 지금보다 더 잘하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열심히 공을 차고 공부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서툴다는것도 어른들 생각이지, 어린이 입장에서는 연습을 거듭한
‘지금‘이 가장 잘하는 때다.
설령 어린이에게 미숙한 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이의 인격이 미숙하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어린이에게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이다. - P91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어도 어린이는 ‘배운 대로‘ 한다. 최소한 ‘배운 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쁜 말을 쓰면 안 되고, 쓰레기를 줄여야 하고,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차별이 나쁘다는 것, 서로 달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스스로 생각해야 하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안다.
그리고 또 어린이는 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 모두를 위한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마스크를 꼼꼼하게 쓰고, 30초를 세면서 손을 씻고, 자주열을 잰다. 학교생활에 제약이 많아도 지침을 따른다. 아는 것을 바탕으로 행동하고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지성주의다. 나는 이 시대의 어린이야말로 지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 P94

나이나 학력과 상관없이 누구나 지성주의자가 될 수있다는 것을 어린이에게서 배운다.
여전히 어린이를 ‘동료 시민‘으로 부르기를 주저하는 분도 있다. 어린이를 보호하고 교육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어른과 똑같이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시기를 보내면서 그런분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린이는 교육받을권리, 놀 권리에 심각한 제한을 받으면서도 방역 주체로서의무를 다해왔다. 만일 ‘몇 살 이상 성인‘ ‘심각한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 ‘특정 지역 주민 등에게 어린이들에게 하듯이 제한을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만큼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을까? - P95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어린이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다. 어린이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린이의 동료 시민인 어른으로서 내가 할 일은 우리가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이제 소용없다. 다 끝났다‘고 하는 순간 악의를 가진 이들에게 동조하는 셈이된다. 나는 혼돈에 빠져 두려움을 확산시키는 대신 이상황이 안정 국면을 찾을 수 있도록 시민으로서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외출을 자제하고, 개인위생을 잘 챙기고, 규칙을 지키고, 기다리는 것. 어린이들이 하는 대로다. 우리가가르친 대로다. - P96

세계 곳곳에 어린이가 산다. 어른의 세계와 어린이의 세계는 늘 겹치게 마련이다. 나의 세계에 어린이가 있다는 걸잊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 어린이한테 모범적인 ‘사람‘이 되자고 또 다짐한다. - P105

그날 이후 며칠을 마치 몸을 얻어맞은 사람처럼 끙끙 앓았다. 그 사람의 공격적인 말투와 말의 내용이, 주변 사람들의 옅은 웃음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리고 나 자신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부터 몸과 마음으로 받아온 폭력이 자세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기억하고 있는 줄도 몰랐던말과, 그 큰 목소리와, 육체적인 충격과, 수치심이 하나하나 생각났다. 그 몇 분 사이의 일이 어른인 나에게도 이만큼 영향을 주는데 어린이들은 어떨까. 어린이를 존중하자거나 보호하자는 내 말과 글은 나보다도 약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하기 좋고 듣기 좋은 이상일 뿐이었을까. 한동안 회의에 빠졌고 희망을 찾으려는 노력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제일 고통스러운 건 나 자신의 말이었다. - P113

어린이는 우리가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사람이다. 오늘의 어린이는 우리가 어릴 때 막연히 떠올렸던 그 미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을 때, 변화를 위해 싸울수록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만 같을 때가있다. 그럴 때 우리는 종종 ‘미래에서 누군가가 와서 지금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미래에는 나아진다고 말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 미래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린이다. 어린이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 어린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격려하고 보호해야 한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지 의견을 가질 수 있게 가르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시민으로서 존중하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야 한다. 어린이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 미래가 바로 그러하듯이. - P123

어린이는 우리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입니다. 어른은 어린이를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또한 어른은 어린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어린이와 함께 미래의 위기와 새로운 기회에 대응해야 합니다. 이때 어린이는 누구보다 적극적인 동료 시민입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곧 어린이가 살아갈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여러분. 세상에는 언제나 어린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환영해주세요.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봐주세요. 처음 보는 어린이와 대화해야 한다면 존댓말을 써주세요. 그럴 때 여러분에게는 "나도 이제 다 컸다!" 하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어린이와 보호자에게 순서를 양보해주세요. 어린이 일행은 언제나 시간이더 걸립니다. 뒤에서 천천히 해도 된다고 하고 시간을 벌어주세요. 제 말을 믿으세요, 여러분.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집니다. 유아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보호자가 보이면 도와주세요. 어린이를 가르치고 돌보는 선생님들께 감사하고 그분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도록 목소리를 모아주세요. 생각보다 빨리 우리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린이는 빨리자라니까요. - P131

더 간단하게 어린이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평소에 멋있는 어른인 척하는 것입니다. 편의점 직원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어른,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어른,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어른이 되어주세요. 여러분이 어렸을 때 좋아했던 어른이 되어주세요. 만일 그런 어른을 만난 적이 없다면, 여러분에게 필요했던 바로 그 어른이 되어주세요. 미래는 달라질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린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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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고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좋은 말하기가 말수에 달려 있다고는생각하지 않는다. 말수 적은 나의 ‘어른‘ 친구들이 그 증거다. 나는 그들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만큼이나 그 ‘적은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이 늘 고맙다. 솔직히 말수 적은 게 멋있어 보여서 따라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실패한다. 그런 것은 타고나는 모양이다. 대신 이따금 그 친구들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마도 조용한 어린이였겠지. 오해를 받아 속상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는 괜찮았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익숙한 고요함 속에서 자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 되었겠지. 그러니까 말수가 적은 어린이도 괜찮을 것이다. - P42

어린이에게 친구는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 어떤 어른들은 이 문제를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 어린이에게 있어 친구란 ‘만나서 노는 존재‘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서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학습에 차질이 생기거나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에 비해 급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친구 대신 가족과 놀 수도 있고, TV를 보거나 게임을하면서 놀 수도 있으니 친구를 못 만나는 것쯤은 덜 걱정해도 되는 것일까? 어른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친구가 꼭 평생 친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어린이의 친구 관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일까?
어린이에게 친구란 단순한 ‘놀이 대상‘이 아니다. 경험과 지식수준이 비슷한 사람, 학교생활 같은 중대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사회적인 위치가 비슷한 사람이다. 친구들끼리는 비슷한 것을 알고 비슷한 것을 모른다. 자기들만 아는 순간과 농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은 물론이고 자매 형제와도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친구와는 나눌 수 있다. 어린이가 ‘친구‘와 놀고 싶은 건 그래서다. - P48

"녹색 어머니 하시는 분들이 힘드실 것 같다. 그런데도 아침에 인사를 해주시면 기분이 좋다."
"나는 오늘 꿈이 하나 더 생겼다. 녹색 어머니를 하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까 남자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나도 아이들한테 인사를 잘 해줘야겠다."
로운이가 본 녹색 어머니들도 나의 지인처럼 반갑게 아이들을 맞이해주었나 보다. 어른들의 격려가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들었나 보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보듯이, 어린이도 어른을 본다. 이웃과 이웃으로서.
이따금 어린이한테 잘 해주고 싶어도 주변에 어린이가 없어서 그럴 기회가 없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을 만난다. 우리가 실제로 이웃을 못 만나서 ‘이웃 어른‘이 될 기회가 적어진다면 동네의 범위를 점점 더 넓게 잡자. 길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만나는 어린이 이웃을 환대하면 좋겠다. 그냥 어른끼리도 되도록 친절하게 대하면 좋겠다. 어딘가에 ‘세상이 이런 곳이구나‘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어린이가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가올 세상이 달라질 거라는 당연한 사실을 사람들이 많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 P64

국립중앙박물관의 좋은 점을 세 가지 말해보겠다. 첫째, 로고가 아름답다. 이 로고는 직선으로만 표현되었는데, 박물관의 외관을 담백하고 기품 있게 표현한 선들이 멋있다. 둘째, 앞마당 전경이 시원스럽다. 이렇게 탁 트인 곳에서는마음도 얼마간 넓어지게 마련이다. 움직임도 커진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린이들은 반드시 뛰게 된다. 셋째, 어린이가 많다. 정책이나 실제 상황은 어떤지 몰라도 이 공간이 어린이를 환영한다는 건 확실하다. 어린이만큼 이 문제에 민감한 사람은 없는데, 어린이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영원한 여정, 특별한 동행: 상형토기와 토우장식토기‘ 전이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모처럼 모르는 어린이를 많이 보았다.  - P74

나는 그림일기 숙제를 싫어하는 어린이였다. 그림 부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림 칸은 글 칸보다 훨씬 넓은데 어떻게 채워야 할지 늘 막막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도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소풍을 가서 돗자리를 펴고 친구들과 배를 깔고 누워 놀던 순간이 너무 재미있었는데 일기에 그린 그림은 내가 봐도 영 어색했다. 엎드린 사람을 어떻게 그린담? 어쩔 수 없이 그림을 지우고 단체 사진 찍는 장면으로 바꾸었다. 글도 그에 맞추어 써야 했다. 내가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을 담을 수 없어서 속이 상했다. 글로 쓰면 되는데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않았다. - P81

글과 그림에 대해, 언어와 비언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물론 독서교실 수업은 언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게 마련이고, 글쓰기와 말하기가 우리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데 유용한 도구인 것도 사실이다. 내 역할은 어린이가 그 일을 자기 힘으로 해낼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언어로 정리된 내용만을 중요하게 여기거나 유일한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일기의 ‘글‘ 부분을 난감해하는 어린이가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을 글쓰기의 전 단계 정도로만 생각해온 것이다. - P82

어린이는 창작자이기도 하고 감상자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독서 수업이 결국 문화 예술 교육의하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책 자체가 언어를 매개로한, 문화 예술의 산물이다. 그리고 어린이에게 문화 예술은 세상을 배우는 길인 동시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알고, 맥락을 이해하고, 다른 감상자를 만나는 것. 어린이 자신이 창작자가 될 때도 그렇게 전달되는 작품을 추구하게 해야 한다. 문화 예술은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육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창의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 P83

서는, 무엇이 창의적인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전의 것들을 배워야 한다. 비윤리적이거나 사회적 합의에 어긋나는 것을 창의성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표현의 기술을익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시 한번, 창작은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창의성이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키는지 실감할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평범한 낱말이 ‘시‘ 안에서 새롭게 쓰인 것을 볼 때 어린이는 은유와 함축성 등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어린이가 세계를 이해하는데 새 지평이 열린다. 언어만의 강력한 힘을 알게 되는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만이 보여주는 세계가 있고, 춤만이 자극하는 감각이 있고, 그림만이 전달하는 감정이 있다. 그렇게 어린이들이 각자의 무한한 세계를 만든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 P84

학교 바깥에서 도서관이 책을 공공의 자산으로 관리하듯이, 문화 예술의 다른 영역에서도 모든 어린이에게 열려있고 다가가기 쉬운 길이 많아지면 좋겠다. 어린이에게는 공연과 전시, 일상적인 교육을 아우르는 공간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그곳에서 어린이가 스스로 진지한 창작자가 되어보고 감상자, 비평가도 되었으면 좋겠다. 평생 예술 안에 머무는 시민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문화 예술의 공공 교육을 생각할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어린이 세대와 다른 세대의 교류다. 우리는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감각과 표현을 배우기도 할 것이다. 신선함에 즐거울 때도 있고 낯설어 놀랄 때도, 심지어 걱정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동료 시민인 어린이의 세계를 만나고 싶다. 언어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하면서 우리의 세계는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문화 예술 교육은 결국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 P85

아동은 표현할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말이나 글, 예술 형태 또는 아동이 선택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국경과 관계없이 모든 정보와 사상을 요청하며 주고받을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13조 제1항


어린이가 쓰고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을 먹고 입고자는 것만큼 시급한 문제로 고민하면 좋겠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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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나는 ‘미래‘가 금방 온다는것도, 그 모습이 결코 모호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린이를 따라서 나도 성큼성큼 미래로 간다. 어린이가 사는 세상이 곧 나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나는 미래를 예측할수 없지만 두 가지 사실만은 알고 있다. 하나는 지금 우리가 어린이를 대하는 방식이 앞으로 우리가 대접받는 방식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이 될지라도 나아가는 사람은 계속 나아가리라는 것이다. 나는그중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이 세상이, 내 미래가 어떻게 되든 나도 끝까지 나아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 이 책을 읽는분들도 같은 마음이면 좋겠다. - P8

그렇다. 다음 칸은 ‘김소영(58세)‘다.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똑같은 속도로 나이를먹어간다. 특별히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나름대로 발전적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냥 계속 자라는 것으로 쳐도 되지 않나? 앞 문장에 부사를 너무 많이 썼다. 이렇게까지 부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진술은 믿을 수없다. 책임을 다해야 할 어른이 나도 아직 자라고 있다고주장하는 것은 너무 뻔뻔하다.
그럼 몇 살부터 ‘자란다‘가 아니라 ‘늙는다‘가 되는 걸까? 사전적으로는 중년이라 할 수 있는 마흔 살 안팎부터라고 한다. ‘중년‘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은 이렇다. - P20

"때로"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원래는 40대까지인데 넉넉하게 50대도 중년으로 친다는 걸까? 사실 나 자신은 아직도 ‘중년‘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있는데, 만일 중년이l
ㅂ50대까지 포함하지 않는 경우라면 나는 이미 중년도 끝나가는 것이 된다.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언제나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있으니까 어디가서 나이 타령 하지 말아야지, 하고 늘 생각해왔다. 스스로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린이와 나란히 놓고 보니 내 연령대가 어디에 놓이는 건지,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나이가 많은지 깨달은 것이다. 달리표현할 길이 있다면 좋겠지만 없기 때문에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도 나름대로 오래 산 것이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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