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驛馬

김동리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춘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의, 화개협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 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 P161

하류의 해물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조기, 자반고등어 들이들어오곤 하여, 산협치고는 꽤 은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의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나오는 그 한 많고 멋들어진 춘향가, 판소리, 육자배기‘ 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 창극 신파 광대 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으레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전례가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P162

가운데도 옥화네 집은 술맛이 유달리 좋고, 값이 싸고 안주인ㅡ즉 옥화ㅡ의 인심이 후하다 하여 화개장터에서는 가장 이름이 들난 주막이었다.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단 두 식구만으로 안주인 옥화가 돌아올 길 망연한 남편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라하여 그들은 더욱 호의와 동정을 기울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 노자가 달린다거나 행장이 불비할 때 그들은 으레 옥화네 주막을 찾았다.
"나 이번에 경상도서 돌아올 때 함께 회계하지라오."
그들은 예사로 이렇게들 말하곤 하였다.

늘어진 버들가지가 강물에 씻기고, 저녁놀에 은어가 번득이고 하는여름철 석양 무렵이었다.
나이 예순도 훨씬 더 넘어 뵈는 늙은 체장수 하나가, 쳇바퀴와 바닥 - P162

감들을 어깨에 걸머진 채 손에는 지팡이와 부채를 들고 옥화네 주막을찾아왔다. 바로 그 뒤에는 나이 열대여섯 살쯤 나 뵈는 몸매가 호리호리한 소녀 하나가 조그만 보따리를 옆에 끼고 서 있었다. 그들은 무척피곤해 보였다.
"저 큰애기‘까지 두 분입니까?"
옥화는 노인보다 ‘큰애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노인은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저녁상을 물린 뒤 노인은 옥화에게 인사를 청했다. 살기는 구례에 사는데 이번엔 경상도 쪽으로 벌이를 떠나온 길이라 하였다. 본시 여수가 고향인데 젊어서 친구를 따라 한때 구례에 와서도 살다가, 그뒤 목포로 광주로 전전하였고, 나중 진도로 건너가 거기서 열일여덟해 사는 동안 그만 머리털까지 세어져서는, 그래 몇 해 전부터 도로 구례에 돌아와 사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저런 큰애기를 데리고 어떻게 다니느냐고 옥화가 묻는 말에 그러잖아도 이번에는 죽을 때까지 아무데도 떠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떠나지 않고는 두 식구가 가만히앉아서 굶을 판이라 할 수 없었던 것이라 하였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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